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산신씨의 都시조는 신경(辛鏡)인 바 그는 송나라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 인종때 와서 1138년(인종16년) 문과에 급제하고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은퇴후 창녕 영산이 중국 천축산과 산세가 닮았다고 생각하여 영산에 정착하였다. 9세손때 영월신씨가 분파하였다.
* 신(辛)씨는 9개 본관 18만명 인구에 이르러는데 영산신씨 8만4천명과 영월신씨 6만7천명이 대종을 이룬다. 시조에 관하여 위에서 본 신경이라는 설이 다수설인데 영월 신씨는 신라 경덕왕때 귀화한 당나라 신시랑이 시조라는 소수설이 있다.
* 영산신씨 시조 신경의 묘를 실전하고 제일 오래된 선조묘가 신경의 증손자 신몽삼 묘로 포항 기계면 화봉리 산56에 있다. 신몽삼의 묘를 영산신씨 시조묘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정확한 말이 아니다.
2. 답사
* 기계면 화봉리 ---기동저수지서쪽 골짜기를 조금 들어가면 길가에 신몽삼의 비석이 서 있다.
비문을 요약하면, 태사공(太師는 고려시대 정일품으로 정승격)몽삼(夢森)께서는 1166년(고려 의종20년) 시조 신경의 증손자로 태어나 4남을 두었는데 장남과 四남이 당대에 일가를 이루었다. 공은 서울인 개경에서 돌아가셨는데 명당을 찾아 이곳 능골에 안장하였다. 그후 여러 병란(兵亂)으로 실묘하여 마음 아파하던 중 1917.10 각종 풍문과 구전을 종합하여 경주종중 三個派가 3차 발굴 끝에 1918.9 지석(誌石)을 찾게되어 數百 종인이 감격하였다.
* 답사한 바 태조 비학산은 족보있는 산이로되 이곳은 중초급이다. 다만 김종덕의 전국결지 답사기는 금계포란형인 명당이라 한다. 과연 명당찾아 개경에서 이곳까지 천리길을 찾아 왔을가, 도중에 이곳보다 좋은 혈처가 수두룩한데--, 경주에 후손 문중이 3개가 있다고 하니까 혹시 공이 경주와 무슨 연고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202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