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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산
장 용 학
따의 긔초를 두샤 영원히 요동치 안케 하셨도다. (詩篇)
1
종이로 쌓은 堡壘(보루)에 旗(기)는 아직도 꽂혀 있었다.
이것이 맑은 세월이라면 내 이 無明(무명)도 이다지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마음엘수록 어지러운 세태는 더욱 비쳐드니, 이 외로움을 어디에 호소하랴. 전쟁터에서 적탄에 맞아서라면 또 뭐라 자위를 찾을 길도 있으련만, 전선으로 향하는 도중 사고로 이 꼬락서니가 되었으니, 梨那(리나) 이미 육체를 떠난 네 이외 또 누구에게 이 잿속에서 꿈질거려야 할 심정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군문에 들어간 것은 단순히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도피였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이 사회를 도도히 흐르는 濁流(탁류), 나날이 마비되어가는 인심을 볼 때마다 저 북쪽 싸움의 마당터, 巨木(거목)도 뒤흔드는 砲門(포문)의 咆哮(포효) 속에 몸부림치는 山形(산형)이 그리워졌다. 거기에는 炸熱(작열)하는 生(생)의 불꽃이 있다. 나는 전쟁이 주는 鄕愁(향수)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나를 귀찮아 몰아낸 것이다.
그렇게 하여 전쟁터를 택한 내 마음이었지만 급기야 내 목숨을 내던진 어깨에 총을 메고 전선으로 향하는 날 아침, 북진하는 군사, ‘失地回復(실지회복)’이라는 관념은 내 마음에 전연 새로운 광명을 비쳐주었으니, 그것은 고향에 돌아가는 運動(운동)이었고, 네가 살고 있는 도시를 쇠사슬에서 풀어주는 구원에의 길이었던 것이다. 뛰는 가슴이었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랬는데 梨那, 그 마음에서 파랑새는 쫓겨나가고 까마귀가 들어앉았다. 나는 소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우의 오발은 내 육체에서 빛을 빼앗아버렸던 것이다.
그 이전의 고민이라는 것은 한낱 센티멘틀리즘에서 생긴 버섯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의 그것은 그래도 아름다웠다. 여기 지금 이 암흑은 너무 축축하다. 감당해내기에 너무도 미지근하다. 下水道(하수도)다. 바닷속에만 그 나갈 구멍이 있다는 대도회의 하수도를 흐르는 물이 나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속에서 살아야 한다. 밤길을 지팡이로 더듬으면서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는 안마의 피리 소리가 나의 유일한 호흡이 되었다.
이 숨막히는 구렁텅이에 梨那 너를 동반자로 끌어넣고 싶어하는 나의 비루한 유혹, 너로 하여금 거미줄이 희게 걸린 곳간에 들어가서 몰래 소매를 적셔야 하는 설움을 지니게 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네가 내 옆에 있어주는 것이 좋았다.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은 또 이 유혹과의 암투이기도 하였다.
梨那, 눈이 먼 병신이 귀엽게 여겼다고 하면 너는 지금 달아날지 모르나 나는 네 그 어쩌면 좀 건드려볼까 하고 드는 눈, 무슨 불평이 늘 그렇게 많은지 나를 대할 때면 언제 한번 얌전하게 제 모양을 하고 있을 때가 거의 없던 네 입술, 나는 네가 생각한 것보다도 더 너를 좋아했다고 한다.
벌써 몇 해 전이 되는가…….
그것은 비 오는 저녁때였다. 너희들은 마지막 학년으로 진급하는 학년말이 가까운 어느 일요일. 부슬부슬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개일듯 말 듯, 푸릇푸릇 정원에서는 생이 기지개를 폈다. 너부죽한 옥수수 잎사귀를 굴러떨어지는 빗방울에 젖어 마음은 저 산 너머로 설레는 것이었다. 이번 학년이 끝나면 고향을 떠나자고 한 것은 오래 전부터의 작정이었으나 막상 그날이 가까이 옴에 따라서는 매섭게 몰아치는 시베리아 바람 속에 제자들을 내버려두고 홀로 이남으.로 떠나버린다는 것은 비겁한 일이기도 했다. 마음을 어떻게 정하면 좋을지 몰라만지는 요즈음이었다. 오늘은 또 雨愁(우수)까지 나무란다.
어슴푸레한 산등성이를 헤매던 눈이 그 중턱에 있는 2층 돌집에 멎는다. 오늘 아침 그 발코니에 우산을 들고 나와서 전화를 거는 시늉을 해보이던 리나의 모습이 생각나기도 했다. 리나에게는 선생님댁에 전화가 없는 것이 제일 재미없는 일의 한 가지라고 했으니, 제일 재미있는 일의 한 가지는 발코니에 자기의 키만한 거울을 세워놓고 세수하고 있는 나더러 그리로 저 푸른 바다를 바라보라고 하는 따위의 장난일 것이다.
아침에 걸려온 전화의 사연은 내일 아침 학교에 가봐야 알겠다.
“뭘 그렇게 혼자 좋아허세요?”
놀리는 듯한 소리에 놀라 그 그림자를 찾아보니 창 밖에 우산을 들고 웃고 서 있는 리나였다. “전 다 알아요” 하면서 앞마당 쪽으로 사라지는 그 우산 끝에 뚝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마치 내 가슴에 떨어진 것처럼 마음이 시렸다. 저 산중턱에 있어야 할 리나의 얼굴을 난데없이 바로 눈앞에 보니 이 세상 만사가 모두 허망한 그림자처럼 느껴져 그렇게까지 해서 고향을 떠나 뭣하랴 하는 그런 생각도 순간 내 마음을 스치는 것이었다.
“누구 생각에 혼자 그렇게 좋아허시는지 전 다 알고 있어요―”
이제보니 분바른 얼굴이었다. 백합화에 맺은 아침 이슬로 그려진 것 같은 그 얼굴이 아니었다.
“아침에 전화를 그렇게 걸었는데도 구경오시지 않구요.”
마루에 올라서면서 벗는 레인코트 속은 무용복이었다. 그제야 오늘 어디에서 열린 무슨 대회에 출연했다가 돌아오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겨올렸던 치맛자락을 퍼뜨리며 무슨 꾸지람이 떨어질가봐 겁내면서도 천연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오는 꼴은 夜會(야회)에서 돌아온 귀부인격이었다.
“젖빨이동물 말이에요 선생님 큰일났어요”
얼려넘기려는 말투였다.
“정말이에요. 큰일났어요 ”
“…….”
“오늘 대회에서 말이에요…….”
어떤 女盟員(여맹원)이 “저 거만한 남성들은 자기들이 젖빨이동물이라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하며 열변을 토하여 말하기를 “남성들이 이때까지 우리 여성에게 감행한 그 야만적인 언행을 즉시 반성함으로써 고치지 않는 한 우리 여성동무들은 강철같이 일치단곁하야 남자아이들에게 우리의 젖을 제공하지 않기를 여기서 힘차게 맹세합시다.” 하기에 모두들 “옳소 옳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리나는 그 사실을 밀고해 드리기 爲(위)하여 이렇게 찾아뵈인 것뿐이라고 했다.
“아무에게두 제가 이런 말 고해바치더란 말해선 안 되요 무용선생님에게두요― ”
“…….”
“남자들두 빨리 어떻게 해요 어린 사내아이들이 불상허지 않어요 선생님 좀 바빠허세요”
“…….”
“흐―ㅁ 아기가 없으시다구 아주 태연허시네. 선생님은 좀 에고이스트예요.”
“그렇거구 선생 찾아오는 법 누구에게 배웠지…….”
“…….”
“그런 얼굴 가지구 큰길 잘 걸어왔다지…….”
“아무에게두 들키지 않았어요. 양산으루 가리었으니까.”
“나 네 뭐지…….”
“학교두 아닌데 그렇게 야단허실 게 뭐 있어요.”
“도대체 넌 너무 뻔뻔스럽다.”
“좋아요 선생님은 참 훌륭한 선생님이세요”
마루로 나가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수건에 적셔 문지르고 돌아선 리나의 얼굴에는 분가루가 없어진 대신 입술이 비죽이 밀려나왔다.
밖에서는 그칠 듯하던 비가 무슨 심술이 났는지 스며드는 황혼과 더불어 줄기차지기 시작했다.
