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35
5월24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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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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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9P81BC2404c
(김정원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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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오늘 5월 24일은 저희 살레시오 가족들에게 큰 축제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께서 각별히 사랑하고 의지하셨던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돈 보스코는 성모님을 바라볼 때 마다 출중하고 탁월한 능력을 지닌 변호사로서의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족하고 나약한 자신을 변호해주시고 중재해주시는 어머니, 자신이 펼치는 모든 사업에 늘 함께 하시며 자상하게 보살펴주시는 협조자로서의 어머니가 성모님이심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카나에서의 첫 번째 기적 사건은 성모님께서 왜 ‘도움이신’ 성모님이신가를 명백히 잘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사실 난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순간, 결정적인 공생활 시작의 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조용히 침묵 가운데 나자렛에서의 숨은 생활을 총정리할 순간입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여인이시오, 아직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서는 무리함을 무릅쓰고 아들 예수님께 졸라댑니다. 잔치의 전부 다 라고 할 수 있는 포도주가 떨어져 난감해하고 있는 혼주들의 딱한 처지를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맛있는 홍어 무침은 산더미처럼 준비되어 있는데, 시원한 막걸리가 떨어졌다면 얼마나 잔치가 밋밋하겠습니까? 더구나 유다 관습 안에서 혼례식을 일주일 내내 계속되는데, 혼주 입장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결례를 넘어 무례였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성모님이셨기에 무리한 요구인지 알면서도 예수님께 거듭 청을 드린 것입니다. 이처럼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딱한 처지, 난감한 상황을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선익과 구원을 위해서라면 체면이고 뭐고 다 던져버리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더라도 성모님은 도움이신 어머니이십니다. 말구유 탄생 이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아기 예수님이 직면했던 다양한 측면의 위협은 부지기수였습니다. 순간순간 성모님은 요셉의 도움을 받아 아기 예수님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무럭무럭 자라나 소년 예수로 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편으로 메시아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완전한 한 인간이셨습니다. 또래의 소년들에게처럼 의식주 전반에 걸친 어머니 성모님의 지속적인 도움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이르러 공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출가를 하십니다. 그 이후 성모님의 삶은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마음고생과 더불어 아들 예수님을 향한 밤낮 없는 기도로 매일 매일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삶은 아들 예수님을 위한 완벽하고도 철저한 도우미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아들 예수님의 아들인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한 성모님의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그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철저하게도 우리의 도우미이자 동반자, 협조자, 인도자이신 분이 성모님이 확실합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 고민과 걱정거리가 있다면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발치 아래 모두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성모님께서 도와주시고 중재해주시고 안내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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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gbGmCpq6_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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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죄에서 벗어나게 만드시는 원리>
오늘 복음에서는 ‘성령’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러 아버지께 가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의 어떠한 생각들이 변하게 되는지 살펴봅시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요한 16,8-11) 상당히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성령의 역할을 알면 단순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아서 서리를 많이 하였습니다. 시골 아이들은 더 많은 서리를 한 것을 더 큰 자랑으로 여겼지, 그것이 죄가 되는 줄은 몰랐습니다. 저의 이 서리 하는 버릇이 사라지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학교에 갔다 오다가 과수원에 들어가 설익은 배를 훔쳐 집에 들어와 깎아 먹고 있었습니다. 아마 중학생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서리가 도둑질로 여겨져 하나 훔쳐 가면 일 년 치 도둑맞은 것을 다 물어주어야 한다는 팻말이 붙어 있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어머니의 무서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거 훔친 거지?” 엉겁결에 아니라도 둘러댔습니다. 어머니는 따지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과수원 아저씨가 다 보고 계셨어.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엄마한테 그러셨어. 지금 딴 거는 잘 먹고 앞으로는 남의 것에 손대지 마!”
서리하다가 들킨 적은 한두 번 있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습니다. 무서울 것만 같았던 과수원 주인이 우리가 따가는 것을 보면서도 참아준 것도 그렇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점차 부드러워지는 것을 보아도 그랬습니다.
