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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2026. 7. 11.~12.(주말) - 음력(5. 27~28.), 일출 05:20~일몰 19:51
●산행지: 신선지맥 1구간졸업(1박2일)
●거리: 약 40.2Km
●소요시간: 30.11h
●누구랑: 나홀로
●경비: 시외버스13,200, 찜질방12,000원, 아침8,000원, 택시14,300원, 뒤풀이12,000원, 시외버스13,500원
●먹거리: 생수3리터, 빵(7,980원), 육포(8,980원), 비상식(단백질바,에너지바,자유시간), 사탕15
●준비물: 텐트, 매트리스, 스틱, 바람막이, 반바지, 고아모자, 헤드랜턴, 말방울, 스패츠, 구급약(소화제,정로환,밴드), 피부연고, 진드기기피제, 버무리, 충전지2, 충전짹, 손수건, 팔토시, 휴지, 물티슈, 비닐우의, 안대, 귀마개, 여분양말의류, 띠지13, 현금 지폐
●산행코스: 마역봉(마패봉, 925m)-924m봉-신선봉(966m)-793m봉-연어봉(611m)- 629m봉-459m봉-소조령-탁사등봉(705m)-제금티-586.5m봉-745.4m봉-738m봉-송치재(527번도로)-658m봉-778m봉-동골재-박달산(824.7m)-746m봉-양산목고개(2차도로)-351.5m봉-맹이재(525번도로)-성불산(530m)-오성리고개(19번국도)- 안민천/달천합수점
●산행경과:
* 2027. 7. 11.(토), 19.6Km
- 09:12 : 마역봉(마패봉, 925m)
- 10:05 : 신선봉(神仙峰, 966m)
- 11:19 : 연어봉(鰱漁峰, 611m)
- 11:48 : 633.7m봉
- 12:25 : 454.0m봉
- 12:34 : 소조령(小鳥嶺, 370m)
- 14:08 : 마등봉(695m)
- 14:12 : 탁사등봉(701.8m)
- 14:29 : 제금티
- 14:50 : 585.7m봉
- 15:40 : 570.2m봉
- 16:18 : 삼면봉(678.2m)/ 시군계/ 삼면봉(괴산군 연풍면, 충주시 수안보면 → 괴산군 장연면)
- 17:00 : 744.7m봉
- 17:25 : 742.7m봉
- 18:35~43 : 송치재(松峙, 330m)/ 527번도로
- 19:22 : 457.5m봉
- 19:30 : 임도
- 20:10 : 비박
* 2027. 7. 12.(일), 20.6Km
- 03:00 : 출발
- 03:41 : 686.0m봉/ 장연면 - 감물면
- 04:38 : 778.9m봉
- 04:48 : 동골재
- 05:08~26 : 박달산(朴達山, 824.5m)/ 2등삼각점
- 06:11 : 743.7m봉/ 폐헬기장
- 06:30 : 671m봉
- 06:35 : 662m봉
- 06:44 : 양산목고개(525m)
- 07:15 : 임도
- 07:39~48 : 매전리고개/ 증자동고개/ 2차선도로(도전로)
- 08:28 : 삼면봉(402m)/ 삼면봉(괴산군 감물면, 장연면 → 칠성면)
- ??:?? : 419m봉
- 09:21 : 369.2m봉
- 09:40 : 도전리고개/ 장연면 - 칠성면
- 10:25 : 364.7m봉
- 10:58 : 맹이재(215m)/ 525번도로(맹이재로)
- 11:20 : 321m봉/ 삼읍면봉(괴산군 감물면, 칠성면 → 괴산읍)
- 11:31 : 340.9m봉
- 11:35 : 텃골재
- 12:08~27 : 갈림길
- 12:15 : 성불산 3봉(505.6m)/ 데크전망대
- 12:52~13:15 : 성불산(成佛山, 529.9m)
- 13:43 : 치마바위봉(455m)
- 13:57 : 250m봉
- 14:17~24 : 방골고개
- 14:53 : 오성리고개/ 성마니재/ 19번국도(충민로)
- 15:20 : 안민천/달천합수점
●날씨: 23~33, 으~~ 더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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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지맥(神仙枝脈)이란...?
신선지맥은 백두대간 마폐봉(마역봉, 927m)에서 서쪽으로 분기해서 신선봉(996m), 소조령, 탁사등봉(705m), 송치재, 박달산(825m), 맹이재, 성불산(530m)을 지나 괴산군 감물면 오창리 안민천과 달천(健川)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2km인 산줄기를 말한다.
♤ 신선지맥 개념도
♤ 신선지맥을 지나는 동네
* 문경시(聞慶市)
동쪽에 예천군, 남쪽에 상주시, 서쪽에 충북 괴산군, 북쪽에 충북 충주시, 제천시, 단양군이 있다. 수도권과 가장 가까운 경상도 지역이다. 이천시 율면의 맨 끝에서 문경시 가은읍 또는 문경읍 극초입까지 최단 직선거리가 약 48km이다. 물론 실제 도로는 직선거리가 아니므로 실제 이동 시 거리는 약 75km이다. 문경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문경새재가 떠오르는데 이 관문은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영남을 잇는 영남대로의 주요 관문이었고 그만큼 문경은 교통의 요지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경부고속도로나 경부선 등 각종 도로, 철도망이 생기면서 이러한 교통 기능을 상실했지만 대신 영화와 사극 촬영지, 트레킹 코스 등으로 각광받고 있다. 경제개발 시기에는 석탄개발이 활발한 곳이었으며 이때는 여느 광산도시와 마찬가지로 번성하던 곳이었으나 석탄사업의 몰락과 함께 크게 쇠락한 곳으로 경북 유일의 폐광지역진흥지구이다. 석탄이 많이 나던 곳답게 지질이 복잡하다. 신라 고령군(상주시 함창읍) 소속 영현으로 관산현(문경 중심지), 호계현(호계면), 가선현(가은읍)이 있었다. 이렇게 이 당시에는 문경이 상주(사벌주)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문경 지역 사람이던 견훤과 아자개가 상주 사람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문경현이었다가 1895년 23부제가 실시되어 안동부 문경군이 되었다. 1896년 23부 체제가 다시 13도로로 개편되어 경상북도 문경군이 되었다. 문경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부터 석탄을 캐던 곳으로 이때 만들어진 대성탄좌는 남한 최초의 석탄광산이다. 한때 국내 제2의 탄전지대였으며 1960~80년대에는 석탄산업이 활발한 곳이었다. 그러나 석탄이 사양산업이 된 이후 석탄을 캐던 광산들은 줄줄이 폐광되기 시작하고 한때 73개에 달했던 문경의 광산은 1994년 7월 최후의 광산인 은성광업소마저 폐광하면서 석탄산업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신기동에 쌍용양회 문경공장이 있었고 문경시 경제에 많은 기여를 했으나 2018년 6월에 폐업하였다. 이 부지는 영화 및 드라마 촬영소로 조설될 예정이다. 석탄개발이 활발하던 1960~80년대까지는 젊은층 인구도 많고 지역 전체 인구도 10만이 넘을 정도로 번성했으며 약 30여개의 탄광이 있던 1974년에 인구는 16만 1천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후로 탄광이 하나둘씩 문을 닫고, 1985년에 본격적으로 산업합리화 정책이 실시되면서 인구가 가파르게 줄기 시작했다. 1974년 16만 1천명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11년간 2만 1천명이 줄어 1985년 인구는 14만명 정도였는데, 1985년부터 10년간은 과거 감소폭의 두 배를 넘는 4만 4천명이나 인구가 감소했다. 2023년 2월 인구가 7만 선이 붕괴되고 말았다. 문경시는 경상도 시 중에서 가장 인구가 적으며 전국 기초자치단체 인구 순위에서 시 중에서는 네번째로 인구가 적다. 계룡대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특례로 승격된 계룡시를 제외하면 (뒤에서) 1, 2, 3위인 태백시, 삼척시, 문경시 모두 폐광으로 인해 인구가 급격히 감소한 지역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나마 KTX 문경역의 개통과 더불어 문경 역세권 도시개발에 기대를 걸고 있으나 이정도로는 얼마나 크게 효과를 볼지가 미지수이다. 1906년 예천군의 동로면과 화장면이 문경군에 편입되었고, 상주군의 산서·산남·산동·산북·영순면이 편입되었다. 1914년 용궁군의 서면, 함창군의 동면 일부를 편입하였고, 1933년 신북면이 문경면에 통합되었다. 1956년 7월 8일 호서남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호서남면의 중심 마을인 점촌리의 이름을 따라 점촌읍으로 개칭되었고, 1963년 1월 농암면 삼송리가 충북 괴산군 청천면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에는 문경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가은면과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를 합쳐 가은읍이 되었다. 1986년 1월 점촌읍과 문경군 호계면 별암리 일부가 합쳐져 점촌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1989년에는 상주군 함창읍 윤직리 일부를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자로 점촌시와 문경군이 합쳐져 도농복합시가 되었다. 1996년 산북면 거산출장소, 동로면 수평출장소를 폐지하였다. 1986년 문경군의 일부였던 점촌읍이 시로 승격되어 점촌시로 설치된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과거 문경군청은 문경읍 상리에 있었으나 1949년 점촌읍으로 이전하면서 문경군의 중심지가 점촌으로 바뀌었다. 1995년 도농복합시 도입으로 인한 행정구역 대개편 당시 본래 하나의 행정구역이었던 점촌시와 문경군도 통합하게 되면서 통합시의 명칭을 문경시로 하느냐 점촌시로 하느냐를 놓고 논란이 일었으며, 이 문제가 지역 주민들 사이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상당한 진통 끝에 원래 이름인 '문경시'가 되었지만 문경시 안에 시청이 있는 구 점촌 지역과 문경읍이 공존하는 상황이 혼란을 가져왔다. 현재 점촌은 문경시 점촌동이다. 문경읍에 문경시청이 없고 옛 점촌시 지역인 시내에 문경시청이 위치하게 된 것이다. 현재 문경시 인근의 대부분의 교통 표지판에는 시내를 가리키는 표시로서 반드시 '점촌(문경시청)'과 '문경읍'을 명확히 표시하도록 되어 있다. 보통 나오는 지도에서는 점촌 지역은 문경시청 소재지라서 문경으로 나오고 역시 문경읍도 문경이라고 나온다. [통합포탈에서 발췌 정리]
* 충주시(忠州市)
충주는 백제시대 낭자곡성·낭자성·미을성으로 불렸고,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할 때 고구려의 땅이 되어 국원성이라 이름하고 약 70년간 고구려 남진 정책의 중요한 전진 기지가 되었으니 국보 제205호인 충주 고구려비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국원이란 근원이 되는 땅, 나라의 근본이 되는 땅이라 풀이할 수 있다. 551년(신라 진흥왕 12) 신라는 한강 상류 유역을 차지하여 553년 신주를 설치하고 557년(진흥왕 18) 국원소경이 되었고, 558년 귀척의 자제와 6부의 호민을 국원에 이주시켜 부도(副都)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통일신라 때인 757년(경덕왕 16) 각 지방의 주·군·현의 이름을 바꿀 때 국원소경을 중원경으로 개칭하였다. 중원이란 나라의 중심지 또는 중앙 지대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고려 태조는 민족을 재통일하고 940년(태조 23) 주·부·군·현의 이름을 바꿀 때 중원경을 충주로 바꾸어 현재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중원(中原)·중주(中州) 등의 명칭이 쓰였으며, 별호로 대원(大原)과 예성(蘂城)이 있다. 충주는 중심주 또는 중주로 고려 초에 있어 국토의 중앙임을 나타냈으며, 충성스러운 고을이란 의미도 담겨 있다. 551년(신라 진흥왕 12) 신라는 한강 상류 유역을 차지하여 553년 신주를 설치하고 557년(진흥왕 18) 국원소경이 되었고, 558년 귀척의 자제와 6부의 호민을 국원에 이주시켜 부도(副都)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통일신라 때인 757년(경덕왕 16) 각 지방의 주·군·현의 이름을 바꿀 때 국원소경을 중원경으로 개칭하였다. 중원이란 나라의 중심지 또는 중앙 지대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고려 태조는 민족을 재통일하고 940년(태조 23) 주·부·군·현의 이름을 바꿀 때 중원경을 충주로 바꾸어 현재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중원(中原)·중주(中州) 등의 명칭이 쓰였으며, 별호로 대원(大原)과 예성(蘂城)이 있다. 충주는 중심주 또는 중주로 고려 초에 있어 국토의 중앙임을 나타냈으며, 충성스러운 고을이란 의미도 담겨 있다. 충주는 한반도의 중심지이자, 한양과 영남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외적이 계립령이나 이화령, 조령을 넘어 영남으로 남하하거나 반대로 영남에서 북상하려면 반드시 충주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이곳의 전략적 중요성은 매우 컸다. 조선시대 충주의 중요성은 봉화체계에서도 드러난다. 조선시대 충주는 봉화체계 5개의 직봉(直烽) 제2거(炬)가 지나가고 있다. 하나는 죽령 봉수에서 단양 소이산 봉수, 청풍 오치 봉수, 충주 심항산 봉수, 마산 봉수, 음성 가섭산 봉수, 망이산성 봉수를 거쳐 경기도 죽산의 건지산 봉수로 연결되었다. 다른 하나는 계립령을 넘어오는 마골산 봉수에서 연풍 주정산 봉수, 충주 대림산성 봉수를 거쳐 마산 봉수로 연결되어 직봉과 합쳐졌다. 대림산 봉수는 최초로 세종실록지리지에 그 기록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忠州牧) 성지조(城址條)에는 '대림산 봉수는 남쪽으로 연풍현 주정산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마산에 응한다.'고 하였다. 여지도서 충원현(忠原縣) 봉수조(烽燧條)와 조선시대 말기에 편찬된 충청도 읍지 충주목조에는 대림산 봉수대에 별장 1명, 감관 5명, 군인 100명이 배속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략적 요충지인 충주의 방어를 위해 이 지역에는 충주읍성을 중심으로 3~5km 이내에 남산성, 대림산성(충청북도 기념물 제110호), 문주리 산성, 용관동 산성, 탄금대 토성, 충주영액 등 많은 산성과 평지성이 축조되어 근접 방어선 역할을 했다. 특히 근접 방어선 중 충주읍성의 남쪽을 방어하는 위치에 있는 대림산성은 문경에서 조령과 이화령을 넘어 충주로 들어오는 영남대로가 바로 앞으로 지나고 있어 충주 지역의 다른 그 어떤 성곽보다도 중요시되었다. 충주읍성을 중심으로 16~20km 이내에 있는 남동쪽의 월악산성과 덕주산성, 한훤령산성, 북쪽의 장미산성, 봉황산성, 견학리 토성, 동산미 토성 등은 충주의 외호 방어선 역할을 했다. 북쪽의 남한강과 서쪽의 달천은 천연 해자(垓子) 구실을 하였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 괴산군(槐山郡)
