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 로드 / 김경성
신당동 집 아래층 양복공장
실크로드에서 카펫을 짜던 사람이 있다
새벽부터 시작되는 재봉틀 소리
사막으로 돌아갈 길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
안개 걷히지 않은 새벽 여섯 시
낙타를 타고 먼길 떠나는 사람의
손끝 아린 비단 실
씨실 날실 그가 걸어갈 길의 무늬를 그린다
온종일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던 길
돌아보면 발자국은 바람에 지워져 있었다
밤새 짜던 카펫 속 길,
모퉁이에 앉아 마시는 박하차처럼
마음 끝에 걸리는 알싸한 실타래는
다음 날 새벽이 오도록 멈추지 않는다
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재봉틀 소리를 타고 실크로드를 걷는다
샹그릴라는 멀지 않다
깊은 잠 / 김경성
- 경주 남산 마애불상*
솔방울 빠져나온 씨앗
지상의 말 퍼트리며 날개 파닥거려 먼 여행 떠날 때
소나무 가는 잎에 걸려 그림자 내려놓은 적 있다
그대와 마주보며 서 있었던 날을 기억한다
그때 우리 머리위에 쏟아졌던 햇빛이라든가, 바람이라던가
봄날, 때죽나무 꽃지고 씁쓰름한 열매 떨어져
그 즙에 기절한 물고기떼 강물에 떠내려갈 때도
바람부는 쪽으로 몸 기울여 바람의 말을 들었다
어느 날 여진이 밀려와
무릎 꿇고 말았던 그때,
그대 발등 위에 내려앉아 유적이 되어갔던 꽃잎을 기억한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 때가 시작이었다
제비꽃 꽃술에 이마를 대고
지층으로 흘러다니는 세상의 말, 두 눈 꼭 감고 들었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뿌리와 뿌리로 엉켜있는
지층 속으로 흘러가는 말들은 간결했다
민들레 뿌리, 쇠비름 뿌리
해마다 내 몸에 기대어 흔적없이 사라져갔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모두 다 기억하고 있다
그대 앞에 엎드려 바라보았던 것, 두 귀로 들었던 것
나를 스치고 지나갔던 말발굽 소리와
창 부딪치는 소리,
시위를 떠나 날아가던 화살까지
모두 내 안으로 들어와 경전이 되었다
내 몸 위로 지나간 시간의 뿌리가 있다, 꽃들의
자국이 있다
이제 잠에서 깨어나 천 년의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내 몸 안에 스며든 기억의 뿌리, 그대 앞에
펼쳐놓으려 한다
몸 일으켜 바라본 세상, 여전히 눈부시다
* 경주 남산 마애불상
2007년 5월말 경주 남산 열암곡(列岩谷)에서 발견됨.
당시에는 불상을 조각한 면이 땅에 파묻혀 그 윤곽 정도만
희미하게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