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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3부. 군사정권, ‘회한과 오욕’의 사법부 1979~1995 1~4
1. 10.26 사건, 허술한 절차와 신속한 처형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총격을 가해 이들을 살해했다. 정부는 대통령의 유고를 이유로 10월 27일 0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재판은 12월 4일 국방부 청사 뒤편의 계엄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열렸다.
(군법회의에서 재판 관할) 10.26 사건 재판은 처음부터 관할권 문제, 내란목적 살인인가, 단순 살인인가 / 우발적 행동인가, 계획적 행동인가 / 이른바 확인사살은 살인죄인가, 사체 훼손인가 등 쟁점이 많았다. 첫 공판에서 변호인들은 계엄 선포의 정당성과 재판 관할권 문제를 제기했다. 계엄법에서 “비상계엄은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에 있어서 적의 포위공격으로 인하여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변호인들은 자연인인 대통령의 피살이라는 계엄 선포 이유는 “적의 포위공격”이라는 비상계엄 선포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또 김재규의 행위는 계엄 선포 이전에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군법회의가 재판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대법원에 재판권에 대한 재정신청을 제기했다.
계엄사령관이 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사건이 나던 시각에 김재규의 초대로 궁정동 안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김재규와 공모한 것이 아닌가 하는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었고 정승화는 전두환에게 쏠리는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를 보안사령관직에서 해임하려 하자 전두환이 하극상을 일으켜 정승화를 제포했다.
(김재규의 변호인 해임) 김재규는 자신의 행위는 “민주회복 국민혁명”을 기도한 것이었다면서 “소신과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한 혁명”이 재판을 받는 데 변호인은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김재규의 행동에 대해 유신체제 쪽 사람들은 대통령을 시해한 패륜이라고 한 반면 민주 진영 일각에서는 김재규가 주장한 ‘민주회복 국민혁명’ 주장에 동조했다. 그러나 김대중을 비롯한 많은 사람은 유신체제가 이미 민중의 힘으로 그 붕괴가 임박했는데 김재규의 행동으로 군이 나설 소지를 준 것 아니냐고 아쉬워하는 분위기였다.
김재규는 100만명쯤 죽여도 문제없다는 차지철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대규모 유혈참사를 막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라고 말했다. 초고속 재판이라 공판조서가 제때 작성되지 않아 변호인들은 조서를 열람할 수도, 등사할 수도 없었다. 국선변호인 안동일 변호사는 “변호인들이 줄기차게 요청한 공판조서 열람 청구도, 공판조서에 대한 이의 신청도, 외부 의사 진단 신청도, 현장검증 신청도, 그 많은 증인 신청도 다 물거품”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12.12 사태 이후 재판 진행은 더 빨라져 재판 시작 두 주를 조금 넘긴 12월 20일에 1심 10차 공판에서 김재규 등 6인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다음 날인 12월21일 최규하가 권한대행 띡지를 떼고 정식으로 대통령으로 취임했는데 신군부는 이 일정을 고려한 것이다. 1심과 항소심을 모두 군법회의에서 끝낸 10.26 사건은 허술한 절차와 무수한 쟁점을 안고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대법원 판결과 김재규 처형) 이미 11월에 이영섭 대법원장이 계엄사령관 이희성과 우연히 만났을 때 이희성은 김재규 사건이 3월 며칠께 대법원에 접수될 것이라고 일정을 통고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형사3부(주심 유태흥)에 배당했다. 주심 유태흥은 접수 20일즘 지나 열린 심의에서 기각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냈다. 이 사건의 심리는 이례적으로 대법원 판사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는데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격론을 벌였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표결에 부친 결과 8대 6으로 ‘상고기각’ 결정을 보았다.