충북 중부에 위치한 군으로 동쪽은 경북 문경시·상주시, 서쪽은 진천군·청주시, 남쪽은 보은군, 북쪽은 음성군·충주시와 접하고 있다. 괴산군은 조선시대에 괴산군·연풍현·청안현 등 3개의 독립 군현이 있었던 곳으로 역사 자원이 풍부하다. 이 지역에서 인간의 거주 역사가 오래되었음은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견됨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삼국의 접경지대로, 처음에는 고구려의 잉근내현·상모현(지금의 연풍면)·도서현(지금의 도안면·청안면)이 되었으며, 그 뒤 신라에 속해 괴양현과 도서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괴주로 이름을 고쳤으며, 1018년에는 충주에 소속되었다가 후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3년에 지괴주사로 승격되었고 1456년에 괴산군으로 고쳤다. 읍의 별호는 시안(始安)이었다. 청주의 영역이었던 청천면 화양동계곡에는 조선 후기에 만동묘·화양서원 등이 건립되어 유림의 집결지로 이름을 떨쳤다. 1896년 지방제도 개혁으로 충청북도에 속했다. 1906년 지방행정구역 조정으로 충주의 두입지였던 불정면이 편입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괴산군과 연풍군 일원 및 청안군의 일부가 합병되어 현재의 행정구역을 형성했다. 교통의 요지인 증평면이 1949년에 읍으로 승격했고, 괴산면이 1979년 읍으로 승격했다. 군의 남동부는 백두대간이 북동에서 남서로 달리고 있어 조령산(鳥嶺山, 1,017m)·백화산(白華山, 1,064m)·덕가산(德加山, 858m)·칠보산(七寶山, 770m)·보개산(普蓋山, 780m)·군자산(君子山, 948m)·낙영산(落影山, 681m)·오봉산(烏鳳山, 680m) 등의 산릉이 연봉을 이루고 있고 그 중앙부에 박달산(朴達山, 825m)·남산 등을 중심으로 제2의 산지가 형성되어 산악이 중첩되어 있다. 북서부 군계에는 두타산(頭陀山, 598m) 줄기가 뻗어 있으며, 북쪽에는 고양봉(顧養峰, 526m)이 솟아 있으나 이들 산지와 중앙부의 산지 사이에는 완만한 경사의 구릉성 산지가 발달한다. 속리산에서 발원하는 달천(達川)이 연풍천과 동진천 등의 지류를 합하여 군의 중앙부를 관류하면서 남한강에 합류하고 보광산(普光山, 520m)과 백마산(白馬山) 등지에서 발원하는 지류를 합류한 보강천은 서남류하여 증평 부근에서는 군내의 가장 넓은 평야를 발달시키면서 금강의 지류 미호강에 합류하고 있다. 남서부의 보은군 미원면 남부에서 흘러든 박대천이 여러 개의 소지류와 함께 달천을 이루어 군 중앙을 북류하며, 칠성면 도정리와 괴산읍 대덕리 일대에서 각각 쌍천과 성환천을 합류하고, 불항면 하문리에서는 음성천을 합류하여 남한강으로 유입한다. 평야는 이들 하천의 연안을 따라 소규모로 전개되며, 쌍천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과 성천천 일대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산악지역이므로 평야의 발달은 미약한 편이다. 괴산의 지명 유래는 606년(진평왕 28) 신라의 장수 찬덕이 가잠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백제의 대군이 침입하여 100여 일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끝내 항복하지 아니하고 큰 느티나무에 머리를 받아 자결하였다. 뒤에 태종무열왕은 이 소문을 듣고 찬덕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을 괴산으로 부르게 하였다고 전한다. 또 다른 설의 괴산의 지명 유래는 신라 경덕왕 때(757년)에 괴양군, 고려 때는 괴주군, 조선조 태종 때(1413년)부터 옛날 과거시험이 있던 때에 지방, 특히 영남지역에서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선비들이 한양에 가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추풍령을 넘는 길이고 또 하나는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추풍령 보다는 길이 더 험한 문경새재를 넘는 길을 선호하였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추풍령을 넘어온 응시생들은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고, 문경새재를 지나 괴산 땅의 느티나무 잎을 밟고 온 선비들은 과거에 장원 급제했다는 것인데 이 말이 전해져와 오늘날에도 느티나무 잎을 밟는 답괴(踏槐)행사가 괴산 땅에서는 치러지고 있다고 한다. 군내의 여러 곳에 남아 있는 산성터는 대체로 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의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괴주라 불렀는데, 1018년(현종 9)에 장연(상모현에서 개칭)과 함께 충주목의 관할 하에 들어가 감무관이 다스렸다. 한편, 고려 초에 청당현(일명 淸淵)으로 불리던 지금의 청안면은 도안면과 함께 청주목의 관할 하에 들어갔고, 뒤에 감무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254년(고종 41) 몽고병이 괴주성에 침입하였을 때, 무관 장자방이 별초를 거느리고 나아가 이를 물리쳤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새 왕조 창업에 공을 세운 배극렴(裵克廉)은 노후에 벼슬을 버리고 이곳 불정면 삼방리 어래산(御來山) 아래에 와서 살았는데, 태조가 세 차례나 친히 그를 찾아왔다 하여 산 이름을 어래산이라 하고, 동네 이름을 삼방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394년(태조 3) 장연현과 장풍현을 합하여 장풍현이라 하고 감무를 두었다가, 1403년(태종 3)에 연풍현으로 고치고, 1413년에 현감을 두었다. 그리고 그 해에 괴주를 괴산으로 고쳐 군으로 승격시켰다. 한편, 1405년에 도안·청안 두 현을 합하여 청안현이라 고쳤고, 1413년에 감무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429년(세종 11)에 충주의 동촌을 이에 편입시켰고, 1476년(성종 7)에는 수회촌을 편입시켰다. 지금의 청천면 화양리에는 명나라 의종(毅宗)의 글씨인 ‘非禮不動’이라는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이는 1683년(숙종 9) 화양동에 은거하고 있던 우암 송시열이 바위에 새긴 것이라 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어 도와준 신종(神宗)을 위하여 화양리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웠다. 1696년 권상하(權尙夏)에 의해서 화양리에 송시열을 봉안하는 사액서원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이곳 사람 김시민(金時敏)이 진주대첩에서 공을 세웠고, 박세무(朴世茂)가 『동몽선습』을 엮었다. 1895년(고종 32) 괴산군은 충주부에 속했고, 연풍과 청안은 각각 군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해 괴산과 청안의 일부 및 연풍군이 폐지 또는 합병되어 현재의 군이 되었다. 1919년 이곳에서도 본격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인삼은 문광·청안 등지의 산록완사면에서 재배되고 있으며 그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농가소득의 상당부분을 특용작물재배에서 얻고 있는데 소득사업의 일환으로 경제작물의 생산이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사과·복숭아·포도 등이 생산되며, 축산업으로는 한우·젖소·돼지·닭·산양 등이 사육된다. 주로 농산물과 임산물의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교통은 충북선과 국도 36번이 남북으로 나란히 뻗어있어 증평출장소를 지나 충주와 청주로 각각 연결된다. 또한 국도 34번이 증평출장소와 괴산읍 간을 연결한다. 괴산읍을 중심으로 국도가 방사상으로 발달하여 음성·청천·미원·보은·충주 등을 연결한다. 충주와 청주까지는 50분, 서울까지는 2시간 정도 소요된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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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지맥의 신선봉에서 성불산까지는 괴산의 어른인 군자산(君子山, 946.9m)이 등대처럼 불을 밝히며 지켜보고 있다. 백두대간에서 분기한 신선지맥과 계명지맥은 그 태생이 단 1.2km 떨어진 쌍둥이지맥으로 볼 수도 있으나 계명은 북향하는 충주의 지맥이고, 신선은 서향하는 괴산의 지맥이다. 신선지맥은 지맥의 거리는 짧은데 비해 토탈고도를 말하는 고도상승이 3,000m에 이른다. 그만큼 봉우리를 많이 넘는다는 뜻으로 백두대간의 높은 고도에서 빠져나와 박달산까지 계속되는 오르내림으로 빡시게 진행한다. 비박으로 진행하는 지맥꾼에게는 두 지맥 모두에 있는 송치재에서 물보충이 요긴하다. 신선지맥에 임진왜란의 진주성전투를 띄우면 웬 뜬금포인가 하겠으나 계명지맥의 마지막에 탄금대전투의 신립(申砬, 1546~1592)장군이 있고, 신선지맥의 마지막에 진주성전투의 김시민(金時敏, 1554~1592)장군이 있다. 신립 장군은 남한강에서 순절했고 김시민 장군은 남강에서 순절했다. 이 또한 계명과 신선의 운명적 필연이 아니겠는가.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온전히 보호하여 의병 활동과 이순신의 수군 전력을 유지시켜 준 대단히 중요한 전투라는 이유에서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진주성전투(晋州城戰鬪)는 1차와 2차가 있다. 서기 1592년 음력 6월 이후 전국에서 의병들이 봉기하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에 의해 왜군의 수륙병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조선이 방어전에 들어가자 기세가 꺾인 왜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경상 우도를 꺾으려 했으나 진주성만은 공격하지 못했다. 이에 7월 하순 육로로만 서진하여 진해, 고성을 점령하고 8월 초에 진주를 위협하였다. 김시민은 각지에 구원병을 요청하며 진주성 방어 태세를 강화하였고 왜군은 남강 남안까지는 진출하였으나 강을 건너 진주성을 공격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 사천으로 물러나 거기에 거점을 확보하려 했다. 김시민은 일천의 병력으로 사천성 왜군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추격해 고성과 진해도 탈환하였으며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치하하고 목사로 승진시켰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에게 잇따라 일본군은 해로를 이용한 군량 보급에 차질이 빚어졌다. 연패당한 왜군은 김해에서 작전 회의를 열어 대부대를 동원해 먼저 진주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라 결론 내렸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경상 우도를 장악할 수 있는 본거지이자 전라도의 곡창지대 침입에 교두보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요충지가 바로 진주성이라 여겨 공략을 명령함에 따라 진주성 공략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진주대첩(晋州大捷)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1592년 11월 7일(음력 10월 4일) 왜군 본대가 군사 3만명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성내에는 진주 목사 김시민을 비롯한 관군 3천8백여 명과 백성이 합세해 결전을 준비했고, 성외에서는 경상의병장 곽재우, 전라의병장 최경희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일본군을 배후에서 견제하며 합세하여 1592년 11월 6일(음력 10월 4일)부터 10일까지 대 혈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투 과정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에 큰 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진주목사 김시민은 일본군이 쏜 조총에 머리를 맞아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1월 21일(음력 10월 18일)에 순국했다. 이 제1차 진주성 전투는 한산대첩과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삼대 대첩 중 하나로, 일본군의 호남 진출 계획을 좌절시킨 엄청난 승리였다. 이 전투로 일본군이 호남 지방을 점령하지 못하면서 전체적인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진주대첩을 임진왜란 3대첩으로 부르며 기리고 있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은 사후에 충무공으로 추존되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第二次晋州城戰鬪)는 1593년 7월 20일(음력 6월 22일)부터 같은 달 27일(음력 6월 29일)까지 진주성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1593년 전쟁이 휴전기로 접어들면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있었는데 그 결과 일본군은 북부 및 수도권 지역에서 철수, 남해안까지 물러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과정에서 일본군 전군에 진주성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다. 이는 강화협상을 위한 무력시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침략 첫 해에 가장 큰 패배를 당했던(제1차 진주성 전투) 진주성에 대한 보복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명의 심유경이 공격 중지를 요구하였으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고니시는 차라리 진주성을 비워놓으라고 심유경에 충고를 했다고 한다. 당시 진주성 안에는 10만에 육박하는 일본군을 상대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명군은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수성을 포기하라고 권고했다. 진주성을 지키고 있던 관군과 김해부사 이종인, 창의사 김천일, 경사우병사 최경회, 복수장군 고종후가 이끄는 전라도의 의병, 충청병사 황진, 경상도 의병장 김준민 등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조정과 명군의 권고와 일본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주에 남아 싸울 것을 결의했다. 창의사 김천일이 도절제를 맡아 총지휘를 하였고, 실질적인 전투대장인 순성장은 충청병사 황진이 맡아 이끌었다. 6월 22일에 처음 교전이 일어나 28일, 일본군의 격렬한 공격을 막아냈지만, 순성장 황진도 적이 쏜 탄환을 맞고 전사를 하였다. 마지막 날인 29일, 비마저 내려 성벽이 무너지고 일본군에게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은 아들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최경회, 고종후, 양산숙 황진 등도 남강에 투신하거나 순절하였다. 임진왜란 기간 가장 처절하게 싸웠던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이렇게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막을 내린다. 조선군 지휘관 전원 전사, 성을 지키던 약 4,000~5,000여 명의 조선군 및 의병의 전멸이였다. 그리고 성안에 피란해 있던 백성, 노약자 등 2만 명에서 많게는 6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왜군에 의해 대규모로 학살당하는 끔찍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과 화력 집중으로 일본군 또한 수만 명에 달하는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할 계획도 다시 물거품이 되고 여력을 상실하여 퇴각했다.