이 일에서 예수님은 어머니이십니다.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죗값을 치른 것입니다.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어머니는 그것을 참아낸 것입니다. 과수원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그분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어머니의 창피함을 받고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창피함을 통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용서’가 성령님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선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고 했음을 기억합시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면 저는 아직도 그때 서리 한 것이 죄인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음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도 죄를 지으면서 그게 죄인 줄 모를 것입니다.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의로움은 죄의 용서를 나타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해 어머니는 과수원 밭의 주인에게 가서 창피를 당하고 어쩌면 꾸지람까지 받아야 하셨습니다. 만약 어머니의 개입이 없었다면 우리는 1년 치 손해를 다 배상해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의로워지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을 가렸습니다. 자기 행위로 의로워지기 위해 거짓말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등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용서받으면 우리 죄는 그리스도의 중재 덕분임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심판받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숨고 가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드님의 가죽옷, 곧 성령으로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대신 뱀을 심판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들어오시면 우리가 아닌 우리 안의 뱀, 그 뱀들이 만든 세상, 그리고 그 세상의 주인인 사탄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그들이 이미 심판받았고 나는 그 주인만 바꾸면 그만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합리화를 멈춥니다.
죄는 성령을 받지 못해서 짓게 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이렇듯 내가 아닌 이 세상이 심판받았고 이 세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를 위로하기 위해, 내 죄를 용서해 주신 아버지께 너무 죄송해서 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죄에 대한 자기합리화는 다른 죄로 이어지지만, 성령으로 용서받은 죄는 그래서 죄가 거기서 끝나게 됩니다. 내 죄가 누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알고 또 내 죄 때문에 누구도 탓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죄가 사해지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성령을 받는 법은 우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씻어줄 능력이 있음을 믿지 못하면 내 죄는 계속 남습니다.
어떤 나라의 큰 공을 세운 형이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있는 동생을 위해 ‘사면권’을 받아왔습니다. 형은 동생에게 묻습니다. “동생아, 만약에 사면을 받게 되면 나와서 무슨 일을 하겠니?” 동생은 손으로 탁자를 치며 말합니다. “나에게 사형을 내린 재판관을 죽이고 나를 밀고한 인간도 찾아서 죽여야지.” 형은 돌아 나오며 사면권을 찢어버렸습니다.
형이 그리스도이고 임금이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그 사면권이 성령이십니다. 아무리 형이 사면권을 주고 싶어도 동생은 형을 믿지 않습니다. 형이 자신을 위해 다른 재산을 포기하고 자신의 사면권을 받아온다는 것은 그로서는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자신이 한 행위가 ‘죄’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아무도 심판할 수 없는 처지가 되기에 이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만약 형을 믿고 사면권을 받는다면 동생은 죄의 탓이 자기 자신보다는 그런 환경에서 살았던 것 때문임을 알고 자신이 속해 있던 환경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노력으로 죄에서 벗어납니다.
폴윤이란 목사는 미국 이민 가서 교회에 다니기는 했으나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갱단이 되었습니다. 마약이나 나쁜 짓은 기본이었습니다. 폴윤은 미국에서 추방당하여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역시 폭력배로 살았고 심한 마약 중독자였습니다. 또 감옥에 갔다 옵니다.
그러나 ‘기도’를 믿었습니다. 주님께 마약 중독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죽기 살기로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몸이 회오리바람에 하늘로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너무 무서워 눈을 뜰 수가 없다가 간신히 눈을 뜨니 하느님 옥좌 앞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닥은 정말 수정과 같았고 앞에서는 무지갯빛이 돌아가는 듯하였고 생명체들이 자기 주위에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바로 마약을 끊었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하느님 옥좌 앞에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얼마나 아프게 해드렸는지 알면 죄를 뉘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자리에 올라오게 한 회오리바람은 자기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게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일이 남습니다. 그도 한 달 뒤에 다시 유혹이 왔다고 합니다. 이제는 자기가 심판받은 이들과 함께 어울려서는 안 됨을 알고 목사가 되어 자기 주위를 선한 사람들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내 죄를 인식하게 되고 그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았으며 그래서 죄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 그것을 멀리하기 위해 그리스도 공동체에 머물게 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받아 주시는 성령으로 죄가 사해지는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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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오시리라>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5절) 제자들은 이 말씀 때문에 슬픔에 잠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7절) 말씀하신다.