대판원 판결이 늦어지자 신군부는 “재판이 늦어져 사회혼란이 가중된다” “대법원을 탱크로 밀어버리자”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는 분위기는 살벌했다. 미국과 재야에서 김재규 구명운동이 벌어지자 신군부는 초조해졌다. 그러는 사이 5.18 학살과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했다. 5월 20일 대법원 앞에 탱크가 버티고 선 상황에서 선고공판이 열렸고 상고는 기각되었다. 그리고 나흘 후인 5월24일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재심이 청구된 사건에 대해서는 사형집행을 미루는 관계가 있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변호인들은 입회하지 못했는데 강신옥 변호사는 재판이 끝난 직후 보안사에 연행되어 20여 일간 고초를 겪었고 다른 변호사들은 모두 피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과감히 소수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들) 10.26 사건 직후 정부는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박정희를 쏘았다고 했고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역시 그렇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그를 내란 목적 살인이라는 계획된 행위로 기소했는데 신군부는 자신들의 권력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김재규가 내란을 획책했다고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내란을 일으킨 것은 김재규가 아니라 전두환 등 신군부였다.
대법원 판사들이 낸 소수의견의 요지는 10.26 사건 이후 새 헌법을 채택하는 것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 행위 시의 체제와 재판 시의 체제가 달라졌기 때문에 내란죄로 처벌할 수 없고 자연인 박정희를 살해한 행위가 국헌문란 목적의 살인행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또 내란죄가 성립하려면 한 지방의 평온을 해치기에 충분한 폭동을 일으킬 만한 다수인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이 사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14인의 대법원 판사중 여섯 명이나 신군부의 압력에 맞서 소수의견을 냈다는 것은 대단히 뜻깊은 일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등 신군부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양병호 등 5인의 대법원 판사는 모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판을 앞둔 8월 초 ‘의원 면직’ 형식으로 대법원을 떠나야 했다.(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 1981년 1월 5.18 민주화 항쟁이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 조작하여 김대중에 대해 사형을 확정한 사건. 그러나 진실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각국 지도자 및 종교인 등의 탄원으로 김대중은 무기, 20년 형으로 감형되었다가 1982년 12월 형 집행정지로 출소)
2. 비서관 뇌물 사건과 안기부의 검찰 길들이기
1983년 1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업자에게서 뇌물을 받고 부하에게서 상납을 받은 철도청장 안창화를 구속할 때 유태흥 대법원장의 비서관 강건용이 “구속중인 형사피고인을 보석으로 풀려나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피고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라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검사 두명 파면, 서울지검장과 서울지검 남부지청장의 인책 사임, 부장판사 두명 사임, 변호사 세명 제명 등 사법사상 전무후무한 파문을 낳음. 이 사건의 처리 과정을 통해 안기부는 검찰과 법원에 대한 확실한 힘의 우위를 과시함.
(요정 여주인과 외화밀반출 그리고 뇌물) 1982년 6월 검찰은 당시 한국 요정 업계에서 쌍벽을 이루던 대원각 주인 이경자와 삼청각 주인 이정자 자매가 미화 27만 달러를 밀반출한 사건을 적발함. 그러나 둘다 구속 한두 달만에 보석으로 풀려나고 이경자는 징역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는데 검찰이나 피고 모두 항소를 포기해 형이 확정됨. 이경자는 보석 석방을 위해 당시 대법원장 비서관이던 강건용에게 3,000만원 주었고 이 사실이 청와대 사정팀에 제보가 되고 청와대는 이 정보를 안기부에 넘김.
안기부 수사 보고에 따르면 강건용은 8건의 사건과 2건의 인사청탁에 개입해 4,660만원을 받았으며 유태흥 등 대법원 판사 3인, 고법원장 1인, 지법원장 3인, 지법 부장판사 2인 등에게 사건이나 인사를 청탁하여 대부분 관철함.
(안기부, 처음으로 가혹행위 인정) 안기부는 법조계와 언론계에서 강건용이 안기부에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묵사발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가자 그 소문의 진원을 캤다. 안기부는 검찰에서 이 사건을 담당한 대검 중수부 2과장 성민경 검사를 소문의 진원지로 지목해 그의 교우관계와 재산관계 등을 뒷조사했다.
