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알면 알수록 더 알 수 없는 인간
김창완
길 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왜 사냐" 묻던 소년… 음악으로 쓰는 반성문
한현우 기자/조선일보 : 2012.05.05.
1966년 봄. 중앙중 2학년생 김창완이 혼자 하교하고 있었다. 서울 계동의 학교 정문을 나와 시청 앞까지 걷던 그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할아버지, 왜 사세요?""아주머니, 왜 사세요?""누나, 왜 사세요?"그가 얻은 대답의 대부분은 "커 보면 알아"였고, 그다음은 "공부나 해 인마"였다. 그는 "의미 있는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1975년 2월 서울대 졸업식을 며칠 앞둔 김창완이 손에 '바리캉'을 든 채 자기 방에 앉아 있었다. 방 전체를 도배하듯 붙여놓은 자신의 그림들을 바라보던 그는 바리캉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깎기 시작했다. 완전히 삭발이 된 그는 졸업식에서 가발을 써야 했다. 김창완은 "나는 왕따였으며, 상당히 상태가 안 좋은 아이였다"고 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김창완(58)을 알고 있다. 산울림의 맏형이자 김창완밴드의 리더, TV와 스크린을 오가는 배우, 라디오 DJ…. 그러나 김창완은 그렇게 쉽게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푸근한 인상의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 남자를, 어쩌면 그냥 그렇게 알고 있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산울림으로 데뷔한 지 35주년을 맞은 그를 지난달 30일과 5월 1일 이틀에 걸쳐 만났다. 그의 집 한쪽에는 방송사에서 받은 연기대상, 가요톱텐 1위상, 라디오 DJ상, 동요대상 트로피가 뒤섞여 진열돼 있었다.
◇외국서 해적판이 나오는 밴드 산울림
―이번에 후배들의 헌정 음반이 또 나왔던데요.
"산울림 20주년과 30주년에도 나왔었는데… 고마운 일이죠. 헌정 음반 처음 나올 땐 무척 쑥스러웠는데 지금은 그 작업을 하는 후배들끼리 서로 교류하면서 일종의 연대감이나 소속감을 느끼는 것 같아 흐뭇했어요."
―헌정 음반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면서 산울림의 가치를 훼손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혹시 그런들 어때요. 그렇지만 지금 상업적인 이익 때문에 음악 하는 사람이 있나요? 제 주변에는 거의 없어요. 제가 그런 사람들과 주로 교류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음악으로 돈 버는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그 사람들은 각별한 재주가 있는 거죠. 돈 버는 재주 있는 사람들이 돈 버는 걸 가타부타 얘기할 건 아니죠. 다만 그러지 않고도 음악 할 수 있는 생태계가 마련돼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많아요. 예전엔 음악 한다고 꼭 가난할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하는 쪽이었지만, 지금은 가난할 자신 없으면 음악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하니까요."
―크라잉넛이나 장기하 같은 젊은 인디 뮤지션들과 가깝게 지낸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데뷔할 때는 존경하는 선배나 영향받은 아티스트를 물으면 한사코 없다거나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 비하면 그 친구들은 참 행복해요. 다만 그 친구들이 돈도 잘 벌었으면 하는데 하필이면 돈 벌리지 않는 내 음악을 따라오는지 그게 좀 답답해요.(웃음)"
김창완이 크라잉넛 멤버들과 장기하를 집에 데려와 술을 마시다가 모든 사내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옷을 다 벗고 놀았던 사건이 한동안 홍대 앞에 회자됐었다. 그때 김창완은 애지중지하던 고가의 와인을 따서 이들과 나눠 마셨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걔들이 원래 술 마시면 잘 벗어요. 덩달아서 놀다가 맞춰 주느라고 나도 벗은 거죠. 저도 대학 시절엔 히피 영향을 받아서 캠핑 가서 벗고 놀고 했어요. 그 비싼 와인은… 어차피 맨정신엔 아까워서 못 따니까.(웃음)”
―데뷔할 때 영향받은 뮤지션이 없습니까.
“고등학교 때까지 외국 음악을 들은 게 전혀 없거든요. 대학 1학년 때 충동적으로 기타를 사면서 C.C.R이나 그랜드펑크레일로드 같은 외국 밴드 음악을 들었죠. 근데 그때 이미 곡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영향받았다고 할 수도 없고….”
―좋은 음악을 만들려면 남의 음악을 듣지 말아야 합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어요. 모차르트도 누굴 가르칠 때 음악을 배운 적이 있다면 수업료를 두 배 받았다는군요. 그만큼 틀에 박힌 사고방식은 개조하기가 어려워요. 사실 지금도 음악 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은데 점점 음악들이 똑같아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후배들도 산울림 트리뷰트 음반을 낼 것이 아니라 작곡하는 데 200년 걸린 영산회상에 음악을 헌정하는 게 옳죠. 그런데 아무도 안 하잖아요.”
