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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투데이 역사발굴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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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의 무역선
流水何尤急
深宮岑田閑
흐르는 물은 그리도 급한데
깊은 궁궐과 두메 밭은 한가롭구나.
세찬 물결 아래 바다 속에서 600년이 넘도록 잠자고 있던 백자 접시에 새겨진 시
한 수. 어쩌면 그토록 자기 신세를 꼭 맞게 읊은 시를 간직하고 있었는지 놀랍다.
고려 제27대 충숙왕(忠肅王) 10년(1323년) 여름. 전라남도 신안군 앞 다도해. 풍랑에 떼밀리던 돛배 한 척이 물살 사나운 도덕도 앞바다에서 끝내 가라앉고 말았다. 이 배는 그 해 6월 초 중국 양쯔강 어귀 닝포항을 떠난
무역선단 가운데 한 척인데,일본으로 가는 수출품을 가득 싣고 있었다. 배는 길이 32m,너비 10.9m,높이 4m(흘수선까지는 2.95m),무게
187톤에 쌍돛대를 단,그때로서는 아주 큰 배였다. 거기에 실을 수 있는 짐은 무려 150톤이나 되었다. 그 무렵 원나라 장삿배들은 이같이
큰 배를 여러 척씩 모아 선단을 이루어,고려와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와 그 너머까지의 뱃길을 주름잡고 있었다. 그들은 도자기와 약재,쇠붙이,동전 따위를 팔아 돈을 벌었는데,그 중에서도 도자기와 동전이 즐겨 다룬 수출품이었다. 중국은 세계에서 제일 눈부시게 도자기
문화를 꽃피웠다. 당나라 위에조우의 청자는 9세기에 이미 이집트와
페르시아에까지 퍼져나가 이름을 떨쳤고,띵조우 가마의 백자는 고려의 청자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침몰한 배에는 원나라가 자랑하는 룽취안 가마 청자와 징떠전 가마 백자 그리고 송나라와 고려의 청자가 가득 실려 있었다. 동전은 중국에서 쓰이지 않게 된 옛날 것인데,일본이 수입했다. 구리 광석을 캐어 제련하기보다 동전을 사다가
녹여서 쓰는 쪽이 훨씬 편하고 생산비가 적게 들었기 때문. 주로 돈이
넉넉한 사찰들이 동전을 사들이고,무역에도 손을 댔다. 1323년 닝포를 떠나 서해를 가로지르던 중국 배에도 일본 도후쿠지로 가는 동전이 배 밑창에 800만 개나 쌓여 있었다. 오늘날의 1톤 트럭으로 26대
분이니,동전 무역이 얼마나 성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다른 나라들이
동전 만드는 기술이 모자라 중국으로부터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으니,동전이 아니라 화폐를 수출했을 수도 있다).
신안의 보물선 발견
뒷날 ‘신안 보물선’이라고 불리게 된 중국
배의 값진 유물들은 65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뒤,깊은 바다 속을 벗어나 햇빛에 드러났다. 그 기적 같은 일은 한 어부가 바다에 드리운 그물에서 비롯되었다. 중국 땅이 아닌 곳 중에서는 중국 도자기가 가장 많이 쏟아져나온
배. 나무 배로서는 동양에서 제일 오래 되고 큰
배. 어느 난파선보다도 유물이 많이 쏟아져나와
세계를 놀라게 한 배. 이처럼 여러 가지 기록을
세운 신안 보물선의 실마리가 처음 잡힌 때는
1976년이었다.
그 해 1월 어느 날,신안군 지도면 방축리 도덕도 앞에서 트롤 어선으로 고기를 잡던 최형근(崔亨根)의 그물에 뻘흙과 굴껍데기가 다닥다닥 붙은 항아리가 걸려 나왔다. 집에 가져가 잘 씻어놓고 보니 청자였다.
