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은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여운 이로 기억되고 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왕위에 올라 삼촌에게 왕위도 빼앗기고 목숨도 빼앗긴 그 짧은 삶은 오늘날까지도 두고두고 대중의 동정심을 자아내고 있다. 그런데 단종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단종보다 더 기구한 운명을 겪었을 한 여인이 있다.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敬惠公主)다. 역사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의 생도 한없이 불쌍하고 가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공주는 단종처럼 살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힘들 때도 있다. 공주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세종의 친위기구인 집현전에서 활약한 인물 중에 이승소(李承召)란 이가 있었다. 세종이 죽기 3년 전에 과거에 급제하고 집현전에 합류한 사람이다. 그가 남긴 시문집인 《삼탄선생집(三灘先生集)》에 〈경혜공주 묘지(墓誌)〉가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공주는 세종이 왕위에 있을 때인 1436년에 세자 이향(李珦, 훗날의 문종)과 권씨(훗날의 현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왕이 아닌 세자인 데다가 어머니가 세자의 첩이었기 때문에, 출생 당시의 경혜공주는 공주가 아니었다. 세자의 정실부인, 즉 세자빈이 낳은 딸에게는 정2품 군주(郡主), 세자의 첩이 낳은 딸에게는 정3품 현주(縣主)라는 작위를 수여했다. 그것도 출생 직후 곧바로 작위를 주는 게 아니라, 보통은 일곱 살 이후에 작위를 수여했다. 경혜공주는 ‘현주’였다.
광화문 광화문은 경혜공주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들어져 있는 경복궁의 남쪽 정문이다.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소재.
시작은 비록 첩의 딸로 했지만, 어린 공주의 운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두 살 때, 어머니가 세자빈으로 승격되면서, 동궁전 즉 세자의 처소인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에서 생활했다. 어린 소녀는 아버지가 왕이 되면 공주가 될 수 있다는 꿈을 안고 살았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동생(훗날의 단종)을 낳자마자 죽는 바람에 궁을 떠나게 됐지만, 이때도 그의 삶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이 무렵부터는 정2품 평창군주(平昌郡主)란 작위를 받고 그에 따른 특권과 대우를 향유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열네 살 때부터 경혜공주의 삶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열다섯 살이 되어도 세종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왕실에서는 그의 혼사를 서둘렀다. 만약 세종이 사망한다면 삼년상 동안은 혼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윤달을 제외하고 25개월 동안은 혼인할 수 없었다. 삼년상의 기간은 36개월이 아니라 윤달을 제외한 25개월이었다. 윤달이 있으면 25개월보다 길어졌다. 왕실의 식구들은 보통 10대 초반에 결혼했기 때문에, 삼년상을 치를 경우 경혜공주는 ‘노처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실에서 급히 얻은 배우자는 전 한성부윤 정충경(鄭忠敬)의 아들인 정종(鄭悰)이었다. 한성부윤은 오늘날로 치면 서울시장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공주와 정종은 세종 32년 1월 24일(1450. 2. 6.) 결혼했다. 이때 공주는 열다섯 살이었다.
그런데 살림집을 장만하기 전인 같은 해 2월 17일(1450. 3. 30.) 세종이 그만 눈을 감았다. 결혼 직후에 할아버지가 사망했으니, 살림집 준비는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살림집을 마련한 것은 세종의 소상(小祥, 사망 1주기 의식)이 끝난 뒤였다. 이때 경혜공주의 신분은 공주였다. 아버지가 왕이 된 뒤였기 때문이다. 공주의 불운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삼년상을 끝내고 한 달 뒤에 아버지 문종마저 쓰러진 것이다. 문종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삼년상은 끝내고 눈을 감게 되었으니 마음이 편했을지 모르지만, 공주의 입장에서는 할아버지의 삼년상에 이어 아버지의 삼년상까지 치러야 했으니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겪었을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그러나 그의 불운은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 훗날의 세조)이 쿠데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로써 공주의 동생 단종은 허수아비 임금으로 전락했다. 이때 공주는 열여덟 살이었다. 운명은 공주의 편이 아니었다. 2년 뒤인 스무 살 때, 공주는 숙부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고 동생이 상왕으로 ‘승격’되는 ‘기쁨’을 누리는 동시에, 남편인 정종이 강원도 영월로 귀양 가는 ‘슬픔’을 맛봐야 했다. 정종이 귀양을 간 것은, 그가 단종을 감싸고도는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 수양대군의 동생)과 친했기 때문이다. 정종의 유배지는 영월에서 경기도 양근(지금의 양평군 일부), 한성, 수원 및 김포로 변경됐다. 유배지가 수원으로 바뀐 뒤부터는 공주도 남편과 동행했다.
