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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여행이 인류 공동의 기억으로 승화되는 과정
- 리쾨르, 레비나스, 줄리앙의 철학을 방법론으로
권대근
문학박사, 중)하북미술대 객좌교수
"기억은 우리에게 과거를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책임을 일깨운다."
- Paul Ricoeur
Ⅰ. 로그인
문학은 지나간 사건을 기록하는 예술이 아니라, 현재를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기억의 예술이다. 시간은 과거를 멀어지게 하지만 문학은 오히려 그 거리를 책임의 깊이로 바꾸어 놓는다. 폴 리쾨르가 『기억, 역사, 망각』에서 말했듯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망각에 저항하는 인간의 실천적 책무이며, 과거를 현재의 책임으로 되살리는 행위이다. 기억은 지나간 시간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인간의 과제를 붙드는 일이다. 전남일보 신춘문예 출신 작가, 제1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가 송명화의 <스트로베리 필즈의 데이지>는 바로 이러한 기억의 책임의식을 꽃 한 송이에 담아낸 수필이다. 존 레논의 추모비에 내려놓은 데이지 세 송이는 개인적 감상이 아니라 인류가 아직 끝내지 못한 평화의 문장을 이어 쓰려는 작은 서명이다.
지구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유지해 갈 수 있는지 진단한 작가 송명화의 수필들은 문학성과 철학성을 겸비해서 지나간 사실을 보존하는 데만 머물지 않는다. 기억을 현재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고, 타자에 대한 작가적 책임을 환기하며, 그 과정을 통해 존재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데 문학적 가치가 있다. 기억이 현재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회상에 불과하고, 타자를 향한 책임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감상에 머무를 뿐이다. 수필은 바로 기억을 존재의 사건으로 전환하는 장르이며, 삶을 다시 해석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생성하는 문학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작품은 리쾨르의 기억철학 위에 레비나스의 타자의식과 줄리앙의 탈합치가 중층적으로 포개지면서 기억의 미학을 넘어 존재의 재구성을 지향하는 현대수필의 한 성취로 읽힌다.
Ⅱ. 클릭
1. 시대를 앞질러 예지하는 ‘저운’의 인간세계
송명화의 수필은 문학을 삶의 장식이 아니라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수필은 하나의 모티프를 끝까지 밀고 나가 새로운 의미망을 구축하는 힘이 뛰어나며, 이러한 구성 능력은 그의 작품세계를 대체하기 어려운 독창성으로 완성한다. 그는 수필가이자 문학평론가, 문학언어치료학박사로서 창작과 비평, 치유의 영역을 함께 걸어왔다. 문학도시 신인상 당선,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을 시작으로 꾸준히 작품세계를 확장해 왔으며, 『꽃은 소리내어 웃지 않는다』, 『순장소녀』, 『사랑학개론』, 『에세, 햇살 위를 걷다』, 『사유한다는 것은』 등의 수필집은 인간 내면의 상처와 사랑, 기억과 사유를 섬세하게 길어 올린 결과물이다. 그의 문학은 화려한 수사를 앞세우기보다 삶의 깊이를 응시하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성찰의 정신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계간 에세이문예 초대편집주간을 맡아 20여 년 간 문학발전에 헌신해오고 있는 것으로 그의 인간세계는 어떠한가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그의 철학과 신념은 문학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 가치로 확장된다는 걸 평자는 그와 가까이 있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 창작이론서 『본격수필 창작이론과 적용』은 수필을 단순한 체험담이 아니라 사유와 미학이 결합된 문학 장르로 정립하려는 학문적 노력의 결실로, 권대근의 본격수필이론을 창작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한 수필창작의 길라잡이다. 또한 오랜 기간 계간 『에세이문예』 주간을 맡아 후배 문인을 발굴하고 문학 생태계를 가꾸는 데 헌신했으며, 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 회장과 부산교대 평생교육원 문예창작반 지도교수로 활동하면서 문학의 사회적 책임과 교육적 역할을 실천해 왔다. 개인의 성취를 넘어 문학 공동체를 키우는 일이 곧 자신의 소명이라는 믿음이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다.