1983년 2월 <전 대법원장 비서관 강건용 조사경과 보고>라는 안기부 보고서는 “강건용을 침상목으로 둔부 3회, 손바닥으로 따귀 5회 등 구타한 사실을 적시함.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확인한 중앙정보부,안기부 자료 중 내부보고서 형태로나마 연행된 피의자에게 구타 등 가혹행위를 했음을 인정한 것은 이 보고서가 유일하다.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지낸 전두환은 안기부의 고문이 너무 자주 논란이 되자 정도껏 하라며 검사를 파견해 수사실무를 지도하도록 했는데 이때 법률당당관으로 파견된 검사가 바로 정형근이었다. 안기부 직원의 직무와 관련된 범죄행위 수사권은 안기부에 있다는 안기부법 규정에 따라 강건용에 가해진 가혹행위에 대한 수사는 검찰에 의해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검찰로부터 검사가 법률담당관이나 수사지도관으로 파견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모를 겪어야 했음.
(안기부의 조사와 검찰의 전면 재조사) 안기부는 대법원장 비서관 뇌물 사건을 트집 잡아 부장판사 두명의 옷을 벗겼지만 진짜 표적은 검찰이었다. 안기부는 1983년 2월 외화밀반출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와 부당 사항에 대해 진상조사에 착수한다고 밝힘. 그 결과는 검찰수사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안기부는 검찰이 돈 없는 서민은 학대 가혹 고문행위를 하고 돈 있는 범법자는 우대하였다며 안기부 조사관들의 가혹행위에 대해서는 진상을 축소했던 안기부가 검찰에거 가해진 가혹행위에 대해서는 마치 인권단체의 보고서처럼 자세하게 그내용을 서술한 것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검찰은 54세의 여성 암달러상에게 런닝샤스, 팬티만 입게하고 나무 의자에 눕혀 두명이 팔을 잡고 한명은 배위에 올라앉아 물에 젖은 수건을 얼굴에 덮고 주전자의 물을 붓는 행위 2회 반복했다. 몸에 난 상처 때문에 조사가 끝난 후에도 방면하지 않고 14일간 여관 세 곳을 전전하면서 치료한 뒤에야 풀어주었다.
안기부는 조사결과를 검찰에 이첩했고 대검 중앙수사부는 1983년 2월 외화밀반출 사건 재조사 결과를 발표함. 이경자의 남편 이태희 등 5명인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고 이경자 이정자 자매도 불구속 입건됨. 검찰은 변호사들로부터 금품을 받은 남부지청 이진록 검사와 당시 부장검사인 동부지청 차장 박계건 검사를 파면함.
(검찰의 기를 꺾어야 한다) 안기부가 특히 문제 삼은 사람은 이창우 서울지검장이었다. 그는 대쪽 같은 성격의 원칙론자로 서울지점장이 되기전인 1981년 4월부터 1982년 6월까지 대검 공안부장을 지냄. 그때 전민학련 사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등 시국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강경 일변도인 안기부 측과 잦은 마찰을 빚음.
안기부는 “외화밀반출 사건의 엄정처리 지휘책임자인 검사장이 말단 사건 담당 검사를 초청, 피의자 남편 이태희와 같이 골프를 쳤는데 이는 통상의 검찰윤리 및 위계질서상 있을 수 없는 일로 평가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태희로부터 호텔 숙박 티켓 1매(20만원)을 수수했다고 한다. 진짜 문제는 안기부가 이 호텔 숙박권을 이창우 지검장의 방을 몰래 뒤져 찾아냈고 이를 근거로 이창우 검사장의 면직을 강력히 요구했다는 점. 결국 검찰은 3월 이창우 서울지검장과 조용락 서울지검 남주지청장이 지휘책임을 지고 ‘의원면직’ 형식으로 옷을 벗는 것으로 처리함.
