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741
■ 3부 일통 천하 (64)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8장 상앙(商鞅)의 말로 (4)
그날로 상앙(商鞅)은 함양(咸陽)을 떠났다. 하지만 상군 작위와 재산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상(商) 땅으로 향하는 그의 행렬은 거창했다.
호화찬란한 수레에 의장대를 앞뒤로 배치한 것이 마치 한나라의 왕이 행차하는 것과 같았다.
이것이 공자 건(虔)과 공손가(公孫賈)에게 또 하나의 좋은 빌미거리가 되었다.
두 사람은 몰래 진혜문왕에게 아뢰었다.
"상앙(商鞅)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마치 왕이라도 된 듯 의장대를 배치하며 떠났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상어(商於) 땅으로 내려가 반란을 일으킬 작정이라고 합니다."
진혜문왕(秦惠文王)은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명을 내렸다.
- 공손가(公孫賈)는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뒤쫓아가 상앙의 목을 끊어오너라.
상앙(商鞅)이 함양성을 떠나 1백여 리쯤 갔을 때였다.
문득 뒤에서 큰 함성이 들려왔다.
상앙이 뒤를 돌아보며 수행원에게 물었다.
"저것이 무슨 소리냐?"
수행원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 알아본 후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큰일났습니다. 왕께서 상군의 목을 끊어 오라고 군대를 보냈다고 합니다."
상앙(商鞅)은 그제서야 기겁초풍했다.
'잡히면 나는 죽는다.'
그는 재빨리 호화로운 옷과 관을 벗어던지고 일반 백성으로 가장한 후 홀로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따로이 먼저 상(商) 땅으로 가 군사를 모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상앙(商鞅)은 연신 채찍을 휘둘러 수레를 몰아 밤낮없이 달렸다.
겨우 추격에서 벗어나 함곡관(涵谷關)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다.
해가 저물었으나 몸이 지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시골 여점(旅店)으로 들어갔다.
여점 주인이 상앙에게 물었다.
"조신첩(照身帖)을 보여주시오."
조신첩이란 오늘날의 여권이나 신분증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상앙에게 조신첩이 있을 리 없었다. 상앙(商鞅)은 얼른 거짓말을 하며 사정했다.
"떠나올 때 깜빡 잊고 가져오질 않았소. 어떻게 그냥 하룻밤만 묵어갈 수 없겠소?"
그러자 여점 주인이 수상쩍은 눈빛으로 말했다.
"당신은 상군(商君)의 법도 모르시오? 조신첩(照身帖)이 없는 자를 재우면 재워준 사람까지 형벌을 받게 되어 있소. 어서 이 곳을 떠나시오. 공연히 당신 때문에 나까지 죽게 만들지 말고!"
아무리 사정해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상앙(商鞅)은 여점에서 쫓겨나 밤이슬을 맞으며 자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했다.
"어허, 내가 만든 법에 내가 걸려들 줄이야!"
상앙(商鞅)은 도저히 진(秦)나라에 머물 수 없음을 알고 위(魏)나라로 달아났다.
그러나 위나라 사람들은 상앙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 공자 앙(仰)을 유인하여 우리의 서하 땅을 빼앗아간 놈!
이런 분위기였다.
상앙(商鞅)은 대량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걸인이나 다름없는 행색으로 다시 상읍으로 향했다.
갖은 고난 끝에 이윽고 상읍(商邑)에 당도했다.
그는 진혜문왕에게 보복하려고 자신의 옛 가신들을 비밀리에 모았다.
그러나 그의 모병이 언제까지 비밀에 부쳐질 수는 없었다.
군사를 다 모집하기도 전에 상읍에 공손가(公孫賈)가 군대를 거느리고 들이닥쳤다.
상앙(商鞅)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사로잡혀 함양으로 압송당했다.
진혜문왕(秦惠文王)은 상앙의 죄목을 일일이 열거하여 꾸짖은 후 명했다.
- 상앙을 끌어내 오우분시형에 처하라!
오우분시(五牛分屍)란 사지와 머리를 소가 끄는 수레에 매달아 다섯 조각으로 찢어죽이는 형벌을 말한다. 혹형 중의 혹형으로 거열형(車裂刑) 이라고도 한다.
신호가 떨어지자 다섯 마리 소가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사지와 머리에 밧줄이 매인 상앙(商鞅)은 팔다리와 머리가 제각기 찢겨져 나갔다.
"아악!"
상앙의 마지막 비명이었다.
상앙(商鞅)은 죽은 후에도 온전치 못했다.
이를 구경하던 진(秦)나라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며 달려들어 상앙의 시체를 후려치고 질근질근 씹어대었다.
얼마나 원한이 깊었으면 오우분시(五牛分屍) 당한 상앙(商鞅)의 시체를 씹었을까?
이 소식을 듣고 진혜문왕(秦惠文王)이 말했다.
- 모반하지 말라. 상앙처럼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진(秦)나라가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게 된 것은 상앙의 개혁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가장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이 만든 법에 의해 자신이 처형당한 것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에 대해 역사의 아버지 사마천(司馬遷)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상앙(商鞅)은 천성이 각박한 사람이었다.
애당초 그가 진효공에게 제왕(帝王)의 도를 유세한 것은 허위의 설(說)을 늘어놓을 것일뿐, 그의 진심은 아니었다.
군주의 총애를 받는 태감에게 주선을 부탁하고, 등용된 후에는 공자 건(虔)을 처벌했으며, 위나라 공자 앙(仰)을 속여 서하 땅을 빼앗고, 조량(趙良)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것은 상앙의 이러한 천성을 충분히 증명해준다.
상앙(商鞅)이 진나라에서 악명을 얻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후대에 생겨난 불교 용어로 말하면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명쾌하게 대답하고 있다.
상앙(商鞅)의 개혁 정책은 오기(吳起)가 초(楚)나라에서 행한 개혁 정치를 연상시킨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상앙은 형명학이라는 학문을 토대로 치밀하게 개혁을 시도한 반면, 오기는 즉흥적이라는 인상이 짙다.
두 사람 모두 개혁 당시의 왕이 죽자마자 보수 세력들에 의해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진보(進步)와 보수(保守)는 영원히 합쳐질 수 없는 평행선인가?
또 한가지, 오기(吳起)도 상앙(商鞅)도 소국 중의 소국인 위(衛)나라 사람인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