한때 ‘임산얼 사건’이 음악계에서 화제였다. 유럽에서 음악 공부하던 한 20대 뮤지션이 현지 외국인 뮤지션들 사이에서 ‘임산얼’이란 한국 밴드가 유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한국에 있는 선배에게 “임산얼이 누군데 유럽에서 이렇게 유명하냐”고 물었으나 선배 역시 그가 누군지 몰랐다. 임산얼은 ‘SAN UL LIM’이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일본 같은 데서 우리 음반의 해적판이 가끔 나와요. 그런 음반에 ‘SAN UL LIM’이라고 써 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우리도 진짜 좋은 밴드는 다 빽판으로 들었는데 우리도 이제야 빽판이 나오는구나 했죠.(웃음)”
산울림은 1977년 ‘아니 벌써’로 데뷔했다. 77년은 대마초 파동으로 대중음악계가 초토화된 지 2년이 지난 때로 MBC가 제1회 대학가요제를 만든 해이기도 했다. 김창완·창훈·창익 삼형제는 ‘무이(無異)’라는 이름의 밴드로 출전했다. 그들의 노래 ‘문 좀 열어줘’가 예심 성적 1위, 서울대 밴드인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가 2위였다. ‘나 어떡해’는 김창훈의 곡이니 산울림 노래가 예심 1·2위를 모두 차지한 것이다. 그러나 삼형제 밴드는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김창완이 대학을 졸업한 뒤여서 대학가요제 참가 자격이 없다고 뒤늦게 통보받았기 때문이다. 삼형제는 ‘우리 노래가 1·2위를 할 정도면 음반을 만들어도 되겠다’고 생각해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 음반사에 찾아갔고, 이것이 산울림의 탄생이 됐다. 그때 김창완이 을지로에 있던 오아시스나 벽제의 지구레코드사에 가지 않고 종로2가 서라벌레코드에 간 것은 ‘집에서 84번 버스를 타고 한 번에 갈 수 있는 회사였기 때문’이었다. 애초 이 음반은 1971년부터 7년간 이어진 삼형제의 ‘음악 놀이’를 정리하는 기념 작품이었지 산울림의 탄생을 예고하는 앨범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니 벌써’가 폭발적인 히트를 기록하면서 김창완과 두 동생은 전혀 생각지 않던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돈은 거의 못 벌었죠.
“그때는 저작권 개념도 없다시피 할 때여서 음반이 많이 팔려봐야 우리한테 오는 돈은 하나도 없었어요. 그나마 밤무대에 서야 돈을 좀 만질 수 있었는데, 우리는 한 번도 밤 업소 무대에 오르지 않았죠.”
김창완은 “우리는 젤소미나였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잠파노였다”고 말했다(이탈리아 영화 ‘길’에서 잠파노는 지능이 떨어지는 젤소미나를 부려 먹고 학대한다).
―음악을 좋아하지도 않았다면서 대학 1학년 때 기타는 왜 샀습니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뜬금없이 샀어요. 저걸 한번 사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했겠죠. 그걸 연습해서 뭘 해보겠다고 생각할 만큼 나를 사랑하거나 기대하지 않았어요. 돌이켜보면 그때 굉장히 한심하던 시절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막연히 미대나 음대를 가고 싶었는데 알고 보니 실기시험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재수해서 미대나 음대를 가고 싶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서울대 농대에 원서를 넣었어요. 고교들 사이에 서울대 진학 경쟁이 심했었죠. 집안 형편상 사립대 가기는 어려웠고, 붙었으니까 그냥 다닌다 이런 심정이었어요. 그때 농대생들은 ‘뻔하다’와 ‘빤하다’로 분류됐어요. 농대 졸업생들이 보통 가는 직장을 가면 앞날이 뻔하다고 했고, 방송사나 은행같이 다른 쪽으로 진출하면 잘 안 될 게 빤하다는 뜻이었죠.”
―미술엔 소질이 있었나요.
“소질이라기보다… 고2 때인가 창덕궁에 사생대회를 갔는데 빈둥빈둥 놀다가 그림 제출할 시간이 됐어요. 그래서 도시락에 남은 밥풀을 도화지에 문질러 놓고 그 위에 낙엽을 확 뿌려서 발로 밟아서 제출했어요. 제목은 ‘가을’이었죠. 그런데 이걸 상을 주더라고요.(웃음) 대학 다닐 때도 빨강 파랑 노랑 원색으로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서 온 벽에 도배를 해놓고 그랬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자폐라고 해야 되나, 좀 묘한 때였죠.”
