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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2권, 1년(1801 신유 / 청 가경(嘉慶) 6년) 2월 26일(임신)
사학 죄인들을 추국하다
사학 죄인(邪學罪人)들을 추국하여 작처(酌處)하였다.
죄인 이가환(李家煥)이 공초하기를,
“일찍이 생질(甥姪) 이승훈(李承薰)의 집에서 사학의 서책을 빌려 왔는데, 거기에 신주(神主)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말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으므로 칼로 긁어서 지워 버리고, 다시는 가져다 보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국정(鞠庭)에서 반핵(盤覈)하는 즈음에, ‘흉얼(凶孼)과 체결하여 성세(聲勢)로서 서로 의지한 일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곧 사학의 무리와 서로 체결한 것을 말한 것인데, 갑자기 공초하기를,
“홍낙임(洪樂任)의 하늘에 사무친 죄악을 일찍이 통분스럽게 여겨 왔는데, 어찌 체결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며, ‘낙임(樂任)’ 두 자를 문목(問目) 외에서 털어 놓았고,
또 말하기를,
“남간(南間)에 갇혀 있었을 때 문밖에서 전호(傳呼)하는 소리를 듣고 홍낙임이 이미 행형(行刑)되었음을 알았습니다.”
하고, 끝에 가서 오석충(吳錫忠)을 끌어대어 말하기를,
“일찍이 홍가의 집에 출입했다는 말이 있었으나 그는 진실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오석충과 면질시키기에 이르니, 오석충이 말하기를,
“과연 일찍이 홍낙임의 아우와 서로 잘 아는 사이이다.”
하였다.
그가 사학에 물든 자취를 한결같이 곧바로 발명(發明)하다가, 여러 번 형신을 받은 후에야 마침내 사학의 괴수로서 지목된 것을 자백한 것으로 지만(遲晩)을 받았는데 옥중(獄中)에서 물고(物故)되었다.
죄인 권철신(權哲身)은 곧 권일신(權日身)의 형인데, 그 아우와 함께 사서(邪書)를 흠숭(欽崇)하여 삼혼 사행(三魂四行)에 대한 말을 매우 신봉하였다.
권일신이 벌을 받아 죽은 후에도 사학에 미혹되어 변개(變改)할 줄을 몰랐는데, 양근(楊根) 한 지경의 어리석은 백성들을 미혹시켜 그릇되게 만드니, 그 무리가 진실로 번다하였다. 지만(遲晩)을 받았는데 옥중에서 물고(物故)되었다.
죄인 이승훈(李承薰)은 서장관(書狀官)인 그 아비 이동욱(李東郁)을 따라 중국에 간 다음 북경(北京)의 천주당(天主堂)에 가서 구경하다가, 서양인(西洋人)과 교유를 맺고 그가 증여한 서책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서 사학(邪學)을 널리 배포하여 전염시켰는데, 조정에서 금령(禁令)을 내린 후에 이르러서는 분서(焚書)의 시와 이단을 배척하는 글을 지어 겉으로는 혁면(革面)을 보였으나, 속으로는 실제로 고혹되어 항상 서양인과 서찰을 통하니, 인아(姻婭)와 족당(族黨)이 모두 그 해독을 받았다.
문서가 적발되고 죄악이 죄다 드러났는데 요서(妖書)와 요언(妖言)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으로서 지만을 받아 정법(正法)하였다.
죄인 정약종(丁若鍾)은 한결같이 곧바로 사학을 정도(正道)라고 하며 천주(天主)의 화상(畵像)을 만들어 놓고 7일마다 첨례(瞻禮)하며 이르기를, ‘천주는 대군(大君)이고 대부(大父)이다. 하늘을 섬길 줄 모르면 살아 있어도 죽는 것만 못하다.’ 하고 선조(先祖)에게 제사지내고 분묘(墳墓)에 배알(拜謁)하는 것은 모두 죄과(罪過)라고 하였다.
