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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유혜정 개인展
유형 : 대전전시회
날짜 : 2021년 12월 2일~12월 8일
관람시간 : 10:00~18:00
장소 : 이공갤러리
문의처 : 이공갤러리 042-242-2020
유혜정 作 꿈의 저편 60.6x50 acrylic+oil on canvas 2021
유혜정 作 노래가 생각나는 그림 65.1x53 oil on canvas
유혜정 作 따로 또 같이 50x60.6 acrylic+oil on canvas 2021
단상들, 자유, 꿈, 마술, 비밀, 이름
: 유혜정의 그림
말(馬)
말이 있다. 눈밭 위의 하얀 달만큼 눈부시게 하얀 말.
화면 위 하얀 말이 꽃 밭을 가로지른다. 가로지르기도 하고 날아가기도 하고 그 영험함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부유한다.
그 말이 작가의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쓰으윽.
그렇게 들어온 말 한 마리는 작가를 태우고 달리기 시작한다. 여기로, 저기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 줄 아는 말은 작가의 꿈이라는 강을 넘기 시작한다. 말은 그를 자유롭게 했다.
말을 그리던 처음쯤 작가, 유혜정은 아직 말과 낯을 가리고 있다. 말은 작가에게 동경과 꿈의 대상이다. 자유에 대한 갈망과 동경이 투영된 대상인 하얀 말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그것이 ‘지독한 사랑의 결실’이 될 것이라는 작가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부유하듯 달아나는 말을 잡기란 영 쉬운 일이 아닐터이니. 혹은 말은 ‘꿈과 강’이므로 영원히 잡히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니. 우리가 타거나 혹은 자유롭게 달리는 말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월적 힘을 부여하는 것은 일종의 물신적 행위이고 근본적으로 이러한 대상에 부여하는 접근불가능함은 지독하고 환상적인 (종종 실패한) 사랑으로 끝나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 지독한 사랑의 끝에서 아마도 작가는 ‘꿈과 강’이라는 환상 혹은 욕망 앞에 서있게 될 것이란 걸 직감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용감하게도 어느 순간 작가는 말에 접근한다. 접근불가능한 환상적, 물신적 말은 친근하고 친절한, 그리고 유쾌한 말이 된다. 혼자 꽃밭을 가로지르던 말은 이제 춤을 추기도 하고 소녀를 태우기도 하고, 다른 말을 태우기도 한다. 그리고 말은 대체로 웃고 있다. 이제 환상은 다시 속도를 낸다. 말에 대한 친밀성의 경험 혹은 인식에도 불구하고 말은 여전히 (미세하게 다른 경로로) 환상적이고 물신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작가가 ‘조야백’이라는 말에게서 받았던 ‘인상’은 이제 작가의 세계 안에서 꿈과 환상과 현실을 넘나든다. 말은 더 장식적이 되고, 더 표현적이 된다.
마술과 꿈의 세계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세계에 대해 어린아이가 처음 경험하는 것은 “어른들이 좀 더 강하다”는 깨달음이 아니라 “오히려 어른들이 마술을 부릴 수 없다”는 깨달음이라고 말했다.”
아감벤Giorgio Agamben 은 행복은 마술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아감벤은 행복이 당위적이거나, 도덕적, 이성적 주체의 노력에 의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인식대상이 아니며 주체를 초과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초자연적 힘 혹은 비밀을 품고 있는 마술의 알 수 없음을 통해서만 행복은 “우리의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린시절 알게 되는 슬픔, 즉 마술을 부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슬픔을 내쫓기 위해 우리는 여전히 마술을 통과해야 한다.
