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가 사용한 컬러 카메라는 canon scoopic으로 컬러 카메라 였습니다.
저 외국여성 앞으로 보이는게
필름통일겁니다.
+++++++++++++++++++++++++++++++++++++++++++
이하는 제 상상으로 이전에 시클에 올렸던글입니다.
+++++++++++++++++++++++++++++++++++++++++++
북특수군600명이 넘어왔으면 공수부대원과 왜 전투를 벌이지 않았냐고?
북특수군이 광주에 600명이나 침투할 정도라면 그 실력으로 청와대를 가서 싹쓸이 하면 된다고?
김일성이 늘 주장하던게 미군철수 없이는 적화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북특수군 100만명이 넘어와 대한민국 국군을 다 사살한다 하더라도
미군이 있는한 적화통일은 불가능이다.
북특수군 600명 초기 임무는 광주에서 폭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일이었다.
그 방법이 시체를 훼손시켜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우고 유언비어를 퍼트려 폭도들을 광분시키는것.
무기고를 털어 폭도들을 무장시키는것.
또 한가지가 이를 영상에 담아 전세계에 대한민국 국군이 자국민을 학살한다는
언론플레이를 하여 미국 국민들 여론에 영향을 주어 주한미군이 철수하게 만드는
일이었고 힌츠페터가 그 영상물을 전파하였다.
이는 황장엽 증언에도 잘 나타나 있다.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fnkradiob201&page=4&command=body&no=119
힌츠페터는 운전기사에 의해서 길을 안내 받습니다.
운전기사는 힌츠페터가 좌빨들이 즐겨쓰는 감성팔이 장면을 찍도록 유도합니다.
계엄군과 폭도들의 진압 시위 장면은 다른 요원들이 찍고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엄군과 폭도들의 충돌장면을 찍어야 하는 요원들은 광주를 떠날수가 없었습니다.
운전기사와 일행은 감성팔이 장면과 요원들이 촬영한 영상물을 가지고 해외 언론에
전달할 배달부가 필요했던겁니다.
요원들과 힌츠페터는 옥상에서 접선을하여 영상물을 넘겨 받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광주를 떠나 자신이 촬영한 영상물과 요원들이 넘겨준 영상물을
독일에 전달하기로 계획이 섭니다.
20일 새벽 4시경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이는 살인사건이 났다는 신호와 동시에 감성팔이 촬영을 오라는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감성팔이 촬영물중 시체팔이 장면을 연출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날 촬영한것은 밝게 웃고 춤추는 폭도들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변수가 발생합니다. 운전기사와 일행은 힌츠페터에게 나가서 촬영할것을
권유했지만 겁이 많았던 힌츠페터와 녹음기사 헤닝은 나가지 않겠다고 한겁니다.
김재화 김만두 촬영은 이렇게 물건너 갔습니다.
동이 틀때 즉흥적으로 감성팔이 장면을 연출하라 지시를 합니다.
날이 밝아야 촬영할 용기가 날 두사람에 대한 배려차원이었습니다.
총성이 울리고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대학생이라고 우기는 요원들이 그 건물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힌츠페터에 촬영을 권유한 기사와 함께 건물로 들어갑니다.
여러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시체 두구를 건물밖으로 실어갑니다.
이장면을 창가에서 힌츠페터는 촬영하게 됩니다.
힌츠페터는 21일 새벽 총소리를 듣고
누군가 사실을 확인하자고 권유햇는지
나가지 말자고 말했다 했습니다.
따라서 새벽 4시경 난 총소리에 누가 죽엇는지는 죽인사람만 알뿐입니다.
그런데 21일 아침
힌츠페터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불구경을 가고싶엇는지 아니면 소란스러워서였는지
어떤 건물쪽으로 갔습니다.
여기서 1.5톤 트럭으로 보이는 차량에 시체 두구실는 장면을 건물 2층 정도 위치에서 촬영을 합니다.
촬영 된것을 보면 힌츠페터는 대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막고있는 건물에 들어가
건물속 현장에 있는 최소 3구 이상의 시신들을 확인하고 건물 2층 정도의 창가에서
1.5톤 트럭에 시신 두구 싣는 장면을 촬영합니다.
그리고 힌츠페터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여지껏 저는 5월 21일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이렇게 3명이 사망한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사진이 김만두 김재화 사진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래 사진은 21일 아침 힌츠페터가 찍은 촬영장면입니다.