그분이 떠나시는 것은 당신이 영광 속에 계시며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이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도 그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당신이 떠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온갖 다양한 선물을 주신다. 그리스도를 이제는 성령 안에서 뵙고, 제자들이 눈으로 그분을 뵐 때와 같이 그분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었다. 더 높은 차원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모실 수 있게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세상의 잘못된 생각을 밝혀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9절)이라 하시는 것은,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어서 당신이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지만 당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신을 믿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오신 빛을 거절한 것이다.
빛을 피하여 어둠 속으로 숨는 것 자체가 심판받은 것이라고 하셨다.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그분의 의로움을 입증하는 것이다. 바로 당신은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사셨음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분이 율법을 위반하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의로움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것을 우리 신앙인들의 의로움으로 깨닫게 해야 한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주님을 믿고 있으므로 그 의로움이 세상의 그릇됨을 밝혀줄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11절) 우리는 성령 안에서 큰 영광을 누리게 되며 그때 이 세상의 우두머리인 사탄은 단죄되며, 주님의 영광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며 원수들의 죄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는 사탄이다. 그 사탄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을 그릇된 방법으로 다스려 하느님을 거스르게 하기 때문이다.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알려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더욱 아버지와 아들을 잘 알게 하여 주실 것이고, 당신의 인도하에 살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성령께 열어놓는 자세가 필요하다. 언제나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려고 깨어있는 삶이 중요하다.
항상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삶이란 이렇게 깨어있을 때 가능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삶이 될 것이다. 순간순간의 우리의 삶이 기쁘고 아름답게 이어나갈 수 있는 삶으로 언제나 성령 안에 잠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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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보호자께서 오시면>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요한 16,8-11)
이 말씀을 쉽게 풀어서 다시 쓰면 이렇습니다.
1) 구세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다.
2)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증거다.
3) 사탄의 지배 아래에서 사는 자들과 사탄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으로 몰아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고,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 <구세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 벗어나서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냥 죄 속에서 살다가 멸망하겠다고 고집부리는 일이기 때문에, 믿음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됩니다. ‘죄’라는 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내가 예수를 안 믿는 것이 무슨 죄냐?”라고 말할 텐데, 그들은 죄 속에서 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고, 멸망을 향해 가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알아야 할 것을 알려고 하지 않아서 모르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구원 문제에서 어리석음은 죄가 됩니다.)
2)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증거다.>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고 증언합니다.(마르 16,19) 예수님이 구세주가 아니라면(죄인이라면) 승천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직접 목격한 일은, 그들의 믿음에 확신을 더해 준 일이었습니다. 물론 안 믿는 사람들은 승천 자체를 부정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서 ‘의로움’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분’, 즉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세주’를 뜻하고, 사람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했다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안 믿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고”라는 말씀은 ‘승천’을 뜻하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승천 후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셔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들 안에 현존하시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3)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그 일은 사탄과 마귀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 세상의 우두머리’는 ‘사탄’이고,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심판이 시작되었다.”입니다. 사탄과 마귀들에 대한 심판은, 사탄의 하수인처럼 사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사람들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사탄이 완전히 제거되는 때는 최후의 심판 때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성령께서 밝히실 것이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안 믿는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뜻이 아니고, 사도들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깨닫게 될 것이고, 그것을 세상에 선포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5-7)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 부활, 승천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라는 말씀은, 당시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이별만 생각하면서 슬퍼하고 두려워했음을 나타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라는 말씀은, “내가 떠나도 너희의 이로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로 해석할 수도 있고, “내가 승천한 후에 성령을 통해서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너희에게 더 이롭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사는 인간들에게는, 또 인식과 감각의 한계에 갇혀서 사는 인간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 예수’의 모습 그대로 백 년, 천 년 함께 사는 것보다 하느님이신 분으로서 성령을 통해서 모든 사람 안에 현존하시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한 일이 됩니다. (떠나시는 분은 ‘사람이신 예수님’이시고,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떠나셔야만 성령께서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떠나셔도’ 성령께서 오신다는 뜻입니다. (승천은 이별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들은 어떤 물증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 일들은 신앙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잘 받는 방법은 무엇인가? ‘기도’ 밖에 없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엘리사벳과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서 하신 일과 성모님을 찬양하는 말을 하는데(루카 1,41.67), 그것은 그들이 평소에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음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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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980년대의 기억들입니다. 