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노래 작사가이신 윤석중(1911-2003)선생이 파평윤씨 소정공 노종파 후손입니다.
경신대보 편찬하신 참판공 상익相翊 어른의 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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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국의 유산 (동영상링크)- 우리말 노래 글로 동요의 역사의 물길을 낸 윤석중
http://www.kbs.co.kr/1tv/sisa/heritagekorea/vod/1892926_386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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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중 선생 소개 (출처 :새싹회 홈페이지)
윤석중 선생은 1911년 5월 수표동 13번지에서 아버지 윤덕병 씨와 어머니 조덕희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노마였다. 호가 석동(石童)이 된 것은 발표 작품의 오식과 관계가 있다. 위로 수명이라는 누님이 있었으나 단명으로 11살에 생을 마쳤다.노마가 두 살 때 어머니 조씨가 세상을 떠나자 남매가 같이 단성사 골목 안(수은동)에서 홀로 사시는 할머니 이씨 손에 양육되었다.만 8세에 3 · 1절 독립운동이 있었고, 10세에 서당공부를 하다가 교동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한글과 일본말을 배웠다. 학교 건너편 천도교 본부에서 어린이의 날 행사를 하고 <어린이> 라는 잡지를거저 나누어 주는데, ‘어린이’라는 말이 처음 듣기에 아주 낯설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소파 방정환 선생과 자주 만났고 <어린이> 지 부록 편집을 거들기도 하였다.14살(만13살)인 1924년에 <신소년>지에 “봄”이라는 동요가 뽑히었고 이듬해인 1925년에 <어린이>지에 동요 ”오똑이”가 입선되자 동요 쓰는 어린이 문사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극이 뽑히기도 하였다. 이듬해(1926)에 조선물산장려회에서 모집한 “조선물산 장려가”가 1등으로 뽑히자 <어린이>지에 천재 소년으로 소개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동요 창작을 시작하면서 <꽃받사>, <기쁨사>, <굴렁쇠> 등 동요 동인활동을 주관하였다.
이후 1930년에, 보통학교를 월반하여 4년에 마치고 양정 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박물학을 가르치며 <성서 조선> 을 주간하던 김교신 선생을 존경하게 된다. 그리고 극심하던 카프(KAPF)화 아동문학시대를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순수문학을 지켰다. 양정고보 시절, 윤석중은 벌써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동요시인이 되어 있었다.이때 윤극영, 정순철, 박태준, 홍난파 등 작곡가들에게 창작동요 작곡을 의뢰한다. 한편 굴렁쇠 동인을 규합하고 울산으로 서덕출 시인(장애인)을 만나러 가서 “슬픈밤” 노래말을 짓는 등 일화를 남긴다. 굴렁쇠 동인은 마산의 이원수, 대구의 윤복진, 울산의 서덕출, 언양의 신고송, 수원의 최순애 등이었다.
1939년 11월에 광주학생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전국 각 고보 학생들이 호응하게 되었는데 양정 고보에서도 동맹휴학을 결의했지만 졸업반에서 취직에 영향이 있을까 해서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윤석중은 이에 반발하여 졸업을 얼마 남겨두고 자퇴를 해버린다. (그 뒤 57년이 지난 1987년 5월 양정고등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게 된다.) 이 날 <자퇴생의 수기>를 중외일보에 발표하게 되는데, 이 글이 나가자 그날 치의 중외일보가 일경에 의해 압수당하게 된다.
윤석중이 소설가이며 시인이며 시나리오 작가였던 沈熏과 자취생활을 하게 된 것은 외할머니의 생활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이 때 동요를 열심히 쓰면서 심훈의 시나리오 창작을 거들었다.1937년부터 조선총독부에서 어린이날 집회를 금지하여<기쁨사>대표로 어린이날행사에 참가하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931년 7월 23일 소파가 세상을 떠나자, 윤석중은 장례식날인 7월 25일 “못가세요 선생님” 제목의 조시를 발표 하였는데, 이 조시가 바로 윤석중 동요를 평가하는 작품이 되었고 다른 동요 시인의 작품과 비교되기도 하였다. 이어서 1932년 한국 최초의 동요집 “윤석중 동요집”이 신구서림에서 나왔는데, 춘원이 머리말에서 윤석중을 극찬하였다.
이듬해인 1933년에는 한국 최초의 동시집인, 윤석중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가 계수나무회에서 발간되었다. 이 해에 개벽사에 입사하여 <어린이>지를 편집하게 되는데, 소파 이후 1년간 카프 영향을 받아들였던 <어린이>지의 내용을 일신하였다. 1년 후 개벽사가 문을 닫게 되자,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이태준의 소개로, 조선중앙일보에 입사, <소년중앙>, <유년중앙>을 창간한다.
1936년 7월 27일 조선중앙일보 출판국 최영주가 주동이 되어 소파의 유골을 아차산에 안장하는데에 동참한다. 이해 1936년 8월 9일에 손기정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하자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사진화보를 내었는데, 이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조선 중앙일보가 폐간된다.윤석중은 이해 12월 조선일보 출판국에 자리를 잡게 되고 이어서 <소년>과 <유년>을 창간한다. 조선일보 출판국 이름으로 “조선아동문학전집”을 엮은 것은 큰 공적이었다.