그것을 동생 최태호(崔泰鎬)가 보았다. 학교 선생이던 그는 혹시 고려시대 청자일는지 모른다고 생각해 군청에 가져가 보여주었다. 그러나
문화재 일을 맡은 이는 바다에서 고려 청자가 나올리가 없다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최태호가 어수룩한 속임수를 써서 보상금을
타려 한다고 꾸짖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디서 들었는지 서울에서 골동품 상인이 최형근을 찾아왔다. 그는 청자를 보고는 원나라 룽취안
가마에서 만들어진 진품이라고 감정했다. 4월에는 어부 박창석이 또다시 같은 장소에서 청자와 백자를 건져 군청에 신고했다. 일이 이쯤
되자 신안 앞바다에 보물선이 가라앉아 있다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재빠른 도굴꾼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바다에서 값비싼 도자기들을 건져올리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원나라와 고려시대의 보기 드문 명품
도자기들이 한꺼번에 여러 점씩 골동품가에 나돌거나,일본으로 몰래
팔려나갔다. 중국과 고려의 진품 도자기가 그처럼 많이 거래된 일은
일찍이 없었다. 전국의 골동품 상인과 도굴꾼들이 알음알음으로 신안에 몰려들었다. 9월에 접어들어서야 낌새를 챈 경찰이 도굴꾼들을 붙잡아 보니,그들의 창고에서 값을 따질 수 없는 국보급 보물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 일로 말미암아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신안 해저 유물 발굴
조사단’을 만들게 되었다. 청자 한개가 어부의 그물에 걸린 지
아홉달 만에 비로소 정식 발굴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발굴의 시작
발굴은 10월26일부터 시작되었지만,처음부터 갖가지 어려움에 부딪혔다. 먼저,넓은 바다에서 보물선이 가라앉아 있는 곳을 꼭 집어내기가 아주 어려웠다. 몇 차례나 허탕을 치자 조사단은 하는 수 없이 경찰에 붙잡혀 있던 도굴범들의 도움을 받았다. 두 번째 어려움은 그곳의 물살이 시속 7∼9㎞로 몹시 빠른 데다 수심이 무려 23m나 된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물속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흙탕물이었다. 유물은 바다 밑바닥을 손으로 더듬거려서 찾아야 했다. 자연의 악조건은 그뿐이 아니었다. 물이 차가워서 1년에 고작 다섯달밖에는 자맥질을 할 수가 없었고,그나마도 밀물과 썰물 시간을 헤아려 하루 한두 번,한 번에 한두 시간밖에는 일할 수 없었다. 결국 이 문제의 매듭은 해군 제5150부대 해난구조대 잠수대원들이 참여하면서부터 풀리기 시작했다. 해군 병사들은 한국 최고의 스쿠버 다이버답게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유물들을 건져 올렸다. 희귀한 보물들이 물속에서 나올 때마다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스쿠버 다이버들은 한 점이라도 더 건지려고 끼니를 걸러가면서 자맥질하는 일이 잦았다. 1976년 10월부터 이 일을 한 김복렬 상사는 1983년까지 8년 동안 수천 번이나 차가운 흙탕물에 뛰어들었다. 金상사처럼 해마다 몇 달씩 가족과 떨어져서 ‘물귀신’이 된 해군 잠수대원들이 없었다면 신안 바다 밑의 유물과 난파선을 끌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신안 앞바다는 끝없이 보물을 토해내는 요술 항아리 같았다. 국보급 고려청자가 나오는가 하면,송나라와 원나라의 청자·백자·흑유(黑釉;검은 빛깔 자기)들이 그득한 나무상자가 고스란히 올라왔다. 청동으로 만든 촛대·향로·주전자·거울·바라…,은접시와 은병에 벼루·맷돌·숫돌 같은 돌로 만든 물건,한약재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전이 쏟아져 나왔다. 화류장을 만드는 자단목(紫檀木)도 8t이나 나왔다. 하나에 수억원씩 나감직한 국보급 자기들은 나올 때마다 숱한 화제를 뿌렸다. 조사단이 1982년까지 여덟 차례 건져 올린 유물은 도자기 1만5,650점과 쇠붙이 제품 5,176점,돌로 만든 물건 25점과 그밖의 것 477점 등 1만6,728점이나 되었다. 거기에 자단목 수백개와 동전이 자그마치 17t이나 되었으니,온 세계의 눈과 귀가 신안 앞바다로 쏠릴 수밖에.
보물선의 연대
‘언제,어디로 가던 어느 나라 배일까?’
보물을 건져 올릴수록 이 물음에 대한 궁금증은 더해 갔다. 학자들은 ‘언제’를
1310년부터 1360년 사이라고 추측했다.