한국천주교회는 대규모 야외행사를 기획했습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가 여의도에서 있었습니다. 박해와 시련을 견뎌낸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대규모 야외행사였습니다. 당시 저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전날 비가 조금 내렸지만 행사 당일에는 햇살이 가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구름 뒤에 십자가의 모습이 보였고, 그것을 찍은 사진이 있었습니다. 1984년에는 103위 성인의 시성식이 여의도에서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시성식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변방의 한국교회가 세상에 알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신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서울 신학교에서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이 성인품에 오르는 영광의 시간이었습니다. 1989년에는 44차 세계 성체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국제적인 큰 행사를 주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신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성체대회에 참가한 외국 순례자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1980년대에 대규모 야외행사도 있었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광야에서 외치는 진리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길을 만들었습니다. 불의와 폭력에 쫓긴 사람들은 교회를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은 학생들을 잡으러 온 경찰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 학생들을 잡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잡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뒤에 사제들을 잡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자들을 잡아가야 할 것입니다.” 경찰들은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였고, 학생들은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이 있었고, 성서 40주간이 있었고, 성서 100주간도 있었습니다. 레지오, 꾸르실료, 엠이, 구역모임은 신앙인들이 함께하는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단과학원의 강의처럼 예비자 교리에도 진리를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본당은 분가하였고, 신축 성당이 새워졌습니다. 제가 있던 본당도 지금은 7개로 분가되었습니다.
40년의 시간이 흘러 지금은 2022년입니다. 교회는 2021년 교회의 통계를 발표하였습니다. 65세 이상의 신자가 20%가 넘는 고령화 교회가 되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자는 전체 신자의 8%가 되었습니다. 물질과 자본이라는 마귀는 2000년 전에 예수님을 유혹했던 것처럼 여전히 교회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권위주의는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그 위선을 탓하였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것처럼 우리들의 신앙도 약해지고 있습니다. 팬데믹의 바람 앞에 쉽게 넘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더 이상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지 못한다면, 교회가 더 이상 불의와 폭력에 희생되는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기 마련입니다. 겨울이 가면 또 봄은 오기 마련입니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나왔듯이 교회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성령입니다. 진리의 성령께 의탁하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이 밝혀질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세상의 그릇된 기준은 무엇입니까? 부정한 여인을 돌로 치려했던 단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 이들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의로움을 독점하려고 하는 권위주의입니다. 의로움은 권위주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봉사에서 드러납니다. 십자가를 지는 희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빌라도의 심판은 불의한 심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보기 전에 내 분에 있는 큰 들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감옥에 머물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모든 것을 버린 바오로 사도의 행위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목숨을 버리려했던 간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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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지난 주일부터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보호자’이시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어떤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일까요? 특별히 ‘죄’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공동 번역 성서는 이를 좀 더 뜻을 살려 번역하였습니다. 곧 “그분(성령)은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윤리적 비도덕적 행동이 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자비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기만을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제 죄는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그 잘못에서 돌아서지 않는 것이 됩니다. 실수와 잘못이라는 수렁 속에서 “나는 죄인이다.” “나는 구원받을 자격조차 없다.”라고 자책하며,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진정한 죄라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굳게 믿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구원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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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윤정환 이냐시오 신부님]
<스승님, 어디로 가십니까?>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승천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제자들은 다시금 두려움에 휩싸이고 걱정이 가득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도 그렇게 허망하게 가시더니 또 어디를 가신다는 말입니까, 저희는 어쩌라구요?"
제자들의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은 그들을 다독여 주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지 못하신다."(7)
예수님은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셨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들 스스로가 일어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야 할 때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오월은 스승의 날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탄생일이기도 한 그날은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1964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내고 있지요.