―부모님이 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던가요.
“워낙 괴팍하게 사니까 그 정도로는 걱정을 안 하셨죠. 뭐 방 안에 해시계를 그려놓고 살았으니까요. 내가 대학 입학할 때가 열일곱 살, 졸업할 때 스물한 살이에요. 늦게 온 사춘기였을 수도 있고…. 요즘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그런 불안과 무력감, 그런 게 무척 컸던 시기였어요.”
김창완은 다섯 살 때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동네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이 두 살씩 많았는데, 그 친구들이 학교에 입학하자 무작정 그들과 함께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었던 것이다. 1년간 그렇게 초등학교를 ‘청강’했던 그는 2학년 때 교장의 재량으로 ‘정식 학생’으로 인정받았다. 그가 17세에 대학을 가게 된 것은 그런 이유다.
◇“음악을 만나기 전 나는 외톨이에 왕따”
―기타를 사서 한 달 만에 곡을 썼지요.
“기타 교본을 보고 연습을 하다가 한 달 만에 ‘왜 가’라는 노래를 썼어요. 음악시간에 악보 쓰는 법은 배웠으니까요. 작곡이라기보다 그냥 흉내 낸 정도죠. 그다음부터 산울림 데뷔할 때까지 100곡 정도 썼는데, 음악을 창작하면서 극도의 좌절감과 무력감에서 조금씩 조금씩 탈출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려서부터 동기부여가 되는 일을 거의 경험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뮤지션과 연기자, 라디오 DJ로 활동해 온 김창완은 어느 하나에도 소홀히 하지 않고 두루 호평받는 ‘만능 엔터테이너’가 됐다. 그는 “어떻게 살 것인가 계속 궁리 중”이라고 말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이태경 기자
―1977년 12월에 산울림 1집이 나오고 78년 한 해에만 2·3·4집이 나왔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는 10집까지 내는 데 1년 정도 걸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1년에 음반 석 장밖에 내지 못해서 오히려 무척 실망했어요. 창작력이 쇠퇴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 회사에서도 그냥 내놓으면 팔리니까 ‘벌써 다 만들었어?’ 하면서 음반을 내줬어요.”
―산울림 음악을 자평(自評)한다면.
“역시 형제가 같이했던 것이 산울림 음악의 바탕이었어요. 형제가 아니라 친구끼리 모여서 했으면 당시 팝 음악 사조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우리는 형제이다 보니 음악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오히려 외국에서 시도하지 않은 것도 할 수 있었어요.”
산울림 음악은 당시 사이키델릭이나 펑크·포크가 동시에 융성하던 외국 대중음악과 견주어 전혀 낯설거나 뒤지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요즘도 보기 어려운 실험적 사운드와 가사들이 즐비하다. 예를 들어 산울림의 마지막 앨범인 13집(1997년)에 수록된 ‘팩스 잘 받았습니다’라는 노래 가사는 이렇다. ‘팩스 잘 받았습니다/ 이번주 금요일 칠월 이십육일 오후 일곱시경/ 집으로 전활 주셔서 인터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김창완이 음악작업 때문에 주고받았던 팩스를 쓰레기통에서 꺼내 그 문구를 가사로 쓴 것이다. 이런 파격은 요즘 인디음악계에서도 상상키 어렵다.
―그런 파격과 실험이 요즘 젊은 뮤지션들에게도 영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접하는 모든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요. 그런 것에 경종을 울리려는 가사라고 할까. 우리의 존재 자체가 신비이고, 우리가 스치는 시간 자체가 기적이라는 거죠. 내가 밤새워 쓴 가사보다 오늘 낮에 스쳐간 풍경이 더욱 시적(詩的)이고, 어젯밤 국어 시험 때문에 암기한 내용보다 오늘 아침 엄마한테 들은 잔소리가 더 좋은 가사라는 것을 후배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런 만행을 저지른 거예요.(웃음)”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란 노래도 마찬가지였죠.