건져 올린 동전 가운데 가장 늦게 만들어진 것이 1310년 원나라가 만든 지대통보(至大通寶)였고,어떤 접시 밑에 사사수부(使司帥府)라는 관청 이름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짐작이었으므로,세계 학자들의 관심은
한결같이 이 배가 가라앉은 때를 확실하게 밝혀줄 유물이 언제 나오느냐 하는 데 쏠려 있었다.
1983년 1월25일 마침내 신비한 베일이 벗겨졌다. 그 전 해 6월16일에 건진 목간(木簡·소나무로 만든 꼬리표) 280여 개를 세척하던 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 연구원이 거기 새겨진 글씨를 찾아낸 것이다. 꼬리표란,받을 사람의 이름과 보내는 사람의 수결(手決·사인)을 새겨 물건을 포장할 때 거기에 매달아 놓는 표식이다.
잘 새겨서 읽어 보니,‘陳皮三七斤’(진피라는 한약재 37근)과 ‘綱司私’(선장의 사사로운 물건이라는 뜻) 따위 글자말고도 ‘至治三年六月一日’(지치 3년 6월1일)이라는 글과 ‘東福寺’(동복사)라는 글이 있었다. ‘지치’란 원나라 제5대 영종(英宗)의
연호이므로,지치 3년이라면 서기 1323년이다. ‘동복사’란 일본 절 도후쿠지를 말하는 것이니,이 배에 실은 물건을 사기로 한
하주(荷主)임에 틀림없었다.
이로써 신안 보물선은 1323년 6월1일 수출품을 싣고 얼마 뒤에 항구를 떠나 일본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다는 사실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다. 다만 이 배가 도중에 고려에 들러 고려 청자와 보급품을 실었는지,아니면 이미 중국에 들어가 있던 고려 청자를 처음부터 중국 땅에서 싣고 곧바로 일본으로 가던 길이었는지는 알아낼 길이 없었다.
1323년이라는 연대가 알려짐에 따라 퍽 중요한 사실 하나가 밝혀졌다. 중국의 도자기 가운데 흰 바탕에 푸른 빛깔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靑華白瓷)는 1351년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지금까지 알려져 왔다.
그런데 신안 유물선에서 나온 백자는 모두가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전 단계인 추부백자(樞府白瓷·원나라 관청인 추부에서 쓴 백자. 낮은 온도로 구워진 백자들이 단단하지 못하고 때깔이 흐린 점을 개선했다)였다.
이로써 그동안 몰랐던 추부백자 제조 연대가 밝혀지고,동양의 도자기 역사가 뚜렷해진 것이다. 이것은 세계 고고미술학계에서 매우 큰 발견으로 손꼽힌다.
보물선 발굴의 의의
1981년 7월 문화재관리국은 목포시 용해동
바닷가에 보존처리장을 세우고 유물선을 인양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배를 건져서 본디
모습을 되살리면 바다에 관련된 역사와 무역은 물론 배 짓는 기술에 이르기까지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유물을 인양하는 것보다 뜻 깊은 일이다. 하물며 동양의
배로서 그토록 오래 전의 배는 단 한 척도 실물을 본 적이 없음에랴.
윤무병 충남대학교 교수가 이끄는 조사단은 여러 가지로 연구한 끝에
배를 되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유물선은 50도쯤 오른쪽으로 기운
채 가라앉아 있었는데,오른쪽 아래 전부와 왼쪽 갑판 아래쪽 3분의 1이 뻘에 묻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배 전체로 보아서 45%쯤 되었다. 스웨덴과 덴마크에서
되살린 옛 바이킹 배가 본디 모습의 40%밖에 안 되는 것을 생각하면,세계에서 가장 복원율이 높은 옛 배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윤박사는 배를 모두 뜯어서 건졌다가 나중에 다시 짜맞추는 ‘해체 인양법’을 쓰기로 했다. 스웨덴의 바사호(340년 전의 배)나 영국의 메리로즈호(400년 전의 배)는 통째로 끌어올렸지만 660년이나
된 신안 유물선은 워낙 나무가 심하게 썩은 데다 바다 상태가 나빠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발굴팀은 1,000년 전 바이킹 배를 뜯어서 건진
덴마크의 본보기를 따르기로 했다.