어린 아이는 자신의 외부 세계를 마법이 걸린 세계처럼 바라본다.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아이가 하찮은 사물일지라도 그것에 “생생한 흥미를 느끼는,” 생생한 인상을 갖는 개체이며 “아이가 형체와 색채를 마구 빨아들이면서 느끼는 기쁨보다 더 우리가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과 닮은 것은 없다” 고 했다. 생생한 흥미 혹은 의미 없는 호기심, 세상에 대한 ‘황홀한’ 시선이 주는 쾌락과 신비가 아이들에게 계속 마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속삭인다. 그러니 우리는 영감을 얻는다는 것은 마술에 걸린 시선, 이 경탄하고 놀라는 어린아이의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작가에게 쓰으윽 들어왔을 때, 작가는 마법에 걸린 듯, 경탄하고 놀라는 어린아이인 듯, 마술과 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말은 그에게 이러한 진입을 가능하게 한 매개이고, 그 자신과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들과 직면할 수 있게 해준 어떤 것이다. 말하자면 그러한 직면이 그의 자아, 그의 욕망, 그의 비의식의 지대들을 자유로워지게 한 듯하다. 그의 말들이 더 장식적이고 더 표현적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자유, 그리고 그것으로 얻은 기쁨, 즐거움 혹은 행복의 발현이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꿈 꿀 능력을 되찾기
“꿈의 강-언젠가 그날이 오면” 시리즈는 접근불가능한 동경의 대상을 작가의 꿈의 세계로 초대하는 과정과도 같다. 조야백의 자유와 영험함에 매료되었던 작가는 말 자체만으로도 신이 나는 듯 화면 위 여기저기 그려 넣는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이라는 막연한 희망에 동반자 혹은 친구, 마법사와도 같은 말에 작가는 자신의 애착의 에너지를 쏟아 붇는다. 작가는 어느 순간 자유롭게 말을 그린다. 여기서 말은 특별한 맥락이나 의미를 갖는 기호도 아니고 특별히 자신을 투영한 의인화된 말도 아니다(이즈음의 그림에서 말이 작가의 심리상태를 드러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작가 자신을 의인화한 이미지라고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아 보인다). 말은 그저 말 자체일 뿐이다. 작가는 말과 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조금 더 솔직할 수도 있겠다. 어린아이처럼 말과 놀고 있다. 숨바꼭질을 하듯 숨기도 하고 화면 한 가득 말이 혼자 그러나 외롭지 않게 있기도 하다.
작가는 ‘아직’ 말을 전유(가장 인간중심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전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내심을 갖고 그린다는 작가의 작업 과정은 결국 그 말과 나 자신을 돌보는 행위와 비슷하다. 돌봄이란 어떤 대상에 주의를 기울일 충분한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는 일상의 모든 순간이 관리되고 통제되는 현대 사회 안에서 파괴된 꿈 꿀 능력을 회복해야만 돌봄의 정신적 능력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인내심을 갖고, 형상이 떠오르게 하는 과정과 시간을 쌓아가는 행위를 통해 작가는 말과 자신과 그리는 행위 자체를 돌본다. 물론 작가의 돌봄은 이제 지나친 사랑, ‘지독한 사랑의 결실’은 아닐지 모른다. 그것은 오히려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와 비슷한 것일 수 있다. 개인적이고 현실적으로 상실된(혹은 상실되었다고 생각하는) 또는 좌절된 꿈과 욕망에 대한 치유와 돌봄의 행위이고 몸짓이다. (작가는 여기서 자신이 말과 회화와 스스로를 돌보는 ‘주체’라기 보다는, 어떻게 드러날지 모르는 말과 회화의 돌봄에 내맡겨진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 지나가자.)
혼자 하는 말
2019년의 개인전 <삶+여행>에서 보여준 그의 그림들은 이제 대부분 ‘언젠가 그날이 오면’과 같은 막연함을 벗어난다. <꿈을 꾸는 아이>, <아빠와 크레파스>, <소녀의 마음>과 같이 꿈 많던 소녀의 마음에 대한 그리움. 자신의 아이가 자라 소녀가 되었다는 것을 보는 엄마로서 표현하는 <엄마의 마음>, <엄마와 딸>, <내 아이의 방>. <독백의 방>, <고백의 방>, <여자의 방>과 같은 내면의 공간들. <아프다>, <봄 맞으러 가야지>, <설레임>과 같이 작가는 자신의 마음 또한 숨기지 않는다. 이야기는 더 많아졌고, 작가 특유의 따뜻하고 밝은 색채와 질감은 화면을 한 편의 동화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따뜻함과 유쾌함은 작가의 가장 큰 덕목이 된다.
