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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미감
적 합목적성
영어영문학과 200517767
임철욱
1. 들어가면서
현대의 예술은 표현의 자유 같은 예술 외적 권리, 혹은 제도 이론의 사회학적 접근 등을 통한 예술행위를 넘어선 그에 대한 담론 자체를 염두에 둔 메타 해석적인 지평으로 파격을 시도하는 듯하다. 잭슨 폴록의 작품들을 보면 색감이라든지, 어떠한 예술 양식의 모방이나 계승이라든지, 정서의 표현 혹은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이나 종교적 교리를 표방하는 선전적 의도 등 지금까지 모든 기존의 예술적 용도나 내용들을 거부하고 단순히 예술에 지위를 부여하는 그 지위와 현실적 실효의 문제로 예술의 정의문제를 한정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술 행위는 직접적인 미나 예술행위에 대한 감상이 아닌 미에 대한 태도나 감상의 심도를 규명하는 데 필요로 되는 개념들에 대한 비평이나 해석으로 그 행위의 방향을 변경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하나로서 조지 디키에서 보이는 제도 이론이 규명하는 지위수여로서의 예술의 정의는 과연 인간의 삶과 정신적 양상에서 차지하는 예술이 갖는 의미에 대한 담론이나 그 담론의 가능성을 충분히 제공하고 있는 것일까?
엄연히 사람의 인상이라든지 어느 정도의 상호주관적 소통이 가능한 예술과 주관의 관계에 대한 담론을 배제한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예술의 정신적 영역에 대한 탐구의 가능성이 없을 것이며 단순히 법적 효력과 예술 지위 수여 사이에 있어서 그 경계는 강제성과 비강제성 혹은 법적 기관과 비법적 기관의 차이 같은 예술이 갖는 내적 필연성이나 합목적성의 특수성이 배제된 근거가 빈약한 애매하고 실체없는 담론이 될 뿐이다.
필자는 제도 이론이 갖는 예술정의의 한계와 그로 인한 예술 담론의 제한이라는 문제들을 칸트의 심미이론을 통해 다루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첫째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이론에 근거해서 미적 태도 규정의 모호함을 지적하는 올드리치의 주장을 살펴봄으로서 그가 주장하고 있는 주관적 행위로서의 미적 접근 방향이 과연 정당한 접근을 보이고 있는가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두 번째로 조지 디키의 수행 이론이 갖는 동어반복적인 정식의 특징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고 예술계의 전문가들이 근거하고 있는 상호주관적인 미적 합목적성의 가능성을 연구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로 칸트가 말한 인간의 심미적인 주관 형식이 갖는 '인간 오성과 이성의 자유로운 유희로서의 미적 접근'이 순수한 쾌로서의 미적 효과에 대한 정의와 갖는 차별성을 탐구함으로서 바이츠가 근거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을 통한 정식의 한계를 짚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인간의 내적 합목적성으로서의 미적 형식이 갖는 도덕적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실천과 동의의 요구로서 자리하는 인간의 심미적 특징이 예술행위와 감상에 부여하는 도덕적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2. 올드리치의 미적 태도 규정에 대한 기준의 모호성에 대한 지적
그리고 그 주관적 기준에 대한 비평
2.1 올드리치와 인식된 사물의 실재성을 통한 예술 분류
먼저, 올드리치가 지적하는 미적 태도 규정의 모호성을 다뤄보고자 한다. 올드리치는 어느 대상이 미적 대상인가 아닌가를 결정해 주는 것은 주관이 행사하는 어떤 활동 내지는 주관에게 일어나는 무엇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미학 이론들이 미적 자극으로 인한 심리적 상태나 대상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요소에 대한 규명이라고 봤다면 올드리치는 이 주관이 행사하는 활동이라는 관점, 즉 미적 지각 방식을 바라보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오리-토끼 그림을 통해 논증했듯이, 오리-토끼 그림은 경우에 따라 선이 그려진 어떤 디자인으로 혹은 유사 오리 그림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토끼 그림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예를 통하여 짚어보려했던 그의 핵심은 미적 관점에 대한 그간의 '통일성'에 대한 반론이었다. 미나 예술을 일률적으로 정의하려고 했던 일단의 근거들이나 시각들을 무효화시키고 주관의 다양성이라는 관점을 들어서 대상에 대한 지각은 다시 대상에 대한 '물리적 관점'과 '미적 지각'으로 나뉘어짐을 말했다. 이러한 올드리치의 다원적 모티프를 좀더 밀어붙여 보면 우리는 미적 관찰에 있어 그 인식에 대한 진술이 어떠한 통일성도 갖고 있지 못하며 동시에 그러한 비통일성을 근거로 진술의 유효성에 대한 의문을 던질수 있다는 귀결로 나아가게 된다. 즉 대상을 우리가 '무엇'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러한 인지의 측면이 던지고 있는 공통적인 '진술되는 무엇'이 실재하냐는 물음인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접근은 일반적 사물에 적용된다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태도이긴 하다. 그러나 올드리치는 이 주관적 관점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다 보니 미적 판단에 대한 심도 있는 규명을 하지 못한 것 같다.