심지어 그 아비를 원수처럼 여기고 군상(君上)을 향해서도 망측한 말을 지어내었으니, 윤리를 멸절시키고 상도(常道)를 패몰시킴이 이보다 심할 수 없었으므로, 범상 부도(犯上不道)로서 지만을 받아 정법하였다.
죄인 최필공(崔必恭)은 사학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후에 곧 전염되었는데, 추조(秋曹)에서 추핵(推覈)하는 가운데 들어가기에 이르러서는 살 길을 구하는 계책을 내어 다시는 학습(學習)하지 않겠다고 공초를 바쳤으므로, 조정의 사람을 올바른 사람으로 만든다는 은택을 받아 심약(審藥)으로 차송(差送)되어, 아내가 없었는데 아내를 얻었고 집이 없었는데 집을 마련하였으나 오히려 개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추국하는 날에 이르러서는 공초하기를, ‘이제 죽기로 결심하였다. 천주학은 식견이 있고 지각이 있는 자는 마땅히 이를 해야 하니, 나는 결단코 개혁(改革)할 마음이 없다.’ 하였다. 그래서 요서(妖書)와 요언(妖言)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으로서 지만을 받아 정법하였다.
죄인 이존창(李存昌)은 본래 호서(湖西)의 관교(官校)로서 사학에 오염되었는데, 최필공과 동시에 체포되었다.
영옥(營獄)에 들어가기에 이르러, ‘뉘우쳐 깨달았다.’고 공초를 바치고 석방되었는데 한결같이 곧바로 포도수(逋逃藪)를 만들어 전혀 오염된 데 대해 개철(改轍)하지 않은 채 무리를 불러 모아 반결(盤結)하고 호서의 거괴(巨魁)가 되었다.
충청도에 압송(押送)하여 정법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였다.
죄인 홍교만(洪敎萬)은 사학의 서책과 야소(耶蘇)의 도상(圖像) 및 첨례 장구(瞻禮帳具) 등을 모두 그 집에 모아 놓고 망령되게 경전(經傳)을 인용하여 겉만 그럴 듯하게 꾸며 서학(西學)은 요사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형륙(刑戮)에 나아가서도 후회하는 빛이 없으므로 요서와 요언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으로 지만을 받아 정법하였다.
죄인 홍낙민(洪樂敏)은 벼슬이 법종(法從)에 이르렀는데도 사교(邪敎)에 물들었다. 처음에는 사학을 배척하는 글을 올렸으나, 마침내는 옛 소굴을 연모(戀慕)하는 마음이 있어서 깊이 현혹시키고 교유(敎誘)하여 호남 백성들을 그릇되게 하였다. 그리고 야소(耶蘇)는 감히 꾸짖어 욕할 수 없다고 하고, 오늘날 형벌을 받는 것도 일찍이 전에 배교(背敎)했던 죄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미혹되어 뉘우칠 줄을 모르고 한 번 죽는 것을 달갑게 여겼으므로, 요서과 요언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으로써 지만을 받아 정법하였다.
죄인 최창현(崔昌顯)은 본래 위항(委巷)의 천인으로서 사학의 서책에 고혹되어 정약종·권철신 등을 대부(代父)로 존숭(尊崇)하고 이승훈·강노파를 교주(敎主)로 일컬었습니다. 마귀의 화상을 그려서 몰래 서로 선사하고 장구(帳具)를 꾸며서 암지(暗地)에서 열심히 일하였으며, 이단의 무리들을 숨겨 주고 간계(奸計)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형륙(刑戮)에 나아가는 것을 달갑게 여겨 결안(結案)을 써서 바쳤으므로, 요서와 요언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고혹시킨 것으로서 지만을 받아 정법하였다.
죄인 정약전(丁若銓)과 정약용(丁若鏞)은 바로 정약종의 형과 아우인데, 당초에 사서(邪書)가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을 때에는 일찍이 보고서 찬미하였으나 중간에 스스로 뉘우치고 다시는 오염되지 않겠다는 뜻을 소장에 질언(質言)하였었다.