그런데 이제 말은 <자화상>처럼 작가 자신이 투영된 의인화된 대상이 된다. 그의 감정과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매개이자 그 자신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혹은 말은 일종의 지지대이자 프레임처럼 구성된다. 말은 그가 안전한 공간을 경계 짓는다. 그렇게 말은 작가의 성(또는 그의 말처럼 ‘방’)이 된다. 말이 이렇게 구성되자 말이 무엇인가를 상징한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서 상징은 ‘온전한’(그래서 닫힌) 의미에 대한 희망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작가는 처음 말과 낯을 가렸던 때와는 다르게 말을 인격적 대상으로 환원하거나 전유한다. 그리고 말은 그렇게 ‘작가에게’ ‘어떤 것’이 된다. 그래서인가 작가는 “나에게 말(馬)은 말(言)이다”라고 말한다. 말을 언어와 동일시하는 것은 언어의 소통가능성에 대한 (다소 신뢰를 잃은) 믿음과 함께 자신에게 고유한 무엇이길 바라는 점유에 대한 희망을 드러낸다. 말 안에 자신과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을 배치하고 그는 그제서야 안전하고 평화롭다고 느낀다. 작가는 ‘내 언어’로 ‘내 사물’로 ‘나’를 드러내는 ‘용기’를 보여준 것에 안도한다. 그는 자신을 돌보는 일을 잘 해낸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하는 말(言), 독백이고 고백인 이 혼잣말이 정말 그를 순수하게, 온전하게 설명하는가? 혹은 작가 고유의 언어인가? 그가 원하는 말인가?
마술에 걸린 이름
다시 아감벤에 의하면, 최종적으로 “어린 아이의 슬픔은 마술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 보다는 자신에게 부과된 이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에서 온다.” 마술은 사물에 존재하는 “겉으로 드러난 이름 말고도 부름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감춰진 이름”을 불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밀스런 이름, “근원적 이름archi-nome”을 불러내는 능력이야말로 마술가의 능력인데, 이러한 호명, 부름은 이름에서, 어떤 대상에 부여된, ‘겉으로 드러난’ 이름에서 대상을 자유로워지게 하는 것이다.
‘근원적 이름’은 대상을 규정하는 이름과는 차이를 갖는, 그 이름에 선행하는 이름이다. 이것이 비밀인 이유는 대상의 ‘겉으로 드러난’ 이름으로는 대상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고 따라서 설명되지 않는 것을 숨겨 온전한 척해야 하기(혹은 억압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대상이 이 부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 이름은 비밀스럽고 근원적으로 있다.) 모든 마법을 믿지 않는 어른들은 따라서 이 비밀스런 호명을 들을 수 없으며, 자신 안에 존재하는 낯선 존재와 관계 맺기에 머뭇거리고, “끈질기게 타자로 향하는 어린아이”를 망각한다.
작가 유혜정은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그렇지 않을까?). 그리고 말과 그린다는 행위가 그를 (어느정도) 자유롭게 한다. 그의 ‘비밀스런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바로 말과 그림인 것이다. 그런데 이 부름은 이미 있으나 아직 오지 않은 이름을 부른다. 그것은 그가 간혹 자신을 소녀라고 지칭하거나 꿈 많은 소녀의 마음을 자화상이라고 지칭하는 것과는 다른 이름, 소녀, 딸, 엄마, 아내와는 다른 이름일 것이다. 자신에 대한 연민의 이름과는 다른 이름.
말은 작가에게 어쩌면 그런 이름이거나, 내면의 낯선 존재이거나, 그러니까, 마술에 의해 불리워진 이름일지 모른다. 그리고 화면 위에서 말은 단순히 작가가 투영된 거울과 같은 대상, 인격화된 대상이 아니라 이 비밀스런 이름을 기쁨, 안심, 평화로 경험하게 하는 것으로, 그렇게 나타나야 한다. (비밀스런 이름은 낯설고 그래서 두렵고 불안한 것일 수 있는데, 작가는 이러한 불안과 동요를 잘 드러내진 않는다. 작가는 이 안전함이 깨질까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작가는 많은 곳에서, 내부이던 외부이던, 말 가까이, 웅크리고 있다.)
여행, 낯선 세계의 여행자, 문 앞에서.
최근 작가는 ‘삶은 여행’과같은시리즈의그림을그리고있다. (<삶+여행>과 작은 차이가 있다. 삶에 여행을 더하는 것과 삶이 곧 여행인 것의 존재론적 차이 같은 것.) 화면이 덜 복잡해졌다고 말해야 할까. 화면 전체에 여백도 생기고 말은 조금 더 추상화되기도 한다. 말은 예전처럼 화면 전체를 장악하지도 않는다. 말은 여전히 중요하게 빠지지 않지만 여기서 말은 작가의 서명과도 같고, 마법을 유지해주는 주문과도 같다. (서명은 자신의 소유권을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것이고, 주문은 작가가 거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말은 평화롭게 모순적이다.) 어쨋든 말은 이제 그에게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해주는 신비한 힘이고 여행의 동반자이다. ‘삶은 여행’이란 (어쩔 수 없이 상투적이지만, 상투적인 것을 깨닫는 것의 어려움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작가에게 두려움과 상실,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떠나야 하는 여행, 굳건하게 가야하는 여행이고, 끝날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 죽음과 함께하는 삶을 상기시킨다.