소장 법관도 아니고 유신의 암흑시대를 살아낸 경력 15년 안팎의 부장판사 두명이 옷을 벗게 된 법원은 완전히 안기부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검사 두명이 파면당하고 검사장과 지청장이 옷을 벗은 검찰의 충격은 법원보다 더 컸다. 공안이나 시국사건이 아닌 일반형사사건에 대한 검찰수사가 사법경찰관 부서인 안기부에 의해 완전히 뒤집힌 것은 검찰 역사상 초유의 치욕이었다. 5공 중반기 이후 안기부가 권력의 중추기관으로 재등장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사건의 여파였다.
3. 국가모독죄와 안기부의 보고서들
(또 하나의 국가보안법, ‘국가모독죄’) 1953년 9월 제정된 형법은 1996년 전면 수정될 때까지 딱 두번 개정됨. 첫번째 개정은 1975년 3월 국회에서 날치기로 국가모독죄를 신설한 것이고 다른 한번은 6월 항쟁이후인 1988년 12월 반민주악법 개폐의 일환으로 국가모독죄를 삭제한 것이다. 1974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이후 유신정권은 국내 취재원이 외신 기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가모독죄를 신설함.(7년이하의 징역이나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한 이후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이 지면을 통해 제기되자 중앙정보부는 동아일보 광고주에게 압력을 가해 대규모 광고 해약사태가 발생함. 동아일보 경영진은 1975년 3월 폭력배를 동원하여 기자 130여 명을 몰아내고 해고함.
유신정권은 날치기 소동을 벌여가며 국가모독죄를 요란하게 형법에 끼워 넣었으나 막상 그칼을 잘 휘두르지는 않았다. 언론인 1,000여 명의 목을 치고 출범한 전두환 정권은 국내 언론에 대한 장악력이 유신 시절보다 높았다. 그러나 문제는 88올림픽이었다. 언론 통제를 위해 과거처럼 긴급조치나 계엄령 같은 비상조치를 취했다가는 올림픽 유치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고 동구 공산국가의 올림픽 참가를 유도하자니 반공법을 되살릴 수도 없었다. 유신이 남겨준 국가모독죄는 전두환 정권에게 언론, 특히 외신 통제를 위한 매력적인 수단이었다.
국가모독죄의 첫 희생자는 기독교청년연합회EYC 상임총무 김철기였다. 다국적기업 ‘콘트롤데이터’는 노동쟁의가 발생하자 일방적으로 공장 철수를 선언했는데 김철기는 국내외 기자 10여명에게 배포한 성명서에서 “정부가 콘트롤데이터 사태의 폭력에 대하여 수수방관, 동조, 지원하면서 다국적기업에는 나약 비굴하며 민중의 지지가 아닌 외세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함. 1975년 3월 검찰은 처음으로 국가모독죄를 적용하여 징역 3년을 구형하고 판사는 징역 1년6월을 선고함.
(남용되는 국가모독죄) 1983년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예상을 깨고 김철기에게 무죄를 선고함. 재판부는 “국가모독죄가 성립하려면 내국인이 외국인을 비방하는 행위와 이용당한 외국인이 국외에서 대한민국 및 그 헌법기관을 비방하는 등의 행위가 있어야” 하지만 김 피고인이 유인물을 외국인에게 배포한 사실만 인정될 뿐 유인물을 배부받은 외국인이 이에 이용돼 국외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비방하거나 국가의 안전, 이익이나 위신을 해하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행위를 했다고 볼 아무런 증거가 없다”하고 판단함.