요즘 스타벅스니 탱크데이니 하며 광주의 피해의식에 무거운 이념 논쟁을 얹어 소모적인 남남갈등의 유발이다. 계명지맥과 신선지맥을 하며 드는 생각이 글로벌시대에 대범하게 임진왜란 왜군 북상루트라는 상품을 발굴하여 일본 관광객을 끌어들인다면 과거 공성전의 나라에서 묻혀진 산성을 발굴하는 기발한 방법이 될 수도 있겠고, 일본의 젊은이들이 폭발적으로 반응하는데 우리의 젊은이들이 쥐죽은듯 가만히 있을까. 안에서 서로 싸우려고만 말고 생각을 밖으로 펼쳐보는 계기를 만들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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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구간거리
마패봉-1.5km-신선봉-4.0km-소조령-2.0km-탁사등봉-4.4km-744.7m봉-3.3km-송치재-5.3km-박달산-3.7km-매전리고개-3.7km-도전리고개-3km-맹이재-2.7km-성불산-4.2km-달천
♤ 구간거리
- 사문리 탐방지원센터 ~ 마패봉/ 신선지맥분기봉: 2.3km
- 괴산 고사리주차장 ~ 조령3관문 ~ 마패봉 2.0km
- 조령산자연휴양림입구 ~ 마패봉 2.6km
- 마역봉(마패봉, 925m) ~ 송치재(527번도로)/ 527번지방도 15.1km
-. 마패봉 ~ 소조령 5.5km
-. 소조령 ~ 솔치재 9.6km
- 송치재(527번도로) ~ 안민천/달천합수점 22.3km
-. 송치재 ~ 매전리고개 8.8km
-. 매전리고개 ~ 합수점 13.5km
-. 맹이재 ~ 합수점 7.8km(성불산 3봉 왕복 1.5km 포함)
♤ 식수 공급지 및 산행정보
- 구간내 매식할 곳은 없음.
- 충주 칠금동 스파렉스 24시 찜질방: 043-844-6100, 12,000원(버스터미널에서 도보 20분)
- 충주택시: 1577-4422, 수안보택시: 043-845-1881, 043-848-6938
- 솔치재, 매전리, 방골고개: 인가 물보충 가능
- 괴산개인택시 : 043-833-0055, 괴산 승합콜 : 010-8502-0878
- 괴산 시내버스터미널 ~ 괴산시외버스터미널: 시내버스터미널 좌측으로 250m 직진 롯데리아 건물
♤ 서울에서 신선지맥 분기점 가는 길
- 동서울 ~ 충주공영버스터미널(롯데하이마트): 06, 06:30, 07, 07:30,~20, 21, 21:40, 1.40h, 9,000원~17,100원
- 충주공영버스터미널 맞은편 하이마트정류장 ~ 송계행, 수안보면 사문리탐방지원센터방면행 버스: 07:15, 08:15,~ 246번, 0.50h
- 들머리: 충주시 수안보면 사문리/ 사문리탐방지원센터~마패봉: 도보 약 2.3km(30분)
♤ 합수점에서 서울 오는 길
- 달천/안민천합수점 ~ 충북 괴산군 감물면 오간리 마을버스정류장: 도보 약 25분 이동
- 오간리마을버스정류장 ~ 괴산읍: 택시14,300원
- 충북 괴산군 감물면 오간리마을버스정류장 ~ 괴산시외버스터미널방면행(601-1번)버스 승차
- 괴산시외버스터미널 ~ 음성공용버스터미널(106번 버스), 약 35분
- 음성공용버스터미널 ~ 동서울: 14:30, 16시, 17시, 18시, 19시, 10,800원
- 괴산시외버스터미널 ~ 증평역 버스 환승(201번 버스), 약 40분
- 증평역 ~ 조치원역 : 약 33분, 2,600원
- 괴산시외버스공용터미널 ~ 동서울 : ~12:55, 13:55, 14:30, 15:55, 17:55, 18:25, 19:30, 2.48h, 13,500원
- 괴산시외버스공용터미널 ~ 센트럴시티 : ~12:10, 13:10, 14:10, 15:10, 16:10, 17:10, 19:10, 2.30h,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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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에서 넘어오는 도로와 조령3관문에서 넘어오는 도로가 안보에서 만납니다.
♤ 충주시 수안보면(水安堡面)
충주시의 남동단에 위치한 수안보면은 고구려식의 상모(上芼)라는 지역 명을 쓰다가 2005년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진 수안보라는 명칭으로 개편하였으며 수안보온천으로 유명한 고장이며, 월악산국립공원과 사조스키장, 충주호와 중원 문화를 살필 수 있는 문화재 등이 주변에 산재한 천혜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으로 지형적으로 백두대간의 험준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이다. 수안보(水安堡)라는 지명은 ‘보(洑) 안쪽의 물탕거리’라는 순수한 우리말이 한자로 변천된 것으로 18세기 초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최초로 지명이 거론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온천 지역은 모두 행정 지명을 붙여 온천명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수안보 지역의 온천은 2005년 이전 행정 명칭인 상모보다는 수안보로 불렸다. 『세종실록(世宗實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 안부(安富), 안보온정(安保溫井), 연풍온천(延豊溫泉)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교통의 중심지였던 안부역의 규모가 더 컸기 때문에 또는 연풍현에 속하였기 때문에 영향을 받았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온천 이용객이 증가하면서 온천리의 규모가 커지자 온천리를 물안보(水安保), 안부역 지역을 큰안보(大安保)라 구분하였던 것이고,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계립령의 경비 명목으로 석문동에 다수의 일본군 헌병대가 주둔하면서 군사적 보루의 의미로 변화되어 수안보가 된 것으로 보인다.
♤ 월악산 국립공원 사문리 탐방지원센터/ 충주시 수안보면 사문리(寺門里)
사문(寺門)이란 지명은 ‘절로 들어가는 문턱’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사문리는 충주시 수안보면에 있는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대사리와 석문동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서 사문리라 하였으며 대사마을은 한절(대사)이라고 부르고, 지금도 마을 자리에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하여 한절(대사)이라고 한다. 석문(石門)은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왜병을 막기 위해 야문재 주변에 성을 쌓고, 성문을 돌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에서 기원한다. 현재도 당시에 쌓아져있던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릅재(계립령)에서 산을 오르다보면 야문제가 있고 동화원으로 가는 산길이 있다. 계림재 골짜기에서 발원하는 석문천이 마을 중심으로 흐르고 안보리에서 사시천과 합류한다. 석문동은 수려한 자연환경으로 관내의 전원주택 단지 중 가장 각광받는 지역이다. 사문리에서 미륵리로 넘어가는 지릅재 중간에 위치해 있어 마패봉 탐방로 등 월악산 산행을 즐기기 위한 기점으로 활용되며, 신선지맥과 계명지맥의 기점이 되는 동네이다.
♤ 문경새재(642m)
영남제3관이라 적힌 문경관문(聞慶關門: 사적제147호) 이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수행차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을 지날 때 성주 흥달(興達)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이 관문은 영남지방과 서울간의 관문이며 또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鷄立嶺: 하늘재)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초부터는 이곳 초참(草站)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鳥嶺)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했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 키요마사(加藤清正)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申砬) 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했다. 그 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辛忠元)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습격하였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 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34년(1708년)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主屹關), 제2관문을 조동문(鳥東門) 혹은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을 조령관(鳥嶺關)이라 이름한다.
♤ 주흘산(主屹山, 1,106m)
주흘산 이라는 뜻은 우뚝선 우두머리산 이라는 말로 주변에 대미산과 조령산 등 1,000m가 넘는 고봉들이 즐비하지만 그중에서도 산세가 힘차게 뻗어있어 주변 산들을 호령하는 산으로 예로부터 나라의 기둥이 되는 큰 산인 중악(中嶽)으로 우러러 매년 조정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올리던 신령스런 영산(靈山)으로 받들어 왔던 곳으로 문경읍을 감싸고 있는 문경의 진산으로 주흘산 최고봉은 1,106m의 영봉이다. 하지만 주봉은 영봉보다 낮은 1,076m인데 이곳이 주봉(主峰)이 된것은 산세가 막 비상하려는 학의 모양인데 이곳 주봉이 학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며, 또한 주흘산에서 이곳의 조망이 가장 좋아 높이에 상관없이 이곳을 주봉으로 삼았다고 한다. 문경의 진산 주흘산을 보면 문경의 지명은 이 주흘산으로부터 지어진 이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주흘산은 영남에서 서울 가는 방향으로 달리다가 영남의 제일비경지인 진남교반의 고모산성을 돌아서면 우뚝하게 솟아나있다. 1,000m 정도의 아름다운 산이다. 맵시 있는 여자 같기도 하고, 절세미인이 단장을 하고 앉은 듯 단정한 산이다. 좌우대칭이 어우러져 있고, 내리뻗은 품세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기도 하다. 산 모양이 정자관(程子冠)처럼 생겨 관현(冠縣), 관문현(冠文縣)이라고도 했다. 정자관은 모자인데, 모자를 옛 우리말로는 ‘고깔’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라시대에는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이라고 했다. 우리 말 고깔의 이두식 표현이라고 보여진다.
마패봉에서 연어봉까지는 조망이 좋은 대신 바윗길과 로프구간이라 스틱을 접고 가도 무방합니다.
♤ 마역봉(馬牌峰, 925m)/ 신선지맥분기점/ 도계(충북-경북)/ 삼시군봉(문경시, 괴산군, 충주시)/ 삼읍면봉(문경읍 상초리 → 수안보면 사문리, 연풍면 원풍리)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사문리와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및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의 경계에 있는 삼시군봉으로 지맥은 경북 문경을 떠나 충북으로 들어서서 괴산군과 충주시의 경계를 따른다. 지도상에는 마역봉(馬驛峰)으로 표기가 되어있다. 경북 문경지역에서는 마패봉으로 부르고 충북 괴산지역에서는 마역봉으로 부른다. 이 산은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의 한이 서린 조령 삼관문을 안고 있는 산이며 마패봉이란 산 이름은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산을 넘으며 조령 제3관문 위에 쉬면서 마패를 관문 위의 봉우리에 걸어놓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국토지리원의 자료에 따르면 문경새재의 정문 격인 제일 관문인 주흘문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문경새재로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산이 마폐산이다. 처음에 마폐산을 마역(門안에 力)山이라 했는데 역(力)은 男根을 말한다. 마폐산의 정상이 마역과 같은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또 풍수지리설로서도 말에게 힘을 불어 일으킨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마역산은 외설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쉬움으로 1925년경의 지형도부터는 역자와 글자 모양이 가장 가까운 한자인 폐(閉)자를 대신 쓰게 되었다.
♤ 괴산군 연풍면(延豊面)
괴산군 연풍면은 괴산군의 동부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백두대간 구왕봉에서 마패봉까지의 구간으로 백두대간 구왕봉이나 휘양산 악휘봉 장성봉을 가기 위해선 꼭 들려야하는 은티마을이 있다. 동남으로는 문경새재 너머 경북 문경시와 백두대간을 경계로 도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은 충주시 수안보면, 서쪽은 괴산군 장연면, 서남쪽은 괴산군 칠성면과 인접하고 있다. 길이는 동서 25리, 남부 30리이며, 동남이 높고, 서북이 낮으며 동남쪽으로 백두대간이 중중첩첩이 내려와 조령산, 소백산이 지붕이 되어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을 이루며 평탄한 지역이 좁아 경지 면적이 적은 산간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한말에는 이 지역은 연풍군의 중심지였던 충북 연풍군 현내면(縣內面)이었다. 최근 중부내륙고속도로 연풍 나들목 및 연풍-수안보 간 3번 국도의 4차선 확포장 등 교통 요충지로 급부상하면서 수옥정 국민관광지 조성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2024년 11월 괴산군에도 철도가 들어서 중부내륙선 연풍역이 신설됐다. 이 곳의 특산물로는 질 좋고 맛 좋은 연풍사과, 청결고추 생산과 더불어 관광 연풍으로 새롭게 변화를 꾀하고 있다.
♤ 924m봉
암봉이다. 길은 뚜렷한데 암릉길이라 시간이 지체된다. 북동쪽으로 북바위봉(772m) 뒤로 월악산 영봉(1,097m)이 보인다. 남쪽으로 조령산(1,017m)이 바라보이고 오른쪽 아래로 수옥정저수지와 연풍면소재지가 보인다.
전국에 신선봉은 공식 명칭으로 등록된 것만 30여 개에 달하고 이외에도 동네 뒷산 곳곳에 신선이 내려와 놀던 곳이라는 의미의 신선봉(또는 신선대)이 수십 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은 백두대간 설악산의 신선봉이고,가평 울업산에 신선봉, 서울 도봉산에 신선대가 있습니다.
♤ 신선봉(神仙峰, 965.9m)/ 정상석/ 3등삼각점(덕산 312/ 2003 재설)/ 산불감시초소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와 충주시 수안보면 사문리에 걸쳐있는 바위산으로 수안보온천에서 동남쪽으로 5km 지점의 기암절벽에 우뚝 솟아있는데 주위의 전망은 일망무제이다. 정상석은 정상 바위 아래에 있다. 이정표, 3등삼각점이 있는데 멀리서 보면 뾰족하게 생긴 봉우리가 과연 신선이 살만한 곳으로 보인다. 신선봉 아래쪽으로 마패봉과 조령등이 이어져 있으며 월악산국립공원과 문경새재 도립공원 사이에 위치하며 예로부터 산 북쪽과 남쪽에 두 줄기 길이 있었는데 신선봉의 북쪽 길은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의 진출을 위해 백두대간 줄기를 뚫은 고개인 지릅재와 하늘재이고 남쪽 길은 조선시대에 영남지역의 선비들이 과거 보러 서울로 올라가던 문경새재로 괴산의 명산 35곳 중의 하나이다. <구한말지형도>에는 이 산의 지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신선봉이 괴산군 상모면과 연풍면의 경계에 위치하는 산이라고 나온다. 이는 상모면(현재의 수안보면)이 충주시에 편입되기 전의 상태를 보여준다. <조선지형도>에도 같은 지명으로 표기되어 있다. 신선봉의 옛 지명은 할미봉이라고 하며 지금도 이 지역 주민들은 할미봉으로 부르고 있다. 할미를 닮은 할미바위가 있어서 붙혀진 지명인데 지도상에는 신선봉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선봉과 연어봉을 가면서 건너편 계명지맥의 석문봉을 유심히 찾아보았습니다. 거꾸로 오시는 분이 있어 어디서 올라오시느냐 물으니 연어봉을 들르지 않고 할미봉(740m)으로 올라왔답니다.