“그 보자기는 교복이지…….”
“좋아요!”
보란듯이 허리에 둘렀던 넓은 띠를 나꿀듯 끌어젖힌다. 나는 아랫방으로 나가려고 의자을 움직였다.
“전 선생님의 제자예요”
나는 도로 앉았다. 오늘은 처음부터 선생으로서의 위신이 바로 서지지를 않았다.
사르르 사르르……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나는가 하더니 갑자기 그 방구석에서 울음 소리가 터졌다. 돌아보니 저고리는 가슴에 안은 체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을 팔굽으로 쪼면서 울고 있기에, 어디가 아프냐고 달래려고 들었더니, 전 어린애가 아니라고 가까이도 하지 못하게 한다. 또 몇 번 달래려고 해보았으나 울음만이 더 높아지기에 단념하고 돌아서려니까, 그제야 서럽게 서럽게 거울 속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 아까 선생님은 입이 쓰다는 듯이 바깥을 내다보더라는 것이다. 절대로 그것은 쓴 듯이가 아니라고 거의 빌다시피 변명도 해보았으나 리나는 종내 듣지 않고, 그런 모욕이 어디 있는가구 선생님은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본다고 제법 비틀어졌다.
“죄꼬만 것이…… 제자가 선생더러 모욕이 벌써 다 뭐냐.”
“전 여자예요!”
“…….”
언젠가 무슨 일로 직원실에까지 따라 들어와서, 의자에 앉은 내 어깨에 몸을 갖다 밀면서 불평을 말하는 너를 어느 선생이, “저애 젖 먹고 싶은 게로군.” 하는 말에 직원실에는 웃음이 터졌지만, 낯이 뜨거워하는 법도 없이, “아― 뵈기 시타 뵈기 시타.” 하던 네가 이제 갑자기 여자라고 선언했댔자 갑자기 믿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울 속으로 새침하게 쳐다보는 네 그 시선…… 나는 끝내 당황해 하는 빛을 나타내고야 말았다. 그런 빛을 머금고 나니 엷은 속옷으로 비쳐 보이는 네 어깨의 살결은 이때까지처림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었다.
“큰일이 났다. 정말 젖을 안 주면 어떡하나…….”
도로 제자리에 돌아와 앉아서도 나는 무슨 말이든 꺼내야 할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남녀 평등이라는 것은…….”
그러나 나는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리나가 깨뜨려주었다.
“선생님 노하셨어요?”
가까이 와서 얼굴을 들여다보며 묻는 소리가 얼마나 아무렇지도 않았는지 나는 한숨을 길게 쉴 수 있었다.
“좀 연극을 해본 거예요 호호호…….”
“?”
어느 새 밖은 어두워지고 빗발이 사나워졌다.
“예술적이죠…… 다른 데는 다 좋은데 선생님은 예술을 모르시는 게 탈이 에요.”
“네 그 춤두 예술이구…….”
“어마 예술이 아니구 뭐겠어요 전 이래 뵈어두 예술가예요 그런 의미에서 저나 무용선생님은 격이 선생님보다 좀 위예요”
“그럼 나도 빨리 예술가가 되어야겠는데.”
나는 저으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왜 나두예오 빨리예요? 무용선생님과 격이 같아지구 싶어서?”
“…….”
“선생님은 저 무용선생님과 좀 좋아할까 허시는 중이죠?”
“지각없는 소릴 말어.”
“그럼 왜 얼굴이 붉어져요?”
“붉어지든 말든 네게 무슨 상관이냐!”
“왜 상관 없어요 전 선생닙의 제자예요 선생님은 결혼 못해요 결혼은 물론, 연애두 안 허신다구 약속해야 해요”
“흐―ㅇ 약속허기 싫으신 모양인데…….”
“그 주둥이를 닥쳐!”
“어마!”
사실 나는 새로 들어온 그 무용선생을 좋아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전 학교 그만둬요! 그만두면 제자 아니에요―”
이런 말을 던지고, 끝끝내 퍼붓기 시작한 비바람 속으로 사라진 이튿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는 리나를 두고 그것이 소녀의 한때 감상이라 해도 내 어찌 그 자리에서 다른 여자를 좋아할 수 있었으랴.
고향을 떠나는 며칠 전, 네 동생이 네가 그렸다는 것을 몰래 미술선생에게 가져온 그림을 보고 나는 새삼스러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애인 줄 알았던 네가 하나의 예술가라는 것을 발견한 것 같았다. 물감으로도 아니고 색종이를 잘게 오려서 만든 것인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화려한 애수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인지. 리나의 머릿속에 그런 애수와 공상의 날개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지금 그 그림을 나는 ‘東方(동방)의 哀愁(애수)’라고 부르고 싶다. 월남하여 네 생각이 날 때면 네 모습은 늘 그 그림 속의 동산을 배경으로 하여 떠올랐던 것이다.
너에게서 마지막 편지를 받은 것은 이번 동란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이었다. 결혼하게 되면, 했다는 것을 알려달라는 몹시 산문적인 것이었다. 그 산문적인 글발을 더듬으면서 느껴오르는 애련한 정을 누를 수 없었으나 그러면서도 끝끝내 리나를 만날 날을 기다리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향을 떠날 적에는 단순히 사제지간이라는 도덕적이라 할까 그런 것에 지배되어서였지만 서울에 올라와서는 感性(감성)에서였다. 리나와의 결혼이 리나와의 추억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게 내 마음은 타락했고 감정은 향수에 굶주렸던 것이다. 나는 네가 결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만 기다렸다. 그것은 슬픈 소식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추억은 영원히 아틈다운 그대로 남는 것이다.
전쟁이 몇 차례 고비를 넘으면서 새상이 점점 흐려짐에 따라서는 이 美的(미적)이라고 할까 鄕愁的(향수적)인 감정은 論理的(논리적)인 그것으로 퇴보하였다고나 할까. 썩어가는 사회에 대한 반항이었다. 반항이라고 했댔자 개미의 그것만도 못한 것이었으나 마비되어가는 사회를 용납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너와의 사랑을 멀리해야 했다. 이를테면 그것은 나의 마지막 浪漫(낭만)이었는지도 모른다.
梨那, 나는 지금 낭만의 천리 밖에 추방되었다. 神(신)은 나를 줄 밖에 내세웠다. 너를 이 줄 밖에 함께 끌어내어 세우려는 욕망과의 싸움은 또 신과의 그것이기도 하였다. 병자를 위한 신이었건만 병자에게 신은 없었다.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냅니다!”
하고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겨보았으나 그는 다방에 앉은 신사였다.
“너를 동정해야 할 것을 내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일이 바뻐.”
거지아이 달래듯이 밀어버리고 다시 고상한 談笑(담소)로 돌아앉는 것이
었다.
길가에 쫓겨난 내 머리에 언젠가 네가 한 질문이 떠올랐다.
“선생님, 현대의 하나님은 나막신을 신었을까요? 구두를 신었을까요?”
그때 나는 하나님이 신발이라는 것을 신는 것인지 어떤지를 몰라 그저 웃기만 했지만 이제 내 그 대답을 해주마.
“현대의 신은 마도로스 파이프를 좋아한다.”
결국 내가 들어설 곳은 눈알이 도리어나가고 움푹해진 눈구멍속밖에 없었다. 두꺼비 노래기 쥐며느리 지네 따위가 반겨줄 따름이다. 저 구석에 도사리고 앉아 빨간 혀를 날름거리는 능구렁이가 여기서는 유일한 色彩(색채)인지도 모른다.
“리나!”
허공을 찾는 손에 약병이 닿는다. 눈을 소독하라는 물이다.
‘藥(약)…… 이 神의 어깨동무!’
굶주린 이빨이 마개를 뜯업버리고 쭉 들이켠다.
병은 저 벽에 가서 비명을 부수어놓으면서 깨어진다.
“핫핫핫하…….”
그칠 줄 모르는 홍소 건강한 몸에도 웃음 끝에는 공허가 찾아들거늘…….
梨那. 이때야 말로 결연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삭풍이 몰아치는 岩頭(암두)에 솟구어 서야 할 때라는 것은 나도 안다. 그러나 나는 벌레먹은 몸이다. 아름다운 추억을 고이 안고 있기에는 나는 너무 추한 것이다. 우물 속이 나의 온 세계였다.