세조 집권 뒤에 발생한 사육신 사건(1456)은 운명이 공주의 편이 아님을 한층 더 입증했다. 단종의 복위를 꾀한 이 사건으로 공주의 동생 단종은 상왕에서 왕자급인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상태에서 영월로 유배를 가고, 남편 정종은 전라도 광주로 귀양지를 바꾸게 되었다. 단종은 이듬해에 죽고 정종은 단종이 죽은 때로부터 4년 뒤에 죽었다. 정종은 시신을 토막 내는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이렇게 부모도, 동생도, 남편도 모두 잃은 공주의 나이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사육신묘 사당 내부 사육신 사건 이후 경혜공주는 하루아침에 관노비로 전락했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소재.
하지만 그에게는 내놓아야 할 것이 더 있었다. 바로 공주 신분과 자유인 신분이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따르면, 그는 남편이 죽은 뒤 전라도 순천부의 노비가 되었다. 한 나라의 공주가 하루아침에 관노비로 전락한 것이다. 당시 그에게는 여섯 살짜리 아들 정미수(鄭眉壽)와 배 속의 딸이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아들의 손을 잡고 순천으로 떠났다. 순천부사 여자신(呂自新)이 진짜로 노동을 시키려 하자, 공주가 수령 집무실인 동헌에 들어가 의자에 앉으면서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내게 노비의 일을 시킨단 말이냐?”며 호통을 친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그를 점입가경의 파멸로 몰아세우던 운명의 신은, 벼랑 끝에서 갑작스레 상황을 종결지었다. 임신하고 애 딸린 공주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여론을 우려한 수양대군(당시는 임금)이 공주를 사면하고 한성으로 부른 것이다. 한성으로 돌아온 공주는 두 아이를 왕궁에 맡기고, 자신은 비구니가 되었다. 남편 잃은 후궁을 포함한 왕실 여인들이 여생을 보내는 비구니 사찰이 한성에 몇 곳 있었다. 그는 그곳 어딘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수양대군의 손자인 성종이 재위할 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 살이었다.
동생 단종도 기구한 삶을 살았지만, 경혜공주는 그에 못지않은, 어쩌면 보다 더 기구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왕실에 삼년상이 겹치는 상황 속에서 그의 결혼 생활은 꼬였고 동생 단종도 비운에 빠졌다. 그는 숙부가 동생과 남편을 차례로 죽이는 것을 목도했고, 한때 노비로 전락했다가 사면된 뒤에는 비구니로 일생을 마쳤다. 공주란 위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자리처럼 여겨진다. 실제로도 경혜공주는 한때 모든 것을 다 갖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왕실의 연이은 비극 속에서 그는 짧은 시간 내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한과 설움을 안은 채 세상과 이별했다. 그의 비극은 단종의 비극 뒤에 가려져 있지만, 어찌 보면 그의 비극이 훨씬 더 서글프고 참혹한 것인지도 모른다.
첫댓글 춘원 이광수의 단종애사를
읽는듯~
본인이 죽으면서 열살남짓한 사고무친 어린애를 왕으로앉힌 아버지(문종)가 문제^^
눈딱감고 아들대신 동생에게 보위를 넘겼
으면 모두가 평안했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