♤ 방아다리바위봉(791.9m)
굵직굵직한 암봉을 오르내리며 백두대간을 두루두루 둘러보며 진행하니 시간은 지체되지만 조망이 시원하다. 방아다리봉은 전망이 좋은 바위봉우리로 바위의 생김이 마치 디딜방아처럼 생겼다.
연어봉 정상석이 받침돌만 있고 어디로 사라졌습니다. 절벽에서 뛰어 내렸을까...
♤ 연어봉(鰱漁峰, 611m)/ 정상석/ 나무데크(평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와 충주시 수안보면 사문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넓은 바위 위에 정상석과 바로 앞에 데크목 평상이 설치되어 있어 산꾼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정상석 바로 옆에 물고기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연어봉으로 불리고 이 바위를 연어바위 또는 고래바위라고 한다. 연어는 민물에서 태어나 바다로 가서 3~4년을 살다가 자기가 태어난 母川으로 와서 생을 마감하는 회귀본능의 물고기로 연어가 회귀하는 대표적 하천이 양양 남대천이다. 암릉을 따라서 내려선다.
♤ 633.7m봉/ 삼리봉(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충주시 수안보면 사문리 → 화천리)
연어봉에서 내려선 안부에서 오른쪽의 흐릿한 길로 올라선다. 석축으로된 참호가 있고 오르내림길 모두 등로가 흐릿한 잡목 봉우리다. 가파르게 올라서니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충주시 수안보면 사문리 → 화천리로 바뀌는 삼리봉이다. 지맥은 좌틀로 내려선다.
♤ 충주시 수안보면 화천리(花泉里)
수안보면 화천리는 망대봉 아래에 자리잡은 농촌마을로 석문천이 흐르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으로 은행정, 발화동, 냉천동을 합하여 화천리가 되었으며, 지명 또한 발화동의 화자(花字)와 냉천동의 천자(泉字)가 합쳐져 생긴 것이다. 자연마을로는 발화골, 사시동, 은행정 등이 있다. 발화골은 화봉이라 불리는 꽃봉이 있어 꽃이 피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은행정(銀杏亭)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번국도를 따라 약 4km 가면 괴산군과 경계한 피난봉 아래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은 화천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 윗말과 아랫말이 동남 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으로 산고개를 넘어 아홉사리가 있다. 윗말에 수백년 묵은 은행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남쪽 화봉을 경계로 발화와 접하고, 서남쪽으로 피난봉이 괴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북간에 와우형인 일자산이 있고, 마을 입구를 흐르는 사시천을 건너 3번국도가 지난다. 특산물로는 석문사과, 월악산송이, 찰옥수수, 수안보배추 등이 있다.
등로 오른쪽 아래로 소조령 터널로 이어지는 3번국도(중원대로)가 보입니다.
♤ 신혜봉(454.0m)/ 민등산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고 서레와대선배님은 코팅지에 신혜봉이라 적었다. 동화원, 신혜원, 조령원은 문경새재에 있던 관에서 운영하던 숙박시설이다. 조령원과 동화원은 조령 이남 문경에 있었고, 신혜원은 조령 이북 괴산 고사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병참선부대가 작업을 했을까. 군 교통호가 뭉개진듯한 구덩이가 자주 보인다. 지맥은 좌틀이다. 소조령은 왼쪽으로 내려서야 편하다. 오른쪽은 축대 철망을 잡고 내려서야 한다.
소조령에서 솔치재까지는 오르내림이 많아 빡십니다. 조망은 특별히 없습니다. 관리하지 않는 사과과수원이 있군요.
♤ 소조령(小鳥嶺, 370m)/ 시군면리계(충북 충주시 - 괴산군)
왼쪽은 연풍레포츠공원이고 오른쪽이 소조령이다. 자전거길 이정표에 탄금대까지 35km라고 쓰여 있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화천리와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인근에 신선봉, 마폐봉과 조령(鳥嶺)이 있는데 이곳을 넘으면 문경으로 이어진다. 조령에서 소조령에 이르는 지대는 북쪽의 하늘재와 함께 백두대간을 동서로 잇는 구조선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지명의 의미는 작은 새재이다. 새재의 한자 표기인 조령(鳥嶺)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는데,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험한 고개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북상하는 세개의 길 중 하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왜군 제1진은 문경새재(조령)를 넘어 산길을 빠져나와 수안보를 거쳐 단월역을 지나 충주 탄금대로 진격했다.
♤ 소조령 터널위
이곳 아래에는 소조령 터널이 지난다. 소조령터널이 개통되기 이전의 구 국도 3호선은 수안보면 화천리 사시마을 부근에서 새재 북쪽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거쳐 소조령 북쪽을 통과하였다. 이 도로는 괴산군 연풍면 수옥리 안터마을에 도달하며, 다시 남쪽으로 수옥정을 지나 연풍면 원풍리의 원풍지구 관광농원과 새재골휴게소를 통과하게 되어 있어 많은 불편이 있었다. 화천리 사지마을에서 서~남 방향을 직진하여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로 연결시킨 도로를 직선화하기 위하여 2003년에 소조령터널이 준공되었다.
♤ 말잔등봉(鞍峰, 645m)
대구마루금산악회 故이한성대장님의 코팅지에 말잔등봉이 적혀있다.
♤ 675.8m봉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화천리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유상리, 원풍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이다. 국립지리원지도에 나오지 않는 지명이라 조금은 헷갈리는데 선답자들의 시그널만 보인다.
♤ 마등봉(馬等峰, 703m)/ 삼리봉(충주시수안보면 화천리,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 유상리)
군부대 참호가 무너진 듯한 석축으로 둘러쳐진 원형 진지가 있다. 지맥의 왼쪽이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 유상리로 바뀌는 삼리봉이다. 반바지운영자님 코팅지산패는 약 100m 진행해서 참나무에 매어 있다.
♤ 괴산군 연풍면 유상리(柳上里)
등로에서 괴산군 연풍면 유상리를 통과하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보인다. 유상리는 연풍면의 북부에 위치한 농촌마을로 버들미 위쪽이 되므로 웃버들미라 한데서 유상이라는 명칭이 생겼으며 자연마을로는 고려장골, 대삿골, 방화동, 쇠재말 등이 있다. 고려장골은 고려장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방화동은 꽃이 많이 있어, 쇠재말은 쇠재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 탁사등봉(701.8m)/ 정상석/ 시군면리계(충주시 - 괴산군)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화천리와 괴산군 연풍면 유상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괴산군 연풍면 연풍초교 53회 졸업생들이 결성한 오삼산우회에서 괴산지역의 무명봉에 세운 '탁사등봉 707m,이라고 적힌 오석(烏石)으로 만든 정상석이 있지만 명확한 문헌적 유래나 전설을 찾을 수 없으며 높이도 국립지리원의 높이보다 턱없이 높다. 오삼산우회 회장님이나 총무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연락처가 없다. 지맥 마루금은 왼쪽의 뚜렷한 등로를 버리고 탁사등봉 정상석 오른쪽 뒷편으로 들어가 잡목 사이로 보이지 않는 등로를 타고 급경사 내리막 길로 떨어진다.
1, 탁사(託辭)는 핑계로 꾸며 대는 말. 2, 탁사(託事)는 교회에 딸린 토지, 건물, 비품 따위를 보관하거나 수리하는 일을 맡은 교직을 말함이다. 오삼산우회에서는 여기에 왜 정체불명의 표시석을 세웠을까 이유를 알 길이 없다.
탁사의 유래는 중국 초나라 사람 굴원의 어부사(漁父詞)에 나오는 "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창랑지수청해 가이탁아영): 창랑의 물이 맑네, 내 갓 끈을 씻네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창랑지수탁혜 가이탁아족): 창랑의 물이 더럽네, 내 발을 씻네"로 세상의 흐름에 따라 처신을 달리하며 세속에 얽메이지 않는 "군자는 표변한다"라는 고사와 의미 상통하는 창랑가(滄浪歌)를 줄인 것을 탁사라고 한다. 정말로 청사탁영(淸斯濯纓) 탁사탁족(濁斯濯足);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탁영탁족(濯纓濯足)의 그 탁사가 맞을까? 참고로 충북 제천시 봉양면에 탁사정(濯斯亭)이 있고, 전남 곡성군 석곡면에 탁사대(濯斯臺)가 있고, 충주시 살미면 문강리 강진마을 앞에 우암 송시열이 바위에 새겼다는 탁영대(濯纓臺)가 있다. 탁영(濯纓)이란 갓끈을 고쳐맨다는 뜻으로 더위를 식힌다는 의미도 담겨있다. 탁사등봉에서 유상리로 내려가는 뚜렷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오른쪽의 희미한 등로로 내려간다.
♤ 제금티(猪金峙, 505m)/ 시군면리계(충주시 - 괴산군)
반바지운영자님 코팅지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옛지명: 상모면) 화천리 발화골마을에서 괴산군 연풍면 유상리로 넘어가는 곳에 넓은 공터가 있는데 제금티라고 지도에는 나와 있다. 제금터(猪金峙)의 유래는 옛날 그 고개에 있는 산에 닭(鷄)과 맷돼지(猪)만한 금덩이가 붙어있다 하여 제금터라 하며 맷돼지처럼 돌진한다는 의미로 저돌적(猪突的)일 때는 저(猪)로 제사에 올리는 제육(猪肉)을 말할 때는 제(猪)로 발음하듯이 제금터(猪金峙)로 작명된듯 싶다. 계저주면(鷄猪酒麪)의 식용 돼지고기를 의미하는 저육(猪肉)이 발음하기 편하게 변하면서 제육이라는 단어가 되었다. 제육(猪肉), 산제(山猪) 등등. 이처럼 豬(돼지 저)는 한자로 멧돼지를 뜻하지만 저가 돼지고기로 쓰일 때에는 제로 발음한다.
♤ 585.7m봉/ 4등삼각점(404 재설/ 1973. 7. 건설부)
준희선생님 산패와 백두사랑산악회 노란색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받침이 없는 삼각점도 있고 삼각점이 두개 있다. 오른쪽 아래 나무사이로 첩푸산 기슭에 중앙경찰학교가 내려다보인다.
♤ 화천리 안부/ 성황당터
안부에 돌무더기와 당산나무가 있다. 오른쪽으로 충주시 수안보면 화천리 은행정 마을로 내려가는 뚜렷한 등로가 보이고 왼쪽으로 괴산군 연풍면 유상리 요동마을로 내려가는 희미한 등로도 보인다.
♤ 511.0m봉
조망은 없고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 570.2m봉
여기도 조망은 없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 590.9m봉
살짝 왼쪽으로 내려서면 너럭바위가 나온다.
마패봉에서 약 11.5km의 거리로, 신선지맥이 분기점부터 함께한 충주시와 헤어지고 좌우 완전하게 괴산군 내로 들어서는 삼면봉입니다.
♤ 678.2m봉/ 시군면리계/ 삼면봉(괴산군 연풍면 유상리, 충주시 수안보면 화천리 →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넓은 공터에서 지맥은 우틀하여 안부로 내려섰다 671.9m봉으로 올라선다. 충주시 수안보면 화천리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유상리, 장연면 오가리 경계에 있는 삼면봉이다. 지맥은 분기점부터 함께한 충주시와 헤어지고 괴산군 내로 들어서서 연풍면과 장연면의 경계를 따른다.
♤ 괴산군 장연면(長延面)
장연면은 괴산군 북동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연풍면과 충주시 수안보면에 접하고, 남쪽은 칠성면, 서쪽은 감물면, 북쪽은 충주시 대소원면과 살미면에 접하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면소재지는 오가리이다. 박달산과 그 산맥이 남으로 뻗은 산악이 중첩한 지세를 이루고 있는 분지형태의 고즈넉한 시골마을이며,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 나들목이 방곡리에 위치하고 괴산휴게소(창원 방향)가 장연면 내에 위치한다. 특히 장연면 송덕리에는 고려시대의 유적이 남아있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미선나무 자생지와 박달산, 수령 800년이 넘은 오가리 느티나무 등 자연 풍광이 수려해 사진 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당도가 높고 과질이 좋은 장연사과가 전국적에 알려져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국민적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는 대학찰옥수수의 본고장이며, 면단위 중 잡곡(수수, 조, 흑미, 찰벼, 기장) 재배가 가장 많아 농촌 정취가 물씬풍기는 고장이며 고추, 봄배추 등의 농특산물이 전국적인 유명세로 전국적인 유명세로 농특산물 소득이 높은 앞서가는 농업면 지역이다.
명성지맥을 하면서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를 지난 기억이 있습니다.
♤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五佳里)
등로 오른쪽 아래로 보이는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는 본래 연풍군 면의면에 속한 지역으로 산, 물, 땅, 곡식, 인심 이렇게 다섯 가지가 좋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며, 괴산군의 장연면 오가리에서 발원하여 오가 저수지를 지나 북쪽으로 흘러 광진리를 지나 장연면과 충주시 살미면의 경계 부근에서 석문동천과 합류하였다가 달천(健川)으로 흘러드는 하천인 오가천을 '까치내'라고도 하고, 한자로 '작천'이라고도 한다. 지명은 이 하천의 주요 통과지역인 오가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나 '조선지형도'에서는 팔봉강(八峯江)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이 지명의 흔적으로 오가천이 달천과 합류하는 지점에 놓인 팔봉교(八峯橋)가 남아 있다.
♤ 671.9m봉
조망은 없고,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다시 안부로 내려섰다가 급경사 오름으로 744.7m봉으로 올라선다.
♤ 744.7m봉/ 삼각점봉/ 면계(장연면 - 연풍면)
백두사랑산악회산패와 맨발대선배님 산패 두개가 있다. 삼각점과 지적도근점이 나란히 있는데 판독은 불가하다. 조망은 없고, 지맥은 우틀로 꺽어져 철쭉군락지를 통과한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장연터널이 지나는 능선을 지나는데 터널 북쪽으로는 괴산휴게소가 있다. 안부로 내려섰다가 742.7m봉으로 빡시게 올라서는데 오른쪽은 천길 단애이다.