“그게 산울림 20주년 기념으로 만든 노래인데, 20년 전에 ‘아니 벌써’가 ‘저게 노래냐’라는 반응을 얻었으니 20주년에도 그보다 더 도발적인 노래를 만들려면 어떻게 할까 궁리한 끝에 작곡자가 아닌 소비자의 반응으로 완성되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송충이로 장롱을 안아보자’ 이렇게 논리를 파괴하는 가사를 썼죠. 마지막에 ‘김치로 옷을 지어 입어보자’고 해서 그 불결한 느낌 때문에 사람들을 분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직도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됐어요.(웃음)”
이런 이유로 산울림의 음악은 철학적이고 추상적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김창완은 “사람들은 가사에 집착하지만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는 한여름에 자동차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만든 노래”라며 가사에 집착하는 것은 좋은 감상 태도가 아니라고 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조연배우로도 각광받는 그는 조만간 김성홍 감독의 스릴러에 주연으로 출연한다. 이번엔 연쇄살인을 하는 사이코패스 역할이다. 그는 연기에 대해 “우는 연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웃는 연기가 진짜 어렵다. 아무래도 웃음은 불수의근(不隨意筋·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근육)으로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SNS로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게 가소로운 생각”
김창완은 매일 오전 9시 SBS FM에서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청취자 의견을 듣고 있지만 정작 김창완은 일절 SNS를 하지 않는다. 그는 스마트폰도 쓰지 않는다.
―SNS를 왜 안 합니까.
“나는 안 하는데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어요. SNS가 세상의 일부로 완전히 체화됐어요. 나는 완전히 옛날 영감탱이가 됐어. 나는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듣고 싶지 않아요. 또 모든 사람의 궁금증에 답해줄 능력도 용의도 없어요. 스마트폰에 카카오톡이란 걸 깔아본 적이 있어요. 라디오 끝나고 나오니까 갑자기 200명이 내 친구가 돼 있는 거예요. 그건 너무 부담스럽잖아요. 그래서 옛날 전화기로 바꿔버렸어요. 이제 사람들이 직접 만나서 악수하고 잔 부딪치고 하는 걸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아요. 너무 정보가 많이 오는 거죠. 오랜만이다 하고 악수하면 손의 보드라움과 체온, 그 사람의 표정까지 다 정보잖아요. 근데 SNS는 체온도 아니고 음성의 느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글자 쪼가리라고요.”
―무척 흥미로운 해석인데요.
“사람들은 SNS로 외로움을 해소하려는 모양인데 난 그게 못마땅해요. 외로움은 사람만이 느끼는 일종의 천형(天刑) 같은 건데, 그걸 감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발칙해요. 감히 휴대폰 하나로 외로움이 가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마어마하게 가소로워요. 외로움이 얼마나 소중한 감정인데 말이에요. 나는 거짓으로 외로움을 잊어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다들 가는 길은 가지 않으려는 심리도 있나요.
“나는 늘 ‘카더라’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좋다더라 하는 것에 너무 즉각적으로 반응해요. 제일 중요한 게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인데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란 것을 다들 심각하게 생각 안 해요. 주인공의 뜻이 뭔지 제대로 안다면 내가 나에게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지, 내가 나를 얼마나 대접하지 않고 있는지 알게 될 거예요. 왜들 그렇게 규격을 맞추려고 눈이 벌개 갖고 그래요?”
―그런 생각이 자녀 교육에도 적용됐습니까.
“나는 아들(신화·32)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으려고 했어요. 나는 어려서부터 누누이 ‘아이를 낳으면 발자국 없는 눈밭을 주고 싶다’고 말했어요. 난 내 아이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아이가 잘 자란 것 같습니까.
“잘 자란 것 같아요. 기타는 잘 못 치는 것 같지만.” 김창완의 아들은 구글코리아에 다니면서 독립해 살고 있다. 김창완은 “아들 집에 가봤느냐”는 물음에 “안 가봤다. 가볼 이유가 없다. 회사 가까운 데 집을 구했다는데, 그럼 내가 가서 얼마나 가까운지 재봐야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런 유의 질문에 종종 흥분하는 편이었다. 김창완은 아내에 대해서도 말을 아꼈다. 산울림 노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에 등장하는 김창완의 아내는 그와 초등학교·대학 동창으로 대학 독서 클럽에서 만났다.
―앞으로도 계속 노래를 할 것입니까.
“나는 노래밖에 모르니까 노래로 계속 반성문을 쓸 거예요. 한국에서 살면서 제일 안타까운 건 어른들이 자기 못난 걸 몰라요. 애들 탓하지 말고 어른들이 반성문을 써야 돼요. 그러지 않고는 애들 못 고쳐요. 나는 정치·경제 개 코도 모르니까 음악으로 반성문을 쓸 겁니다. 우리 노래 듣고 돈 안 줘도 나는 상관없어요.”
그와 대화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기 어려워졌다. 그의 서가엔 문학 계간지와 디자인 전문지 ‘토털 일러스트레이티드’, 건축지 ‘아키월드’, 체코 사진가 얀 사우덱의 사진집, 자전거와 오토바이 관련 서적이 즐비했다. 한쪽에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 1001’ 시리즈 책이 6권 나란히 꽂혀 있었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이 적어도 6006가지는 되는 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