2.2 칸트의 취미판단 제 1계기인 ‘무관심성’을 통한 올드리치의 규정적 정의 비판
미적 판단, 다시 말해 취미판단에 대한 칸트의 중요한 논증 가운데는 '무관심성'이라는 요소가 있다. 칸트에 따르면 취미는 근본적으로 비목적성을 띈다. 이 비목적성은 인간의 사상이나 행위적 목적, 혹은 존재 대상의 실재 여부에 대한 관심에 근거하고 있지 않은 순수한 미적 쾌감으로서의 반응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인 대상에 대한 관심이나 고려사항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미적 쾌감을 형성하는 순수한 합목적성이 칸트가 말하고자하는 ‘무관심성’의 의미이다. 이 미적 쾌감은 대상의 실재 여부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오직 자신에게 반영되는 주관적 미적 쾌감을 관조하며 내 자신 속에서 만들어내는 표상으로 인한 미적인 자기충족성에 관심을 둘 뿐이다.
올드리치가 근간하고 있는 명시적, 진술적 목적성을 지닌 예술행위의 정의는 사람마다 각기 도출되는 예술의 명시성이 갖는 내적 필연성을 짚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칸트의 시각에 의하면 본질적으로 대상의 실재함에 대한 ‘무관심성’을 띄고 있는 취미판단의 성질은 올드리치가 말하는 외적 규정 내지 명시적 규정에 근간한 진술 안에서는 단지 대상과 그에 대해 통념적으로 인지되는 서술의 동어반복을 속행할 뿐이다. 칸트는 오히려 그러한 통념적 인식(장미는 아름답다)이 인간의 주관적 미적 보편성에 근거했음을 진술한다. 인간의 미감에 대한 접근은 ‘실재’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닌 ‘그것이 우리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며 실재로 무엇을 가능하게 하냐는 관심으로 이어진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칸트는 미적 판단의 영역에서 인간의 오성과 이성은 현상에 대한 규정이나 분석을 넘어서서 ‘자유로운 유희’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었던 달이 취미 판단의 영역에서는 상상력을 통해 ‘사랑하는 이의 눈썹처럼’ 보이게 되는 상상력의 지평, 유희의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
2.3 주관적인 내적 형식으로서 취미판단 정립 필요
올드리치의 주장은 결국 어떠한 관점들이 ‘실재’하고 있다는 주장에서 그 진술을 그치고 있다. 그러나 그 정식이 근거하고 있는 인간 감정의 ‘실재’의 경위에 대해 올드리치가 충분히 진술하지 못함은 오히려 특정한 대상이 우리에게 심리적으로, 현상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충분히 시간을 두고 숙고하지 않은 협소한 관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이론은 ‘열려진 개념’이라는 진술을 통해 일률적인 예술의 정의에 대한 반기를 취하고 있지만 오히려 알려질 수 있는 것(실제로는 제한된 통념을)에 한정해서 모든 논의를 한정시키려하는 한계를 가진지도 모른다. 어떠한 작품에 대해 소설이냐 소설이 아니냐에 대한 규정적 의도가 서린 질문, 그리고 소설 자체에 대한 본질 규명을 위한 질문에 대한 답변들은 통일되기 힘든 면이 있다. 그러나 그 소설을 접하면서 일어나게 되는 순수한 쾌와 오성과의 조우가 일으키는 자유로운 유희의 양상, 그리고 그러한 취미판단에 요구되는 상상력(미감적 이념)과 이성적 이념의 관계에 대해 접근해가며 대상과 주관의 관계가 의미하는 바를 우리는 풍성히 논의할 수 있다. 이것이 소설이냐 저것이 소설이냐라는 질문 속에는 어떻게 우리는 소설을 소설되게 하느냐라는 주관성의 의미가 배제되어 있다. 마치 그 대상이 인간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이 ‘실재’하는 전적 타자인양, 혹은 과학적 분석의 대상인양 접하는 것은 주관적 형식으로 보편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미적 판단력에 대한 철학에 있어 기계적인 과학주의에 근거하고 있는 분석 오류를 보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3. 조지디키의 수행이론과 미감적 보편성의 문제