♤ 742.7m봉/ 면계/ 삼리봉(괴산군 장연면 오가리, 연풍면 유상리 → 장연면 송덕리)
올라서며 고속도로 차량 소음이 들린다. 조망은 없고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맥길은 우틀이다. 지맥의 왼쪽이 연풍면 유상리 → 장연면 송덕리로 바뀌며 지맥의 좌우가 완전하게 괴산군 장연면으로 들어서서 한참을 내려선다.
♤ 괴산군 장연면 송덕리(松德里)
등로 왼쪽으로 보이는 괴산군 장연면 송덕리는 장연면의 중간에 위치한 솔티고개의 남쪽 비탈진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로 본래 연풍군 장풍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송치동, 송동, 교동, 덕비동을 병합하여 송동과 덕비동의 이름을 따서 송덕리라 하여 괴산군 장연면에 편입되었다. 경지면적의 80% 이상이 밭으로 구성되어 있고 유명한 솔티샘(옻샘)을 보유하고 있는 마을로는 송티, 덕비 등이 있다. 송티(송동)는 송티재 중턱에 위치한 마을로, 일명 음지마을 평해 황씨 집성촌이고, 덕비동은 옛날 12호가 거주하다. 화전정리로 이거하여 현재는 잡초만 무성한 마을로 덕비골이라고도 부른다. 유형문화재로 송덕리 5층 석탑이 있다. 송덕리 5층석탑은 송덕리 일명사지(逸名寺址)에 있으며 화강암으로 조성된 높이 305cm의 탑이다. 현재 5층 탑신까지 남아있는데 5층 옥개석 이상 상륜부(上輪部)는 모두 결실 되었다.
♤ 612m봉
612m봉을 내려서면서 뚜렷한 직진길을 버리고 급하게 우틀로 꺽어진다.
♤ 성황당고개
농가가 있는 왼쪽으로 넘나드는 파란물통이 있는 안부이다. 여기서 농가로 내려서서 양회임도를 따라 솔치로 이동하기도 한다.
♤ 411.4m봉/ 두루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봉따대선배님 배하사님은 여길 두루봉이라 했다. 송치재에 거의 다 내려올 무렵 쌍곡환종주의 보배산과 군자산이 바라보인다.
서쪽으로 향하던 신선지맥이 솔치재에서 북쪽의 박달산에 올랐다가 다시 양산목재로 내려섭니다. 여기서 물을 구하지 않으면 박달산을 넘을 수 없어 솔치재 직전 왼쪽에 있는 농막으로 올라가 물을 구하고 머리도 감고 옷도 주물주물 빨아서 입었습니다.
♤ 솔티/ 송치재(松峙, 330m)/ 527번도로/ 거문리
고개에 소나무가 많아 유래된 이름으로 거문리(巨門里) 버스정류장이 있다. 충북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에 있는 고개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도로쪽에 ‘내고향 거문마을,이라는 간판과 솔치재 팻말이 있다. 흔하게 있는 솔치보다는 거문리가 더 인지도가 있다. 지맥은 장연면 오가리 내를 통과한다. 거문마을 표지판을 올라 오른쪽으로 향하다가 왼쪽 묘지쪽으로 올라간다.
♤ 거문마을(오가리)/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
거문동(巨門洞)은 송티재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됨배재는 거문동에서 감물면 증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중턱에 마을이였다. 절터골마을은 거문동 서쪽에 옛날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절터골이라고 한다. 느티나무의 고장 괴산 장연면 오가리 우령 마을 입구에는 800년 이상 된 거대한 느티나무 세 그루가 하늘을 이고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정자를 닮았다 해서 ‘삼괴정’이라 불린다. 한국 전쟁 때는 임시 피난처였고, 40여년 전에는 나무에서 울음소리가 들린 뒤 마을에 변고가 일어 났다는 얘기도 전해오는데 마을 사람들은 가뭄이나 큰 물 한 번 들지 않고 대대로 평화롭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느티나무 덕이라고 믿고 있다. 괴산에는 이처럼 영험한 나무로 여겨지는 느티나무들이 유난히 많다. 느티나무 괴(槐)자를 쓰는 괴산의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 364m봉
거문마을의 오른쪽 능선을 걷는다.
왼쪽 아래가 거문동 마을입니다. 보이진 않지만 아이들이 계곡에서 물놀이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 457.5m봉
묘지에서 사면길이 있으나 올라서면 준희선생님의 오래된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신설임도를 지나 올라선 봉우리에서 비박했습니다. 원래는 매전리까지 진행해보고자 했지만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일이었고, 땀을 많이 빼고 힘이 많이 들어 일찍 쉬고 조금 일찍 출발하자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나마 솔치에서 물을 1리터는 마시고 3리터를 보충해 넉넉했습니다.
♤ 신설임도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에서 감물면 매전리로 넘어가는 신설 임도이다.
신선지맥이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와 처음 만나는 지점으로 거리상으로 지맥의 중간쯤 되는 지점입니다.
♤ 686.0m봉/ 면계(장연면 - 감물면)
준희선생님 힘힘힘 격려산패도 지난다. 정상에는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솔치재에서부터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 내를 걸었지만 이곳부터는 장연면과 감물면의 면계로 왼쪽 능선은 감물면이고 오른쪽 능선은 장연면이다. 우틀로 급하게 꺾어져 내려선다. 신선지맥이 괴산군 감물면의 하단부에 위치한 매전리를 처음 만나는 곳으로, 여기서 만난 감물면 매전리와는 북쪽 리계를 따라 박달산에 오른 지맥은 박달산에서 성불산으로 질러가지 않고 매전리를 북에서 남으로 횡단한 후 남쪽 리계를 따라 성불산 넘어 치마바위봉 아래 Y자 갈림길까지 태극 모양으로 아주 길게 우회한다.
♤ 괴산군 감물면(甘勿面)
괴산군 감물면은 충북 중앙부에 위치한 괴산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으로서 동으로는 괴산군 장연면과 경계하고 서로는 괴산읍과 북으로는 불정면과 남으로는 칠성면과 경계하고 있다. 동쪽은 유령으로 주월산, 박달산령을 따라 장연면 방곡, 추점, 오가, 장암과 경계하면서 증자동 양산목을 거쳐 장연면 장암쪽으로 내천을 이루고 있다. 또, 쌍천과 합류하는 칠성면 태성리, 비도리를 돌아 괴산읍 검승리 이탄과 구무정 접경하면서, 성불산을 안고 달천강이 오창리, 이담리, 구월리를 돌아 흐른다. 서쪽은 평단부로 이담들, 오창들이 능촌, 세평, 목도, 하문리와 경계하는농경지를 이루며 동남 산, 서북 강 지대이다. 본래 감물면은 충주군에 속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충주)에서 감물내(甘勿內)는 본래 감물내미부곡(甘勿內彌部曲)이었다고 적고 있다. 『여지도서』(충원)에도 여전히 감물내미면이라고 나오는데, <1872년지방도>에는 감물면이라고 나온다. 1914년 충주군 감물면이 군의 동하면 4개 리와 연풍군 장풍면의 3개 리와 합쳐져 괴산군 감물면이 되었다. 광전리 지명은 1914년 광지리·미전삼리·미전이리 등을 합친 리라는 의미에서 광지와 미전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담리(鯉潭里)는 달천강가에 잉어 떼가 많이 모이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잉어소라는 지명의 한자 지명에서 유래하였는데, 1914년 계담리·호암리·항동 등을 합쳐 이담리라 하였다. 이담(鯉潭)과 관련된 파생지명으로는 잉어소나루·잉어소들·잉어배미·이담제 등이 있다. 오창리는 본래 괴산군 동하면 지역이었는데, 역시 1914년 오간리 일부와 유창리를 합쳐 오창리라 하였다. 오성리·이담리 일대의 평야지대에서는 논농사가 활발하며, 주로 감자·고추 등의 작물이 생산된다. 백양리에는 괴산군에서 가장 큰 이담저수지가 있다. 면 서쪽에 달천이 북쪽에서 북동쪽으로 흐르는데, 물맛이 달아 감물, 감천으로 불려 지명이 유래하게 됐다. 충주시와 인접하며 동쪽에는 월악산, 남쪽에는 속리산이 있는 백두대간이 위치하는 곳이다. 감물면 동부에는 높이 825m의 비교적 높은 산지가 분포돼 동고서저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하천은 달천이 면의 북쪽에서 북동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안민천이 박달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달천에 합류한다. 산지가 많아 경지율이 낮으나, 산간지대에는 안민천을 따라 논이 분포하고, 북서부의 이담리에는 경지정리가 잘되고 넓은 평야가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과 감자, 옥수수, 외에 고추 등이 있다. 또, 축산업과 과수, 표고버섯으로 소득을 올리는 주민도 있다. 법정리로는 현재 광전리와 구월리, 매전리와 백양리, 오성리와 오창리, 이담리 등 7곳이 있다. 감물면의 대표 축제로는 매년 6월 하지무렵 감자 수확기를 맞아 진행되고 있는 감물감자축제이다. 감자축제는 지난 2002년 해마다 감자 수확기에 맞춰 열고 있다. 주민 노래자랑과 농‧특산물판매장, 감자캐기 체험행사 등을 하고 있다. 특히, 감자캐기행사는 축제 전 사전에 예약을 받아 진행하는데, 매년 인기를 끌며 조기에 신청이 마감되고 있을 정도이다. 감물면에서 생산되는 감자는 청정 자연환경과 깨끗한 토양에서 재배하는 친환경 농산물이다. 비타민을 비롯한 각종 영양이 풍부하게 함유돼 있고, 단단하고, 맛이 뛰어나며 저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괴산군 농업연구소 무균배양실에서 무병 씨감자로 3년째 걸쳐 생산된 보급감자를 재배해 맛과 품질이 우수하다. 여기에 교육기관으로 감물초등학교와 오성중학교 등이 위치해 있다. 오성중학교는 기숙형 중학교로 알려졌다. 충주 방면의 국도가 면 중부를 가로지른다. 교통은 충주 방면의 19번 국도가 면 중부를 가로질러 충주시와 괴산읍으로 연결되며, 주월산과 박달산 사이 터널을 통해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IC로 연결된다.
신선지맥의 후반부 절반 이상을 감물면 매전리와 함께 합니다.
♤ 충북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梅田里)
충북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는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IC 인근에 위치한 자연 친화적인 농촌 마을이다. 일설에 의하면 매전리를 맹자, 증자, 도자, 안자의 명에다 동자를 붙여 지어진 것이라고도 한다. 그중 맹자동이 현 원매전이라 한다. 원매전은 성불산을 북으로 동남으로 병풍친 것과 같이 두르고 앞서들 산을 바라보며 동으로 트인 분지를 이루는 곳이다. 원매전은 아랫맹이, 웃맹이로 동리가 나누어진다. 본래 충주군 감물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미전2리 일부 괴산군 동하면의 매양리와 연풍군 장풍면 안민도전리를 병합하여 매양과 미전의 이름을 따서 매전리라 해서 괴산군 감물면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는 원매전(元梅田), 도전(道田)/도저니, 안민동(安民洞)/아치실, 증자동(曾者洞)/징개골로 분리되어 있다. 증자동은 속칭 징개골이라고도 한다. 증자동이라 표기된 것은 언제쯤인지는 모르나 금계골이란 말도 있다. 금이 나는 골이란 뜻인데 짐계골로 되었다고도 한다. 증자동은 박달산 서남 계곡의 협소한 골짜기가 4Km이상 뻗어있는 부락으로 양산목, 윗말, 중간말로 이룬다. 양산목은 정감록의 피난지라고 모여들은 사람들이 이룬 부락이다. 중간말, 윗말은 왜정시 금을 캐기 위한 광부들이 정착하여 이룬 부락이다. 증자동은 감물면에서 전기를 제일먼저 밝힌 부락으로 금광이 성황을 이룰때는 광산의 자가발전으로 증자동을 밝힌 바 있다. 강원도라 불리우리만치 화전민이 많았고 도유림을 경작하는 영세민의 집단지이기도 하다. 옥수수, 고구마를 많이 재배하여 한때 1가구당 50-60叺의 옥수수를 수확한 때도 있었다. 약초와 산채도 많고 산뽕으로 누에 30여장 씩을 치기도 했었다. 6.25때 인민군 패잔병 1개 사단이 몰려온 때도 있었다. 6.25때 공비가 출몰하여 양산목고개에서 경찰 5명이 순직한 사건도 유명하다. 오솔길로 감물까지 상촌에서는 10Km되는 곳인데 새마을사업으로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개통되었다. 도전동은 도자동이 도전으로 변했다는 설도 있으나 도전리는 박씨가 개척하였다고도 전하고 있다. 해발고도는 증자동 보다도 오히려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증자동과 비슷하게 경작형태가 이루어 진다. 안민동 (일명 아치실)은 아치실이라 불린다. 옛날 장사를 지내기 위하여 묘자리를 파는데 학이 날아가서 앗차하여 아차실이란 설도 있다. 원래 영풍아차실이다. 연풍현 하차곡리였다. 그 후 장풍현 아차곡인 때도 있었다. 동리가 그 이전에 아차곡리라 하였다. 일설에 안자동이란 말도 있으나 맹자동, 증자동, 안자동, 도자동으로 매전리 동명의 유래를 보기도 한다. 함양박씨 문중 호구장 308년 전의 것을 보면 즙전리로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고사리가 많이나는 고장이다.
야간이라 드문드문 불빛과 개짖는 소리만 잠시 올라올 뿐...
♤ 660.9m봉
등로 오른쪽으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휴게소가 보이고, 등로 왼쪽 아래쪽으로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 증자동에 있는 무심사라는 절집이 보인다. 정상은 넓은 공터이고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 무심사(無心寺)/ 충북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
괴산군 감물면 박달산 남쪽 자락에 위치한 한국불교태고종 사찰이다. 무심사는 약 1400여 년 전에는 선정사라는 아주 큰 대찰이었다. 그러나 숙종 때 모든 전각이 소실되고 터만 있던 곳에 2000년 지광스님이 불사를 시작하여 2007년 12월 2일 혜초 종정예하를 모시고 대웅전 및 요사채 낙성법회를 봉행했다. 동진출가(童眞出家)한 동자승들이 주지스님과 함께 생활하며 방송을 통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어 더욱 잘 알려진 사찰이기도 하다. 매년 지역 어르신을 초청하여 경로잔치를 봉행하고 있으며 노인복지법인도 운영하고 있어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포교도량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장연면과의 면계를 따라 북향하던 지맥이 좌틀하여 괴산군 감물면 내로 들어섭니다.