녹음이 우거지는 5월의 푸른 하늘에 청춘을 머금고 흰 구름이 흐르는 正午(정오), 아롱아롱 눈이 부시는 양산을 들고 이 우물가를 지나쳐버리는 너의 그 모습을 그려보고 설움과 비애에 몸이 떨린 그 몇날 몇밤이었던가 때로는 너를 욕도 했다.
“이 요사스런 계집! 내 눈앞에서 모른 척해라!”
그러나 水彩晝(수채화) 같은 梨那였다. 끝끝내 어지러움을 모르는 梨那, 그러면서 동백꽃의 정열을 품은 리나였다. 두 남자를 생각할 줄 모르는 리나였 다.
리 一 나
나에게로 돌아오라
荒凉(황량)한 벌판
廢屋(폐옥)에 雜草(잡초) 무성한 우물가에
胡笛(호적)이 우는 이 품으로
리 ― 나 돌아오라
“선생님 저예요― 리나가 찾아왔어요.”
이런 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오는, 아 ― 그런 순간은 영영 이승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말인가…… 있자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음은 시간과 야합하여, 아물어가는 상처에 이렇게 비루한 버섯이 돋아나는 어느 날 밤이었다. 땅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리나가 찾아오면 그러면 너는 그를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냐?”
마음의 상처는 다시 도졌다. 버섯과 나비의 싸움이 벌어졌다. 그것은 長劍(장검)이 번쩍이고 나팔 소리가 들려오는 古代(고대)의 싸움이 아니었다. 눈에 현미경을 걸고 핀셋으로 菌(균)을 찾느라고 잿속을 뒹구는 그러한 싸움이었 다.
결국 나는 이기지 않을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승패가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다.
리나는 나를 찾아온다. 이것은 벌써부터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싸움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스스로 오는 리나를 받아들일 만큼 나는 강하지 못했고 손톱이 길었다. 실명하기 전에 리나를 기다릴 생각을 품었더라면 또 모르나, 그랬다 해도 그때엔 또 그때의 싸움이 있을 것이고, 그때의 승리가 있었을 것이다. 어느 싸움이고 나는 끝끝내 승리를 거두어야 했다.
凱歌(개가) 없는 승리였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승리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잃을 또 무엇이 나에게 남아 있었으랴.
抗拒(항거)할 지반이 없었다. 이기는 싸움이 없는데 뭘 가지고 항거하랴. 힘이 없는 것이 아니다. 地形(지형)이 나빴다. 그는 산비탈에 城砦(성채)를 쌓고 섰는데 나는 기슭에 마른 갈대로 엮은 울타리가 유일한 堡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거기는 모랄의 戰場(전장)이었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白旗(백기)를 들고 休戰(휴전)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부서진 창을 질질 끌면서 나는 平地(평지)를 물러섰다.
멀리서 돌아보니 그는 산기슭을 점령하고 나의 보루에다 불을 지르고 있었다. 화 ―ㄱ 타오르는 보루는 서럽게 흐느끼면서 손질하는 것이었으나 내 볼에서는 눈물이 귀찮게 흘러내릴 뿐이었다. 그저 그럴 뿐이었다!
리나! 너는 상식의 세계로 가거라. 이것이 너에게 대한 마지막 사랑이다.
너는 청춘이었고 너의 얼굴에는 웃어야 할 꽃밭이 있어야 했다. 무릇 美(미)는 衣現(표현)을 바라는 것이고, 보여야 美는 美인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美를 보지 못하는 廢物(폐물).
저 네거리의 揭示板(게시판)에 너의 그 嬌態(교태)를 걸어놓아라.
순진한 마음일수록 生을 향락할 권리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고운 마음일수록 짐을 지녀야 한다고 하는 것은 市場(시장)의 낭설이다. 피지 못한 靑春(청춘)이 얼마나 아픈 것인가 하는 것은 내가 겪은 바다. 으레 피어야 할 꽃봉오리를 안고 여름내 서럽게 지내온 너에게 내 어찌 또 이 우물 속의 식은 바람을 맞아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내 네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혹 우물 속에서 울 것이지만, 그 눈물이 네가 핀 꽃에 이슬이 되어 맺을 수 있다면 내 恨(한)도 또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것은 내 눈물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방법일 것이 아닌가.
나는 새로운 샘이 내 살결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찢어진 나의 生이 네 행복 속에 피어오름을 느꼈다.
그랬는데 梨那!
나는 뭐 때문에 그런 싸움을 했고, 그런 승리를 거두었고, 그런 노래를 불러야 했던가.
그렇게까지 해서 妄覺(망각)의 揭示板에 걸어놓은, 네가 이미 지난 여름의 큰 폭격에 오유로 돌아간 고향거리와 함께 그 생을 마쳤다는 소식을 듣기는, 내 눈의 상처도 다 아물고 집에 돌아온 날이었으니, 나에게도 체념이라는 것이 생겨 마음도 이럭저럭 새 세계에 맞도록 修繕(수선)되어가는 즈음이었다.
梨那, 그것이 勳章(훈장)이었다. 그 소식이 나의 勝利(승리)에 대한 하나님의
賞品(상품)이었던 것이다.
“핫핫핫…… 겨우 요거아.”
그날 밤으로 나는 집을 떠나 길에 나섰다. 忘却의 十字路(십자로)에서 나는 도로 나의 길에 오른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내 발 밑에는 네 영혼으로 통하는 길이 깔리었다.
이 길을 평행하여 머리 위, 거창한 聖餐(성찬)의 베푼 銀(은) 그릇들이 서로 닿는 소리가 그대로 얼어붙은 것 같은 星座(성좌) 사이를 건너지르고 穹窿(궁륭)에서는 銀河水(은하수)가 그 궤도를 奔流(분류)하고 있으리라.
2
論理(논리)라는 것이 따로 생겼다는 것이, 事實(사실)이 論理的으로 움직여주지 않았기 때문인 것처럼 現實이 神意대로 운영되어지지 않은데서 神이라는 것이 假設(가설)되었으리라. 科學(과학)이 事實과 論理의 乖離(괴리) 위에 이루어
진 塔(탑)이라면 現實(현실)과 神意(신의)의 相剋(상극)이 빛어낸 幻影(환영)이 詩(시)일 것이고, 그가 사는 草幕(초막)이 모랄. 이 賤民(천민)의 貴族主義(귀족주의), 귀족의 賤民化를 독촉하는 이 啓蒙思想(계몽사상)은 地殼(지각)에서 푸른 草原(초원)을 훑어버리고 大地(대지)를 石灰(석회)로 덮었다. 그 鋪裝運動(포장운동)은 나를 여기에까지 몰아왔다…….
이런 글을 마음에 적고 있는 여기 이 두메산골 오두막이 어디가 되는지 나는 모른다. 집을 떠난 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른다. 그땐 아직 단추를 꼭 채워야 했던 옷이 지금은 무더워질 정도이니까 그저 그만한 공간이 지났겠고 그만한 시간이 흘렀으리라.
하지만 방향을 모르는 나에게 있어선 시간과 공간은 언제나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눈이라는 것이 때로는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듣기도 한다는 것을 너는 모르리라. 나에게는 그런데서 풍기는 뉘앙스가 없다. 이렇게 말하면 너는 그런 몸이 되어가지구 그까짓 뉘앙스가 없다구 탄하는가구 나무랄지 모르나 인생은 인생답게 풍요하게 해주는 것은 이러한 뉘앙스였다는 것을 너는 모르리라.
그 너도 새가 우는 소리로 지금이 오전인가 오후인가를 헤아리고 살에 닿는 공기로 여기가 산그늘인지 벌판인지를 알아내는 따위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도 기껏해서 普通名詞(보퉁명사)뿐이 다. 여기는 固有名詞가 없다. 固有名詞가 없는 世界(세계), 옛날 에덴동산은 고유명사가 없는 세계였지만 오늘날에는 그것이 없는 것이 마치 공기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고유명사가 있는 세계가 하나 있다. 눈방울이다. 네 모습은 거기에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거기서 너는 웃기도 하고 춤도 춘다. 너와 나는 앞이 보이는 사람인 것이다.