국어사전에서는 "자기(스스로)를 가르쳐서 남을 인도하는 사람"을 '스승'이라 합니다. 자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삶의 지혜를 전달하고 보여준다는 말이겠지요. 그래서 스승이 된다는 것, 스승 노릇을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예전에는 "스승과 어버이는 하늘과 같다"고 했다지만, 요즘은 하늘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거나 심지어 아예 밑에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눈높이 교육'이 강조되고 학생이 원하는 데로 가르쳐야 할 지경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럴수록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는 물론 그 책임까지도 사라져버리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스승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역할도 그렇지요.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줄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생각처럼 그럴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 말고 반드시 있어야만 할 것들 말이지요.
숨 쉴 공기나 마실 물과 같은 생존과 직결되는 것은 접어두더라도 예컨대, 건강이나 돈, 혹은 배우자나 자녀들, 아니면 평생을 투신할 직업, 자신이 믿는 종교나 우정을 나눌만한 친구 혹은 존경하는 선생님 등등 꼽아 보면 참 많은 것들이 있겠지요.
하지만 과연 이런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지를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이 세상의 가치들을 따라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님의 신비한 힘에 이끌려 쇠사슬을 풀고 자유로운 몸이 됩니다.(사도 16,26) 그 어떠한 세상의 권력도 그들을 속박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대목이지요.
하지만 오늘 독서에서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은 것은 바오로 사도가 아니라 그를 지키던 간수였습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가 탈옥한 것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고 자살하려고 하였지만,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듣고 회개하여 그의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습니다. 세상의 가치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선물을 받은 것이지요(사도 16,33).
오늘 복음에서도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혀주실 것"(8)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세상을 단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가치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치에 묻혀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우리 자신을 바로 알게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참 스승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참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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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간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며,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하느님께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유익한 점은 무엇입니까?
첫째 :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영적인 구세주로서 모든 인간들에게 다가가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세상 끝날 때까지 모든 세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모습으로 유다 나라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눈에 보이는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믿음의 기초를 놓아 주신 다음 이제 시간과 공간에 매어있는 범위을 넘어서, 영적으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육신의 모습을 취하여 계시는 한에는 만나면 헤어져야 하고,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받으시나, 그러나 영에는 제약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부활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믿음의 대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대상으로 바꾸심으로써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더 가까이 더 완전히 함께 계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성령으로 하느님의 영으로서 다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시어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의 마음을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때에 자기들이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사도행전 2, 37에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자기들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실을 다시 이야기로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은 찔렸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다시 들었을 때 무거운 죄의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또한 오늘에 우리들에게도 죄의식을 주는 것은 무엇이며 십자가 앞에서 몸을 낮추게하는 힘은 무엇이겠습니까?
인도에 어떤 마을에 한 선교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 수난에 관한 슬라이드를 보여 주고 있을 때, 십자가의 장면이 벽에 비추워졌습니다. 그 그림을 보던 한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가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쳐다보고는 "내려오십시오! 당신이 아니라, 제가 그곳에 달려야만 합니다"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셋째, 진정한 회개 이후엔 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오늘에 우리들도 우리 자신이 "자신이 진 죄에 대한 죄의식 없이 구세주가 나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유다 나라에서 범죄자로 못 박힌 한사람의 모습이 어찌하여 여러 세기를 통하여 오늘날까지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처럼 괴롭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죄에서 깨닫고 일어나 해방의 기쁨, 죄에서의 자유의 기쁨을 주시고자 모든 이의 마음속으로부터 일깨워 주시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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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오창일 요아킴 신부님]
<우리도 예수님처럼>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시지만, 그 대신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보호자’로 오시는 성령께서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6,5)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매일매일 따라다니며 그의 곁에 있는 그림자가 있었지요. 그림자는 항상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림자에게 잘해주었고 그림자는 말없이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질투 많은 바람이 그에 곁을 지나며 말했습니다. "왜 그림자에게 잘해주세요?" 그러자 그는 "그림자는 항상 내 곁에 있어주기 때문이지." 하고 말했지요. 바람이 다시 말합니다. "아니에요. 그림자는 당신이 기쁘고 밝은 날만 잘 보이지, 어둡고 추울 때는 당신 곁에 있지 않았다고요."