♤ 778.9m봉/ 면계/ 삼리봉(괴산군 감물면 매전리, 장연면 오가리 → 방곡리)
정상은 넓은 공터이고 맨발대선배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이 오른쪽이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 → 방곡리로 바뀌는 면계이자 삼리봉이다. 오른쪽으로 뚜렷한 등로가 보이는데 괴산군 장연면 추점리로 이어지고 박달산은 왼쪽 내리막길이다.
♤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方谷理)
방곡마을이 속한 방곡리는 본래 연풍군 면의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양방동(兩方洞)·운곡동(云谷洞)·자약동(自若洞) 일부를 병합하여 양방동과 운곡동 이름을 따서 방곡리가 되었고, 괴산군 장연면에 편입되었다. 방곡리에는 간곡마을과 방곡마을 등 여러 부락이 흩어져 있다. 간곡 마을의 옛 지명은 병방골 샛골이었다. 방곡 삼거리에서 방곡마을로 들어가면 병방골(兵防谷)이 있다. 이 병방골은 방곡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로 병자호란 때 이곳에서 호병(胡兵)을 막았다고 한다.
♤ 괴산군 장연면 추점리(楸店里)
괴산군 장연면 추점리는 장연면 중부에 있는 농촌마을로 자연마을로는 추점, 옹점, 구름들 등이 있다. 추점은 가래나무가 많아서 붙은 이름으로 가래올, 가래월, 추동이라고도 부르며 천연기념물인 백로가 마을 뒷산 잡목에 서식하던 곳으로도 유명하고 또한 천연기념물인 미선나무 자생지가 있다. 옹점은 가래올 북쪽에 있는 골로서 옛날에 옹기점이 있었다하여, 구름들은 가래올 북쪽의 마을로서 앞들이 매우 좋고 구름이 자주 낀다 하여, 추점이라는 이름은 추동과 옹점의 이름을 따서 생겼다고 하며 이 마을에 있는 미선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20호로 면적 7,798㎡. 농경지로부터 가까운 산록의 경사면에서 자라고 있는데, 이 지역은 경사가 급해서 흙이 적고 잔돌이 많다. 미선나무 이외에 나도국수나무·두릅나무·새·붉나무·칡·청미래덩굴·굴피나무·산딸기·개회나무·다래·시무나무·개머루·노박덩굴·찔레꽃·담쟁이덩굴·멍석딸기·사위질빵 등이 자라고 있다. 미선나무는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작은 관목으로 물푸레나무과에 속한다. 일속(一屬) 일종(一種)의 우리나라 특산식물로 괴산군 이 외에서는 자생지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꽃은 3월말부터 잎보다 먼저 피는데 흰색이 주종이고 붉은색·상아색 등이 있다. 열매는 가을에 익으며 둥근 부채같이 생겨서 ‘미선(美扇)’나무라고 한다. 근래에는 묘목으로 많이 양성되고 있다.
♤ 동골재/ 안부
오른쪽으로는 장연면 방곡리 간곡마을, 왼쪽으로는 감물면 매전리 증자동으로 이어진다.
정면으로 속리산연봉이 바라보이는군요. 왼쪽으로 넘나온 신선지맥의 능선이 바라보이고 희양산과 구암봉, 장성봉 등등 백두대간이 바라보입니다. 오른쪽 끝으로 군자산도 찾아 보았습니다.
♤ 박달산(朴達山, 824.5m)/ 2등삼각점(충주 23/ 1982 복구)/ 정상석/ 무인산불감시카메라
솔치재에서 약 2시간 30분 소요된다. 세개의 봉우리로 되어있는 정상이 가까워지며 월악산 영봉과 수안보 너머로 충주호도 아련히 보인다. 뒤돌아 보면 백두대간에서 출발한 신선지맥의 분기점인 마패봉, 신선봉과 오른쪽으로 뻗어진 깃대봉, 신선암봉 너머로 주흘산이 멋진 모습으로 다가온다. 정상에서 수안보I.C 너머로 계명지맥 능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무인산불감시카메라 울타리에 백두사랑산악회 산패가 매어 있다. 오른쪽으로 희양산에서 시작하여 백화산, 조령산, 신선암봉, 마패봉, 포함산, 대미산으로 펼쳐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장쾌하게 펼쳐진다.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와 매전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괴산 35명산 중의 하나이다.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와 2등삼각점, 정상석과 한국고대사 연구회에서 세운 박달산 정상 대한민국 게양대가 이채롭다. 단기 4330년 음력 7월6일(1997년 8월8일)에 세웠다고 하는데 누군가가 그 아래의 내용을 지워 버렸다. 박달산(朴達山)의 유래에 대하여 2가지 설(說)이 있다. 하나는 박달(朴達)이 배달민족의 배달과 같은 의미로, 배달은 발달에서 온 말로, 그 어원은 밝다이며 박으로 발음되고, 달은 산을 뜻하는 옛말이다. 그래서 배달은 밝음, 새벽, 빛 등 산 곧 큰 산을 뜻하는 박달의 말소리가 변한 것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옛날에 천지가 개벽할 때 이 일대가 모두 물에 잠겼는데, 이 산꼭대기만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만큼 잠기지 않았다고 하여 박달산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한국고대사 연구회라는 곳에서 박달산의 지명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해놨다. 박달(朴達)과 배달을 연결지어 밝은 산을 뜻한다고 하는데 조금은 억지스런 느낌이다. 옛날 우리말에는 박달(朴達)은 밝은 땅을 의미하거니와 그 유래가 밝은 임금은 단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고대사와 연결시키는 걸로 조금은 억지스런 느낌이다. 내려서면서 오른쪽으로 달천이 보인다.
♤ 809m봉
우틀하여 급경사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 743.7m봉/ 폐헬기장/ 느릅재갈림길/ 면계/ 삼리봉(괴산군 감물면 매전리, 장연면 방곡리 → 감물면 백양리)
대한산경표상의 석문동지맥과 신산경표상의 신선지맥의 갈림길이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오른쪽의 느릅재로 이어지는 박달산 1.5km, 느릅재 1.5km 이정표가 보인다. 지맥이 오른쪽이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 → 감물면 백양리로 바뀌는 면계이자 삼리봉이다.
모든 지맥이 합수점으로 향해야만 원칙이란게 지맥에 적용됩니다. 162개 지맥 중 일부가 합수점으로 향한다고 하여 지맥에도 산자분수령원칙이 적용된다면 그건 원칙이 될 수가 없습니다. 고로 지맥의 끝머리는 합수점을 고집하지 않고 산줄기의 위용과 길이 등을 고려해 자연스런 산줄기를 따르는게 합리적입니다.
♤ 주월단맥/ 석문동지맥
주월단맥/ 석문동지맥은 달천(健川)과 달천의 지류인 석문동천을 구분하는 수계 산줄기로, 백두대간 마패봉(925.1m, 일명 마역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신선봉(965.9m), 소조령, 송치재, 박달산(824.5m), 느릅재, 주월산(502.9m), 주월재, 옥답산(509.6m), 435.4봉, 지사골재를 지나 석문동천이 달천과 합류하는 충주시 살미면 토계리 도랫말(팔봉교 옆)에서 끝나는 약 30.5km의 산줄기를 말한다. 743.7m봉까지는 신 산경표 신선지맥과 산줄기가 동일하나, 이후 대한산경표 석문동지맥은 북서쪽으로 급격하게 꺽여 느릅재, 주월산, 옥답산, 지사골재를 지나 석문동천과 달천의 합수점으로 이어진다. 백두대간 상의 마패봉 분기점에서 볼 때 지맥 오른쪽의 물줄기는 모두 석문동천으로 유입되고, 왼쪽의 물줄기는 쌍천, 안민천 등을 거쳐서 먼저 달천의 일부가 되었다가 지맥이 끝나는 합수점(팔봉교 주변)에서 이 산줄기로 인하는 갈라졌던 좌우의 물이 다시 만나게 된다. 합수점에서 볼 때는 이 산줄기가 좌측의 석문동천과 우측의 달천을 구분하는 완전한 수계 산줄기가 된다는 주장이다. 다만, 1963년 석문동천과 달천의 합류지점 인근에 있는 수주팔봉(493m) 칼바위 주변 암릉을 인위적으로 절단하여 만들어진 팔봉폭포를 통하여 석문동천이 달천에 떨어지도록 함에 따라 현재 토계리 일대의 구 하천은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 수주팔봉(水周八峰)/ 충주시 살미면 토계리
충주시 살미면 토계리의 달천에 있는 '물 위에 선 여덟 개의 봉우리'라는 뜻을 가진 기암절벽 명소로,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 팔봉마을에서 달천 건너 동쪽 산을 바라볼때 정상에서 강기슭에서 여덟개의 봉우리가 떠오른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충주시 관광지로 주차장, 탐방로 및 출렁다리가 조성되어 있다. 드라마 빈센조에 배경으로 등장하여 유명해졌다. 달천의 수주팔봉 야영장은 수주팔봉의 경치를 즐길 수 있는 캠핑 명소로 인기가 높으며 차박 성지로 떠올랐다. 수주팔봉에서 가장 높은 칼바위(劍巖, 493m)는 칼바위는 지질학적으로 옥천 누층군의 변성퇴적암 지층인 문주리층으로 구성된 암석이다. 문주리층은 충주호 지역에서 수주팔봉을 지나 괴산군 장연면 조곡리 지역까지 북동-남서 방향으로 분포하는데 수주팔봉 일대에서 폭이 가장 넓어진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김정은 귀양 후 사형당하고 이자(李耔)는 훈구파 남곤(南袞)의 도움으로 죽음은 면하고 귀양을 간다. 1차 귀양지는 용인 지곡동, 2차 귀양지는 음성 음애동, 3차 귀양지는 수주팔봉이 있는 충주 토계리 칼바위(劍巖)로 귀양 온 것은 1529년이다. 이자 이곳에 몽암(夢庵)을 짓고, 1519년 기묘사화로 충주에 낙향해 살고 있는 이연경(李延慶)과 교류한다. 1533년 이자가 세상을 떠난 후 1582년 충청감사 김우굉(金宇宏)과 충주목사 이선(李選)이 이자를 추모하여 1583년 계탄서원을 건립하였다. 계탄은 이자의 호인 계옹(溪翁)과 이연경의 호인 탄수(灘叟)에서 한 자씩 따서 만들어졌다. 이들 두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노수신이 계탄서원의 완성을 기뻐하며 칼바위(劍巖)라는 시를 지었다. 팔봉폭포는 칼바위 아래, 석문동천이 달천으로 흘러드는 폭포이다. 이 폭포는 오가천 물길을 막아 농지로 만들기 위해 칼바위의 옥천 누층군 문주리층의 암석을 인공으로 절단하여 만든 폭포다. 수주팔봉 건너편 달천의 모래사장에는 취사와 야영이 가능한 캠핑장이 있어 수주팔봉과 칼바위의 경치를 바라보며 캠핑할 수 있다. 캠핑장은 불법건축물을 철거하고 충주시가 노후 화장실과 수도시설을 개선한 끝에 2023년 재개장하여 야영의 명소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 671m봉
느릅재갈림길에서 길이 없는 내리막길로 내려서면 뚜렷한 등로가 보인다. 10여분 진행하면 만나는 두리뭉실한 봉우리이다. 지맥은 직진 방향 골격을 이룬 능선을 벗어나 좌틀하여 정남 방향으로 사면 형태의 능선으로 뚝 떨어진다.
♤ 662m봉
671m 봉에서 5분 정도 진행한 곳으로,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와 백양리의 경계를 따르던 지맥이 매전리 내로 들어서서 양산목고개로 내려선다.
♤ 양산목고개(525m)
반바지운영자님코팅지산패가 층층나무에 매어 있다. 양쪽에 계곡을 거느린 안부로 틀림없이 지름길로 이용된 고개이다. 아래에서 아련히 차소리도 올라온다.
♤ 537.7m봉
양산목고개에서 올라선 봉우리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이후로 임도로 내려서기 직전 봉우리로 다가가며 잡목숲을 피해 왼쪽으로 우회하여 오른다.
주인아저씨가 사유지인데 당당하게 들어와 물좀 달란다고 의아해 하시더군요. 산줄기를 타는 사람인데 물이 꼭 필요하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 매전리고개/ 양산목재/ 배넘이고개/ 2차선도로(도전로)/ 인가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 도전마을에서 양산목마을이 있는 증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양산목 마을은 정감록의 피난지라고 모여들은 사람들이 이룬 마을로 증자동에서 장연으로 넘어가는 고개(댐비재)가 있다.
♤ 349m봉
지맥은 좌틀로 꺽어져 내려선다.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 안을 통과한 지맥이 박달산에서 헤어진 괴산군 장연면과 다시 만나 면계를 따라 우틀한다.
신선지맥은 여기서 괴산군 칠성면과 만나 맹이재 위의 삼읍면봉까지 약 4.3km를 함께 하며, 2020년 무한도전에서 개통한 쌍천환종주는 여기서 신선지맥과 이별하고 비도리 내로 직진하여 448.7m봉을 넘어 쌍천 쌍곡교로 내려서서 원점회귀 합니다.
♤ 402m봉/ 삼면봉(괴산군 감물면 매전리, 장연면 장암리 → 칠성면 비도리)
쌍천환종주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삼면봉에서 칠성면 비도리 내로 직진하여 약 150m 떨어져 있는 448.7m봉에서 쌍천으로 내려서지만 지맥은 우틀한다. 지맥의 왼쪽이 괴산군 장연면 장암리 → 칠성면 비도리로 바뀌는 삼면봉이다. 알바 유의구간이다. 뚜렷한 직진길이 아닌 우틀로 내려가야 하는데 등로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지맥은 다시 만난 장연면과 헤어지고 감물면과 칠성면의 면계를 따른다.
순록농장의 철조망 울타리를 놓치지 않고 약 30분 동안 계속 따라가야 합니다.
