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란 상품과 같이 가치를 지닌다
소쉬르의 언어학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소쉬르가 직접 쓴 저서를 통해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이 집약된 《일반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 1916)는 소쉬르가 직접 쓴 책이 아닌 그가 자신의 모국 스위스의 주네브(제네바) 대학에서 했던 강의를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소쉬르의 동료 및 제자였던 샤를 발리(Charles Bally)와 알베르 세슈에(Albert Sechehaye)가 소쉬르의 강의안과 학생들의 노트를 참조로 정리하면서 탄생되었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은 1913년 소쉬르가 사망하고 난 후 3년이 지나서였다. 그는 자신의 강의가 책으로 출간되어서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조가 됨으로써 언어학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이 책에 담긴 언어학의 핵심 내용이 정확하게 소쉬르의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소쉬르 연구가들의 꼼꼼한 연구는 이론의 여지 없이 이 책에 담긴 언어학적 구상이 정확히 소쉬르의 일관된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혔다.
그 사실은 흥미롭게도 소쉬르가 언어학 이외에 관심을 두었던 신화에 대한 연구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소쉬르는 전통적인 북유럽의 신화를 연구하면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그는 북유럽의 많은 신화들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각기 달리 불리지만 사실상 동일한 인물임을 확인하였다. 가령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유럽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관한 신화는 비록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북유럽에서도 존재한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인물이 사실상 동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신화의 스토리 구조가 갖는 유사성에서 비롯되며, 달리 말하면 주인공이 다른 인물들과 맺는 관계에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인물이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었다면 설혹 시대적 배경이 현대라 하더라도 그 인물이 오이디푸스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 인물이 아버지 및 어머니라는 주변 인물과 맺는 관계 때문이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만들어진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2003)라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난봉꾼 ‘조원’이라는 인물과 프랑스 영화 〈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 1959)에 등장하는 ‘발몽 자작’은 시대적, 인종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스토리 구조상 주변 인물들과 맺는 관계에 의해서 동일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소쉬르가 신화에서 주목한 사실은 지역적으로나 시기에 따라 신화의 주인공 혹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바뀐다 하더라도 동일한 인물임을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한 인물의 의미는 명칭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뜻이다. 이는 언어 혹은 기호의 의미는 어떤 특정한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닌 다른 기호와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소쉬르의 언어학적 전제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기호는 어떤 고정된 외부의 대상을 지시한다기보다는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그 의미가 결정된다는 이러한 급진적 생각은 이후 알기르다스 그레마스(Algirdas Julien Greimas, 1917~1992)의 기호학에서 더 구체화된다. 가령 원론적으로 단순화시켜서 생각하자면 ‘남성’이라는 기호는 어떤 특정한 대상을 지시한다기보다는 ‘여성’이라는 기호와 대립함으로써 그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다소 생뚱맞게도 소쉬르는 언어 혹은 기호의 의미를 가치(valeur)라고 부르고 이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에서의 경제적 가치이론과 비교하였다. 그가 언어 혹은 기호의 의미를 가치라고 부르는 이유는 결국 기호의 의미가 경제적 가치와 마찬가지 메커니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스미스와 리카도 및 마르크스와 같은 고전적인 정치경제학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이 지닌 물질적 성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며 미리부터 정해진 것도 아니다. 가령 치약의 경제적 가치는 그것이 이를 닦는 데 사용된다는 물질적 특성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러한 특성이 물건이 상품이 되게 하는 조건은 될 수 있지만, 정작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상품과 얼마만큼의 비율로 교환되는가 하는 것이다. 치약이 천 원의 가치를 지닌다면 그 치약의 물질적 가치가 천 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천 원짜리 물건과 등가적으로 교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상품의 가치는 전적으로 교환체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소쉬르가 언어의 의미를 가치에 비유한 것은 곧 언어의 의미(가치)가 다른 언어와의 교환체계에서 비롯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언어란 상품과 같이 가치를 지닌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