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 향찰 구결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이전에, 우리 선인들은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우리 문자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래서 부득이 기존에 쓰고 있던 한자(漢字)를 이용하여 우리말을 적어 보려는 시도를 하였다.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우리말을 적으려는 것이 그것인데, 이에서 나온 것이 이두(吏讀), 향찰(鄕札), 구결(口訣)이다.
한자는 중국어를 기록하기 위한 글자다. 우리말과 중국어는 언어의 분류에서 볼 때 서로 거리가 멀다. 중국어는 낱말이 어떤 형태상의 변화가 없이 문장 속에 그대로 쓰이고, 다른 말과의 관계는 어순에 의해 표시된다. 그러나 우리말은 단어 또는 어간에 문법적인 기능을 가진 조사나 어미가 다양하게 결합함으로써 문장 속에서의 문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래서 우리말은 교착어라 하고 중국어는 고립어라 한다.
이러한 양자의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은 한자의 음 빌리기[音借 음차]와 뜻 빌리기[訓借 훈차]를 통하여 우리말을 적어 보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서 나온 이두, 향찰, 구결은 그 쓰임의 갈래와 범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럼 이들을 차례대로 살펴보자.
이두
선인들은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음소로 분절되는 국어를, 뜻글자인 한자를 이용하여 적었는데 여간 불편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그에 대한 고민의 길을 따라가 보자.
한자로써 우리말을 적기 위한 최초의 방법이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방식이다. 이것은 어순이 국어와 다른 한문 즉 중국어를 우리말의 어순에 따라 적던 표기법이다.
임신서기석이란, 1934년 5월 경북 월성군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 터 부근 언덕에서 발견된 돌을 가리키는데, 여기에 쓰인 글은 순수한 한문식 문장이 아니고 우리말식의 한문체로 되어 있다. 이 돌에 새겨진 내용은, 신라 때 두 사람이 유교 경전을 습득하고 실행할 것을 맹세한 글이다. 이 돌은 임신년의 맹세 기록을 담고 있다고 하여 통상 임신서기석이라 부른다. 그러면 그 내용의 일부를 잠깐 보자.
壬申年六月十六日(임신년육월십육일) 임신년(壬申年) 6월 16일에
二人幷誓記(이인병서기)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天前誓(천전서) 하늘 앞에 맹세한다.
今自三年以後(금자삼년이후)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忠道執持(충도집지) 충도(忠道)를 잡고 지녀
過失无誓(과실무서)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비록 글자는 한자를 썼지만, 그 문장은 한문의 어순이 아니라 우리말 순서로 적었다는 것이다. 다음 문장을 자세히 보자.
二人幷誓記(이인병서기)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天前誓(천전서) 하늘 앞에 맹세한다.
한문의 어순이 아니라 우리말의 순서대로 한자를 차례로 적었다. 이것을 오늘날 영어에 비유하면, ‘This is a book.’을 우리말 순으로 ‘This a book is.’와 같이 표기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씌어 있는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는 뜻인 ‘二人幷誓記(이인병서기)’는 한문 어순이라면 ‘二人幷記誓(이인병기서)’라야 한다. 또 하늘 앞에 맹세한다는 ‘天前誓(천전서)’는 ‘誓天前(서천전)’이어야 한다. 그 아래도 이와 같이 모두 한문 순서가 아닌 우리말 순서대로 한자를 배열했다. 이처럼 임신서기석의 표현은 어려운 한문식 표기를 피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말 순으로 한자를 배열하여 적은 것이다.
그런데 이 임신서기석보다 약간 발전한 방식의 표기법이 뒤이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신라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에 나타나는 표기법이다. 이 비는 신라 진평왕 13년(591) 경주 남산에 위치한 남산 신성을 쌓을 때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축성에 참가한 사람들은 남산에 모여 비를 세우고 그들의 이름, 축성 담당 구간 그리고 견고한 성곽을 쌓겠다는 맹세의 서약을 새겼다. 그럼 여기에 쓰인 내용의 일부를 잘 뜯어보기로 하자.
南山新城作節(남산신성작절) 남산신성을 지을 때
如法以作後三年崩破者(여법이작후삼년붕파자) 만약 법으로 지은 뒤 3년에 붕괴되면
罪敎事爲(죄교사위) 죄 주실 일로 삼아
聞敎令誓事之(문교령서사지) 들으시게 하여 맹세시킬 일
이니라.