잠수대원들은 1983년 7월18일까지 배에서 나무 345개를 뜯어냈다.
용골 3분의 1과 용골에 잇대어 갈비뼈 구실을 한 목재들,배가 상하지
않도록 겉에 댄 널빤지와 돛대 밑둥 들이었다.
최광남 소장을 비롯하여 보존처리장 직원들은 뱃조각이 들어오는 족족 민물 탱크에 넣었다. 나무는 물 먹은 스펀지처럼 물렁물렁했다. 섬유질이 모두 녹아버리고 대신 바닷물을 나무의 4배가 넘게 머금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것을 민물에 담가 소금기가 1%쯤 남을 때까지 우려낸 뒤 본디대로 단단해지도록 경화(硬化) 처리를 해야 했다. 공기 속에서 말리면 나무는 10분의 1로 쪼그라들고 만다. 폴리에틸렌글리콜(PEG)을 탄 물에 담가 나무에 PEG가 스며들어야만 95%가 넘게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소금기를 빼고 PEG로 굳히는 데는 3∼4년 걸린다. 그래도 스웨덴이
바사호를 말리는 데 잡은 40년에 견주어보면 무척 빠르다. PEG 처리가 끝난 나뭇조각을 놓고 그것을 5분의 1로 줄인 나뭇조각을 하나씩
만들었다. 못구멍과 벌레 먹은 자리까지 똑같이 본떠 만든 이 나무들로 5분의 1 크기의 모형배를 만들었다.
1986년 8월30일 5분의 1 축소 모형배가 만들어졌다. 이제는 목포에 해양 박물관을 세우고,1990년까지 모형배에 맞추어 유물선을 실제 크기로 만드는 일만 남았다.
모형배를 만드는 사이에 학자들은 이 배가 매우 뛰어난 기술로 만들어진 배임을 알아냈다.
우선,널빤지를 이을 때 이음 부분을 그냥 맞대지 않고 같이 이어 물이 새지 않게끔 만들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배 밑바닥에 현판을 벌레로부터 지켜 줄 얇은 널빤지를 방현재(防舷材)로 달았다는 것. 이것은 오늘날 배 밑바닥에 페인트 칠을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널빤지는 항해가 끝나면 떼어냈다가 다시 붙일 수 있어 편리했다.
세 번째 특징은,일곱 칸 수밀격벽(水密隔壁)이다. 수밀격벽이란 선체를 칸막이로 구분해,어느 한 곳에 스민 물이 다른 곳으로 넘나들지 못하게 한 것이다. 1912년 영국이 사상 최대의 호화 여객선 타이태닉을
만들고는 ‘하느님도 침몰시킬 수 없으리라’고 큰소리를 친 근거 중
하나도 수밀격벽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술을 서양배들이 쓰기 시작한
것은 신안 유물선보다 500년 뒤진 19세기의 일이다. 오늘날에도 수밀격벽은 꽤 어려운 기술이라고 한다.
또 바닷물이 갑판을 넘지 못하도록 방패 구실을 하는 현장(舷牆)이 발견된 것은 세계에서 처음. 그밖에 큰 바다나 좁은 물길이나 자유롭게
다니도록 배 밑바닥이 뾰족한 첨저형(尖底型)인 것, 뱃머리가 사다리꼴인 것,배 가운데 물 50톤을 담을 수 있는 물탱크를 둔 것도 이 배의
특징이다.
1984년 9월17일까지 열한 차례 인양에서 나온 유물은,청자 1만2,359점을 비롯한 도자기 2만0661점,쇠붙이 제품 729점,돌제품 43점,잡동사니 574점 등 모두 2만2,007점이다. 그밖에 자단목 1,017본과 동전
28톤이 있다.
동전은 너무 많아 처치하기 곤란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지만,옛 중국의 화폐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좋으리 만큼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서기 14년에 만들어진 신나라의 ‘화천(貨泉)’으로부터 원나라의 지대통보에 이르기까지,1,300년 동안에 만들어진 234가지 800만개 동전은 돈으로 쳐도 100억원어치가 넘어,유물 인양에 든 돈의 17배나
된다.
수백억원에 이르는 보물이다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역시 가장 큰 수확은 되살린 보물선이라는 것이,신안 유물인양을
지켜보아 온 사람들의 한결같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