5월 말이긴 하지만 밤과 새벽은 일교차가 큰 관계로 몹시 쌀쌀했을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긴팔과 긴내의을 입고 다녓을겁니다.
그런데 위 김만두 김재화 사진과 아래 힌츠페터가 촬영한 영상에서 옷과 내의가 다릅니다.
위 김만두 김재화 사진은 왼팔에 무늬가 없고 내의에 피가 묻어 있습니다.
밸트를 한 시신은 혁띠를 차고 내의가 없습니다.
아래 사진에서는 줄무늬 겉옷에 피묻지 않은 내의 왼팔부분에 확연히 보이고 잇습니다.
이영상은 힌츠페터가 건물 내부에서 촬영한 시신입니다. 턱부분에서 광대뼈쪽으로 총알이 관통한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위 김재화 김만두 시신에서는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이는 힌츠페터가 21일 아침 어떤 건물에 가서 촬영하게된 배경은 새벽4시 총소리때문이 아니라
21일 아침 총소리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어찌 되었건
힌츠페터가 촬영한 시신들이 김재화 김만두 이북일? 이 아닌건 분명한거 같습니다.
그럼 21일 사망한 사람들은 3명이 아니라 최소 6명 이상이 되는겁니다.
힌츠페터 말에 의하면 건물 내부에는 시신들이 더 잇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21일 아침 계엄군과 전혀 무관하게 일어난 사건임이 너무나도 분명해서
모르쇠로 일관한게 아닐까요?
.
.
.
.
시민들이 총을들고 장전을 하고 방송국이 불타는걸 촬영하고 싶었지만
운전기사와 일행은 시간을 재촉합니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간 힌츠페터는
촬영물을 보내고 마이니치 신문을 한부 삽니다.
일본 언론기사를 통해 21일 광주속보상황을 알고싶었기 때문입니다.
광주폭도들에 의해 광주가 장악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힌츠페터는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뉴욕타임즈에 실린 위 사진은 미국날짜로 22일 발간 되었습니다.
푸른눈의 목격자 방송분에 나오는 힌츠페터는
21일 광주를 빠져나와 21일 저녁 일본으로 가서 필름을 독일로 보낸후 3시간 가량을 머물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옵니다.
23일 경계를 뚫고
다시 힌츠페터는 광주로 잠입하게 됩니다.
21일 밤 힌츠페터가 가져온 마이니치 신문에도 뉴욕타임즈에 실린 똑같은 사진이 삽입되어있습니다.
의문의기자?는 힌츠페터보다 더욱 신속하게 광주를 빠져나와 일본으로 갔던지
아니면 다른 통신수단으로 사진을 전송했다는 말이 됩니다.
위 사진으로 보면 폭도들이 무기고를 털어 신나게 광주일대를 휘젓던 21일 오후기 때문입니다.
의문의기자?가 통신수단으로 여유롭게 사진을 일본으로 혹은 미국으로 전송했다면
힌츠페터는 왜 비행기를 타고 직접 일본까지 갔을가요?
1959년에 미국의 주가 된 알래스카와 하와이는 1965년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실시했다. 아시아
최초로 컬러방송을 실시한 일본에서는, NHK, 도쿄 방송, 요미우리 TV에서 1960년 9월 10일부터
NTSC 체계의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실시했다.(NTSC-J라 불린다.) 필리핀은 1966년 아시아에서
NTSC 기준에 있는 컬러 텔레비전을 방송하여 일본에 이어서 컬러방송을 하는 두 번째 국가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1977년부터 이미 칼라 텔레비전을 제조하여 수출하고 있었으며, 방송국들
도 이미 1974년부터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박정희 대통령
의 반대로[1] 방송하지 못하였지만, 제5공화국 3S정책 일환으로 시작하게 된다. 1980년 12월 1
일에 KBS 1TV에서 (단,KBS 2TV 와 MBC는 1980년 12월 22일부터) 대한민국 최초로 컬러 텔레비
전 방송을 시작하였으며, 완전한 컬러 텔레비전 방송은 1981년 1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C%BB%AC%EB%9F%AC_%ED%85%94%EB%A0%88%EB%B9%84%EC%A0%84
우리나라는 컬러 방송을 할능력은 있었지만 80년 당시 컬러 방송을 하지않았고
카메라를 운용하지 않은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서울 방송국에만 컬러방송을 할수있는 장비가 있었다 합니다.
또 컬러방송을 할수있는 카메라 장비를 다루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라고도 합니다.