두 번째는 조지 디키의 수행이론이 지시하고 있는 수여체계로서 혹은 예술행위에 대한 명명 자체로서 정립되는 예술 지위 부여 근거에 대한 질문이다. 문제는 이른바 제도 자체를 문제삼는 메타 해석적 예술을 지향하는 예술가들 자체도 예술 행위를 명명함에 있어서 기존의 예술계에 반하거나 혹은 긍정하는 양태의 근거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예술은 하늘로부터 갑자기 떨어져서 인간의 심상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닌 연속적인 공감과 동의 혹은 혁신의 과정이 내포되어있다. 즉 그러한 각자가 지닌 주관적 미적 형식들이 갖는 동의의 과정들이 예술의 지위부여가 갖는 진실이지, 예술계의 인정이나 예술가의 행위 자체를 예술 지위의 근거로 삼는 것은 예술 행위 자체에 담겨진 취미판단에서 보이는 공통감에 대한 요구라는, 상호적 특성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다.
앞서 칸트의 취미 판단에 대한 제 1 계기로 ‘무관심성’을 든바 있다. 이 무관심성은 이전의 이성적 고찰과는 다른 종류의 보편성을 요구한다. 그 전의 객관적 보편성이 인간 외적 사실, 곧 자연적 사실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했다면 취미판단의 보편성은 주관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 미적 주관성, 곧 쾌와 불쾌에 대한 인상은 모두 다 각자 그 내용이 다르지만 그 대상과 조우해서 내적 능력들이 특정한 인상을 형성하는 주관적 합목적성을 띄게 된다. 그 대상에 접하는 우리의 미감적 합목적성으로 인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취미판단에 대한 동의를 요구하는 미감적 보편성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 보편성은 단순히 우리가 실제로 ‘시위’를 한다는 뜻이 아닌 우리의 내적 합목적성이 특정 대상에 대한 인상을 하나의 범례로서 작용하는 매우 당연한 진실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이성친구 혹은 연예인을 미적 기준에 있어 거의 독단적인 우위에 두고 있지 않은가? 더 사밀하게 나아가면 심지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친구들과 가벼운 혹은 심한 언쟁을 보이기도 하지 않던가?
조지 디키는 예술가의 수여 행위 이전에 예술가의 예술작품 제작과 그 행위 자체가 ‘권위’를 갖게 되는 과정을 간과한 듯하다. 단순히 제도에 대한 논의에 그치게 될 때 우리는 예술에 대한 ‘제도적 특징’을 말하는 것이지, 예술 행위가 그 합당한 권위를 인정받게 되는 예술적 근거, 곧 예술지위 수여의 필증적 근거를 말하지 못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상과 사람의 인식 내지 판단이 갖는 심리적 필연과 그 형식에 대해서 침묵한다는 것이다.
예술가의 내적 합목적성이 갖는 그 동의적 보편성의 지평은 미적 지위에 대한 근거가 됨과 동시에 미 자체가 독립되있는 것이 아닌 상호주관적 맥락 속에서 반성되고 형성되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게된다.
3. 바이츠가 근거하는 가족유사성을 통한 예술 정의 불가능성과
선험적 미적관념의 문제
세 번째 논의는 바이츠가 근거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에 따른 예술에 대한 열려진 개념으로서의 접근에 대해 짚어보려 한다.