1939년 조선일보 계초장학회의 추천으로 일본 상지대(上智大)신문학과에 유학을 하게된다. 일본에서 <모던 니혼>지의 사장으로 있던 마해송의 도움을 받는다.일본에서 동요집 “어깨동무”(1940)를 낸다. 1944년 징용을 피해서 전 가족이 한국으로 오게 되는데 마해송으로부터 부인 박외선 여사와 종기, 종훈, 주혜 등 자녀를 개성으로 피난시켜 줄 것을 부탁받고, 같이 연락선을 탄다.해방되던 날에 지은 동요가 “새나라의 어린이”이다.
해방이 되자 좌우익 대립이 극심해졌다. 그러나 윤석중은, 윤석중 문학을 비판하는 좌익의 목소리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고 순수문학을 지켰다. 을유문화사(사장 민병도)에 조선 아동문화협회(약칭 : 아협) 본부를 두고 <주간 소학생>을 창간했는데 후에 월간 <소학생>이 된다.1946년 어린이날을 다시 출발시키고 “어린이날 노래”를 짓고 (안기영 곡) 졸업식 노래(정순철 곡)를 지었다. 1950년 6월 윤석중 제7동요집 “아침까지”의 견본이 나온 날에 6 · 25가 터진다.
이후 육군본부와 미 제 8군 사령부에 3년간 문관으로 근무하면서 <윤석중 아동연구소>를 운영하였고, 1956년 1월 3일에 아동문화운동단체 <새싹회>를 창립한다.
그 동안 한국 문화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국제상인 라몬 막사이사이상(1978)을 비롯, 수많은 국내상을 받게 된다. 수많은 저서에서 가려 뽑아, 1988년에 윤석중 전집 30권(웅진출판사)이 출간되었고, 윤석중 팔순기념 동요집 “여든 살 먹은 아이”(1990), 이어지은 동요집 “그 얼마나 고마우냐”(1994), “반갑구나 반가워”(1995)를 출간하는 등 아흔 가까운 나이에도 창작을 쉬지 않았다. 200년에는 윤석중 아흔 기념 창작문집 “내일도 부르는 노래”가 석동문학회편으로 나왔다. 2003년 12월 9일 만 92세의 나이로 타계한다.
윤석중 생존시에 그를 <한국 아동문학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불렀다. 한국 아동문학이 1908년 육당에서비롯되었지만 본격 아동문학은 소파에서 시작되었고, 그 주류는 동요였으며 그중심에 윤석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석중의 동요 동시 창작은 1924년의"봄"에서 시작, "반갑구나 반가워"(1995)에 이르기까지 2천여 편, 작곡된 동요는 "오뚜기(박태준작곡) 에서"고향땅", "기찻길옆","달맞이","옥수수나무","우리산우리강"."퐁당퐁당"..전기한 "어린이날 노래","졸업식 노래" 에 이르기까지 600여곡, 그밖에 동화집 4권,산문집 "어린이와 한평생"등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그 중 동요 · 동시집은 한국 최초의 동요집인 “윤석중 동요집”, 한국최초 동시집인 “잃어버린 댕기” 외에 “어깨동무”(1940), “굴렁쇠”(1948), “반갑구나 반가워”(1995), “내일도 부르는 노래”(2000) 등이 있는데 기록을 생략한다.
춘원은 “윤석중 동요집” 서문에서 윤석중이 우리나라 동요의 일인자임을 인정하였고, 피천득은 <그의 동요는 우선 엄청난 양에 있어 놀랄 만하다. 아이들이 말하고, 듣고, 놀고, 자는 모든 현상이 그에게 부딪치면 다 노래가 되고 만다.>고 하였다. (윤석중 아동문학독본, 을유문화사, 1962, P1)
그 밖의 몇 연구자들의 말은 이러하다.
이재철은 <윤석중은 관조적인 위치에서 작품을 쓰기 보다는 차라리 언제나 아동이 된 입장에서 창작을 한다>고 하였고(한국 아동문학 작가론, 개문사, 1983, P59)
노원호는 <윤석중은 철저한 동심주의적 시인으로 낙천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 을 공감하였다(윤석중 연구, 한국외국어 대학 석사 학위 논문, 1991, P105)
문선희는 <윤석중의 작품세계는 순수 동심 세계의 동경과 맑고 푸른 세계의 동경으로 나타났음>을 작품 분석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윤석중 동요 동시 연구, 경희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7, P105)
이상을 요약하면 윤석중은 동심에서 살고, 동심으로 작품을 쓰고, 어린이를 즐겁게 하면서 자신도 즐거운 일생을 보냈던 분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자주 <늙지 않으려면 동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글을 어렵게 쓰기는 쉽고 쉽게 쓰기는 어렵다>는 말을 하였는데, 그가 남긴 명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