♤ 432m봉/ 면계(감물면 매전리 - 칠성면 비도리)
연두색 휀스가 쳐져있는 평장묘지로 내려서야 하는데 좌우로 조금만 벗어나도 가시숲이라 길을 잘 찾아야 한다. 옆길로 올라 좌틀하면 순록농장 철조망이 맥길을 따라 이어진다. 순록은 한마리도 볼 수가 없었는데 아마도 여름엔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도 있겠다. 반대편엔 복숭아가 한창 익어가고 있다.
♤ 괴산군 칠성면(七星面)
충북 괴산군의 중앙부 남동쪽에 위치하며 군소재지로부터 8km 지점에 있으며, 면내의 일부가 속리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남부에는 백두대간의 군자산(948m), 비학산, 옥녀봉 등이 있어 험준한 산지를 이루고 경치가 아름다워 소금강이라 일컫는 쌍곡계곡이 있으며, 동은 연풍면, 서는 괴산읍과 문광면, 남은 청천면, 북은 감물면과 장연면을 접경하고 있다. 북부는 서류하는 연풍천과 북류하는 달천이 합류하면서 만든 비교적 넓은 평지가 발달해 있다. 연풍천 유역을 중심으로 농사가 이루어진다. 현재 12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면 소재지는 도정리(道井里)이다. 1914년 이전까지 군의 동중면(東中面)이었다. 1914년 동상면의 일부 리와 연풍군 장풍면의 비도동 일부가 기존의 동중면에 합쳐져 칠성면이 되었다.『신구대조』에는 면에 속한 송정리·외사리·사은리·사평리·도정리 등 10개 리가 나온다. 면의 지명은 도정리 남쪽에 있던 일곱 소나무와 칠성바위, 즉 칠송암(七松岩)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칠송암이라는 지명유래는 다음과 같다. "먼 옛날 하늘나라의 일곱 신선이 죄를 짓고 바위로 변해 땅에 떨어졌다. 시간이 흐른 후 하늘나라의 대왕은 이곳저곳의 땅에서 외롭게 지내는 그들을 측은히 여겨 모여 살도록 허락했다. 그들은 평소 보아둔 북두칠성 모양의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해 대왕은 기꺼이 이들 7개의 바위를 7그루의 소나무 옆으로 옮겨주었다. 이 일곱 바위와 일곱 소나무를 일러 칠송암이라고 했다 한다." <구한말지형도>, <조선지형도>에도 칠성암(七星岩)이란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1960년대까지 도정리에는 실제로 두 그루의 소나무와 바위들이 남아 있어 7월 칠석이면 동민들이 모여 국태민안과 마을의 복을 기원했고, 5월 단오에는 소나무에 그네를 매 타기도 했다고 한다. 도정리는 깊은 우물이 있다하여 길우물·도정이라 부른 데서, 두천리는 달천이 마을 앞을 돌며 흘러 마치 내로 막은 것 같다 하여 마그내·두천이라 부른 데서, 태성리는 마한 때 태자가 이 지역을 순행하다가 쌓은 태자성(太子城)이 있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태성리는 원래 1914년 장연면에 속했었는데, 1989년 칠성면으로 바꾸어 편입시켰다. 경제작물이 많은 중간산 마을로 고추, 인삼,절임배추, 송이버섯 채취 등으로 소득을 얻고 있다.
♤ 괴산군 칠성면 비도리(斐道里)
괴산군 칠성면 북동부 군자산 자락에 위치한 산골마을로 북으로 감물면과 장연면에 연접한 비도리(비동리)는 본래 연풍군 장연면 비도동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연면에 편입되었다가 1947년 면의 거리관계로 편의를 도모 칠성면에 편입된 자연 마을이다. 수려한 자연환경 속에 농가와 전원주택이 자리잡고 있다. 한자로는 비단 비(斐) 자와 길 도(道) 자를 쓰며, 마을 앞을 흐르는 쌍천(雙川)의 물줄기가 반달처럼 굽이쳐 흘러 달이 맑게 비치는 모습이 아름다워 '아름다운 길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는 설화가 있다. 이 지역은 과거 청동기시대의 돌화살촉 유적이 발출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과거 인근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월계정' 터가 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 쌍곡환종주
괴산 쌍곡계곡은 충북 괴산군에서 연풍 방향으로 10km 지점인 칠성면 쌍곡리 쌍곡마을로부터 제수리재에 이르기까지 10.5km 구간에 분포되어 있다. 쌍곡구곡(雙谷九曲)이라 불리는 9개 절경 포인트가 연속으로 이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구곡은 호롱소, 소금강, 병암(떡바위), 문수암, 쌍벽, 용소, 쌍곡폭포, 선녀탕, 마당바위(장암) 등이다. 쌍곡(雙谷)은 쌍곡리(행목동)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살구나무골이라는 뜻으로도 설명된다. 천연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전하고 있는 쌍곡계곡은 옛날부터 쌍계라 전해졌고, 조선시대 퇴계 이황, 송강 정철 등 당시 수많은 유학자와 문인들이 쌍곡의 산수경치를 사랑하여 이곳에서 소요하였다고 전한다. 수많은 전설과 함께 보배산, 군자산, 비학산의 웅장한 산세에 둘러싸여 있고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이 기암절벽과 노송, 울창한 숲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 쌍곡환종주는 괴산 8경 중 하나인 쌍곡계곡을 중심에 두고 군자산부터 막장봉 악휘봉 칠보산 보배산 등 여러 봉우리를 이어 원점회귀하는 종주 산행으로 산행거리는 약 30km이다.
♤ 쌍천환종주
쌍천환종주란 충북 괴산 연풍에서 시작하여 충북 괴산 칠성(종점)으로 흐르는 한강수계의 지방하천으로 하천 연장 약 24km, 유역면적 182.45 km²이다. 쌍천 환종주는 쌍천을 중심에 두고 괴산군 칠성면 쌍곡리에 위치한 쌍곡교에서 출발하여 군자산을 걸쳐 517번 제수리치 지나 백두대간 장성봉, 황학산, 조령산, 마역봉에서 신선지맥으로 이어져 신선봉, 소조령, 솔치재, 박달산을 지나서 원점회귀산행으로 다시 쌍곡교에 이르는 약 86km의 초장거리 종주산행이다. 주요구간은 쌍곡교-다파리재-군자산(919.4m)-도마재-남군자산(830.2m)-화학재-ㅈ-수리재-막장봉-악휘봉-은티재-주치봉-구왕봉-지름티재-희양산-배너미평전-시루봉-배너미고개-이만봉-곰틀봉-사다리재-평전치-백화산-황학산-조봉-이화령-조령산-신선암봉-깃대봉(치마바위봉)-조령제3관문-마패봉(마역봉)-신선봉-연어봉-소조령-탁사등봉-솔치재-동골재-박달산-743.7m봉-양산목고개-삼면봉-쌍곡교로 2020. 4. 11(토) 무한도전클럽에서 개통하였다.
♤ 419m봉
오른쪽으로 순록목장의 철조망을 놓치면 안된다. 직진으로 이어지는 길을 버리고 철조망을 따라서 우틀로 내려간다.
♤ 369.2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철망 울타리는 오른쪽으로 내려가고 지맥은 좌틀이다.
♤ 도전리고개/ 검은동골 양회임도/ 면계(장연면 - 칠성면)
철망 울타리 끝에서 도전마을로 이어지는 콩밭 농로로 내려선다. 매전리고개에서 약 3.5km 거리이다. 여름엔 칡넝쿨 지대라 접속이 여의치 않다. 직진으로 임도를 따르다가 왼쪽에 묘지가 있는 곳에서 지맥에 접속한다.
♤ 350.7m봉/ 4등삼각점(413 복구/ 76. 11. 건설부)
잡목봉이라 조망은 없다. 준희선생님 산패와 백두사랑산악회 산패 두개가 있다.
♤ 364.7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성황당이 있었는지 무너진 돌무지가 있고 당산나무도 있습니다.
♤ 사곡재(寺谷峴)/ 괴산군 칠성면 사평리(沙平里)
깊은 계곡처럼 푹파인 고개인데 사곡마을로 이어지는 왼쪽 괴산군 칠성면 사평리쪽은 뚜렷한 등로가 보인다. 칠성면 사평리 사곡마을은 괴산군 동중면의 지역으로 모래벌판이라 모랫들 또는 사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사동과 연풍군 장풍면의 비도리 일부를 병합하여 사평리라 해서 칠성면에 편입되었으며, 사곡(절곡)마을은 모래들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절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올라야할 성불산이 가까이 다가와 보입니다.
♤ 308.0m봉/ 면계/ 삼리봉(괴산군 감물면 매전리, 칠성면 사평리 → 갈읍리)
알바 유의구간이다. 사평리로 이어지는 뚜렷한 직진길을 버리고 길이 없는 우틀로 내려선다.
산사태방지턱을 배낭부터 올리고 펄쩍 뛰어서 올르기를 반복했습니다.
♤ 맹이재(215m)/ 525번지방도로(맹이재로)/ 면계(괴산군 감물면 - 칠성면)
반바지운영자님 코팅지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와 칠성면 갈읍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박달산에서 발원하는 안민천으로 물이 흐른다. 절개지공사로 한참을 내려가 묘지길을 따라 맥길에 접속하는데 절개지 옹벽으로 오르기도 한다.
맹이재에서 오른쪽 아래로 한참을 내려서야 있습니다.
♤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 맹이마을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에 있는 맹이마을의 마을 이름인 '맹이'는 과거 중국의 성씨(맹자, 증자, 안자 등)를 따서 부르던 데서 유래했다. 원매전마을이라고도 부르며 상맹이, 하맹이 마을이 있는데 상맹이 마을은 매전리의 윗부분에 새로이 마을이 들어서서 불리웠고 하맹이마을은 원매전 마을 중 아랫마을이다.
맹이재에서 능선으로 올라서는 곳입니다.
♤ 321m봉/ 삼읍면봉(괴산군 감물면, 칠성면 → 괴산읍)
묵묘가 있다. 맹이재에서 약 15분 소요된다.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 칠성면 갈읍리, 괴산읍 검승리가 만나는 특징없는 삼읍면 경계봉이다. 박달산에서 합수점까지 오른쪽으로는 감물면 지역이고, 왼쪽인 남쪽은 장연면, 칠성면, 괴산읍을 거쳐 다시 감물면으로 접어들면서 원을 그리며 맥길을 이어가는 형태로 들날머리의 직선거리는 얼마 되지않지만 15km이상을 빙 돌아간다. 이곳부터 남쪽은 잠깐 조우한 칠성면과 작별하고 괴산읍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지맥은 우틀로 내려선다.
♤ 괴산군 괴산읍(槐山邑)
괴산읍은 괴산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으로 동쪽에는 감물면과 칠성면, 남쪽은 문광면, 서쪽은 소수면, 북쪽은 불정면을 접경하고 있는 군청 소재지읍으로서 괴산읍사무소는 현 농협군지부 자리에 있던 것을 1981년 6월2일 군청사를 수진리로 신축이전함에 따라 구군청사로 이전하였다. 북부는 주로 200m 이상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며, 남부에는 남산(394m)·오봉산(384m)·성불산(520m) 등이 솟아 있다. 동진천과 성황천이 동부리에서 합류하며, 동쪽에는 달천이 흐른다. 달천의 지류가 다시 두 줄기로 갈라지는 분기점 사이의 곡저평지에 발달한 소도읍이다. 고추·옥수수 등이 특산품으로 생산되고 있다. 대덕리 일대에는 수산식품산업거점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농산물의 집산지이고 특히 황색담배가 유명하다. 충북 관광종합개발계획의 하나로 관광도로의 일부가 개설되어 수안보·청주·충주 등지와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부근에는 높이 50m, 폭 10m의 수옥정 폭포가 있다.
♤ 텃골재(305m)
반바지운영자님 코팅지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 윗맹이마을에서 괴산읍 검승리 터골마을로 이어지는 고개인데 터(텃)골재는 검승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터가 있어 생긴 이름으로 텃골위에 있는 고개로 윗맹이 마을쪽은 고개의 역할을 한 지가 오래인지 길이 보이지 않고, 텃골쪽은 基谷마을은 사라지고 성불산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성불산자연휴양림 아래에 있는 점골마을은 중골이라고도 부르며 옛날 토기(土器)를 굽던 점토(粘土)가 많아 점골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지금도 토기를 굽던 가마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 340.9m봉
선답자의 띠지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야할 성불산 3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뒤돌아보면 멀리 백두대간과 지나온 지맥이 보이고 쌍곡환종주의 군자산도 자세히 보인다.
♤ 휴양림갈림길
괴산군 성불산자연휴양림에서 올라오는 뚜렷한 임도를 만나 오른쪽의 성불산으로 향한다. 괴산 성불산자연휴양림은 2009년부터 255억원의 예산을 들여 괴산읍 검승리에 81㏊ 규모의 자연휴양림이다. 생태공원, 산림문화휴양관, 생태숲학습관, 숲관광메가시티, 한옥체험관, 숲속의집, 미선향테마파크 등이 있으며 가족 연인과 함께 사계절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편안한 휴식을 즐길 수 있다.
군자산은 신선지맥의 등대와 같은 산으로 신선봉에서 성불산까지 군자산과 자주자주 만납니다.
♤ 군자산(君子山, 946.9m)
군자산은 충북 괴산군 칠성면 쌍곡리에 위치한 산이다. 예로부터 충북의 소금강이라 불렸을 정도로 산세가 빼어나다. 군자산 남쪽 청천면 관평리에 827m 높이의 남군자산( 또는 작은군자산, 소군자산)이 있는데, 이 남군자산과 구별하기 위해 군자산을 '큰군자산'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온 산이 기암 석벽과 암릉으로 이루어져 산세가 험준하다. 군자산과 남군자산 모두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하며, 괴산군이 꼽은 괴산 명산 35에 꼽힌다. 인근에 군자사가 있으며 군자산 바로 서쪽에는 달천(健川)을 막아 만든 괴산댐이 위치한다. 삼국시대에 백제군과 신라군의 전투가 있었는데 싸움에서 진 한쪽의 장군이 느티나무에 머리를 받고 자결했다고 하며 그때부터 괴주, 괴양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초기부터 괴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비약산이라고도 하고, 예전에 군대가 있었다 하여 군대산(軍垈山)으로 불렸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괴산)에 군대산은 "군 동쪽 13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여지도서』(괴산)에서는 "경상도 문경현 조령산으로부터 뻗어 나왔다."고 적고 있다. 이 지명은 과거에 군대가 머물렀던 터라는 의미에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대동여지도』에서는 '군대산(軍帒山)'으로 한자를 바꿔 표기했다. 『구한말지형도』에서는 '군추산(群墜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후 『조선지지자료』와 『조선지형도』에서는 '군자산(君子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로 보아 현재와 같은 군자산(君子山)으로 바뀐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인 것으로 여겨진다.『한국지명총람』에서는 군자산의 지명 유래를 산세가 군자의 풍모를 갖추고 있어서라고 적고 있다.