여행자는 늘 위험에 노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제 자신의 안전이 깨질까 하는 염려에 (말로) 단단히 성을 쌓지는 않는 듯하다. 이것이 어떤 변화로 그를 이끌 것인지 아직 우리는 서둘러 판단할 필요가 없다. 여행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일과 마주하게 하며, 일정은 수시로 엉망이 되고, 목적지엔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르지 않은가. 작가가 자신의 비밀스런 이름을 듣기 위해 이 여행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위험과 타자를 만날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지도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말과 그림으로 떠난 그곳이 점유의 공간(작가가 어디선가 인용한 푸코의 ‘권력의 공간’이라는 말은 작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든 공간이 권력의 공간일 수 있지만, 작가는 권력의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을 의식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세계에 대한 경험에 아직도 놀라워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이 아니라 환대의 장소가 되길 바라며. 소설가 김영하가 그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의 작가의 말 서두에 쓴 글-말을 듣는다.
“소설을 쓰는 것이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어린아이가 레고를 갖고 놀듯이 한 세계를 내 맘대로 만들었다가 다시 부수는, 그런 재미난 놀이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르코 폴로처럼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에 가깝다. 우선은 그들이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처음 방문하는 그 낯선 세계에서 나는 허용된 시간만큼만 머물 수 있다. 그들이 ‘때가 되었다’고 말하면 나는 떠나야 한다. 더 머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현지연 2021.8
G. 아감벤, 『세속화 예찬 – 정치미학을 위한 10개의 노트』, 김상운 역, 도서출판 난장, 2010, p.27
샤를 보들레르,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정혜용 역, 도서출판 은행나무, 2014, p.23
G. 아감벤, 『세속화 예찬』, pp. 31-32
김영하, 『여행의 이유』, 문학동네, 2019, pp. 61-62,
유혜정 作 삶은 여행 53x72.7 acrylic+oil on cnvas 2021
유혜정 作 삶은여행 90.9x72.7 acrylic+oil dn canvas 2021
유혜정 作 안녕 내사랑 53x72.7 oil on canvas 2021
희망을 그리는 작가 유 혜 정
유혜정 작가는 현대인의 내면을 직설화법이 아닌 우회한 감정으로 표현하고 의인화된 동물을 통해 작은 행복함과 평안함을 선사하려고 합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을 그리며 의인화를 하고 반 구상 작품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혜정 작가는 대학 때 서양화를 전공했고 졸업 후 학생들만을 가르쳤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늘 아쉬움이 많았던 유혜정 작가는 무엇인가 얘기하고 싶어 했고 왜 살아가는지 고민했습니다.
경험에서 묻어둔 것들을 분출해 내듯 그림으로 이야기했고 좀 더 실력을 갖춘 작가가 되고자 간절한 마음을 담아 꿈의 저편에 있는 희망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현재는 배재대학교에 출강하고 있고 아티스트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평범하게 때를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서도 엄마로서 모성의 삶을 선택해서 살아 냈지만 여성작가로서 걸어갈 길 만큼은 때를 거스르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절실함이 묻어나는 용기 있는 작가입니다.
우려의 경계를 넘어 그림으로 많은 이들과 소통하는 작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유혜정 작가가 제일 부러워했던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이고 싶었을 겁니다.
앞으로는 때를 거스르지 않고 무던히 그림을 그려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반 백년을 살아온 유혜정 작가가 앞으로 그려갈 꿈의 세계를 설렘으로 계속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책: <눈을 뜨고 꿈꾸다>에서 발췌.
유혜정 作 안심 162.2x130.3 acrylic+oil on canvas 2021
유혜정 作 인생은 스케치여행 145.5x112.1 acrlic+oil on canvas 2021
유혜정 作 할아버지 53x40.9 oi on canvas 2021
문화가 모이는 곳 "대전공연전시" http://www.gongjeo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