소설에 들어맞는 것은 예술의 모든 하위 개념들, 이를테면 “비극”, “희극,” “회화,” “오페라”등을 비롯하여 그 밖에 “예술” 개념 자체에도 들어맞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X는 소설인가, 회화인가, 오페라인가, 예술 작품인가?”라는 어떠한 질문도 사실상의 긍정이나 혹은 부정이라는 의미로서의 명확한 답변을 허용하지는 않고 있다.
바이츠는 한 예술에 대한 정의가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예술 사이에는 개별적인 유사성은 존재할지언정 전체를 규정하는 공통성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단순히 자연물을 예술적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인상들을 볼때 인공물이라는 조건조차 예술에 대한 하부적 정의가 될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바이츠의 의견, 비트겐슈타인이 근거하고 있는 이 ‘실제적 관점에 근거한 논증’은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 내면의 필연성과 그 내면 사이의 관계의 의미를 짚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그렇게 예술적 지위나 장르를 부여하는 우리의 ‘정신’의 작용과 그 의미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까? 그저 원래 그러할 뿐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예술이 전수되는 과정과 예술의 천재성(비인공성에 대한 창조와 관조)가 어떻게 발현되는지 그 필연성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분명 무엇인가로부터 이성적 이념과 상상력을 형성하여 예술 작품에 이를 투영하고 있으며 관객은 예술이냐 예술이 아니냐라고 말하는 비실천적인 행위가 아닌 그 작품 내에서 우리의 미감적 합목적성이 부여하는 보편성에 따라 미적 관조라는 실천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미가 우리에게 인식되는 이유와 이 인식된 미가 왜 개별적인 주관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상호성을 요청하며 또한 실제적으로 공통감이라는 것을 형성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보다 근본적이지 않을까? 인간의 세계가 물리적 실제와의 관계에서 어떤 미감적 양상을 갖고 있는지 밝히는 것이 우리에게는 보다 본질적인 접근일 것이다.
칸트는 어떤 종류의 ‘판정’이 미에 대한 만족에 선행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미적 판정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지닌 오성과 이성들의 자유로운 유희이다. 바로 우리는 이러한 유희에 적합한 대상과 예술 작품 속에서 이러한 유희의 여지를 발견한다. 예술 작품은 단순히 예술의 공예적 측면, 기술의 교묘함을 넘어서서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느끼는 미적 관념을 느끼게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참된 취미판단 속에서 예술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모든 임의의 규칙들을 넘어서서 이 예술의 형식을 넘어서서 마치 자연의 산물인 것처럼 느끼게 되됨을 의미한다. 그런 진술 안에서 바이츠가 말했던 예술에 대한 진술적 정의, 구분적 정의는 의미를 잃게 된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에술적이거나 미적 관념을 일으키는 근원적 원인이 어디있으며 인간의 예술 활동에서 과연 그런 미적 관념의 유가 어떻게 드러나게 되느냐를 살피는 것이 보다 근원적인 접근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산물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이 예술이지, 자연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의 형식에 있어서 합목적성은, 이 예술의 산물이 마치 한갓된 자연의 산물인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렇게 임의의 규칙들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 있어야만 한다.
무엇을 예술로 분류하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예술 행위를 통해, 혹은 예술 감상을 통해 아름답다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만족의 동기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은 어떻게 기원하는가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칸트의 이론처럼 만약 우리의 미적 만족이 외적 실재 여부나 특정한 관념에 실재하지 않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양상을 띈다면 오히려 예술에 대한 정의 자체는 분류나 진술의 측면에서 ‘불가능함’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닌 내재적인 원리로서, 주관성의 형식에 대한 접근을 통해 이뤄질수 있다고 볼수 있다.
다시 말하면 취미 판단에 있어 마음의 구조들(자유로운 유희와 그것의 다양하고도 내적인 그리고 생기를 불어넣는 합목적성의 방식들)이 예술로 하여금 자연처럼 보이도록(인간이 자연을 통해 느끼는 만족)이끈다고 말할 수 있다.
