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 전문가가 소개하는 건축조명의 세계_ 13편 조명이 그저 어두운 곳을 밝히는 장치라고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거주자의 삶의 질을 떨어뜨릴 수도, 높일 수도 있는 것이 조명이다. 조명설계전문가 차인호 교수를 통해 매월 조명설계의 세계와 실제를 만나본다.
해 질 녘, 경기도 어느 전원주택 공사 현장의 점등식이다. 긴 시공 기간을 거쳐 조명 전기공사까지 마치고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아주 짧은 정적이 흐른다. 그리고 다음 찰나, 빛이 들어온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공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벽의 질감이 은은하게 살아나고, 바닥의 마루와 타일이 스며들 듯 빛을 받는다. 테이블 위에 놓인 사물들은 제자리를 찾은 듯 또렷해지고, 사람의 시선은 망설임 없이 한곳에 머문다. 그 순간 현장의 누군가는 말한다. “와, 조명 좋다.” 하지만 그 감탄은, 사실 지금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어디를 밝히고 어디를 비울지, 몇 번이나 고민하며 도면 위에서 지웠다 다시 그렸던 시간. 같은 마감재를 놓고 색온도를 바꿔가며 끝까지 고민했던 선택. 눈에 잘 띄지 않는 간접조명의 각도를 몇 도씩 조정하던 집요함. 그 모든 과정이 지금 이 한 번의 ‘딸깍’ 소리 안에 들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 감동은 단순히 불이 켜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수없이 반복된 선택들이 의도한 대로 정확한 자리에 놓였을 때 비로소 터져 나오는 후련함과 안식이다. 여주 SH 패시브주택, 건축설계 : 정온건축사사무소 오대석 흔히 조명을 공간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고 한다. “왜 우리는 마지막 한 점에 집착할까?” 동양화에서 말하는 화룡점정은 ‘용의 눈동자를 찍는 그 한 번의 붓질로 그림은 비로소 살아나 용이 승천하게 된다’라는 의미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그 한 점이 중요하다면, 그 이전의 수많은 선과 면은 무엇이었을까. 용의 눈, 그 한 점을 찍기 위해 이미 용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모든 것이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눈은 마지막이지만 본질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과정이다. 과정이 부실하면 눈을 그려 넣는 ‘점정(點睛)’은 효과가 없다. 대충해서는 그림 속 용이 하늘로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의 조명디자인에서도 이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는 결과를 ‘마무리’에서 찾는다. 하지만 실제로 결과는 언제나 ‘과정 전체’에서 이미 결정되고 있다. 특히 공간을 다루는 일, 예를 들어 조명디자인 같은 분야에서는 더 그렇다. 마지막 스위치를 켜는 순간의 감동은, 사실 그 이전에 쌓인 많은 고뇌와 선택의 총합일 수밖에 없다. 그 선택 중에서 우리가 자주 놓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엔트로피’다. 엔트로피라는 개념은 무질서의 정도를 가리키는 용어로 얼음과 물은 ‘H2O’로 같은 분자식을 가지지만 얼음은 분자구조가 규칙적이라 엔트로피가 낮은 것이고 물은 분자가 자유롭게 움직이므로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이다. 아침에 정리한 책상은 왜 저녁이면 어지러울까. 사람이 다니지 않는 산속 오솔길은 왜 점점 무성한 잡초에 덮일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인데 상태는 점점 흐트러진다. 자연은 본래 질서에서 무질서로 그렇게 흘러간다. 우리가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점점 복잡해지고 어지러워지며 판단과 예측을 하기 어려운 상태로 변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공간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람은 공간을 ‘본다’. 그리고 보는 순간, 시선이 흐르고 머물면서 판단을 시작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무엇이 중요한지. 이 모든 것은 생각보다 빠르게, 거의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뇌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결정된다. 이 순간 가장 중요하고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조명이다. 조명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또는 무엇을 보지 못하게 하거나, 무엇을 먼저 보여주고 무엇은 나중에 보여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에서 조명디자인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여주 SH 패시브주택 차고 건축조명. 여주 SH 패시브주택의 LDK 그런데 만약 그 공간이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단조롭다면 어떨까. 대상의 밝기감이 제각각이고, 시선이 어디에 머물지 갈 곳을 잃고, 재료는 서로 앞을 다투듯 산만하다면 우리는 그 공간을 ‘느끼기’ 전에 먼저 피로해진다. 판단이 어려워지고 선택이 늦어지고 불편하게 느껴지기에 결국 머무는 시간이 줄어든다. 이 상태를 한마디로 말하면, ‘공간의 엔트로피가 높다’라고 할 수 있다. 조명으로 공간의 시선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반대로 잘 설계된 공간은 다르다. 어디가 중요한지 자연스럽게 보이고 시선이 흐르는 방향도 위계가 있으며 밝기와 어둠이 의도를 가지고 배치되어 있다. 사람은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편하다’라고 느낀다. 이건 단순히 아름답고 쾌적한 공간이 아니라, 체계적인 설계 의도를 가지고 엔트로피를 낮추어 잘 관리된 공간이다. 