힌츠페터는 20일 광주에 입성했고
그가 사용한 컬러 카메라는 canon scoopic으로 컬러 카메라 였습니다.
5월 18일에 컬러 카메라를 가지고 힌츠페터보다 광주에 먼저 입성한
의문의기자?는 누구일까요
.
.
.
.
서울로 돌아온 힌츠페터는 운전기사와 일행의 권유로 김영삼이 가택연금당해있는 장면을
찍으러 가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22일쯤이면 힌츠페터가 보낸 영상물이 전세계를 돌고 세계여론은 한국정부를 질타하게 될것이고
미국정부또한 곤란에 처할것이라 예상합니다.
또 광주폭도들이 광주를 장악했으니 전국적으로 폭동이 번질것이라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광주에 잠입해있던 요원들로부터 긴급히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습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겁니다.
일파 만파로 번져나갈줄 알았던 폭동이 총기를 반납하거나 총기를 잘 받지 않고
피난을 가는 겁니다.거기에다 한국언론은 정부 통제에 잘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를 급히 감지한 요원은 작전이 실패한것이라 판단하고 훗날을 위해 감성팔이
촬영모드로 돌입합니다.
23일 제집드나들듯 힌츠페터와 운전기사 일행은 광주로 들어갑니다.
실망이 컷지만 감성팔이 촬영을 멈출수는 없었습니다.
.
.
.
.
.
북괴 의도대로 흘러간 세계여론
1980년 북한이 대남적화를 위해 필요했던건 미군 철수였습니다.
만약 5.18폭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우리 계엄군의 한계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미군이 철수를 하지 않으면 북괴군은 남침을 쉽게 할수 없었을겁니다.
따라서 미군이 철수할 명분을 줘야 하는데
그역할을 힌츠페터한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니 그가 자처했을지도 모릅니다.
월맹은 베트남을 적화통일하기 위하여 월남의 우방국들 그중에서도 미군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언론을 통하여 반전여론을 형성시키는데 성공하였고 그 주인공은
미군 폭격에 화상을 입고 울부짖는 소녀였습니다.
북괴는 1980년 대한민국에 혼란을 부추기고 베트남적화통일의 교훈을 실천하기 위하여
월맹소녀역은 광주시민을 네이팜탄역은 계엄군으로 설정하고 대한민국 군인의 잔인성을
주제로 전세계와 미국 국민들에 생생한 영상으로 보여주어 미군은 자국민을 살육하는
독재국가로부터 철수하라는 여론을 형성 하고자 외신기자들이 필요했을겁니다.
북특수공작원 600명이 광주에 침투하여
군차량을 탈취하고 44개 무기고를 탈취하는것보다
힌츠페터의 역할이 몇백배는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힌츠페터는 단 2일동안 전세계가 경악할 영상물을 챙겨 광주를 21일 떠나야 했던겁니다.
광주시민들 처럼 장발을 하고 청바지를 입어야 했던 북특수공작원 이라면
미군철수를 위해 언론플레이를 해야할 핵심주역들은 외국인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언제 어디서든 의심도 덜받고 촬영과 영상자료 전송을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KBS 가 방영한 푸른눈의 목격자에 나오는 외신기자들의 멘트는
북괴공작이 성공했다는걸 의미합니다.
미국 CBS 뉴스 - 정부는 광주사태의 원인을 공산주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고 왜곡함으로써 시위가 계엄령 반대와 군부의 과잉진압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숨기려하고 있습니다. 광주에서 cbs 뉴스 브루스 더닝이었습니다. -
미국 ABC 뉴스 - 전두환 장군과 소수의 선택된 장군들이 민간 정부를 완전히 무시하고 새로운 혁명의회를 구성해서 군사독재를 감행하려 하고 있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광주사태와 더불어 군사독재의 가능성이 우려되고 있습니다.
푸른눈의 목격자 풀버젼 http://purmeice.tistory.com/175
감독: 김정일
주역: 힌츠페터
조감독:조총련,고정간첩
무대세트: 북특수부대 600 명,외신기자
한국인들도 전혀 모르고 있었던 힌츠페터의 광주영상은 그날 다시 유로비젼을 통해
유럽전역에 방송이 되었고 매시간 뉴스로 나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미국에서도 그 필름은 그대로 방송되었다.
힌츠페터의 광주영상은 한국을 제외한 세계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이다.
동영상속 의문점~
위사진에서 볼수있듯이 힌츠페터와 동행한 독일인 한명외에 동양인으로 보이는 남자 3명이 등장합니다.