♤ 성불산 3봉(505.6m)/ 데크전망대
성불산3봉 아랫쪽을 우회하면서 급경사 능선을 올라간다. 성불산은 주봉을 비롯하여 2봉과 3봉이 있는데 이곳 안부에서 왼쪽으로 3봉과 2봉이 있어 3봉쪽으로 향한다. 조망이 대단하다. 동쪽으로는 매전저수지 너머로 왼쪽의 박달산과 오른쪽으로는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신선봉과 조령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동남쪽으로는 군자산(좌)과 비학산이 가깝게 보인다. 남서쪽에 있는 도덕산(바로 앞에 보이는 산)과 한남정맥 상의 보광산(뒷쪽의 흐릿한 봉우리)의 모습, 도덕산은 괴산 35산에 들지는 않는다.
♤ 서귀바위(495m)
바위 이름의 유래는 모르겠고 등산객들이 능선 산행 중 조망을 즐기는 주요 거점 중 하나이다. 서귀바위는 성불산 주능선(신선지맥 등산로) 상에 위치한 암봉이자 전망대 역할을 하는 바위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성불산 정상의 풍경이 일품이다. 바위 아래로 천길 낭떠러지이다. 멀리 백두대간부터 지나온 신선지맥을 그려볼 수 있다.
괴산읍과 감물면의 읍면계를 따르던 지맥이 감물면 내로 들어섭니다.
♤ 성불산(成佛山, 529.9m)/ 읍면계/ 삼리봉(괴산군 감물면 매전리, 괴산읍 검승리 → 감물면 오성리)
우틀하여 치마바위 방향으로 내려선다.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와 오성리 그리고 괴산읍 기곡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괴산 35명산 중 하나이다. 정상에는 정상석과 돌탑, 이정표가 있는 약간 넓은 공간이 보이며 서쪽으로 달천(健川)이 흐르고 있다. 옛날 산 정상 부근에 부처를 닮은 형상의 바위가 있었다 하여 성불산이라 전해져 오며, 산 아래는 성불사라는 절은 사라지고 절터만 남아 있는데 백운화상이 「직지심경(直指心經):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된 불교경전」을 만들은 곳이 성불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학계의 진단에 따라 관심이 되기 했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와 『조선지형도』에서 같은 지명으로 표기가 되어 있으며, 고도가 높지 않으면서도 산에 들어서면 모질게 자란 소나무가 능선 전체에 널려있어 사시사철 변함없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 괴산군 감물면 오성리(五城里)
오성리는 본래 충주군 감물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廢合)에 따라 성동, 반다리, 오간리, 모촌리의 각 일부를 병합(倂合)하여 오간과 성동의 이름을 따라 오성리라 하여 감물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 남양동리, 신기리, 구무정리의 3개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성동(城洞)은 마을 뒤편 또는 인근에 옛 성터(城址)가 있어 성골 또는 성마을로 불리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 안구바위(眼球岩, 495m)/ 눈깔바위
성불산에는 안구바위 외에도 부처바위, 말안장바위, 머리바위 등 다양한 전설과 부처의 형상을 한 바위들이 있어 산행의 묘미를 더해준다. 매전저수지와 지나온 박달산을 둘러보고, 석문동지맥이 지릅재에서 주월산으로 가는게 보인다.
♤ 치마바위봉(455m)
이 봉우리 아래가 치마바위인데 정상에서는 확인할 수 없고 아래서만 볼 수 있어 밟고 가는 걸로 만족한다. 치마바위를 지나자마자 직진방향 등로를 버리고 오성리 성골방향으로 급좌틀한다.
♤ Y자갈림길/ 괴산군 감물면 오성리, 매전리 → 광전리)
치마바위를 지나자마자 직진으로 감물면 광전리로 내려가는 뚜렷한 등로가 보이고 맥길은 희미한 왼쪽 사면길로 이어지는데 내려서는 길에 잡목이 심하다. 선답자님들의 시그널이 촘촘하게 안내하기에 알바할 일은 없다. 지맥의 오른쪽이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 → 광전리로 바뀌는 삼리봉이다.
♤ 성골산(成骨山, 261.6m)
괴산군 감물면 오성리, 칠성면 두천리, 괴산읍 검승리 일대에 걸쳐 위치하며 성불산 서쪽 달천변 기슭으로 성불산과 도덕산(道德山, 455.7m) 능선으로 이어져 있는 야트막한 산이다.
♤ 256m봉
괴산군 감물면 오성리와 광전리의 경계를 따르던 지맥이 오성리 내로 들어선다.
♤ 괴산군 감물면 오성리 방골마을
연안이공묘지에서 바라본 괴산군 감물면 오성리 방골마을에 꽤나 큰 교회(하임교회)가 보인다.
삼거리에 인가와 공장건물이 있는데 수도가 보여 머리도 한번 감고, 옷, 수건도 씻고 요긴하게 잘 사용합니다.^^ 주인아저씨가 나와보더니 산행하셨나보다며 갈때 물을 잘 잠그고 가라고 하시네요.
♤ 방골고개(房谷峴)
괴산군 감물면 오성리 방골(방학동) 마을에 있는 고개로 방골은 새터마을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대가 방처럼 아늑하여 방골이라 하고, 학이 노는 곳이라 하여 방학동이라도 불린다. 방골고개 오른쪽에 대형 축사가 있고, 직진으로 이동통신탑을 바라보면서 양회임도로 올라서서 임도를 따라 약 0.5km 진행한다.
♤ 198m봉
지맥은 좌틀이다.
팬션의 문이 활짝 열려져 있어 씩씩하게 통과했습니다.^^
♤ 성마니재/ 오성리고개/ 구무정고개/ 19번국도(충민로)
괴산군 감물면 오성리에 있는 고개로 19번 국도가 지나가며 왼쪽 아래는 구무정 마을이 있고 오른쪽은 감물면 소재지로 이어지는 신기마을이 있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구무정고개, 오성리고개로도 기록되어 있는데 성마니재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구무정 마을은 남양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구멍이 아홉게 뚫린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길건너에 있는 신선지맥의 마지막 봉인 144m봉을 가기 위해 성마니재에서 구무정 마을로 내려가다가 오른쪽 양회임도로 올라선다. 마지막봉으로 가는 길은 개인 사유지라 주인과 마찰이 있다고 한다. 도로로 진행하여 안민천 강둑을 따라 오간리배수장으로 향한다.
♤ 144m봉/ 신선지맥 마지막 봉
철조망 시작점에서 옹벽으로 잡목넝쿨을 헤치고 올라 다시 철조망이 나오면 잠시 따르다가 안쪽 도로로 넘어 들어간다. 오른쪽으로 가면 별장이 나오고 등산로를 따라 능선끝에 평상 쉼터가 있는 곳이 144m봉이다. 철조망 너머 급경사의 절개지 아래는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오간정수장이 있는데 절벽 수준이다. 등산로를 따라 끝까지 계단을 내려서면 달천변 데크로드에 내려선다. 달천으로 내려서서 우틀하면 오간양수장이다. 우회한다 해도 성마니재에서 합수점까지는 기껏해야 약 300m 거리이다.
제방 위로 난 양회임도를 따라 19번 도로 오간버스정류장으로 나갑니다. 서둘렀으면 15:40분차를 탈 수 있었는데 다음 차는 16:50분쯤에 있어 기다리다가 괴산택시를 불렀네요.
♤ 안민천(安民川)/ 달천(健川) 합수점(95m)/ 읍면계/ 삼리경계면(괴산군 감물면 오성리, 오창리, 괴산읍 능촌리)
반바지운영자님의 신선지맥종착점 코팅지산패는 날라갔군요. 왼쪽 달천에 수량이 꽤 많은데 오른쪽의 안민천은 조그만 동네의 개울처럼 수량이 적다. 안민천은 감물면 매전리에서 시작하여 매전저수지와 광전리를 지나 오창리에서 달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한강수계의 지방하천으로 달천의 제1지류이다. 하천의 이름은 안민동에서 유래한 것으로, 안민동은 매전리의 마을 이름이다.
♤ 충민사(忠愍祠)/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강건너 달천을 굽어보는 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장렬히 전사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아련히 보인다. 충민사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전투에서 순절한 진주목사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1554~1592)과 그의 종숙(從叔)으로서 원주목사로 순절한 충숙공 김제갑(金悌甲, 1525~1592)을 모신 사당이다. 김시민은 본래 1652년(효종 3)에 진주 충민사가 건립되면서 제향되었고 1667년(현종 8)에 사액되었으나, 1868년(고종 5) 경에 훼철되었다. 그 뒤 김제갑의 충열사에 합사되었는데 1976년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고 충민사를 세웠다. 1978년 정화사업 때 그의 묘소를 충청북도 중원군 살미면 무릉리에서 손자 대부터 거주한 현재의 괴산읍 능촌리로 이장하면서 묘소 아래에 새로이 충민사를 짓고 단독으로 제향하였다. 1976년 12월 21일에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괴산의 충민사에서는 매년 두 분의 영정과 위패 앞에서 추모제를 지낸다.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 장군과 원주에서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왜군과 맞섰던 김제갑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함이다. 이 행사에는 괴산군수와 괴산군의회와 지역 유림과 기관 단체장 등 무려 100여 명이 참석한다. 이 두 주인공은 숙부와 조카의 관계였다. 김제갑 장군이 숙부이고, 김시민 장군이 조카였다. 조선시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무관에게 내려지는 최고의 시호인 충무(忠武)는 출생년도를 기준으로 퇴촌 조영무(趙英茂, 1338~1414), 이준(李浚, 1441~1479), 남이(南怡, 1443~1468), 그리고 성웅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이곳 충민사의 김시민(金時敏, 1554~1593), 이수일(李守一, 1554~1632), 정충신(鄭忠信, 1576~1636), 구인후(具仁垕, 1578~1658), 김응하(金應河, 1580~1619) 등 모두 아홉 분이 있다.
♤ 달천(達川)
달천은 충북 보은군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청주와 괴산군을 걸쳐 충주시로 흘러드는 123km, 유역면적 1,614.37㎢ 하천이니 괴산쪽에서는 달천을 괴강이라고 부른다. '달래강, 감천(甘川)'이라고도 부르며 옛날에는 수달이 많이 살아서 '달강'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 때문인지 인근에 수달피 고개가 있으며, 달천리 서쪽 물가를 물개달래로 부른다. 한편, 달천은 물맛이 좋아 '단냇물'이라 하였던 것이 '달냇물'로, 다시 '달천'으로 변했다는 지명 유래도 전한다. 주변의 풍광이 몹시 빼어나다. 이곳에는 화양동계곡, 선유동계곡, 쌍곡계곡 등이 있는데 이들 계곡물은 맑고 맛있어 예부터 이름 있는 선비들이 즐기던 곳이다. 이 달천은 조선시대 오대산 우통수, 속리산 삼파수와 함께 3대 좋은 물로 꼽힐 정도였다. 이황, 송시열 등이 달천의 풍광에 반해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곳곳에 이름을 짓기도 했다. 달천동 주변에는 '달다'는 뜻의 단월동과 단호사(丹湖寺)가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달천 혹은 덕천(德川)이라고 한다. 고을 서쪽 8리에 있다. 근원이 보은현 속리산 꼭대기에서 나와서 물이 세 갈래로 나뉘었는데, 그 하나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 배를 띄우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이행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였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달천은『해동지도』(충주)에서 음성천과 합류하여 충주를 동서로 가로지르며 흐른다. 나루터인 달천진(達川津)도 확인할 수 있으며『대동여지도』에는 달천강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조선팔도고금총람도』(1640)에는 음성천과 만나 충주 방면으로 흐른다.『동국지도첩』에는 달천의 유로와 함께 지명이 표기되어 있고『여지고람도보』에는 달천의 유로만 표기되어 있다.『공충도』(19세기 전기)와 『여지도』에는 달천유로와 지명이 함께 표기되어 있다.『구한말지형도』에서도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달천의 또 다른 이름인 '덕천'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설이 전해 온다. "병이 있는 한 중년 남자가 '중생을 위해서는 적선을 하고 육신을 위해서는 고행을 해야 한다.'는 도승의 주문에 1년간 고생하여 돌로 달천에 다리를 놓았는데 급한 환자가 이 다리를 건너 생명을 구하였다. 이때 생명이 위급한 환자가 '참으로 덕을 입은 강이로다.'하였다 하여 덕천으로 부르게 되었다.

첫댓글 수고하셨읍니다.................................................................................................안전산행
고려산대선배님!
새는 나무가지가 부러지는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네요.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래요.^^
혼자 장거리 산행을 다닌다면 위험하다며 둘이 같이 다니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때 제가 들려주는 말입니다. 둘이 가나 혼자 가나 위험은 항상 따릅니다.
사전에 철저한 준비, 그리고 자신감과 체력입니다. 감사합니다.^^
퐁라라운영자님의 신선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더운 날씨에 산줄기도 시원스런 신선지맥을 즐기셨네요.
암릉과 트인 조망으로도 알려진 산줄기입니다.
한여름에는 산줄기 어디든 진행에 만만치 않은 요즈음인 듯 싶습니다.
멋진 글과 시원스런 풍광으로 즐감합니다.
더위에 수고많으셨습니다.
방장님 감사합니다.
일간 함 사무실로 찾아뵙겠습니다.
엊그제는 조고문님께서 모자에 모기장을 달아주신다고 방화역으로 오라해서 앞잽이사모님 뵙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