이러한 삶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을 비판적으로 작품에 담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저항의지를 암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 전반적으로 그의 수필은 이질적인 타자들의 억압이 그만큼 무겁다는 것을 보여준다. 설총문학상, 연암박지원문학상, 1억원고료 제1회 김만중문학상, 상금 2천만원의 신격호샤롯데문학상, 평사리문학대상 등 다수의 문학상이 증명하듯 작품성과 사회적 기여를 함께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그의 인간세계를 규정하는 것은 수상의 경력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끊임없는 사유의 자세이다. 그는 문학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기억을 성찰하며, 인간과 세계가 더 깊이 만나는 길을 모색해 왔다. 그의 삶과 문학은 결국 한 사람의 작가가 어떻게 시대와 호흡하며 타인의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이 사회정화에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진 송명화 박사의 인간성을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 높이 평가해야 할 점은 오랜 기간 다스림이란 문학공동체를 지켜온 책임감과 신의이다. 문예지는 한 사람의 열정만으로 지속될 수 없는 지난한 작업이지만,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한 번 맡은 소임을 끝까지 지켜내며 스승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는 단순한 행정 능력이나 운영의 성실성을 넘어 사람에 대한 의리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 그리고 문학에 대한 깊은 사명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스림의 리드로서 에세이문예 주간으로서 부산교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론 지도교수로서 수많은 문인을 품고 신인을 발굴하며 문학의 토양을 묵묵히 일구어 온 그의 발자취는, 한 편의 작품보다 더 오래 남는 인품의 증거이며, 송명화를 신뢰받는 문학인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가장 큰 자산이라 할 수 있겠다.
2. 전운을 읽어 현실을 깨우는 ‘저운’의 문학세계
송명화의 수필세계는 하나의 문학적 경향이나 미학적 틀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일상의 미세한 풍경에서 존재론적 성찰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기억에서 공동체의 정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의미를 확장하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따라서 그의 수필은 정답을 제시하는 닫힌 텍스트가 아니라 독자와 함께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열린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의 문학은 익숙한 가치와 고정된 인식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삶을 둘러싼 관습과 편견, 획일적인 사고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시각을 제안하는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인간과 세계를 다시 읽어낸다. 그의 작품은 전쟁의 전운을 읽으면서도 시대의 전운을 예지한다. 그 이중의 통찰이 오늘의 독자를 깨우는 문학적 힘이 된다. 이러한 예지성과 저항성은 송명화 수필의 핵심 동력이자 그의 문학세계를 독창적으로 만드는 원천이다.
1)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책임이다
좋은 수필은 지나간 일을 기록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기억을 현재의 삶 속으로 불러와 독자의 존재를 흔들고, 새로운 흔들림을 일으킬 때 비로소 문학이 된다.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는 저장고가 아니라 현재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이며, 개인의 체험은 타인의 삶과 연결될 때 보편적 의미를 획득한다. 송명화의 <스트로베리 필즈의 데이지>는 바로 이러한 현대수필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존 레논의 추모 공간이라는 구체적 장소에서 출발하지만, 기억을 현재의 책임으로 전환하며 개인적 체험을 인류 공동체의 윤리로 확장한다. 리쾨르의 기억철학으로 읽을 때 이 작품은 과거를 회상하는 수필이 아니라, 기억이 어떻게 현재를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문학적 실천이 된다.
작품은 존 레논의 오래된 사진 한 장에서 시작한다. "낡은 앨범에서 빛바랜 화보를 찾았다." 이 한 문장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과거의 이미지는 현재를 흔드는 사건으로 되살아난다. 리쾨르에게 기억은 저장된 정보가 아니라 현재 속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책임의 실천이다. 따라서 화자가 뉴욕을 찾는 이유 역시 관광이 아니다. 기억을 확인하고 그 기억에 응답하기 위해서이다.
모자이크 바닥의 글자가 나를 불렀다. ‘imagine’, 나는 글자 발치에 행상에게 받은 데이지꽃 세 송이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반짝이는 검은 대리석 조각들이 하얀 바탕에 무심한 척 박혀 내게 말을 건넨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추모를 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말이 없는 속에 전해지는 엄숙한 의식처럼 조심성 있게 움직이는 일단의 사람들에게 침묵은 나름의 가치로 지켜지는 예법처럼 무게를 잡았다.
-<스트로베리 필즈의 데이지>중에서
스트로베리 필즈의 모자이크 바닥에 적힌 "Imagine" 앞에 데이지를 내려놓는 장면은 작품 전체의 핵심 장면이다. "나는 글자 발치에 데이지꽃 세 송이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이 행위는 헌화가 아니다. 기억을 현재 속에서 다시 살아 있게 만드는 의례이다. 리쾨르가 말한 '기억의 충실성'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기억은 과거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변화시키는 실존적 선택이다.