그 눈망울에 이런 그림 저런 그림을 그려보다가도 그만 잠이 들면 그 공상은 그대로 꿈길을 더듬는다. 그러다가 깜짝 깨었을 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이고, 공상이고, 현실인가를 몰라하는 것이다. 나는 내 國籍(국적)을 몰라한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꿈이었구나 하고 한숨을 길게 쉬려다가는 그만 시꺼먼 나락을 굴러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것은 생생한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는 ‘東方(동방)의 哀愁(애수)’가 깃드는 色紙(색지)의 동산인 것이다. 네 영혼이 있어 이승에 머문다면 그곳은 나의 눈망울 속 이외 없으리라.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네가 살아 있는 육체라면 네 모습이 그렇게 생생하게는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리나, 天帝(천제)가 준 그 勳章을 감사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죽었기 때문에 리나는 영원히 나의 리나가 되었다고 은근히 생각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생각을 꾸짖는 소리도 소리는 높을망정 사실이다.
그런데 어째서 眞實은 소리가 높아야 하고, 事實은 낮아도 좋은가. 事實만이 事實이고 眞實은 自己자기 欺瞞(기만)이라는 누명을 써야만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인가…….
하나님의 이간질이다! 사람의 意識(의식)을 분열시켜, 자기를 떠나려고 하는 그 人間을 계속하여 자기의 멍에 속에 가두어두기 위한 그의 교묘한 음모에 지나지 않는다. ‘人間’을 ‘남’ ‘녀’로 쪼개버린 前科(전과)를 지니고 있는 神의 奸計(간계)다!
더 숨이 막히는 일은, 그 作業(작업)을 실지로 집행하고 있는 것은 人間 자체라는 것이다. 神을 생각할 때 오히려 人間이라는 이름이 무섭다.
밤도 깊었다.
내일 아침 이 집을 떠날 것이 망설여진다. 며칠만에 이렇게 집이라는 곳에 편히 쉬어보니 마음은 약해져가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일선지구라고 한다. 아무리 앞을 보지 못하는 병신이라고 해서, 전선을 넘어가는 것이 허용되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북쪽 고향 하늘에 끌려 여기까지 헤매고 온 이 몸이었다.
밤도 깊었다.
몇 달만에 이렇게 집이라는 곳에 편히 쉬어보니 마음은 약해져가는 것이었다.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잡담에 시간가는 줄도 모르던 이웃사람들도 한사람 두사람 헤어지기 시작했다
땅이 이렇게 가무는 것도 천도가 무심치 않는 징조라고, 세상 인심이 야박해가는 것을 가랑가랑 취기를 띈 가래를 돋구면서 개탄하는 이 집 주인은 구학문도 좀 있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엊저녁 청하지도 않은 잠자리를 빌려주었고 오늘 아침에는 하루쯤 더 쉬다 가도 좋지 않으냐고 내외는 거의 손을 붙잡으면서 만류해주었다.
한사람 한사람 다 돌아간 뒤에도 주인은 그대로 거기에 앉아 있었던지 썩 지나서야
“이년 오늘도 안 와이.” 하면서 부엌으로 일어서는 기척이 들려왔다.
이윽고 주위는 다시 다시 감감해지는가 했더니 갑자기, “왜 ― ㄱ. ”밤공기를 찢어내는 비명 소리는 그러나 싱거운 것이었다.
“뭐유! 도둑츠럼.”
“두 장만 내눠.”
“없우―.”
주머니끈에 매어달리는 소리다.
“다 알구 있어. 한 장만 내!”
“그먼 퍼먹으문 배두 불렁불렁했겠는데. 없우. 옥순드러 달래진 못하구.”
“아무리 기대레두 돌아오지 않는걸 으뜨캐!”
하는데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온다. 온다. 그러문 그렇지.”
“오늘두 찌피차라우.”
“옥순년두 그먼하면 출세한 게지. 자동찰 다 타구. 우린 인록고두 못 타봤는데, 안 그래 ―.”
“암 그타뿐이겠우.”
“우리 옥순이 어디 체련만 못한디가 있우. 우리두 욕심 느무 목지 말고 알럭덜럭한 완뻬스란 것을 사 입히구. 여부, 분두 한 개 10만원짜리를 사 발리구 하문…….”
“10만원! 분 한 개 10만원 그 잘난 낮판대기에 10만원 멕해!”
“그보다 여부, 우리 시작한 바에 저 건넷방을 치우구 집에서 하게 하는 게 어떻수?”
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으나 건넛방이라는 것이 내가 누어 있는 이 방이니 잠자리가 어수선해졌다.
이렇게 말하면 너는 남의 말을 엿듣는다고 나를 나무랄지 모르나, 저쪽에서도 남이 들어서는 좋지 못할 듯한 말을 제 목소리로 하는 것으로 보아, 나는 이런 면에 있어서도 눈뜬 사람들과는 이미 그 세계를 달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서 새삼스러이 스며드는 적료감을 느꼈던 뒤여서 그런지, 그들이 한 말이 무엇을 두고 한 것인지를 깨달았을 때 나는 울고 싶었다.
무서운 바람이었다. 그칠 줄 모르는 질병이었다. 마비될 대로 마비된 사람의 마음이었다.
이것이 神이 그 모습을 빌려주고 있는 人間의 墮落(타락), 그것은 神의 榮
養(영양)이 되는 것이었다. 사람이 타락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피는 더욱 고귀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藥(약)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안심하고 질병 속으로 질병 속으로 숨가쁘리 만큼 달음박질할 수 있었던 것이다. 神은 墮落에의 原因(원인)이고, 罪惡(죄악)에의 理由(이유)였던 것이다.
이따위 神이 아직도 그 존재가 우리의 머리카락 위에 엄연한 것은 에넬기不滅論(불멸론)의 혜택에서인가?
모든 것이 불멸이라면 바라건대 우리의 靈魂(영혼)만은 차라리 滅亡(멸망)이어라.
나는 다시 길에 나섰다. 집은 사람이 오래 있을 곳이 아니었다.
길 길…….
뒤에서는 債鬼(채귀)가 쫓고 앞에서는 梨那의 모습이 부른다.
산길에 들어선 것 같지만 돌이킬 수 없는 나의 설움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외나무다리였다. 발아래 水流(수류)는 정막의 산협에 애타는 음영을 울부짖으면서 아래로 아래로 揭示板이 서 있는 平地(평지)로 질주하고 있었다. 낮이면 윤이 흐르도록 희고 흰 雲海(운해)가 발아래인 山嶺(산령) 그 울창한 정기를 머금고 太古(태고)의 하늘로 솟은 巨樹(거수)의 나무뿌리를 돌돌 굴러나와 이에 운집하여 질주하는 水流를 건너지르고 길이 뻗는 이 외나무다리는 가도 가도 한이 없는 洞窟(동굴)인가. 살얼음을 밟는 不安(불안)인가…….
높고 높은 深淵(심연). 人間은 이미 그 峻巖(준암)에서 영원히 追放(추방)되어버렸는가…….
水音(수음)이 주는 蠱感(고감)…….
絶無(절무)에의 滅亡. 古代가 그것이었다. 古代는 大海(대해)였고 峻嶺(준령)이었다. 古代의 神은 人間에게 그 自由를 주고 있었다. 그의 권한은 罰(벌)에 그쳤다. 近代(근대)의 神처럼 罪죄를 빌려주는 것은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왜 나는 이런 罰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懷疑(회의)란 것이 없었다. 그들은 완전한 犯罪人(범죄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神은 巨人(거인)의 沒落(몰락)이었고 和解(화해)의 女神(여신)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하나님, 이 거룩한 모랄리스트는 血統的(혈통적)으로 中性(중성)이
다. 이 平地(평지)의 시골 紳士(신사)!
그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地城(지성)이 오늘날 어디이냐…….
지친 몸이 쓰러진 이 바위뿌리는 하늘에 높이 솟은 봉우리인 것 같다.
遊星(유서)이 아우성치며 운행하는 여운이 들려올 것만 같다. 손을 들면 그 소리가 잡힐 것만 같다.
멀리 울려오는 砲聲(포성)…….
梨那, 이 추워지는 마음. 네 모습 때문에 내 손이 뜨거워짐에서이리리.
