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28.sun.7:35am 비 런던 8도"
"일과 끝났나요? 영국 신사(강아지) 하고 먹방 하는 씬 외에 업로드된 사진이 없어서...팀원들과는 친해졌남요? 이제 출국 4일 남았네. 네 엄마와 언니가 너 없이 한 달 사느라 힘들었겠구나. 물론 가장 고생한 사람은 예공일 테지만. 끝까지 멘탈 다잡고 see you again(나)"
"ㅎㅎ 이제 일정 끝내고 숙소 가는 중이에요. 인터넷이 빠르지가 않아서 업로드 못했어요. 숙소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같이 다니기도 했는데 영 사람이 귀찮네요. ㅎㅎ 출국 4 남았다니 끔찍. 그러게 엄마랑 언닌 괜찮아 보이던데. 여긴 서울이랑 8시간 차이 납니다."
"목소리가 씩씩해 보이이는구나. 넌 나랑 언니와 확연히 다른 거 같아. 처음과 끝의 편차가 없고 소리 없이 강하다는 거야. 칭찬이야(나)"
"ㅎㅎ 소리 많이 내는 데 안 그래 보이나 봐요. 칭찬 감사해요.굿밤"
2.
하다 하다 목 등이 바깥쪽으로 아파서 자다 말고 생쇼를 했어요. 할 수 없이 워머를 다시 꺼내 두루고 선친의 '거지 컨셉'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친은 잠바나 재킷의 안쪽과 바깥 쪽을 개의치 않고 실용성 만을 위한 주머니를 직접 핸드메이드로 사용하셨고 한겨울은 물론이고 오뉴월에도 종종 목 폴라나 수건을 두드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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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마다 원조 패밀리 크산티페로부터 '동낭치'냐며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 같아요. 며칠 전 기침 멎을 때 활약한 목도리 효과를 기대하고 털 목도리를 둘렀으니 이번에도 목도리 매직이 기적을 가져올 것을 믿습니다. 영국사가 생각보다 내용이 방대해서 이번 쳅터는 종교개혁 태통 관련한 영국사만을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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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는 15세기 말 튜더 왕조와 더불어 절대 왕정이 성립하여 헨리 8세 때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고, 16세기 후반 엘리자베드 여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또한, 영국에서는 장원 제도가 순조롭게 붕괴됨으로써 근대적인 산업이 발달하였습니다. 튜더 왕조의 국왕들은 대체로 이러한 발전을 촉진시키는 정책을 수행하였고,1588년에는 에스파니아가 파견한 무적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에스파니아의 쇠퇴를 촉진시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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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7세기 초에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서자, 사태는 달라졌어요. 제임스 1세나 차알스 1세는 다같이 중세 이래의 입헌적인 전통을 무시하고 전제 정치를 강화하였으며, 의회의 승인 없이 함부로 세금을 징수하고 경제적 독점권을 남발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종교면에서도 국교회를 강화하는 정책을 강행하여 청교도를 압박하였어요. 이때 청교도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1) 튜더 왕조와 헨리 8세
리차몬드의 공작이었던 헨리7세는 영국 내부의 결속을 어느정도 다진 다음에 종주국 이었던 스페인과 우호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스페인의 왕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리 사이의 셋째딸인 캐더린을 맞이해서 큰아들 아더와 결혼 시킵니다. 1501년 11월 14일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1502년 4월에 신랑이 사망하고 말았요. 그러자 이사벨라는 강력한 압력을 가해서 아더의 도생 헨리 8세와 재혼 시킬것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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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듣지 않으면 결혼 지참금을 회수하겠다고 했어요. 이렇게 해서 케더린은 1509년 시동생인 헨리8세와 결혼 합니다. 철이 들면서 헨리8세는 어쩔수 없는 결혼이었지만 아들을 낳아서 왕위를 계승할려고 했으나 케더린 사이에는 딸만 낳았고 그것도 다 죽고 오직 메리 튜더만 살아 남습니다. 후일의 역사는 그를 가리켜서 피의 여왕 메리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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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복잡하자 헨리8세는 정치를 추기경인 월시에게 위임해요. 월시는 수도원을 세속화 시키고 거기서 얻은 돈을 가지고 그리스도 대학을 세웁니다.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헨리 8세는 궁녀 앤 볼린과 사랑에 빠져요. 그리고 아이를 갖고 말지요. 자신이 게더린과의 결혼은 불법이므로 이혼하고 앤과 함께 결혼하기를 원했어요. 월시추기경은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영국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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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란 케더린은 조카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챨스5세에게 결혼 뮤효승인을 취소케 합니다.그래서 월시는 실각되고 그의 뒤를 이어 토마스 크롬월이 영국의 실권자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크롬웰은 헨리8세의 요구에 따라 교황권 제한령과 사전 보호법을 발동 시킵니다. 이 두가지 법으로 교황의 권한이 영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국왕의 허가 없이 교황에게 항소 할수 없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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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헨리8세와 앤과의 결혼이 적법하다고 공포되고 앤은 여왕이 됩니다. 1533년 9월 공주 엘리자베드가 태어나고 1534년 국왕의 영국교회 수장법이 통과 되었어요. 1536년에는 수도원 해산법을 통과 시킴으로서 드디어 영국교회가 탄생되고 맙니다. 앤은 두번째 임신과 더불어서 왕위계승법을 통과 시켰는데 이법은 누구든지 왕자를 낳으면 계승권을 가지고 그 다음으로는 메리튜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엘리자베드라고 명기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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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년 앤은 두번째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간통죄를 적용해서 처형 당하고 세번째 여인인 제인 세이모어에게로 향해요.말아요. 그는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고서 죽고 말아요. 그후 헨리8세는 클리부스 앤과 결혼 하였으나 이혼하고 크롬웰도 참수 시킵니다. 이제는 보수파에서 케더린 하워드를 왕비로 내세우면서 카돌릭6개 조항을 발표 시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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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수파도 얼마가지 못하고 헨리8세는 케더린 하워드를 간통혐의로 처형하고서 마지막 여섯번째 부인인 케더린 파르와 결혼 합니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음으로서 에드워드6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헨리8세는 각 권력의 암투에 휘말리면서 개혁보다는 권력유지에 부심한 이혼경력6번을 가진 왕입니다. 즉 개혁을 향한 의지는 약했지만 어느쪽에 치우치지 않고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서 새로운 독립을 유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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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국 교회는 완전한 개혁측도 아니고,그렇다고 완전한 카톨릭측도 아니고 중간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어요.에드워드 6세는 10세에 왕위에 오르면서 너무도 어린 나이에 오르게 되었어요. 그래서 자연히 외척이 힘을 가질수밖에 없었고 삼촌이었던 헤르포드의 백작은 섭정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솜머세트 공작으로 승진 하여서 국가의 총사령관직을 수행하게 됩니다.