취미판단은 논리적 필연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각 예술의 장르가 마치 3단 논법처럼 기계적인 객관성을 지닌 공통점을 갖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그 장르들이 소유하는 작품들의 추구하는 내용이나 이념 모두 다를 수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인식 능력이 객관적 판단과는 전혀 다른 결로서 취미판단에서 일종의 자유로운 유희를 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주관적 합목적성안에서 대상에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미적 개념에 걸맞는 예들을 하나의 범례처럼 여기는 보편성에 대한 간주를 통해 우리는 모든 예술활동에 선행하는 취미 판단의 선험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또한 이 취미 판단의 보편성 그리고 주관성이 인식 능력들의 자유로운 유희와 주관적 합목적성이라는 선험적 원리에 근거하여 예술에 대한 공통감을 형성함을 알게된다. 바이츠가 의도했던 ‘논리적 실재하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미적 개념이 투영된 실제 여러 종의 예술작품들을 갖고 있고 여러 가지 기술적 설명을 통해 도달하려고 하는 그 대상이 촉발하는 내적 만족의 상태에 대한 지향점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인식 능력들의 자유로운 유희가 일으키는 주관적 합목적성의 선험성과 외부에 대한 동의의 필요에 의해서이다. 객관적 판단의 보편성은 언제나 인간 외적인 물리적 근거나 기계적 유추에 따라 성립되지만 순수한 미감에 근거하고 있는 취미판단의 보편성은 외부적 객관을 지닌 것이 아닌 모두가 소유한 인식 능력들의 상상력에 의해서 이뤄진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주관적 합목적성에 따라 대상의 미감을 판단하지만 동시에 객관적이지 않은 주관적 합목적성의 특징으로 인해 상대와의 상호주관성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해가는 것이다. 여기서 요청되는 것이 바로 상대의 생각까지도 앞서 헤아릴 수 있는 상상력이고 우리는 취미판단에서의 인식능력들 그리고 표상능력들의 자유로운 유희는 사적 관심사를 배제한 보편적 취미에 대한 반성의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보편적인 미적 개념들을 공유해갈 수 있는 선험적 능력을 갖고 있는 셈이다. 예술이 지닌 인간학적 가능성-미감적 판단을 통해 우리는 객관적 판단을 요구하는 바이츠의 요구를 피해갈 수 있다. 내재성과 외부 세계의 관련성에 요구되는 필연성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미적 판단력이 현실 내에서 역사적/도덕적 측면과 갖는 상호 주관적 맥락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 - 객관적 분류의 미 접근에 대한 비평
; 주관적 상호성으로서의 취미 판단의 특성과 도덕성과의 연계성
지금까지 주로 위의 제도 이론과 수행이론이 근거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분류적/객관적 판단을 통한 예술정의 불가능성을 주로 비판해왔다. 그 이유는 예술제도론이 갖는 보편성에 대한 부정이 예술을 통해 인간이 부여하고자 하는 미적 이념과 또한 인간 안에서 취미 판단이 일으키는 심리적 양상에 대한 논의마저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의 예술 활동은 분명 순수한 미적 쾌감과 여타 이성 개념이나 표상에 분리되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취미 판단만의 주관적 합목적성과 인식 능력들의 유희라는 개념을 통해 예술을 위한 선험적 판단력에 대한 정립을 시도한 칸트의 의도에는 이성개념들 그리고 객관적 비판이나 도덕적 관념 분석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자연적 미에 대한 발견과 이 자연적 미를 통해 부여된 도덕적 만족의 연계성을 정립하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여러 사람들의 동의와 공감대를 형성해야하는 정치의 영역, 도덕의 영역의 실천이성적 원리와 유사하게 주관적 합목적성을 선험적 원리로 하는 취미판단은 그 합목적성의 정당화를 위해서 ‘보편성’을 요청하게 되고 이 ‘보편성’은 물리적 실제나 논리적 추론이 아닌 여타 다른 사람들의 주관성들과의 동의에 근거해있다. 객관적 분류에 주로 동원되던 오성과 이성은 예술에 있어서는 대상에 나름의 미적 관점을 부여하는 상상력을 갖게 되며 이 상상력은 상호 동의 가능한 합목적적 미적 형식을 추론하는 데도 활용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선험적인 미감적 판단 자체가 공통된 미적 개념들을 창조해갈 수 있는 하나의 근거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객관적 판단, 특히 제도 이론이 제시하는 정의가 예술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예술가와 감상자의 심층적 심리를 다루지 않고 단순히 그전 여타 이론들의 주장들의 무력함을 기계적으로 논증한 것에 비하면 칸트의 미감적 판단에 대한 분석은 취미 판단의 주관성이 지닌 보편성에 대한 필연적 요구와 그 실제적 유효성의 필연성을 심도 있게 드러냈다.