영상에서는 힌츠페터가 운전기사만을 언급하고 다른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일체 화면속에 등장하지를 않습니다.
운전기사가 통역까지 맡았다면 나머지 두사람은 왜 동행했을까요?
좌측이 힌츠페터 녹음기사 해닝 입니다.
여기서 의문은 두명의 국제자문위원회 젊은이 2명을 만났다고 했는데 사진 촬영자를 합하여 3명이 더있습니다.
사진은 운전기사가 찍었다면 국제자문위원회 2명을 제외한 나머지 2명의 신분은 왜 밝히지 않았을까요?
또한가지 이상한점은 5.18을 선전하는 쪽에서 가장 중시하는 부분중 하나가 외신기자와 외국인들입니다.
외국인들의 증언에 대하여 발굴하고 알리는데 주력하는 그쪽사람들 자료중 국제자문위원회 2명에 대한 증언이나
기록을 볼수가 없습니다.
만일 국제 자문위원회 소속이라는 2명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게 아니라면 왜 이들의 증언은 없는걸까요?
힌츠페터 일행은 20일 광주입성했는데 그 이전 영상을 이들로부터 인계받는 장면이 아닐까요?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그들에게 지난 며칠동안 무엇을 겪었는지 물었다. 그들도 기꺼이 승낙했고 그리고 그 사진에있는 지붕위에서 우리와 인터뷰를 했다. 그 때 그들이 목격하였고 다행히 우리가 보지 못한 그 끔찍한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군인들이 폭력을 쓰고 학대하면서 시위대를 진압했다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잔혹함이 처음 며칠동안 일어났던 것이다.]
베트남 종군기자로 활동했었던 힌츠페터는 80년 한국에서의 기억을 베트남전쟁보다 더 참혹하다했다는데
그 참혹함이 폭력 학대하면서 시위진압한거라니 참으로 해괴합니다.
이자의 영상물에는 광주시민과 인터뷰하는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운전기사와 통역역할을 함께한자가 분명 같이 있었을텐데 소감이라던지 이유라던지 전혀 인터뷰를 하지 않습니다.
|
|

첫댓글 뭐 그래서 힌터팬츠도 빨갱이란 소리여?
글고 소설을 써도 그럴듯하게좀 써라. 뭐 미국이 철수하도록하기위해 남한내 분란을 이르키는게 존재하지도 않는 특수부대를 만드냐? 아야 카터정부가 소련의 1978년 아프간 침략이후로 어떤 정책을 내놓았는지 알기나 하냐? 대결구도가 심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잘도 철수하겠다 ㅋㅋㅋ 특수부대 특수부대 하는데 무리하지 마라 너희들이 떠받드는 전대가리처럼 양아치들이 일으켰다고 해라 응?
글고 만약의 경우에 미군도 진압작전에 쓰려고 준비 시켰던 것도 뉴스에 나온적 있지 아마..? 미군 철수? 이거원 북한특수부대 600명 갔다붙이려고 애쓰네 ㅋㅋㅋ
글고 자꾸 감성팔이라고 하는데 니들이 하는 근거없는 특수부대 이야기는 감성돔팔이냐?
계속짜증나는게 10.26이후 계엄령이 내려져 있었는데 특수부대침투 그것도 600명이나? 대한민국 군대가 개좃이냐? 니들이 떠받드는 인간을 영웅으로 만들려고 다른 군인들을 좃도아닌 병신으로 만들어?
차라리 6.25때 남겨진 빨치산들이 고정간첩으로 있다가 무기고 터는게 더 났겠네. 오래 살았으니까 지리도 잘알고 무기고도 잘알고 ....
그럼 북한 북단까지 침투했다던 우리나라 북파공작원들 존재도 뻥이란 말이겠네
제가 영화 '화려한 휴가'가 조작한 뉴욕타임즈지 5월 22자에 대한 자료를 곧 공개하려던 참에 중요 자료를 공유하여 주셨습니다.
북파공작원도 통제가 삼엄한 북괴 청진까지 가서 작전임무를 수행했다합니다.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7/30/2013073090126.html
2006년 12월 탈북군인협회가 기자회견하였을 때 북파공작원도 그런 증언을 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힌츠페터를 동원한 이가 해닝 외에 또 있었다는 위 자료를 보니 일본 내의 어떤 한국인 조직이 그의 한국 방문을 돕기 위해 한국에서 활동 중인 자기네 조직 요원을 붙여 주었다고 한 말이 기억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