국청에 나아가기에 이르러서는 차마 형을 증인(證引)하지 못하였는데, 정약종의 문서 가운데 그 무리가 서로 왕복하는 즈음에 정약용에게 알리지 말라고 경계한 것과 평일(平日) 그 집안 사이에 금계(禁戒)한 것을 증험할 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단지 최초로 물든 것으로 인해 세상에서 지목한 바 되었으므로, 정약전·정약용은 차율(次律)로 감사(減死)하여 정약전은 강진(康津)의 신지도(薪智島)에, 정약용은 장기현(長鬐縣)에 정배하였다.
죄인 강녀 완숙(姜女完淑)은 곧 덕산(德山)의 사인(士人) 홍지영(洪志榮)의 처인데, 요서를 학습하여 사학의 여인 가운데 가장 간특한 자였으므로, 추조(秋曹)에 출부(出付)하여 구핵한 후에 작처(酌處)하게 하였다.
죄인 황사영(黃嗣永)은 여러 번 이름이 국초에 나왔으나, 기미를 알고 도피하였으므로, 포청으로 하여금 염탐해서 체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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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3권, 1년(1801 신유 / 청 가경(嘉慶) 6년) 9월 11일(을유)
추국을 설치하여 사학 죄인을 처리한 일에 대해 아뢰다
시임·원임 대신이 연명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추조(秋曹 형조)의 옥에 갇혀 있는 죄인이 이미 모두 자백을 하였는데, 정절(情節)이 대단히 흉패(凶悖)하니, 오래도록 옥사(獄事)를 지체되게 할 수 없습니다. 국청에 붙잡아 와서 격식을 갖추어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허락하였다.
이어서 추국을 설치하여 사학(邪學)의 죄인을 작처(酌處)하였는데, 죄인 유항검(柳恒儉)은 사학에 미혹되어 마음을 합쳐 강습하여 주문모(周文謨)를 받들어 신부(神父)로 삼고서 조상의 신주(神主)를 땅에 묻으며 제사를 폐지하는 등 그의 죄악이 이미 용서할 수 없는 데에 도달하였다.
심지어 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권일신(權日身)·홍낙민(洪樂敏)의 무리와 더불어 주문모와 결탁하고는 이국(異國)과 몰래 교통할 때에 이가환은 은(銀) 50냥(兩)을 내었고, 그는 그의 당질(堂姪) 유중태(柳重泰)와 같이 돈 4백 냥을 변통해 내어서 북경(北京)의 천주당(天主堂)에 김유일(金有一)을 행장(行裝)을 꾸려 보내어 큰 선박(船舶)을 나오도록 청하여 우리 나라를 위협해서 한판 판결을 내려고 한 계책이 대단히 흉패하여 만번 주륙(誅戮)하여도 오히려 가볍기에 대역 부도(大逆不道)의 죄로써 결안(結案)하였다.
죄인 유관검(柳觀儉)은 유항검의 아우로서 양인(洋人)을 맞아 오는 일에 난만하게 주무하였으며, 신주를 땅에 묻고 인륜(人倫)을 깨뜨려 없앤 죄와 큰 선박을 나오도록 청한 계책은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가 어렵기로 모역(謀逆)에 동참한 죄로써 결안하였다.
죄인 윤지헌(尹持憲)은 윤지충(尹持忠)의 아우로서 제 형이 복법(伏法)된 뒤에도 끝내 잘못을 뉘우쳐 고치지는 않고 또 유항검 형제와 더불어 부동해 빠져 들어가 사학(邪學)을 고취하여 인도하고 주문모를 높이 받들었으며, 몰래 이역(異域)과 통하여 양인(洋人)에게 서찰을 주어 전후 세 차례나 큰 선박을 나오도록 청한 음모와 흉계에 난만하게 참섭하였으니, 모역에 동참한 죄로써 결안하였다.
죄인 이우집(李宇集)은 유항검의 절친한 인척(姻戚)으로 유관검의 권유를 받아 사학을 전수(傳受)하고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으며, 유항검 무리와 같이 몰래 이류(異類)와 통하여 큰 선박을 나오도록 청하는 일에 전연 놀라서 분개하고 달려가 고하려는 마음은 없이, 수컷이 부르면 암컷이 화답하는 것같이 한데 난만하게 수작하였으니, 실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죄로써 결안하였다.