생각해보니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힘들고 슬프고 어두울 때는 항상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림자에게 "더 이상 내 곁에 있지 말고 가버려라." 하고 말해버렸지요.
그러자 그 한 마디에 그림자는 조용히 사라졌답니다. 그 후 그는 바람과 함께 즐겁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잠시 스친 바람은 그저 조용히 사라져버렸습니다.
너무나 초라해져 버린 그는 다시 그림자를 그리워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림자야, 어디 있니? 다시 내게 와줄 순 없을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말에 어디선가 그림자는 다시 나오고 조용히 그에 곁에 있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림자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난 항상 당신 곁에 있었답니다. 다만 어두울 때는 당신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냐구요? 힘들고 슬프고 어두울 때는 난 당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아마도 당신은 저를 바라 볼 수가 없었나 봐요.”
우리는 힘이 들 때 정작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걸 잊고 삽니다. 그리고 세상에 혼자 남겨져 있다고 생각하면 그 아픔은 두 배가 되어버리지요. 하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단지 그 분께서 너무나 가까이 계셔서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그림자처럼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특히 어두움으로 표시될 수 있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는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십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하여 당신이 잠시 계시지 않다가 다시 오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시는 ‘생명의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성령을 파견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5) 파견을 받은 성령께서는 그 계획을 다시 취하시고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와 더불어 온전히 실현하십니다.
곧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공동체를 위하여 그 계획을 해석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과 당신을 충실하게 하십니다.(성령의 기능)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막 감옥에 들어온 무기수였습니다. 언제 나가게 될지, 어떻게 이 좁은 공간에서 지내야 할지 막막했던 그는 교도소장을 향해 간절한 청원을 한 가지 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테니 교도소 마당 한 귀퉁이에 정원을 가꾸게 해주십시오.” 새로 부임한 교도소 소장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는 처음엔 손길이 많이 가지 않아도 잘 자라는 고추와 양파를 심었습니다. 씨를 심고 그것이 자라자 그는 작은 만족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에는 장미도 심고 작은 묘목의 씨앗도 뿌렸습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그는 정성스럽게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비록 내가 지금은 자유의 몸이 아니지만 이 정원을 돌보듯이 나 자신을 돌봐야겠구나, 또 이렇게 씨를 뿌린 다음 지켜보고 경작하고 결과를 추수하는 정원사의 일이 큰 보람과 기쁨을 주는가…’
교도소 마당의 귀퉁이에 무언가를 심고 가꾸던 그는 이십칠 년이 지난 후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입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앞날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헤아리고 헤쳐나갈 때 분명 주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우리 주님은 참으로 가난하고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세상에 오실 때 당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셔서 세상에 오셨고, 모든 일의 시작에서부터 끝을 당신 뜻대로 행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느님께 맡기는 가난과 겸손을 보여 주셨으며, 협조자이신 성령께 당신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시고 마치시는 분이심을 깨닫고, 모든 것을 안배해주시는 성령의 뜻을 따라 마음의 정원을 가꾸며 살도록 합시다. 오늘도 그분 안에서 힘을 얻고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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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바름과 그름>
요한 16,5-11 (성령께서 하시는 일)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바름과 그름>
바름은
바름을
바름이라 하고
그름은
그름을
바름이라 하네
바름은
그름을
그름이라 하고
그름은
바름을
그름이라 하네
바름은
바름으로
마침내 드러나고
그름은
그름으로
마침내 드러나니
그름이
득세하여도
오직 바름이어라
그름이
살길이어도
죽어도 바름이어라
그름은 사라지고
마침내
바름만이 남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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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떠나 보면 알거야>