여기에 쓰인 진하게 쓰인 글자 즉 절(節) 자는 ‘때’를 나타내고, 이(以) 자는 ‘-으로’를 나타내며, 자(者) 자는 어미 ‘-면’을 나타내며, 교(敎) 자는 ‘-게 하다’의 뜻을 각각 나타내고 있다. 그러니 임신서기석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표기법으로 쓰인 것이 남산신성비다.
이 글은 임신서기석과 마찬가지로 우리말 어순으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윗글 중 짙은 표시로 되어 있는 글자들은 본디의 한자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우리말의 뜻을 나타낸 글자다. 그중에는 조사나 어미 같은 문법소까지 나타내는 것도 있다. 임신서기석에는 우리말의 순서대로 글자를 배치했을 뿐인데, 남산신성비에서는 이에서 나아가 문법의 기능을 나타내는 조사나 어미까지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영어에 비유하면 ‘This is a book.’을 ‘This는 a의 book is다.’와 같이 나타낸 것이다. 곧 조사 ‘-는’이나 ‘-의’, ‘-다’와 같은 어미, ‘-게 하다’란 말과 같이 사역의 뜻을 나타내는 문법소들까지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러한 남산신성비의 표기법은 이전의 임신서기석의 방식보다는 한 단계 발전된 것이다. 임신서기석도 한자를 빌려 우리말 어순의 문장을 표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우리말의 조사나 어미 따위를 표기하는 발전된 문법 의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산신성비는 그러한 것들을 표기하였다. 이와 같이 임신서기석이나 남산신성비처럼 문장 배열은 우리말 어순으로 하되, 조사․어미․부사, 기타 특수한 용어를 한자의 음과 훈(訓 뜻)을 이용하여 우리말을 적으려는 방식을 이두라고 한다.
이러한 이두식 표기는 세간에 널리 쓰였고, 특히 관리들의 문서 활동에 주로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이두(吏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두(吏讀)를 이토(吏吐), 이문(吏文), 이찰(吏札) 등으로 부른 것은 관리(서리 胥吏)들이 주된 향유 계층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양반들은 한문으로 의사를 소통하고 문학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러나 하급관리나 서리들은 그 실력이 선비만 못하였기 때문에 이두를 사용해 공문서를 작성하고 의사소통도 하였다. 그래서 이두는 조선말까지 이어져 사용되었다.
향찰
이러한 남산신성비의 이두가 점차 발전하여 모든 품사 특히 조사나 어미에까지 이르는 표기 방식으로 확산되었다. 문장 일부를 이두로 표현하던 표기 방식을 확장하여, 전 문장을 우리말로 표기하고자 나온 것이 향찰이다. 이두는 실질형태소는 한문 그대로 표기하고 형식형태소인 조사와 어미 따위를 한자의 음이나 뜻을 따서 표기하였으나, 향찰은 전 문장을 우리말 순서대로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하여 적은 것이다. 그러니 향찰로 적은 글은 온전히 우리말(신라어, 고려어)이다. 향가는 향찰로 기록된 대표적인 문헌이다. 그중 모죽지랑가의 한 구절을 보자.
去隱春皆理未
이것은 우리말 ‘간 봄 그리매’를 표기한 것이다. 즉 ‘지나간 봄을 그리워하매’라는 뜻이다. 그러면 이 구절에서 어떻게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나타내었는지를 살펴본다.
去隱 : 去(갈 거) 자의 뜻 ‘가’
隱(은) 자의 끝소리 ‘ㄴ’
春 -‘봄 춘’자의 뜻 ‘봄’. 이를 합해서 ‘간 봄’
皆理未 : 皆(다 개) 자의 유사음 ‘그’
理(이치 리) 자의 음 ‘리’
未(아닐 미) 자의 옛 음 ‘매’. 이를 합해서 ‘그리매’
향가는 모두가 이러한 향찰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이 향찰은 고려 중엽을 지나면서 그 사용이 점차 소멸되었다. 향찰이 소멸된 까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한자를 사용하던 상류층들이 굳이 한자의 음훈을 빌려와서 우리말을 적지 않더라도, 표현하고자 하는 뜻을 한문으로만 적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데 기인한다. 향찰을 사용하던 사람들 또한 한문을 알고 있던 지식 계급이었다. 그들이 한문을 구사하는 힘이 높아져 굳이 향찰을 사용하여 표기할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다. 신라 향가는 거의 모든 어휘가 고유어로 되어 있지만, 고려 향가 즉 균여가 쓴 보현십원가는 태반이 한자어로 되어 있는 것만 봐도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둘째는 우리말이 가지는 특수성 때문이다. 중국어나 일본어는 모두 음절 단위를 그 기층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말은 낱낱의 음소로 나누어지는 분절음을 단위로 한다. 수많은 자음과 모음이 합해져 단어를 이룬다. 특히 국어는 받침이 발달한 언어이고 조사나 어미도 복잡하다. 이렇게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어서 한자로 우리말을 적는 데는 한계가 없을 수 없다. 한자의 이러한 제약성 때문에 향찰의 표기 방식은 오래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요인이 바로 한글을 창제하게 한 동기가 되었다.