실권을 장악한 솜머세트는 개신교 추종자이었으니 종교개혁은 속속 진행되었습니다.
2) 메리 여왕의 반동
에드워드 6세의 사망은 영국의 왕위계승 문제를 야기 시켰습니다. 영국사람들은 메리에게 눈길을 돌렸으며 왕위에 오른 메리는 자연스럽게 조카인 챨스 5세의 자문을 구하합니다. 메리 여왕은 한 많은 여왕 이었어요.그래서 그는 헨리 8세의 시절과 에드워드 6세의 시절 법령을 상당수 번복 합니다. 헨리 8세와 케더린과의 결혼은 적법한 것이었으며,메리는 적법한 왕위계승자라고 선포합니다.에드워드의 6세의 모든 종교적인 법안을 폐기 시켰으며,헨리 8세 시절의 반-교황적인 법을 무효화 시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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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교회의 수장으로서 메리 여왕은 중세적인 예배전통을 그대로 복구 하였으며, 미사를 다시금 실시 해요. 메리여왕은 스페인의 왕 필립과 결혼 한 후 개신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 합니다.대륙으로부터 자유를 찾아서 왔던 개신교 지도자들은 모두 대륙으로 되돌아 갔으며,영국의 개신교들도 대륙으로 도피 하였으며,가톨릭 성직자들이 속속 복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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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파견 된 교황청 사절은 순종법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이단 규제법도 발동 시켰어요. 이때부터 개신교도들의 박해가 시작 됩니다. 메리여왕은 피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개신교 지도자들을 처형 하였으며,불운한 삶을 살았어요.
3) 엘리자베드의 수습
엘리자베드(1559-1603)의 즉위 이전부터 영국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개신교쪽으로 흐르고 있었어요. 엘리자베드는 1559년 1월 15일 대관식을 거행하고서 왕위에 올랐으며,1603년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영국 교회를 개신교 쪽으로 이끌어 갔으나 어느 한쪽으로도 과도하게 흐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러한 점에서 청교도들의 출현은 당연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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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드는 1588년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무찌름으로서 로마 교황 권과 로마주의 신앙으로부터 영국을 보호 하였으며, 동시에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서 화려했던 과거의 영국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엘리자베트의 영국 교회의 개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어느 하나도 버리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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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에 이르기 까지 영국교회는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를 따르지만 예배모범과 교회조직에서는 가톨릭 모범을 많이 반영한 복합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예공!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란 구교인 가톨릭과 신교인 프로테스탄트를 총칭한다. 어쩌다 보니(은혜로) 개신교를 선택했고 가톨릭의 만행을 알게 됐지만 개의치 않고 루터의 '개혁의 모토'에 목숨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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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와 가톨릭의 차이 점 중 가장 큰 것은 성경의 권위가 교회 위냐 아래냐는 것이었기 때문에 40년 성경을 팠고 지금까지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아부지가 "나는 크리스트교 신앙을 벌써 개 줘버렸다" 말했을 때 누구보다 네게 얼마나 미안하고 속절 없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성경을 놓지 못하는 것은 플라톤이나 칸트 철학처럼 깊은 성찰이 담긴 한 분야로 의미 부여를 하기 때문이다. 결혼-에예공의 출생-가정 교회-광야 생활-이혼-지금의 에스더 예주까지 추억의 편린들이 주마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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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자기 부정'이나 '성령의 통치'같은 핵심 패러다임은 칸트나 헤겔 철학에도 '절대정신'이나 '도덕법칙에' 녹아있다. 더 이상 이 땅은 껍데기고 부질 없는 곳이기에 천국을 소망하라는 플라톤(기독교식)식 '영원 불변'은 믿지 마시라. 세상은 지금까지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행복을 위하여 카르페디엠!
2024.4.28.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