센트럴 파크 원형 편평구조의 레넌 추모비는 붐볐다. 한 청년이 연설을 시작한다. 짧으나 단호한 문장들, 영어가 짧아도 마음으로 들린다. 총도 구호도 없었다. 바닥에 박힌 하나의 낱말과 마음을 담은 꽃들만 누워있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또 떠나갔다. 베트남 전쟁이란 이름 하나 적힌 곳 없는데, 나는 미케비치의 모래를 퍼올리는 부연 파도를 떠올리고, 후에 황궁 담벼락의 총탄 자국을 떠올리고, 장남을 월남전에서 잃은 외조부모님의 외로운 산소를 떠올렸다. 우크라이나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수단에서 레바논에서 끼쳐오는 피비린내와 아우성을 생각했다. 언젠가 종전이 되겠지만 죽고 다치고 가족을 잃고, 살 곳을 상실한 사람들의 삶과 영혼이 아물 방법은 무엇일까. 요란한 다툼이 그치지 않는 지구촌 한 귀퉁이에 앉아 눈을 감아보지만, 추모비 주인의 요청에 답할 수 없었다.
- <스트로베리 필즈의 데이지>중에서
작품 후반부에 이르면 기억은 한 장소를 넘어 세계 전체로 확장된다. “우크라이나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수단에서 레바논에서...” 기억은 연쇄를 만든다. 존 레논에서 프라하, 베트남, 우크라이나로 이어지는 사유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는 창고가 아니라 현재의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 된다. 수필은 이렇게 기억을 개인의 감상이 아닌 인류 공동체의 가치로 승화시킨다.
이 작품의 문학적 성취는 기억을 과거의 정서로 소비하지 않는 데 있다. 하나의 추모 장면은 세계의 전쟁과 폭력, 인간의 상처를 성찰하는 사유로 확장되고, 개인의 체험은 인류 공동체를 향한 책임의식으로 심화된다. 이러한 확장은 기억을 현재의 실천으로 이해한 리쾨르의 철학과 깊이 맞닿아 있다. 결국 <스트로베리 필즈의 데이지>는 추억을 아름답게 복원하는 수필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읽어내는 존재론적 수필이다. 개인의 경험을 보편적 가치로 승화시키고,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시대를 다시 성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현대수필이 지향해야 할 기억의 미학과 실천적 책임을 높은 수준에서 구현했다고 할 수 있다.
2) 데이지는 꽃이 아니라 타자를 향한 응답이다
문학이 타자를 만나는 방식은 설명이 아니라 응답이다. 특히 뛰어난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과시하거나 감정을 토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직면한 문제로 끌어안을 때 보편성을 획득한다. 레비나스가 말했듯 인간은 타자를 인식하는 존재가 아니라 타자에게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송명화의 <스트로베리 필즈의 데이지>는 추모를 소재로 한 기행수필을 넘어, 전쟁과 폭력으로 상처 입은 타자에게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묻는 수필로 읽힌다. 작품 속 데이지 한 송이는 꽃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 앞에 선 인간의 책임을 상징하는 문학적 기호이다.
베트남 전쟁이란 이름 하나 적힌 곳 없는데, 나는 미케비치의 모래를 퍼올리는 부연 파도를 떠올리고, 후에 황궁 담벼락의 총탄 자국을 떠올리고, 장남을 월남전에서 잃은 외조부모님의 외로운 산소를 떠올렸다. 우크라이나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수단에서 레바논에서 끼쳐오는 피비린내와 아우성을 생각했다. 언젠가 종전이 되겠지만 죽고 다치고 가족을 잃고, 살 곳을 상실한 사람들의 삶과 영혼이 아물 방법은 무엇일까. 요란한 다툼이 그치지 않는 지구촌 한 귀퉁이에 앉아 눈을 감아보지만, 추모비 주인의 요청에 답할 수 없었다.