죄인 김유산(金有山)은 몰래 시골의 천인으로 사학을 몹시 믿어 정약종(丁若鍾)·유항검의 집에 왕래하였고 이가환·이존창(李存昌)의 사이에 통섭(通涉)하였으며, 감영(監營)의 옥에 갇힌 사교(邪敎)의 괴수를 찾아가 옷섶에 요망한 서찰을 숨기고는 감히 역졸(驛卒)의 명색(名色)으로 양인이 거처하는 천주당에 몰래 들어가서 서찰을 전달하고 회답을 구하여 난만하게 교통하였기에 실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죄로써 결안하였는데, 아울러 전라 감영(全羅監營)으로 압송(押送)하여 정법(正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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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3권, 1년(1801 신유 / 청 가경(嘉慶) 6년) 11월 5일(무인)
사학 죄인을 추국하여 작처하다
사학 죄인(邪學罪人)을 추국하여 작처(酌處)하였다.
죄인 황사영(黃嗣永)은 본래 정약종(丁若鍾)의 질서(姪婿)로 사술(邪術)에 미혹되어 빠져 들어가 주문모(周文謨)가 나온 뒤에 스승으로 섬기고 아비라고 불렀으며, 영세(領洗)를 받고 명호(名號)를 받았었다.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리자 기미를 알고 망명(亡命)하여 산협(山峽)에 숨어서 불궤(不軌)를 도모하였으며, 황심(黃沁)·옥천희(玉千禧)와 함께 난만하게 화응(和應)하여 백서(帛書)를 써서 내어 장차 양인(洋人)의 천주당(天主堂)에 전하려 하였는데, 백서 가운데에 말한 것은 글자마다 흉악한 뱃심이었고 글귀마다 역적의 심장이었으므로, 위를 향하여 부도(不道)한 말을 한 것과 국가와 더불어 원수가 되려는 계획을 한 것 아님이 없었기에 대역 부도(大逆不道)한 죄로써 결안(結案)하였다.
죄인 옥천희는 본래 선천(宣川) 사람으로 해마다 절사(節使)를 따라 왕래하면서 황사영·황심·현계흠(玄啓欽)의 무리와 체결하고 여러번 서찰(書札)을 전하여 천주당에서 우두머리로 있는 탕아립산(湯亞立山)이란 자로부터 세례(洗禮)와 명호를 받았으며, 주문모를 강완숙(姜完淑)의 집에서 찾아보고 토서(討書)를 양인에게 전달하여 그의 답장을 받아 장차 돌아와서 주문모에게 전하려 하다가 만부(灣府 의주)에 도착하여 사당(邪黨)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도로 피중(彼中)에 들어가 국내의 사정을 전부 전하였다.
황사영의 무리들이 해박(海舶)을 오도록 청하여 사술(邪術)을 널리 펴려 한 계획을 난만하게 참견하여 들었기에 지정 불고(知情不告) 죄로써 결안하였다.
죄인 현계흠은 황사영·최창현(崔昌顯)·강완숙 등 여러 사람에게 서로 주무하고 관통(關通)하여 주문모가 나온 뒤에 세례를 받고 명호를 받았다.
당초에 사당이 옥(獄)에 갇히게 되자 기미를 알고서 도피하였는데, 스스로 면하기가 어려울 것을 알고는 돌아서 바로 자수하기를 다시는 더러운 데에 물들지 않겠다는 뜻으로써 공초(供招)를 바쳐 방면(放免)받게 되었었다.
황사영이 체포되기에 미쳐 정절(情節)이 더 드러났는데, 사당이 서양 선박을 오도록 청할 때에 함께 난만하게 참섭하여 밤낮으로 그들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이국(異國)의 선박이 동래(東萊)에 표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세히 가 보고서 십자(十字)를 그리어 보였으니, 이는 사교(邪敎)들 사이에 서로 탐문하는 방법으로 이로써 그 진위(眞僞)를 분변하였다.
