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과 무학대사~
회암사 지
무학대사 죽이기
경기도 양주 천보산 아래
회암사지가 세상에 그 위용을 드러내며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문헌상으로만 남아 있던 회암사지가 발굴되어 299칸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1328년 고려 충숙왕 15년에 지공화상이 창건한 회암사는
나옹선사와 무학대사를 거치면서 국찰로서 번창을 구가했으나
조선 중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최근에 목이 잘린 불상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으며 전횡을 일삼던 보우 스님의 행각에 분노한 유생들이
사찰을 공격하여 불태웠을 것이라는 추론만 무성할 뿐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조선은 유교를 이념으로 한 국가다.
건국 주역 역시 성리학 신봉자들이다.
건국 초기 국가 기틀의 뼈대를 마련한 정도전이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내놓았지만
불교개혁을 완수하지는 못했다.
불교를 혁파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태종 이방원은 불교 개혁에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자초는 천례에서 나와 살아서도 취할 것이 없고 죽어서도 이상한 자취가 없사온데 전하께서 그가 일찍이 왕사가 되었다 하여 예조로 하여금 부도, 안탑, 법호, 조파, 비명 등을 상정하게 하시니 전하의 뜻에 어긋나는 줄로 아뢰옵니다.”
사간원에서 상소하였다.
자초(自超)는 무학대사의 속명(俗名)이다.
자초는 출신이 천출이고 죽어서도 사리가 나오지 않았으니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땡초중이라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왕사가 되었다 하여
평범한 중에게 부도탑을 세워주고 법호를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얘기다.
또 불교 개혁을 일관되게 추진하는 임금의 정책과도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이것은 나의 뜻이 아니고 상왕의 명령을 받은 것이다.”
태종은 한 발을 뺐다.
공연한 변명은 아니다.
무학대사를 왕사로 모신 태조 이성계는 대사 생전에 부도탑을 세워주며 존경을 표했다.
무학대사 부도탑
“중 자초가 왕사의 이름을 분수없이 받았으므로 식자들이 비방할 뿐 아니라 같은 무리 역시 비웃습니다. 죽을 때는 미쳐서 신음하고 통곡하여 보통사람과 다를 것이 없었고 다비한 뒤에도 이상한 자취가 없었습니다.”
무학대사는 불심이 깊고 학덕과 인망이 높아 왕사가 된 것이 아니라
이성계와 사사로운 친분관계로 왕사를 받았으니 지식인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동료 승려들마저 비웃고 있다는 것이다.
“본원에서 입탑, 시호, 탑명, 조파, 비명 등을 파하자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사온데 지금 그의 문도들이 임의로 해골을 안치하고 방자하게 굴어 밝은 세상을 더럽히니 그 죄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을 내려 직첩을 거두고 죄상을 국문하여 율에 따라 논죄하고 소재관으로 하여금 그 탑묘를 헐어버리고 그 해골을 흩어버리게 하소서.”
무학대사의 영혼에 비수를 꽂았다.
불교 개혁이 종착점에 다다른 것이다.
승려이면서 왕사였던 무학대사 해체 작업의 신호탄이다.
백성의 우상이었던 무학대사를 해체하여 저잣거리로 끌어내겠다는 것이다.
백성은 단순하다.
백성은 미래지향적인 청사진보다도 영웅의 까발림에 환호한다.
한 마리 학처럼 고고했던 존경의 대상이 해체되어 속인과 같다는 것이 확인되었을 때
자신의 죄업에 대한 면죄부를 받는 듯한 착각에 빠지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백성의 가슴에 새겨진 우상을 해체하는 것은 통치술의 하나다.
자초는 1327년 고려 충숙왕 14년에 경상도 합천 상기에서 농부 박인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의 제자가 되었으며 혜명국사에게 불법을 배웠다.
진주 길상사와 묘향산 금강굴에 머물며 능엄경을 파고들던 그는
더 깊은 불도를 배우기 위하여 원나라로 건너갔다.
여기에서 스승 나옹호상을 만났다.
자초에 관한 설화는 《순오지》 《대동기문》 《지봉유설》 《연려실기술》 등에
수록되어 있지만 확인할 수 없거나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다.
무학대사 초상화
경상도 합천 상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분명해보이지만 그의 탄생지는 여러 곳이 등장한다
우선 간월도 얘기를 파헤쳐 보자자초의 어머니가 처녀시절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큼직한 오이 한 개가 떠내려 왔다처녀는 오이가 하도 먹음직해서 건져 먹었는데
그만 아이를 잉태하여 낳았다.
그 부모는 처녀인 딸이 애를 낳자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내다 버렸는데
학이 날개로 보호하여 돌보았다
그래서 호가 무학이라는 것이다
학돌재 얘기는 더 구체적이다.
자초가 어머니 엄씨의 태중에 있을 때
부친이 나라의 빚을 많이 졌는데 빚을 갚을 길이 없어 피신했다.
이에 사령이 남편 대신 부인을 호송하여 서산 감영으로 가던 중
갑자기 산기를 느껴 길에서 몸을 풀었다
핏덩이를 옷가지로 덮어두고 부인을 끌고 간 사령이 관아에 당도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현감이 “며
사령을 꾸짖어 아기 있는 곳으로 보냈다
.
뒤에 사람들이 무학 스님이 태어난 곳을 학돌재라고 불렀다
학돌재는 충남 서산 인지면 모월리에 있다
법통을 전하는 표시로 불자(拂子)를 주었다.
이때부터 나옹과 자초는 사승(師僧)관계가 성립되었다
그 뒤 나옹이 머물던 신광사를 찾아갔으나
나옹을 따르던 제자들과 마찰을 일으켜 고달산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혼자 살았다.
회암사를 크게 중창한 나옹이 입적하자 자초는 명산을 주유하는 선승이 되어
전국을 만행하다 설봉산 토굴에서 면벽수행 중 이성계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하여 임금에 오르자 그는 왕사가 되었다
왕자의 난을 거치며 가슴앓이를 하고 있던 태조의 말벗이 되어주던 자초는
회암사에서 나와 금강산 진불암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내다
세수 78세를 일기로 금강암에서 입적했다.
법랍(62세였다
저서로는 《인공음印空吟 한 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으며
《무학대사어록 한 권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무학비결이라는 필사본이 있으나 자초의 유명세를 빙자한 위서라는 설이 있다
현재 전하는 저서로는 순천 송광사에 소장되어 있는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가 있다.
첫댓글 이 두 사람의 野談이 이것 외에도 있지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