손을 내밀면 금방 네 모습이 내 몸에 안길 것만 같다. 그러면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대포소리가 무서워서이다. 죽어서 이 세상에 없는데 나는 대포소리가 무섭다.
梨那, 나의 설움이 네 것만도 못함에서일까. 내 너를 사량함이 네 사랑만도 못하였음에서일까…….
내 주의는 얼음이고 네 모습 때문에 내 마음 水銀(수은)처럼 떨린다.
딸랑딸랑 방울 소리에
검은 나비도 앉았다간 날아가고
울타리 밑에 떨어진 리나의 꿈
상여는 비탈길을 올라갔다.
리 ㅡ 나
네 지금 어데이냐
꽃이 없고 샘도 마른
까마귀 홀로 우는 동산
네 간 그 동산이
여기서 어디메 냐
3
설움은 공상의 날개를 타고 고향 하늘로 난다 ㅡ.
冠帽(관모)의 連峯(연봉)이 멀리 바라보이는 거기 廢墟(폐허)…….
最後최후의 날.
파도처럼 하늘을 밀고 덮어드는 B-29의 편대. 기러기처럼 줄지어 떨어지는 폭탄…… 꽝! 꾸르르 꽝! 하늘을 솟아오르는 시꺼먼 불기둥의 亂立(난립). 땅을 뜯어내고 공기를 녹여낸다. 地上(지상)은 斷末魔(단발마)의 悲鳴(비명)과 世界의 終末(종말)을 고하는 幻影(환영)이 차지했다.
그 속을 이리 뛰어보고 저리 뛰어보고 하다가 거꾸러지고 쓰러지고 하는 市民(시민)의 絶望(절망). 등뒤에서는 이리 같은 共産主義(공산주의)가 총칼을 휘
두르고 머리 위로는 사치스러운 資本主義(자본주의)가 무차별하게 폭탄의 비를 쏟는다. 잿불에 떨어진 누에 같은 生靈들이었다. 간신히 餘白(여백)을 찾아 전봇대를 기어오르는 할아버지의 흰 머리카락!
활개치는 火焰(화염). 또 하나 沖天(충천)하는 불기둥…….
地上(지상)은 가도 가도 이런 晝面(화면)의 연쇄였다. 있는 온갖 물감을 다 털어서 휘갈긴 이 벅찬 晝布(화포)에 또 그래도 우박처럼 쏟아지는 폭탄. 아귀처럼 달려드는 Z機기의 亂舞(난무). 무슨 장난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장난이 아니라면 歷史(역사)의 告別式(고별식)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一大 交響樂(일대 교향악)인 것이다. 世界의 모든 雜音(잡음)을 죄다 모아서 쏟아놓아도 이렇게 우렁찬 오케스트라는 좀 만들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限界(한계) 밖의 散文(산문)이었다.
머리가 뜯겨나가서 없어진 어머니의 젖꼭지에 매어달려 젖을 빨고 있는 갓난아이의 포동포동 살찐 장딴지. 그 발목을 잡아당기는 실한 손이 있다. 다른 데는 다 무사한데 한쪽 발이 꼭 찝힌 기둥이 불붙고 있는 것이어서 그 청년은 작두로 발목을 잘라버리고 목숨만이라도 싸 안고 달아나고 싶으나 여기는 외양간이 없는 도시였다. 바지가랑이가 타오른다. 땅을 치고 손가락으로 흙을 긁어 모으다가 그만둔다. 타죽은 것이다. 정말 억울하다.
범벅이었다. 뭐가 뭔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간과 기왓장의 차이점은 파편에 맞았을 때 한쪽은 빨간 액체를 흘리고 한쪽은 부스러지는 屬性(속성)을 나타낸다는 것뿐이다. 거기에는 善惡의 구별도 없었다. 善惡의 江(강) 이쪽이었다. 살에는 금이 서고 마음은 胱臼(탈구)되어버린 것이다. 자식이구 어머니구 아내구 다 팽개치구 자기만 살겠다구 달아나다가 파편에 맞아 쓰러지는 중년신사를 “거 싼 노릇을 했다. 천벌이다.” 이렇게 욕할 수도 없는 阿鼻叫換(아비규환)이요 地獄圖(지옥도)였다.
그 地獄이 지나간 여기 까마귀 외로이 우는 廢墟―---.
바라보이는 한 寂寞이었니. 원한을 품고 죽은 亡靈(망령)들이 사뿐사뿐 거니는 발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여기다 집을 짓지 마라. 망령들이 어디를 거닐랴.
肉(육)의 위에 세우려고 했던 敎會(교회)가 조각조각 깨어져버린 터전을 지나 나는 푸른 바다가 바라보이는 고갯길을 더듬고 올라간다. 남아 있는 것은 옷깃을 나무라는 바람뿐이었다.
바람아, 너는 어찌 죽지 않았느냐. 네 장난에 치맛자락을 잡으며 낯을 붉히던 리나는 이미 이 근처에서 없어졌거늘 넌 또 뉘 치맛자락을 나부껴보려고 남았느냐. 은혜도 정도 모르는 너 서러운 바람아. 거기 돌 위에 한 소년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너 리나를 못 봤니?”
“아 ― 그 눈이 까뭇까뭇한 아가씨 말이에요?”
“이마가 흰 설움 말이다.”
“전 그 눈이 까뭇까뭇하고 이마가 편지지처럼 흰 아가씨를 참 좋아했어요.”
“코가 가을 바람처럼 거만하고…….”
“거만하지 않어요. 연꽃처럼 고요한 입을 가졌어요. 이담에 크면 나두 이런 아가씨에게 장가들면 얼마나 좋을까 늘 그렇게 생각하고 좋아했어요.”
“얘. 리나는 울며 가더니?”
“가지 않었어요. 늘 이렇게 앉아 있어두 전 아가씨 나가는 거 못 보았어요.”
눈 먼 그 소년의 앞을 지나 괘 위에 올라서니 리나가 살았던 옛 집은 소나무 숲을 등지고 벽만이 남아 서 있었다. 그동안 비바람에 씻기고 씻기어 앙상하게 하늘을 이고 선 굴뚝을 새똥이 희게 덮은 것이 마치 落第生(낙제생)이 쓴 운동모자처럼 서글프다.
까악 까악. 까마귀가 우는 소리를 따라 찾아 올라갔다.
고래뼈를 세워 놓은 것이 나타났다. 가까이 가 보니 ‘無爲(무위)의 門(문)’이
라는 패가 걸려 있다.
들어서니 바라보이는 한 꽃동산이다. 몸은 둥실 구름 위에 올라선 것처럼 눈이 부시다. 머리 위에는 파랗고 얼음 같은 하늘, 내려다보면 저 아래 주검의 거리. 여기는 地에 속하고 있다기보다 하늘에 연해 있는 地城(지성)이었다.
헤매고 드니 迷宮(미궁)에 빠져드는 것처럼 나갈 길이 묘연해진다.
뚝 뚝, 시름없이 떨어지는 동백꽂 길가에 널려 있는 새빨간 웃음 이승의 원한인가, 저승에의 기약인가…….
목련화는 흐올 흐올 하얀 密語(밀어)처럼 가지 끝에 맺혀 지난 날의 설움을 하늘거린다.
멍하니 서 있는데 어디서 파닥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보니 祠堂(사당) 뒤뜰에 탐스럽게 피어 있는 어항만한 꽃 속에서 까치가 벗어나겠다고 날개를 치고 있다. 홍색빛의 그 꽃은 다정스럽게 차츰차츰 꽃잎을 접혀가는 것이다. 아무리 버둥거리고 몸부림쳐도 靑銅(청동)으로 기둥을 세운 사당 안에서 돌부처는 ‘吾無關焉 唯我獨尊(오무관언 유하독존)’
한 손을 어깨에 들고 천만 년 그러고 앉아 있을 작정이니 숲 속에서 구렁이가 혀를 날름거리면서 그 꽃을 부러워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殺戮(살육)도 이 동산에서는 하나의 美를 자아내는 調和(조화)를 이루는 것이니, 마침내 봉오리 된 꽃잎 속에서 까치는 아직도 버둥거리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곰실거리는 꽃의 살결, 그것은 靑春의 괴로움에 웃음을 숨기려는 處女(처녀)의 부풀어오른 젖봉오리와 다름없는 生에의 喜悅(희열이었고 無무에의 歸依(귀의), 그것은 人間의 契約(계약)을 멀리 떠난 自然의 律法(율법)이었다.