공간의 시각적 위계가 절 정리되어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조명은 이 지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빛은 단순히 밝히는 도구가 아니다. 공간의 질 서를 만들어내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같은 공간이라도 어디를 밝히고 남겨두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인상을 주게 된다. 시선의 우선 순위가 생기고, 공간의 위계가 만들어진다. 즉, 복잡한 정보를 정리해 준다. 카페에 들어갔을 때, 자연스럽게 앉고 싶은 자리가 보이는 경우가 있다. 굳이 안내받지 않아도 그곳이 ‘좋은 자리’라는 걸 알게 된다. 대부분은 조명이 만든 결과다. 기본적으로 빛의 밝기, 대비, 집중도. 이 세 가지가 이미 결정을 내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디에 앉아야 할지 애매한 공간은, 대부분 조명이 모든 것을 ‘같이’ 보여주고 있다. 중심이 없고, 방향이 없고, 결국 선택이 어렵다. 이 차이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공간 엔트로피의 문제다. 조명디자인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이것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추가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정리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빛을 더하는 일 같지만, 사실은 불필요한 정보를 줄이고 덜어내면서 필요한 것만 남기는 작업이다. 그래서 좋은 조명은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공간이 또렷해지고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돕는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의 건축조명 설계과정을 청소에 비유한다. 공간의 엔트로피를 낮춘다고 획일화된 공간으로 연출하면 단조로워지기에 오히려 불쾌하게 느껴진다. 조명에서는 균일한 수평면 조도만 강조하여 모든 공간이 물건을 쌓아두는 창고나 마치 끝없이 길게 이어진 흰색 병원 복도를 거니는 것과 같은 공간의 부정적 경험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늘 강조하지만, 공간의 목적과 상황에 맞는 조화와 균형의 유기적인 설계가 필요하다.
서울 삼성동 아크로빌의 LDK, <차인호 공간조명연구소> 인테리어 설계 및 시공. 건축주의 소장품을 전시하기 위한 아일랜드와 붙어있는 수납장을 설계하면서 내부 조명도 눈부심 없이 쾌적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다시 화룡점정. 마지막 눈동자를 찍는 순간, 그 한점이 빛나기 위해서는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조명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에 ‘좋은 조명 하나’로 해결되는 일은 거의 없다. 공간의 구조, 마감 재료, 색, 사용자의 동선까지 모든 요소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마지막 빛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공간을 처음 기획하는 시점부터 조명을 고민하면 완성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가끔 너무 급하게 그리고 뒤늦게 의뢰하여 조명디자인이 현장에 반영되는 일도 있다. 몇 배로 힘든 작업이 된다. 일반적인 현장에서 조명은 골조, 목공, 도배나 도장, 가구 설치 이후 가장 마지막 공정인 경우가 많은데 그 기획과 준비 과정은 이 모든 공정을 다 이해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자연광 유입 조건, 가구에 설치되는 조명과 건축화 조명의 상관관계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기 어렵다. 조명은 공간의 엔트로피를 낮추는 데 큰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공간에서 주목받는 주연이 아니다. 공간의 주역들을 빛나게 하는 조연으로 스스로 빛을 내지만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는 안된다. 이것이 건축조명 제1법칙으로 1950년대 미국 뉴욕의 마천루 건축 사이에서 건축조명이 탄생한 목적이자 숙명이다. 그래서 조명은 공간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러면 드디어 조명은 공간의 화룡점정이라 할만하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공간의 엔트로피를 낮추는 것이다. 사람이 더 쉽게 보고, 더 빠르게 이해하고, 더 자연스럽게 머물도록 만드는 것. 그 과정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는 분명하게 느껴진다. ‘왠지 기분 좋은 공간’이라는 말 뒤에는, 언제나 잘 정리된 질서가 숨어 있다. 그리고 그 질서를 만드는 일. 그것이 바로, 필자가 하는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이번에는 어떤 용이 하늘로 오르게 될지 다음 현장의 점등식이 기대된다. 아니 점안식(點眼式)이라고 해야 할까?
글과 사진_ 차인호 교수 : 차인호 공간조명연구소 성균관대학교 교수, 디자인학 박사(Ph.D. 건축조명+공간계획) 전문 건축조명과 인테리어 회사인 「차인호 공간조명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권위 있는 IALD(국제조명디자이너협회)의 최고 레벨인 Professional Member이다. Musashino Art Univ.에서 건축조명디자인 분야 세계적 거장 멘데 카오루(面出薰, LPA 대표)를 석사과정 지도교수로 모시고 건축조명디자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면서 세계적 건축가가 설계하는 싱가폴 도시계획조명, 롯본기 모리타워 등 국제적 대형 건축조명 프로젝트에 참여해왔다. 귀국 후에는 한국의 공간환경에 적합한 빛의 공간을 직접 연구한 조명기구로 설계하며 만들고 있다. www.inholighting.com |
첫댓글 감사드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