5월을 가장 좋은 계절이라고 했는데 옛말이 되었습니다. 이미 한여름의 열기가 숨을 몰아쉬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봄은 분명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이 생명은 겨울의 쓸쓸함 속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봄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여름, 가을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화창한 날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비오는 날을 뛸 듯이 좋아합니다. 어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둠이 빛을 더 빛나게 하고 그래서 그의 소중함도 더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새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빛은 빛으로써 존재하고 있었고 어둠은 어두움대로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호자 성령께서 증언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세속의 권력자들이 하느님의 정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판하려고 하려고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지금 새로운 법을 만든 잣대로 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잘못된 것을 지금 알게 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야기(루카 15,11-32)를 보면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게 되었고 아버지 집의 충분하고 넉넉한 풍요로움을 새롭게 깨우쳤습니다. 그는 집을 나가서 밑바닥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아버지 집에 돌아와 아무 조건 없이 껴안아 주시는 아버지의 품에서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깨달아 안다는 것은 잊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 떠나 보면 알게 됩니다. 자기 삶의 자리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한발 물러서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 한발 물러서 보십시오. 지금 자리를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를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지금 처지에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꽃자리 / 구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어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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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3월 어느 주일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성지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지금 임종하실 것 같으니 병자성사를 달라는 전화였습니다. 곧바로 가겠다고 했고, 병자 성유와 성수 그리고 예식서를 들고 운전해서 환자가 있는 곳으로 급하게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운전해서 가는 동안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솔직히 그날 몸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비염이 갑자기 심해져서 코가 막혀 말하기도 힘든 상태였거든요. 더군다나 병자성사는 보통 본당 신부님께 청하고, 환자분이 있으신 곳 근처에는 수도원과 신학교가 있어서 신부님도 많았습니다. 따라서 굳이 거리가 떨어져 있는 성지에 청할 것은 아니지 않나 싶었습니다. 코가 막혀서 말하기도 힘드니 더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환자가 있는 요양원에 도착하자마자 운명하셨고, 저는 유가족들과 함께 마지막 기도를 함께 바쳤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저를 찾아주신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인해 불평의 마음이 들었던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몸 상태보다 분명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 성사를 드리며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가장 중요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부정적인 생각만 했던 것입니다.
어떤 부정적인 마음이 들 때, 과연 그런 생각이 중요한 것인지를 먼저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삶을 살면서 커다란 기쁨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가까웠고, 이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이별은 제자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가져왔습니다. 근심으로 가득 차서 정신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는 이 이별이 영광으로 돌아가는 이별이며, 제자들에게는 주님 대신에 하느님의 일을 맡게 되는 시간을 알리는 이별입니다.
지금 상태로는 주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을 대신하여 세상을 구원의 길로 이끄실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령은 세상이 저지른 죄를 꾸짖고 깨뜨린 정의를 되돌리고 그릇된 심판을 바로 잡아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오히려 이롭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성령을 받은 뒤에는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알리는 중요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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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교활동의 본질적 요소>
-성령과 환대-
참 아름답고 겸손하고 매력적입니다. 끊임없는 위로와 힘을 주니 참 감사합니다. 숨겨져 있으며 할 일을 다합니다. 바로 보호자 성령과 환대의 사람이 그러합니다. 선교활동의 본질적 두 요소가 성령과 환대입니다. 참으로 향기롭고 겸손한 성령이요 환대의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떠나도 향기는 남는다
바람처럼 왔다가
향기만 남기고 떠나신 분
몇 년만에 고백성사차 방문하셔서
잠시 겨우 한 시간 머무는 동안도
민첩한 손놀림으로
빨간실로 행주 둥글게 뜨개질 하여
선물로 남기고 가신 분
은은한 향기
꽃처럼 남기고 조용히 떠나신 분
사람은 떠나도 향기는 남는다”-2007.5.
15년전 써놨던 시가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지금도 향기로 남아있는 정말 아름답고 겸손한 분입니다. 어제 세상에 숨겨져 살다가 5월이 되자 나타난 옛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 당시는 13살이었는데 이제는 환갑에 육박한 58세 노년에 접어든 순수한 제자들 몇이 스승의 날은 지났지만 선물 가득 안고 찾아와 동심童心 가득한 빛나는 얼굴로 동요童謠들을 불러 줬습니다. 성령의 선물같은 제자들은 떠났어도 지금도 은은한 향기로 남아있습니다.