이러한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고려 때 현종(1009~1031)과 그 신하들이 지은 향풍체가(鄕風體歌) 12수와 예종(1095~1105)이 지은 도이장가를 끝으로 향찰 표기는 사라졌다.
이와 같이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자기 나라말을 적은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일본, 베트남, 중국의 백족(白族) 등도 그렇게 했다. 우리나라는 그것을 향찰이라 했는데, 일본은 만엽가나(萬葉假名)라 불렀고, 베트남은 쯔놈자(字), 백족은 백문(白文) 또는 한자백독(漢字白讀)이라 하였다.
구결
구결(口訣)은 우리말로 ‘입겿’이라고도 하고 ‘토[吐]’라고도 한다. 구결은 이두와는 달리 한문 문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장의 중간이나 끝에 조사나 어미 즉 토를 삽입한 표기법이다. 이 토는 한자의 획을 따거나 기존에 있던 한자를 간략화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한문을 읽을 때 문맥에 맞게 한국어의 토(조사나 어미)를 달아 읽었는데 이를 현토(懸吐)라고 불렀다. 구결은 보통 이 토를 원문 옆에 작은 글씨로 메모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면 논어의 첫 구절을 예로 들어 현토해 보자.
學而時習之 不亦悅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는,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뜻이다. 이 문장을 이해하기 쉽게 토를 달아보자.
學而時習之面 不亦悅乎牙(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여기에 쓰인 토는 ‘면(面)’과 ‘아(牙)’다. ‘면’은 ‘배우고 그것을 익히면’에서 ‘익히면’의 ‘-면’에 이어진다. 그리고 ‘아(牙)’는 한문을 읽을 때 쓰는 의문형 어미다. 이것은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의 ‘-가’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한문을 쉽게 독파하는 데 쓰인 ‘면(面)’과 ‘아(牙)’ 자 따위를 구결이라 한다. 구결로 쓰인 몇 글자를 보이면 이러하다.
隱-는․은 伊-이 尼-니 爲稱-하며 是面-이면 是羅-이라
그런데 처음에는 이러한 온전한 한자체의 구결이 쓰이다가 점차 한자의 일부분을 떼어와 간략한 약체(略體)를 만들어 썼다. 약체는 한자의 초서체나 해서체를 채택해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원 한자의 앞부분을 따거나 뒷부분을 따 독립된 문자로 사용한다.
즉 ‘隱(은, 는)’, ‘伊(이)’ 따위와 같이 한자를 쓰기도 하였지만, 나중에는‘亻(伊의 한 부)’, ‘厂(厓의 한 부)’ 따위와 같이 한자의 일부를 떼어 쓰기도 하였다. 이때 특히 한글이 없던 때에 한자를 사용하여 토를 다는 것을 구결이라 했다
이러한 구결이 이두와 같은 점은 한자를 이용하여 우리말을 적었다는 것이며, 다른 점은 이두는 전문(全文)이 이두로 되었음에 대하여 구결은 한문 원문에 토만 적었다. 이두는 임신서기석의 방법에 문법형태소를 덧붙인 것이라 보면 된다. 그러므로 이두는 그것을 빼면 한문 문장이 되지 않지만, 구결은 그것을 지워도 한문의 완전한 문장이 된다.
그런데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구결은 한자를 변형시킨 새로운 문자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구결은 한문 문자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보조적인 구실을 했던 문자이지만, 문자 형태로 볼 때는 하나의 새로운 문자라는 의의를 갖는다. 다시 말하면 한자, 몽고문자, 설형문자 등 모든 문자와 대등한 하나의 문자로서의 자격을 갖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