-<스트로베리 필즈의 데이지> 중에서
레비나스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자유가 아니라 책임에서 찾는다. 그는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책임을 명령한다.”고 말한다. 이 책임은 계약 이전의 책임이며, 선택 이전의 인간존재의 근원적 요청이다. 수필에서 송명화는 특정 국가를 비난하지 않는다. 전쟁의 승패를 말하지도 않는다. 대신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한다. “죽고 다치고 가족을 잃고, 살 곳을 상실한 사람들의 삶과 영혼이 아물 방법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정치적 입장이 없다. 오직 타자의 상처를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공감의자세만 존재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얼굴은 바로 이러한 질문 속에서 드러난다.
말없이 돌아섰다. 자리를 비켜줘야 할 때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글자 아래에 누운 데이지는 그 자리에 남았다. 마치 더 상상할 것이 남았다는 듯이. 말보다 오래 남는 것이 침묵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더 차분해진다. 치어다 보니 숲 넘어 존 레넌과 오노 요꼬가 살았던 다코타아파트가 보인다. 내가 저 앞을 지나왔구나. 그의 피가 스민 땅을 밟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 발을 내려다보는데 새로 사 신은 운동화가 추모비 분위기다. 신던 운동화가 낡아서 서울역에서 공항 가기 전에 급히 산 신인데, 흰 바탕에 검은색 마크가 날렵하다. 이 신을 신고 화합을 부르짖는 추모비를 찾아 내 손으로 하얀 데이지를 남겼다. 참 소심한 추모다 싶지만 이러고 싶어 뉴욕에 남은 것이었으니.
-<스트로베리 필즈의 데이지> 중에서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추모비 앞의 침묵이다. “말보다 오래 남는 것이 침묵이라 생각하니...” 침묵은 말의 부재가 아니다. 타자의 고통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 배려의 태도이다. 레비나스에게 진정한 인간다움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는 것이다. 화자는 설명하지 않는다. 꽃을 내려놓는다. 결국 데이지는 장식물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당신의 고통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가장 조용한 책임의 언어이다.
이 작품의 압권은 전쟁의 비극을 거창한 담론으로 말하지 않는 데 있다. 화자는 누구를 단죄하거나 역사를 해설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 속에서 꽃 한 송이를 내려놓는 작은 행위를 통해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사소한 몸짓 하나를 인류 보편의 가치로 확장하는 힘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미학적 성취이다. 데이지는 추모의 장식물이 아니라 타자를 향한 응답의 언어이며, 침묵은 무력함이 아니라 책임을 감당하려는 가장 깊은 말이다. 개인의 체험을 윤리적 상상력으로 승화시키고, 독자로 하여금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수필은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성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뛰어난 현대수필이라 할 수 있다.
3) 관광은 어떻게 존재의 성찰이 되는가
좋은 기행수필은 장소를 소개하지 않는다.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바라보게 함으로써 독자의 존재 인식을 변화시킨다. 관광이 풍경을 소비하는 행위라면, 문학은 풍경을 사유로 전환하는 행위이다. 프랑수아 줄리앙이 말한 '탈합치'는 바로 이러한 문학의 작동 원리를 설명한다. 익숙한 세계와의 일치를 벗어나는 순간, 사물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존재는 다시 사유된다. 송명화의 <스트로베리 필즈의 데이지>는 관광지를 답사하는 기행문이 아니라, 공간을 존재의 질문으로 변환시키는 철학적 수필이다. 이 작품의 미학적 성취는 장소를 소비하지 않고, 장소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읽어내는 데 있다.
프랑수아 줄리앙은 익숙한 세계에서 한 발짝 벗어나는 순간 새로운 사유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탈합치’라고 부른다. 센트럴파크는 관광지이다. 그러나 화자는 관광객으로 머물지 않는다. 추모비 앞에서 관광은 기억으로, 기억은 책임으로, 책임은 세계의 평화로 끊임없이 변형된다. 바로 이 전환이 탈합치이다. 같은 구조는 프라하에서도 반복된다. 레논의 벽은 원래 낙서의 공간이다. 그러나 화자는 거기에서 “CAN DO IT NOW” 라는 문장을 통해 자신의 안온한 삶을 되돌아본다.
제대로 낙서 한 번 못해본 나의 질서가 파열음을 내었다. ‘CAN DO IT NOW’라는 붉은 낙서가 내 가슴으로 뛰어들었다. 직진의 굉음, 입술을 부르르 떨며 그 문장을 읽었다. 그저 다독이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소시민적 안온함을 그 야단스러운 문장과 그림들은 돌벽에 더께 진 함성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일찍 나온 젊은 청년이 바이올린으로 ‘이매진’을 연주하고 있었다.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장엄한 이 예술품을 마주 보고 일월이었지만 가슴이 뜨거워져 외투를 벗어들었다. 안 된다고, 안 된다고 그리 목청을 높여도 지구의 한편은 늘 멍들고 있었다.