칸트는 더 나아가 미감적 판단에 요구되는 상호주관성과 반성적 특징을 도덕적 판단과 연계해서 둔다. 특별히 칸트는 미감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이 갖는 반성적 특징의 연결고리를 자연미에 대한 감응을 둔다는 점이 특이하다. 인간의 모든 미적 판단의 원류가 실제로는 아무런 이익이나 목적을 두지 않는 순수한 자연에 대한 존경과 관조에서 얻는 만족에 있음을 말하면서 순수한 미에 대한 감응은 바로 이 자연미에 원형을 두고 있음을 말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자연에 대한 관심은 자연이 인간에게 선사한다고 인식되는 그 호의들을 통해 우리에게 더 나은 도덕적 목표나 내적 가치들에 대한 관심을 이끔을 밝히고자 한다. 이 자연적 미에 대한 관조를 드러내는 이유는 바로 취미 판단과 도덕적 판단의 유사함의 근거로서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미적 판단의 주요한 계기로서 우리는 무관심성, 즉 사적 관심사가 배제되고 보편성, 다른 인간들에 대해 반성해야하는 측면이 있음을 발견했었다. 다시 말해 위의 자연미에 대한 예와 같이 만약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일이 자동적으로 도덕적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면, 우리는 도덕성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반성하는 방식과 유사한, 유비적인 또는 동형적인 방식으로 미적 대상들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추상적 차원의 문제와 경험적 차원의 문제가 서로 유비적으로 연결되어있으며 도덕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차원의 개념들이 경험적 차원의 대상들, 혹은 경험적이거나 사회적 차원의 미적 대상들로 비유되어(독수리에 국가를 빗대는 경우, 사랑에 포옹을 빗대는 경우)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미와 도덕성 간의 이러한 상징적 관계는 반성의 차원을 넘어 경험적 세계 즉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대상들과 도덕적 법치 하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 개체들에 의존해있는 것이다.
예술가는 주관적 합목적성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이 주관적 합목적성이 지향하는 만족과 동의를 목적으로 두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만족과 동의로 나아가기 위한 미적 판단의 순수성은 사회성과 예술적 상징에 의해 촉발되는 데 예술은 그리하여 단순한 정서의 표현이거나 예술계의 관습의 재현보다 더 깊은 차원, 즉 이성적 개념의 비유적 표현이 되는 미감적 이념으로서 제시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예술은 자연미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이나 지식에 더하여서 도덕적 연관성을 지닌 자연적 지평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감상 행위를 통해 단순히 예술계의 관습적 차원을 넘어서는 지평을 얻게 됨과 동시에 그 자연적 차원에서 다시 예술과 현실에 얽혀있는 인간 그리고 역사적 지평을 숙고할 수 있는 비평적 차원에 참여한다. 세속적 경계와 형식적 기준의 문제에 매여 있는 제도이론이나 객관적 판단의 영역에 있어 인간의 심미적 차원이 갖는 주관성과 이 주관성의 초월적 지평의 역할은 단순히 기계적 제도의 한 부분으로 전락될 수 있는 예술개념에 다시 상상력과 공통의 지평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데 있지 않을까? 동시에 이 칸트미학이 제기할 수 있는 오래된 새로움은 기존의 파격과 실험정신에 가려진 예술의 인간학적 의의를 되살려 아름다움과 인간의 내면 형성이라는 주제로 새로운 갱신의 기운을 불어넣는데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요한, 『예술의 정의』, 서광사, 2007.
크리스티안 헬무트 벤첼, 박배형 역, 『칸트미학』, 그린비, 2012.
조지 디키, 오병남, 황유경 역, 『미학 입문』, 서광사, 1977.
이중텐, 곽수경 역, 『이중텐 미학강의』, 김영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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