무죄판결이 있고 40여일이 지난 뒤 안기부은 보고서에서 이신섭 판사에 의해 기각된 영장이 다른 판사에 의해 발부된 것을 들어 “법관으로선 상식 이하의 행위를 자행한 자로 법관 자격이 없다고 판단”된다면서 “차기 인사 시 지방 좌천 예정자”라고 단언함. 오히려 재판장 신진근 부장판사가 1983년 5월 ‘의원면직’ 됨. 그로부터 약 2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3명의 대법원 판사 중 11명의 다수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형사지법으로 되돌려 보냄. 이때 무죄 취지의 소수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는 이 일로 ‘대쪽 판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일규와 이회창이었다. 그들은 “국내에서의 국가모독행위의 규제는 자칫 헌법이 보장한 표현 비판의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할 수 있다”라고 주장. 즉 소수의견의 핵심은 “내국인이 국내에서한 국가모독행위는 원칙적으로 처벌대상이 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대법원에서 국가모독죄에 대해 유죄 취지의 판결이 있고 사흘 뒤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의 비서실장 김덕룡이 외신 기자에게 반정부 유인물을 준 혐의로 국가모독죄로 구속됨. 이를 시발로 국가모독죄는 제5공화국 정권이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리기 힘든 야당 정치인이나 종교인 등을 처벌하는 수단으로 사용됨.
특히 안기부는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재야 정치활동 모임인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에 대해 국가모독죄 동원을 모색하며 “민추협의 성명발표는 상임운영위(위원 25명)의 결의를 거치므로 상임운영위원 전원에 대하여 국가모독 등 공범으로 필요시 입건 조사처리 가능”하다고까지 주장함. 김영삼 당시 민주당 총재도 군사정권하의 서울올림픽을 나치하의 베를린올림픽에 비유했다가 상이군경회에 의해 국가모독죄 위반으로 고발됨.
5공 정권의 국가모독죄 운영은 점점 더 경색되어 1987년 6월 항쟁 직전에는 “기자회견 장소에 외신 기자가 한명이라도 있을 경우 국가기관을 비방하는 발언을 하면 해당되며 외신 보도 여부에 관계없이 죄가 성립한다”라는 것이 검찰의 공식 입장이었다.
4. 안기부의 학생시위 엄벌
유신시대의 민주화운동이 경인 지역에 편중된 것이었다면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거쳐 제5공화국 시기에 들어와서는 항쟁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번졌다. 전두환 정권 초기는 유신시대와 마찬가지로 경찰이 교내에 상주하면서 학생시위를 강경 진압했고 시위학생들은 대개 1년 안팎의 형을 받음. 그런데 당시 병역법은 6개월 이상 복역한 사실이 있는 사람은 현역 입영은 물론 방위소집까지 면제해 줌. 그러다 보니 군대가서 3년 썩는니 시위를 주동하고 1년가량 옥살이 하면 군대 문제도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음.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의 시위 확산을 막는 방편의 하나로 병역의무를 필하지 않은 남학생이 시위를 주동하면 병역기피 목적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 이들에 대한 형량을 높이는 방안을 강구함. 그러나 개별 사건에 대한 형량을 결정하는 권한은 사법부에 있었기 때문에 안기부로서는 ‘조정’이라는 이름의 과정이 필요했다
(안기부의 ‘조정’과 말 잘 듣는 사법부) 1983년 4월 안기부 보고서를 보면 학원 관련 사범, 특히 군입대 기피목적 사태 유발자에 대해 신속한 재판 처리로 엄단함으로써(5년이상 구형, 3년이상 선고) 신속한 기소 및 공판 기일 지정으로 조속 처리토록 검찰 및 법원을 조정하기로 함. 대법원에서는 전 관할법원에 동 처리방침을 시달함.
1983년 3월 안기부는 학생시위의 대부분을 관할하게 되는 서울형사지법에 대해 직접 ‘조정’에 들어감. 1983년 3월이라는 시점은 앞서 살펴본 요정 주인의 외화밀반출 사건과 국가모독죄 무죄사건의 여파로 안기부가 사법부를 마구 흔들어대고 있을 때였다. 안기부가 형사지법 수석부장이 아니라 형사지법원장에게 직접 행사한 ‘조정’은 너무나 잘 먹혀들었다. 1983년 2월 1심인 수원지법에서 징역10월형을 선고받은 성균관대생 3명에 대해 4월 원심을 깨고 징역1년 6월형을 선고함. 항소심에서 형량이 두배 가까이 늘어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임.