-<스트로베리 필즈의 데이지> 중에서
벽은 더 이상 벽이 아니다. 그것은 행동을 촉구하는 존재의 외침이 된다. 줄리앙이 말한 탈합치는 익숙한 공간을 낯선 철학으로 다시 보는 힘이다. 뉴욕도, 프라하도, 센트럴파크도, 모두 관광지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사유의 장소로 재탄생한다. 이처럼 이 수필은 관광의 기록을 존재의 성찰로 승화시킨다. 뉴욕과 프라하는 더 이상 여행의 목적지가 아니라 인간의 기억과 책임, 평화와 공존을 사유하는 철학적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이러한 전환은 익숙한 현실을 낯설게 열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는 줄리앙의 탈합치를 문학적으로 구현한 결과이다. 더 나아가 작품은 리쾨르의 기억철학과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를 자연스럽게 포괄하면서, 개인의 여행을 인류 보편의 성찰로 확장하는 높은 문학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체험을 단순히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체험을 존재의 재인식으로 이끌어 독자의 세계관까지 흔들어 놓는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현대수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성취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위대성은 세 철학이 서로를 완성한다는 점이다. 리쾨르는 왜 기억해야 하는가를 설명한다. 레비나스는 왜 타인의 아픔을 나의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설명한다. 줄리앙은 어떻게 익숙한 현실을 새로운 존재의 시선으로 바꾸는가를 설명한다. 그 결과 데이지는 더 이상 꽃이 아니다. 기억이 되고, 책임이 되고, 평화를 향한 상상이 된다. 존 레논의 “Imagine” 역시 공허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기억과 책임이 결합될 때 비로소 현실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상상력으로 다시 태어난다.
Ⅲ. 로그아웃
문학의 사회적 요구를 우선시한 작가 송명화의 <스트로베리 필즈의 데이지>는 전쟁을 말하는 수필이 아니다. 이 작품은 전쟁 이후에도 인간이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를 묻는 수필이며, 기억이 어떻게 타인을 향한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인간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존 레논의 노래는 작품 속에서 하나의 문화적 상징을 넘어, 리쾨르의 기억철학과 레비나스의 타자의식, 그리고 줄리앙의 탈합치를 관통하는 살아 있는 사유의 중심축으로 기능한다. 화자가 내려놓은 데이지는 한 사람의 추모를 넘어 세계의 상처를 기억하려는 문학적 실천이며, 그 꽃은 시간이 지나 시들지라도 기억의 책임감은 독자의 내면에서 계속 피어난다.
오죽했으면 작가는 윌 듀런트의 통계를 소환했겠는가. 인류의 역사가 곧 전쟁의 역사였음을 객관적 사실로 환기함으로써, 전쟁이 얼마나 오랫동안 인간의 삶을 파괴해 왔는지를 절실하게 드러낸다. 이어 『전쟁의 역사』라는 책의 두께를 떠올리며 “세월과 비례해 늘어날 책의 부피를 예상하고 가슴이 무지근하게 내려앉지 않던가.”라고 고백하는 대목은 전쟁에 대한 깊은 절망과 혐오를 응축한 문학적 표현이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과 개인의 정서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서술은 평화의 가치를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절실한 인간의 소망으로 체감하게 한다. 이 작품은 전쟁의 역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끝내야 할 이유를 독자의 마음속에 새겨 넣음으로써 평화의 가치를 설득력 있게 일깨우는 뛰어난 수필적 성취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문학적 성취는 거대한 평화 담론을 외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꽃 세 송이를 내려놓는 미세한 몸짓 하나가 인류의 역사와 접속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데 있다. 작은 행위가 세계를 향한 책임으로 확장되고, 개인의 여행이 인류 공동의 기억으로 승화되는 과정은 수필이 지닌 가장 높은 미학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문학이 현실생활을 반영해야 한다고 믿는 작가 송명화의 <스트로베리 필즈의 데이지>는 하나의 기행을 기록한 글이 아니라, 기억은 책임이 되고, 책임은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다시 인간답게 만든다는 사실을 꽃 한 송이의 이미지로 증명한 탁월한 본격수필이라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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