“지나가다 멈추었다
향기맡고 뒤돌아 발견한 꽃
하늘 향기
아카시아꽃 그윽한 향기
당신 겸손의 향기
당신 존재의 향기
당신 추억의 향기
당신 사랑의 향기로 삽니다”-1998.5
아까시아꽃이, 자귀꽃이, 장미꽃이, 찔레꽃이 바로 그러합니다. 향기맡고 뒤돌아 보고 발견하는, 이런 꽃같은 주님을 닮은 사람이 바로 성령의 사람, 환대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성령에 감사하고 성령을 사랑하십시오. 환대에 감사하고 환대를 사랑하십시오. 성령이 얼마나 고마운지는 성령에 관한 많은 성가들을 통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보호자 성령이, 제1독서 사도행전은 환대의 사람, 리디아가 주인공입니다. 선교활동의 본질적 두 요소가 보호자 성령이요 환대의 사람임을 입증합니다. 온갖 시련과 고난을 백절불굴의 믿음으로 이겨내고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는 분이 숨어계시며 활동하시는 성령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예수님이 바로 성령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이런 증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순전히 성령의 은총입니다. 사람들이 제자들을 회당에서 내쫓김의 박해를 당해도 건재할 수 있음도 성령의 은총입니다. 마음의 고질병인 무지無知에 대한 답도 진리의 영, 성령뿐입니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나도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아버지도 예수님도 성령도, 즉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르기에 이런 무지한 폭력입니다. 사람이라고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에 닫혀 있는 무지의 사람들이 예나 이제나 문제입니다. 광야 여정중 급기야 이념에 중독된 극단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잔인하고 사나운 괴물이, 폐인이, 광인이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선교활동에 본질적인, 한결같은 도움을 주는 성령입니다. 제가 이렇게 평생, 매일 흐르는 “강”처럼 강론을 써서 마침내 강론의 “바다”를 이룬 것도 순전히 성령의 힘이자 은총입니다. 가톨릭 교리서의 성령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느님을 계시해 주시는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살아 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진리의 성령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신다’. 참으로 하느님다운 ‘숨김’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분을 아는 것은 성령께서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교리서687항)
참 겸손하고 멋지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성령입니다. 참으로 ‘성령의 사람’이 이러합니다. 어제 갑자기 눈에 띈 참으로 하찮은 개망초꽃들이 참 예뻤고 다음같은 시를 썼는데 성령의 은총이라 믿습니다.
“꽃은
다 예쁘다
사람도
다 예쁘다
주님은
다 예뻐하신다”
제1독서 환대의 사람, 티아티라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하느님을 섬기는 리디아 역시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로운지요!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시니 바로 성령의 은총이요, 이어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으니 이 또한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의 은총은,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 말하는 리디아의 바오로 일행에 대한 자발적 기쁨의 환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이어 영문 주석도 소개합니다.
‘리디아의 환대와 보호자 성령은 공통적인 어떤 점을 지닌다. 교회의 삶과 일에서 그들 각자의 역할은 본질적이나, 배후에 숨겨져 있을뿐 “표면에 나서지 않음”으로 특징지어 진다. 그러니 성령과 환대, 그들은 결코 교회의 정신과 기억에서 결코 사라져선 안된다.’
‘표면에 나서지 않음(self-effacement)’이란 말마디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느님다운 겸손의 표현입니다. 바로 성령과 환대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겸손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겸손하고 향기로운 성령의 사람, 환대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시편149,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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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A9hyeCnwM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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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 7)
언제나
최선을
다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보호자이신
성령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이시다.
우리를 향한
구원의 역사는
어느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다.
끊어 주어야
새로워질 수 있고
떠나야 다시
만날 수 있는
삶의 기쁨이다.
사랑은 끝이
아니라 늘
시작이다.
너와 나를
지켜주시는
성령이시다.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
우리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떠날 수
있으시기에
어디로
가야할지도
아신다.
아픔 없이
새 역사는
시작되지 않는다.
죽어버린
역사의
이야기가 아닌
살아계신
성령의
활동이 되신다.
그릇되고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는
성령이시다.
떠나보내야
오늘을
살 수 있는
우리들 삶이다.
성령과 함께
이르러야 할 곳은
구원의 자리이다.
과거와 현재가
살아계신
성령 안에서
살아있는
시간이 된다.
만남과 떠남으로
구원이
되어 오시는
성령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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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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