연꽃. 은그릇에 담긴 불그스름한 끔. 龍宮(용궁)에의 유혹인가. 잠을 깨고 하늘로 날아오른 仙女(선녀)의 부끄러움인가. 땅에 뿌리를 두고 물에 뜬 天上(천상)의 꽃. 그것은 또 業寃(업원)의 아픔이 化石(화석)한 正午(정오)의 哭聲(곡성)이기도 하였다.
돌멩이를 주워 던지니 파문은 떨리어 꽃은 이슬에 설렌다.
물 속에서 하늘거리는 또 나의 孤影(고영)…….
달이 구름 사이에 밝은 가을밤에 멀리서 흘러오는 다듬이 소리에 시려지는 나의 맥박…….
파리한 自然의 리듬은 여기 正午에다 深夜(심야)의 無爲(무위)를 흘러넣었다.
비어지는 마음 無爲에 맺은 이슬. 悲瀨(비원)은 무지개를 타고 설은 땅을 헤매느…….
거기 나룻배를 타고 연꽃 사이를 저어 갔다.
배는 소리없이 彼岸(피안)에 닿았는데 眞珠(진주) 같은 자갈로 깔린 한 줄기의 길이 숲 속으로 이어져, 나의 걸음은 白色(백색)의 世界를 거니는 듯 마음은 그리움에 검은 그늘이 진다.
푸른 뭉게구름 같은 숲의 녹음을 지나 돌층대를 밟고 올라갔다.
고색 蒼然(창연)한 누문을 들어서서 머리를 드니 화강석으로 된 圓塔(원탑)이 거기에 中世期(중세기)처럼 서 있다. 탑벽에는 층층다리가 기어오르는 구렁이처럼 감겨 있었다. 靑銅으로 된 그 층층대를 발소리에 가슴을 조이면서 올라갔다.
어느 창가를 돌아 오르려다가 우뚝 발을 멈추었다. 오색이 현란한 紗羅(사라)가 미친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줄 알았다. 수십 마리가 되는 蝴蝶(호접)의 亂舞(난무)였다.
그 亂舞 속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쥐고 있는 黑衣(흑의)!
“리 ― 나!”
“…….”
놀라는 빛도 없이 조용히 드는 흰 이마, 코가 거만한 설움.
나비 떼의 비단에 어울려 마치 忘却의 끔으로 싸인 高麗磁器(고려자기)를 연상케 하는 그것은 깨어지기 쉬운 리나의 얼굴이었다.
“리나!”
“…….”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왜 이렇게 찾아왔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리 ― 나! 나야!”
창을 넘어 뛰어 달려갔을 땐 리나도 몸을 일으켜 다가서주는 것이었으나, 내 손이 네 손을 네 몸을 구하였을 때 너의 말간 시선이 나의 가슴을 막는 것이었다.
“리 ― 나! 날 몰라?”
“…….”
“흐 ― ㅇ, 거지가 되어 왔다구 몹시 쌀쌀하구나.”
“그런 거짓말 이젠 믿고 싶지 않어요”
“거짓말?”
“비단옷을 입으신 건 다 들어서 알고 있어요.”
“들어서? 누가 그런 지각없는 소릴…….”
“天帝(천제)께서”
“천제……? 흐 ― ㅇ, 너 그동안 이마가 더 희어졌구나. 더 예뻐졌구나. 그래서 나를 모르겠다는구나.”
“이제 오실 길을 왜 떠나셨나요?”
“꿈이었다. 그땐 꿈 속이었다는 것은 너도 알지 않느냐.”
“지금은요?”
“지금? 지금은 나는 나다! 아주 가난뱅이야.”
“거만이라는 딱딱새래요. 천제께서는 선생님을 딱딱새라구 하셨어요.”
“좀 천제 천제 하지 말아줘. 내가 지금 필요한 것은 장갑이란다. 리 ― 나, 난 손이 시려…….”
내 입김은 타는 듯하였다.
“리나! 우리는 너무 불쌍했다. 서로 껴안아도 추운 우리 설움이다! 리나!”
나의 손은 리나의 팔을 찾았다.
어쩔줄 몰라 힐끔 뒤를 돌아보는 리나의 눈…….
“전 춥지 않아요!”
너의 눈동자를 스치는 공포감을 나는 보고야 말았다. 나는 내 손이 정말 시려지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여기가 우리만이 아니라는 것, 여기에도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대담해졌고 무서운 것이 없어졌다. 나는 너의 너무나 가벼운 허리를 껴안으면서 네 입술을 찾았다.
“안 돼요! 안 되는 일이야요!”
“너 언제 나보구 여자라구 선언했잖었니.”
“아녜요! 딸이에요! 여자이기 전에 전 천제의 딸이에요!”
“너는 아직 어느 품이 더 따뜻한지 모르고 있다.”
“사랑할 수 없어요. 전 사랑할 수 없는 몸이에요.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요.”
나의 정열을 밀어버리고 리나는 안쪽이 되는 평상으로 검은 바람을 날리는 것이었다.
한때 창 밖으로 흩어졌던 나비들이 일제히 몰려들더니 네 주위에다 다시 오색의 무늬를 펴들었다.
술프게 흐느끼는 너의 그 까만 孤影(고영)…….
나는 가까이 갔으나 나비들의 亂影(난영)을 헤칠 수는 없었다.
“천제께서…….”
황홀한 난영 속에서 너는 또 천제를 뇌까리는 것이었다.
“천제께서 다시 이 몸을 지상에 내려보내실 때…….”
하면서 네가 하는 말이 一
“그 사내는 지상에서는 같이 될 수 없는 영원한 너의 배필이었니라.”
리나가 계수나무 그늘에서 울고 있으려니까 천제께서 용수레로 오셔 이렇게 말씀하시더라는 것이다.
“대왕님, 언제면 그이를 만날 날이 있아오리까?”
“그자는 전세에서 나의 온갖 사랑을 한몸에 받고 갖은 영화를 다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지렇게 오만헤졌으니 이제 또 30년은 저 지상에서 두더지처럼 더 살아야 할 것이다.”
“30년! 이제도 30년이나 이렇게 기다려야 하나이까. 대왕님, 이 소녀가 언제 한번 天德(천덕)을 흐리게 한 적이 있었나이까.”
“미련한 소리를 함부로 하는구나. 뜻이 사랑보다 깊음을 몰랐느냐. 30년을 멀다 하지만 그 후에 오는 영생을 생각할진대 눈깜짝할 사이로다.
나의 큰 사랑을 인간의 지혜로 재려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
“아직도 인간의 지혜가 죄였음을 깨닫지 못하겠느냐.”
“황송하오나 대왕님의 사랑을 깨닫는 지혜는 죄가 되지 않나이까?”
“얕은 생각은 입 밖에 내지 말지어다. 네 듣거라. 그 사내의 죄는 벌을 홀로 받기에는 너무 컸으니 네가 나누어야 할 것이고 네가 있기 때문에 더욱더 눈이 어두워져서 요즈음 번쩍번쩍한 옷을 입고 심지어는 이나에게 화살을 겨누고 있으니 나의 노여움이 또 얼마나 되랴. 네 세월을 눈물로 지내야 함은 마땅한 도리로다.”
“…….”
“그렇기는 하나 너에게 무슨 죄가 있었으랴. 너의 지극한 정을 내 어찌 차마 그대로 볼 수 있으랴. 내 다시 너를 지 지상에 내려보노니 잘 듣거라. 네가 가꾼 꽃가지며 나비에게 혼을 주어 너를 지키게 하였으니 벗으로 삼고 끝끝내 인간을 삼갈지어다. 그자를 가까이 하지 말지어다. 어기는 날에는 멸망이 있으리라.”
하시고 용수레를 돌리더니, 지붕은 새빨간 珊瑚(산호)로 하고 대리석 같은 소금바위로 벽을 두른 구름 속 神殿(신전)으로 돌아가시더라는 것이다.
“이 동산의 꽃가지며 나비며 모두 제가 가위로 오려서 만든 색종이에 지나지 않아요”
“……?”