안기부의 ‘조정’으로 단순 교내시위에 대한 형량이 두배가량 늘어남. 안기부 ‘조정’의 첫 희생자로 갑자기 3년형을 받게 된 동국대생 김유능은 그후 승려가 되었다가 2004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중형은 판사가 내리고 생색은 ‘각하’가 내고) 1983년 12월 안기부 보고서는 “1983년 이후 검찰에서는 학원사범에 대해 최소 3년, 최고 5년형 구형으로 일관성 있는 엄벌처리 원칙을 고수하여 거의 100% 영장발부, 구속기속 처리를 해왔으며 법원은 검찰 구형의 최소한 2분의 1 이상 선고 원칙하에 평균 징역 2년형 이상 선고해 왔다고 밝힘. 그러면서 구속자 누증으로 인한 정치적 부담은 ‘각하의 특별조치’로 탄력성 있게 대처한다는 처방을 내놓음.
약 20일 후인 1983년 12월 22일 정부는 학원소요와 관련된 학생 134명을 석방함. 1983년 말과 1984년 초에 걸친 일련의 ‘특별조치’로 풀려난 학생은 모두 338명으로 남아있는 학생은 22명. 안기부의 중형 선고 방침에 따라 충실히 중형을 선고한 판사들만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슬 푸른 안기부의 ‘조정’과 ‘협조’요청에 무기력하게 굴복한 법원은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 연세대생 내란음모 사건과 안보수사조정권 >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검찰은 지금의 기세등등한 검찰과는 달리 안기부의 직접 통제를 받았다. 1981년 3월 연세대생 장진환 등 4명은 유인물과 관련해서 검거, 안기부는 이들이 광주항쟁 소식이 궁금해 이북방송을 들은 사실을 밝혀냄. 광주항쟁 이후 대학가에서 전두환 정권 타도 움직임이 확산되자 이를 막기 위해 안기부는 그림이 필요했던 차에 학내의 단순 유인물 사건이 안기부에 의해 이북과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과 연결된 내란 선전선동 사건으로 둔갑함. 안기부은 이 사건에 국가보안법 외에 내란죄를 적용하여 서울지검 공안부로 송치함.
사건을 담당한 구상진 검사는 사건의 수괴로 지목된 장신환은 불기소로, 나머지 피고인들은 최소한 내란죄로 기소할 수 없다고 생각함. 안보수사조정권의 핵심중 하나는 안기부가 송치한 사건의 피의자 신병 처리는 안기부장의 ‘조정’을 받아야 하고 다른 하나는 안기부가 제시한 송치 의견과 다르게 기소하거나 불기소할 때에는 안기부장과 ‘협의’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통령령에 불과한 안보수사조정권이 형사소송법에 보장된 검찰의 기소독점권을 짓밟았던 것이다. 그의 생각대로 진행한 구상진 검사는 “당장 죽여버리겠다”라는 협박전화를 받았고 “서울지검에 빨갱이가 있다”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결국 구속만기를 하루 앞두고 안기부장 대신 검찰총장이 “안기부 요구대로 내란죄로 기소하라”하는 공문을 보내자 구상진은 사표를 쓰고 잠적했다.
그리하여 공소장 작성 및 기소 임무가 공안부의 정형근 검사에게 떨어졌고 시간에 쫓긴 정형근은 기록을 제대로 검토할 시간도 없어 안기부 의견서를 베껴 공소장을 제출함. 사표를 낸 구상진은 미국 유학을 준비했고 정형근이 피의자 전원을 내란죄로 기소했는데도 안기부는 야인이 된 구상진을 계속 주시하며 그의 비위사실을 조사함. 안기부 내에서 그를 구속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집안 배경으로 인해 화를 면한듯. 당신 대검 차장인 배명인(뒤에 법무장관, 안기부장 역임)과 하나회 핵심인 예비역 육군소장 배명국 형제가 구상진의 이종사촌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