주문모의 문적(文蹟)과 황사영의 흉서(凶書)가 나타나기에 이르러 모두 동래에서 탐문한 선박으로써 동일한 화본(話本)을 만들어 낭자하게 터무니없이 속이고 바꾸어 가면서 서로 빚어내었기에 지정 불고 죄로써 결안하여 아울러 정법(正法)하였다.
거제부(巨濟府)에 정배(定配)한 죄인 이치훈(李致薰), 신지도(薪智島)에 정배한 죄인 정약전(丁若銓), 장기현(長鬐縣)에 정배한 죄인 정약용(丁若鏞), 능주목(綾州牧)에 정배한 이학규(李學逵), 운봉현(雲峯縣)에 정배한 죄인 신여권(申與權)·죄인 이관기(李寬基)에게는 모두 국초할 것을 발론하여 아울러 다시 붙잡아다 형신(刑訊)하였으나 별로 정범(情犯)을 더 구핵(究覈)할 것이 없었으므로, 모두 작처(酌處)하여 이치훈은 제주목(濟州牧)에, 정약전은 나주목(羅州牧)의 흑산도(黑山島)에, 정약용은 강진현(康津縣)에, 이학규는 김해부(金海府)에, 신여권은 고성현(固城縣)에, 이관기는 장흥부(長興府)에 찬배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추국을 철파하라 명하였다.
삼사(三司)에서 번갈아 가며 상소하여 작처 찬배하라는 명을 정침하라고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신유박해[辛酉迫害 ]
1801년(순조 1) 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 ·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때문에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이 박해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출처] 신유박해 | 두산백과
정약용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籜翁)·태수(苔叟)·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한.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이다.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鬐)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출처] 정약용 | 두산백과
정약전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자는 천전(天全), 호 일성루(一星樓)·매심재(每心齋)·손암(巽庵)·연경재(硏經齋)이다.
평산김씨와 혼인하였고 아들 정학초를 두었다.
1758년 진주목사를 지냈던 정재원(載遠)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정약용(丁若鏞)의 둘째 형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의 학맥을 이어받았으며, 서학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성호학파를 이끌었던 권철신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그에서 서학뿐만아니라 실학사상과 천주교의 교리를 접하게 되었다.
17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790년(정조 14년) 왕자의 탄생을 기념하는 증광별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고 부정자(副正字)·초계문신(抄啓文臣)에 이어 1797년 병조좌랑(兵曹左郞)이 되었다.
한국 천주교 태동기를 이끌었던 이벽, 이승훈을 통해 서양의 역수학(曆數學)에 관심을 가졌고,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이벽은 정약전의 장형 장약현의 처남이었고 이승훈은 그에게 매형이었다.
정치적으로 남인에 속했지만 두드러진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 정약용이 노론과 정치적 대척점에 서있는 입장이 되자 노론 벽파의 공격을 받았다.
남인을 등용하여 탕평책을 펼치던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노론 벽파의 공격이 본격화되었으며 신유사옥(1801, 순조 1)이 일어나 다른 천주교 신도들과 함께 화를 입게되었다.
동생 정약용과 함께 천주교를 신봉하였다는 제목으로 체포되어 국문을 받았고 전남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조카사위 황사영(黃嗣永)이 천주교를 신봉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극형을 받게되자 그와 관련하여 혐의가 의심되어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으며 1800년 11월 5일(순조 1년)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었다.
정약전은 흑산도 사리에서 복성재(復性齋)라는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강진에 유배중인 약용과 달리 학문연구에 전념하지는 않았다.
실학사상에 기반한 저술을 하였는데 《자산어보(玆山魚譜)》가 그를 대표하는 책이다.
결국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1816년 6월 6일 유배생활 16년만에 생을 마쳤다.
흑산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 조정의 소나무 정책을 비판한《송정사의(松政私議)》를 저술했다. 또한 흑산도 해중에 서식하는 다양한 어종과 해초의 이름을 밝히고 이들의 생태와 습성을 연구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하였다.
그외 그의 저술로《논어난(論語難)》, 《역간(易柬)》등이 있다.
[출처] 정약전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