“거룩하신 천제의 사랑…….”
조용히 드는 네 얼굴에 떠오른 감사의 희열.
“리 ― 나! 리나는 아직도 천제의 음모를 모르겠느냐. 그런 음모 때문에 이 지상은 이렇게 침침해진 것이다. 自然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天帝가 우리 머리 위에 자리잡았을 때부터 自然이 황폐해간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저 바깥 꽃동산을 내다보면서 아직도 감사의 희열에 잠기고 있는 네 얼굴을 다시금 보아야 했을 때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천제는 사람의 얼굴까지를 그렇게 비비꼬아 놓았다.
나는 나비들의 輪舞(윤무)를 헤치고 네 곁으로 갔다. 더이상 숨박꼭질 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네가 의식하고 있든 없든 그것이 억지로 머금어올린 감사요 희열이란 것을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벗겨버리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네 손을 끌고 남면한 창가로 갔다.
“저 주검의 거리를 보아라.”
아래는 천인단애요 거기에 펼쳐져 있는 廢墟. 빽빽이 널려 있는 都市 의 殘骸(잔해)를 가리키며 나는 비통함을 억제할 수 없었다.
“저것이 천제가 그 이름을 빌려주고 있는 인간이 자유와 평화의 이름으로 빚어낸 業蹟(업적)이다!”
나는 司令塔(사령탑)에 서서 女王(여왕)에게 賊情(적정)을 설명하는 司令官(사령관)처럼 침울하면서도 신이 나 했다.
“산산이 깨어져 널려 있는 기왓장 밭을 보아라. 지면이 지붕으로 된 것이다. 저 밑엔 땅을 파고 이제는 지상에 서서 살기가 두려워서 다시 기어다니기로 약속한 人類(인류0의 一團(일단)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어느 돌담 그늘로 거적을 헤집으면서 나오는 상이군인. 지팡이에 매달려서 기우뚱거리는 그는 옷이 없다. 필요가 없었다. 석고와 붕대투성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질금질금 싯누런 고름이 떨어지는 석고와 붕대 뭉텅이였다. 짝이 맞게 한쪽 다리와 한쪽 팔이 없다. 몹시 閒暇(한가)해진 육체였다. 배 아래 거기 그것도 파편에 뜯겨나갔는지 끝이 굽어진 시험관 같은 것을 그 자리에 꽂아서 排尿作用(배뇨작용)을 이루도록 修繕(수선)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구석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유리로 된 시험관을 가랑이 사이에 달고 그는 소변 보기 위하여 구석진 곳을 찾고 있다! 아직도 인간이라는 證據(증거)로 수치심이라는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原罪(원죄), 골수에 맺힌 罪意識(죄의식)!
“눈을 들어 저 수평선을 보아라. 집결되어 있는 뗏목. 그 위에서 조련에 영일이 없는 亡命客(망명객)들. 해안선에서 바다로 쫓겨났으면서도 프라이드를 지키려고 맹세한 人間의 一團이 저기에 있다!”
한 척의 조각배가 해안선으로 가까이 오더니 거기서 검은 부대를 쓴 그림자가 뛰어내렸다. 한 줌의 흙을 움켜쥐고 도로 올라탄다. 조각배는 쏜살같이 수평선을 향하여 달아난다. 곡식을 심으려고 흙을 저 뗏목으로 훔쳐가는 것이다.
상이군인도 땅 밑으로 기어들어가고 공기는 죽었다.
汚辱(오욕), 뜯기고 밟혀서 멍든 地平(지평).
“하늘이 땅 위에 저렇게 깊을 적에는 意味(의미)가 있어야 했다! 闇雲(암운)
을 찢고 독수리가 그 날개를 파닥일 때, 獅子(사자)는 동면을 깨고 그 포효를 전갈할 때 ! 人類의 혈관에는 새 피가 돌고 肉體는 높이 그리고 깊이 저 너머로 飛翔(비상)하리라.”
나는 내 말에 흥분하였으면서도 네 얼굴에서 희열이 흐려지며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계산이 틀리면 큰 뜻이구 사랑이다. 이것이 천제의 數學(수학)이다! 그따위 큰 뜻이 없었던들 이 땅이 이다지 꾀죄죄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
“너는 입을 다물고 있는다. 듣고만 있는다. 네 입이 얼마나 거짓말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가 하는 것은 네가 잘 알고 있다.”
“…….”
“천제는 그 사내를 삼가라 했다. ……그래 네가 내 앞에서 나를 삼갈 수 있을까? ……없는 것이다!”
“…….”
“천제가 그것을 몰랐을까.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
“그러기에 리나, 네가 나의 품을 거역한다는 것은 천제의 거룩한 계획을 어기는 것이 된다!”
횡포한 힘으로 나는 리나의 몸을 싸안았다.
“너는 악마의 소리라고 할지 모르나 길은 이것밖에 없다. 천제에 대한 인간의 대답은 이것뿐인 것이다. 罰주고 싶어하는 천제에게 대한 인간의 답변은 罪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試鍊9시련)이에요! 모두 시련이에요!”
너는 나의 품에서 몸을 빼어가려고 하였으나 초조해진 내 정열이 더 타오를 뿐이었다.
“滅亡(멸망)을 주려는 시련에 대해선 차라리 滅亡으로 대답할 따름이다!
그것이 人問의 矜持(긍지)이다! 이 긍지에서 人問의 自由는 시작되는 것이다! 天帝에 대한 人間의 유일한 답변은 人間의 勝利(승리)뿐인 것이다!”
“永生(영생)은요? 선생님, 우리 저 세계에 가서 언제까지 살아요 해질 때까지…….”
“미지근한 영생보다 우리는 이 正午의 滅亡을 택한다! 그것이 生이다. 神에서의 滅亡! 그것은 人間에의 새벽이었던 것이다!”
“…….“
“우리에게도 權利(권리)는 있었다 ! 왜 罪人이어야만 한단 말인가……. 왜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된단 말인가!”
한사코 내 가슴을 막아내던 네 팔에서 힘이 흘러나갔다.
“리나!”
“아 선생님…….”
나는 승리한 것이다. 우리는 승리한 것이다.
내 입술은 네 입김에 닿았다.
깜짝, 놀라 뜨는 梨那의 눈. 그러나 그것은 이미 천제의 그림자, 죄의식이 비친 그것이 아니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處女(처녀)의 부끄러움이었다. 여자에의 탈피로 부풀어 오르는 祈願(기원)이었다. 기나긴 겨울 밤은 사라지고 肉體에 새벽의 트는 貪欲(탐욕)이었고, 肉의 길을 밟고 가는 靈(영)에의 돌아감이었다.
서로 서로의 육체를 애원하던 두 개의 육체는 하나의 입김에 탔다. 두근거리던 고동은 멎고 황홀한 眞空(진공) 속에서 肉이 흐느낀다. 무지개는 산 너머 이름 모를 엣 터에 걸리고, 구름에 싸인 듯 몸은 서 있는 것이 고달팠다.
그래서 서로 손목 잡고 무지개의 다리 밑으로 숨어들려는데, 그때였다.
깍깍! 깍깍!
무슨 소동이 일어난 것처럼 까마귀들이 아우정치는 소리가 공기를 찢어냈다.
“나비가! 나비가!”
새파랗게 질린 리나의 소리에 보니 나비들이 방바닥에 뚝 뚝, 떨어져서는 마치 고장난 것처럼 멋없이 뒹굴어버리는 것이었다. 나비뿐이 아니었다. 리나의 시선을 따라 밖을 내다보니 동산의 꽃가지는 마치 소금물에 젖은 배추처럼 추 ― ㄱ 늘어지는 것이 아닌가.
“천벌이에요! 아 ―.”
쓰러지는 梨那.
“돌아가주세요! 여기는 선생님이 올 곳이 못돼요!”
나의 입술은 증오와 조소에 비죽거렸으나 다음 순간 나는 소름이 쭉 끼쳐오르는 것을 누를 수가 없었다. 나비들이 날개를 움직이면서 다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그 정도의 타락으로 그치면 용서하는 데 인색하지 않겠노라 하듯이 꽃가지들은 다시 천연스럽게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해가 지고 달이 떴다.
나는 그렇게 네 곁에 있겠다고 애원하고 원망하고 하였으나 梨那는 끝끝내 나를 밖으로 몰아낸 것이었다.
쫓겨난 나는 마치 미친 강아지처럼 圓塔(원탑) 밑을 헤매면서 아무리 쳐다보아도 네가 있는 방의 창문은 열려주지 않는 것이었다.
꺼진 가슴을 안고 나는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무거운 발을 옮겨놓으면서 樓門(누문)을 나서려다가 나는 나의 그림자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밤하늘로 童話(동화)처럼 솟아 있는 尖塔(첨탑)에 걸린 滿月(만월)!
나는 발길을 돌려 탑으로 돌진했다. 나는 센티멘틀리즘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층층다리를 꾹꾹 밟으면서 나는 梨那의 침실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선 나는 멈칫했다. 검은 옷인줄로만 알았던 리나는 흰 잠옷을 입고 잠들어 있었다.
흘러드는 달빛에 싸여 고이 잠든 梨那의 살결은 육체라기보다 小夜曲(소야곡)의 한 토막이 거기에 이슬져 있는 꿈이었다.
그 잠옷에 비친 나의 무더운 그림자…….
나는 더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 가냘픈 어깨에 간신히 지니고 있는 너의 悲願(비원)을 내 손으로 무찔러버릴 수는 없었다.
人間이 쓴 가련한 假面(가면). 그것을 벗겨버릴 손을 人間은 갖고 있지 않아야 했다. 나는 물러섰다.
그러나 돌아선 내 눈에는 저 창 밖 폐허의 遠景(원경)이 비쳐들었다. 피가 거꾸로 흘렀다.
나는 모랄의 大王과 싸위야 하고 싸울 수 있는 堡壘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던 것이다. 여기는 내가 나에게 약속한 마지막 밤이었다. 새 아침이 트는 마지막 싸움터였다.
돌아선 나는 梨那의 머리맡에 있는 백합화를 가볍게 꺾어서 집어들었다.
깜짝, 놀라 눈을 뜨는 梨那의 가슴에다 그 백합화를 던졌다.
그 백합화의 운명이 너의 悲願이 지나가야 할 道標도표였다.
그것은 墮落이 아니라 復活부활이었다.
꺾여진 백합!
그것이 새로운 誕生(탄생)이라는 것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神이 죽어가는 二元方程式(이원방정식)을 발견해냈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 다.
罪意識(죄의식)이 罪였다. ‘意識’은 人間의 領域(영역)이다. 철모르던 시절에 그만 속아서 빌려주었던 租借港(조차항)인 ‘香港(향항)’을 도로 찾아냄으로써만
우리는 ‘罪’를 우리 大陸(대륙)에서 소멸시켜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리나, 여기는 나비가 떨어져 죽을 수 없는 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罪가 없어졌는데 天帝가 무슨 천제란 말인가……. 우리는 원래 自然의 子孫이었던 것이다!”
내일 아침 천재가 용수레를 타고 이 동산에 달려왔을 때 나는 이슬로 가득 찬 合唱(합창)으로 마중하리라.
“당신의 盆地(분지)는 어젯밤에 꺼져버렸노라.”
나는 오래간만에 平安(평안)을 안고 꿈길로 흘러들어갔다.
平安이란 또 하나 罪에의 誘感(유감)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깊은 잠에 들어갔다 ―.
무덥다
정말 무덥다.
흑혹 끼쳐드는 熱氣(열기)
얼굴이 붓고 눈알이 그슬리는 것 같다.
몇 달째 그대로 가문 땅
구름 한 접, 한 오리 바람도 없이
우물도 바싹 말라버리고
공기는 바알갛게 익었다.
살을 뜯고 피를 빨면서라도 목을 축이고 싶은 渴(갈)이었다.
이 땅에 終末(종말)이 왔다는 무서운 풍설……
엊그저께 우물가에 나왔다가 죽은 고양이는 썩어서 말라서 지금은
하얀 해골로 누웠고.
아― 한 모금의 물!
生을 지닌 모든 것이 말라죽는
여기 지평선이 아득한 벌판 한 모퉁이.
하늘에는 데인 피를 빨다가 곪은 野欲(야욕) 같은 太陽(태양)……
그 벌판으로 내달아나가는 한 대의 수레가 있었으니!
뽀얗게 이는 紅塵(홍진)……
오아시스로 물 길러 가는 몸부림이었다!
太陽(태양)은 怒氣(노기)를 그리로 뿜었다.
휘청거리는 황소 … …
목을 비틀어 한소리 울더니
거품을 물고 퉁 쓰러졌다ㅣ
들쥐가 한 마리 기어와 그 거품을 핥다가 그대로 고꾸라지고
벌판은 다시 죽었다.
寥寥(요요)한 地熱(지열)
하늘엔 滿醉(만취)한 野欲(야욕)이 짖는 哄笑(홍소) ……
까깍! 까악 까깍!
어디서 살아 있는 소리 일다.
구름인양 바람인양 뭉게뭉게 이는 검은 그림자
하늘로 하늘로 까마귀의 大群(대군)!
저마다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秕政(비정) 蜂起(봉기)한 義兵(의병)처럼
太陽을 바라고 날아오르는 長蛇(장사)의 陣(진)!
긴 行軍(행군) 끝에 마침내 太陽에 당도했다.
일제히 달겨드는 鴉族(아족)!
無謀(무모)한 排戰(도전)이었다.
怒吼(노후)하는 太陽(태양)!
퍼붓는 黃金(황금)의 화살……
한마리 또 한마리 떨어지는 시체를 무릅쓰고
한사하고 달려드는 꺼먼 悲願(비원)!
地上과 天上의 戰爭(전쟁)이었다.
점점 숨이 가뻐해가는 黃金圈(황금권)
압축되어가는 修羅場(수라장)……
드디어 血鬪혈투는 끝났음인가.
黃金의 화살이 멎었다.
凱歌(개가)는 꺼멓게 歸道(귀도)를 내려오고
어두워진 하늘
아 ―
보라!
구멍이 펑 뚫린 하늘,
하나의 金環飾(금환식)!
太陽을 가리고 하늘에 걸린 둥우리!
드디어 落成(낙성)된 ‘바벨의 塔’이었다.
이는 바람,
식어가는 공기 ……
황소는 일어섰다.
수레바퀴가 굴리기 시작했다.
막 굴러서 내닫는 수레 !
이미 그것은 물 길러가는 길이 아니었다.
地平線(지평선) 저 쪽,
땅 끝 절벽으로 굴러떨어진
珊瑚의 소금집으로
이제야 公主(공주)를 구하러 가는
그것은 高句麗王子(고구려왕자) 행차였다!
길고 길었던 暗黑時代(암흑시대)는 끝났다.
“서의 ᄉᆞ방 끗츨 뎡ᄒᆞ신 이가 누구며 그 일홈이 무엇이며 그 아ᄃᆞᆯ
의 일홈이 무엇인지 네가 아ᄂᆞ냐.”
地平線에 둥실, 검은 구름……
그러나 時間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니,
刻一刻(각일각) 太陽은 움직이고 있었다!
地球지구는 돌고 있었던 것이다!
自滅(자멸)의 軌道(궤도)를 돌고 있었던 것이다!
벗겨져 나가는 塔影(탑영)……
내미는 뻘건 怒髮(노발)……
太陽은 다시 王權(왕권)을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부풀어오르는 怒色(노색)……
시삘건 憤怒(분노)는
堂上(당상)에서 ‘따의 冒瀆(모독)’을 차버렸다!
확 ― ㄱ
墜落(추락)하면서 불붙는 ‘近代의 塔’!
나는 그것이 내 머리 위에 떨어질 것만 같아서 눈을 떴다.
주위는 아까의 業化(업화)가 化石(화석)이 된 것 같은 沈默(침묵)의 바다였고, 戰塵(전진)이 자욱한 오솔길을 멀어져가는 저 그림자…….
“리 나?”
내민 내 손에 닿은 것은 무득득한 바위의 감촉뿐이었다.
“리 ㅡ一 나!”
그 메아리에 대탑해주는 것은 어디선가 까마귀가 우는 소리뿐이었다. 까악 까악…….
가슴에서 불은 꺼지고 倦怠권태로움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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