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기
명이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은 ‘북경의 울타리’인 요동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예상 밖으로 강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명은 이제 조선을 단순한 번국이 아니라 명 자체의 ‘虜地’이자 ‘九邊’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나아가 명은 임진왜란의 경험을 통해 조선의 안위가 명의 안위와 직결되어 있는 상황을 새삼 인식하고, ‘쇠망의 기미가 누적된 나라[積衰之國)’인 조선이 ‘강하고 사나우 나라’인 일본과 인접하고 잇는 현실 속에서 조선의 방어를 위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왜란 당시 일본으로 글려간 피로인들을 송환하는 교섭을 벌이면서 피로인들이 ‘천조의 적자’임을 강조하여 일본을 압박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더욱이 왜란 이후 동북지역에서 누르하치의 동향이 불온해지면서 명의 전략적 관심은 조선보다 여진 쪽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명군 지휘부는 조선의 자강을 강조했고, 그것은 조선 지배층에 대한 정치적 압박으로 이어졌다.
다시 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1597년 12월 경략 형개는 “조선으로 하여금 명이 베푼 재조지은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주목되는 것은 이 무렵 명군 지휘부가 처음으로 ‘재조지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朝鮮君無堅志 臣有避心 朝鮮君臣先以賊勢重大 故上下*莽 『명신종실록』
선조 말년부터 광해군대에 걸쳐 명이 압록강 부근에서-조선의 혁파 요구에도 불구하고-중강개시를 존속시키라고 강요하고,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의 태감 출신 칙사들이 수만 냥의 은화를 요구하여 착복했다.
三方建置須聯合朝鮮『명신종실록』
조선은 인조반정 이후 ‘배금’의 기치를 내걸기는 했지만 후금에 대해 실질적으로 적대정책을 취하지 않았고, 명과 후금 사이의 대결 속으로 직접 말려드는 상황도 애써 회피하려고 노력하였다. 더욱이 반정 이듬해인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 한성이 함락되는 등 우여곡절 이후에는 내정을 추스르기에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조선의 서북지역에서는 모문령군이 주둔해 있던 가도에서 올라온 한인들이 설치한 둔전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이에 후금은 수시로 군사를 보내 한인 농군들을 납치하고, 둔곡을 불태우거나 약탈해감으로써 조선과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다.
인조의 조정은 명의 승인과 인조의 책봉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모문령의 도움이 절실했고, 실제 볼전 과정에서 그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둔전 설치 요구 등을 수용했다. 조선 영토 안에 한인들의 둔전이 설치되고, 한인(遼民)들이 그곳으로 몰려들게 되면서 청천강 이서지역은 사실상 그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정작 평안도 주민들은 고향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한인들의 살육과 약탈에 시달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1627년 6월, 후금에서 심각한 기근이 발생한 이후 곡물과 생필품을 교역해달라는 후금의 요구는 해마다 커졌다. 1628년 이후 후금은 조선에 사신을 보내 미곡을 비롯하여 과일과 약재 등을 교역해줄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명은 이미 1621년 요동 전체를 후금에게 빼앗겼다.
(명의 병부상서 풍가회馮嘉會, 등래순무 李崇.. )
일찍이 유몽인은, 조선이 호란을 맞이할 경우 명이 조선을 돕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예언한 바 있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군이 남쪽에서 북상했기 때문에 서북으로부터 명의 원병이 원병이 투입될 수 있었지만, 누르하치는 서북으로부터 침략해올 것이기 때문에 원군 투입로가 막힐 것이라고 보았고 또 명이 멀리 떨어져 있는 조선을 위해 코앞에 있는 누르하치와 모험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모문룡 휘라의 명군은 호란이 빚어지는 동안 조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살육을 자행했다. 그럼에도 모문룡은 명 조정에 자신이 조선을 도와 후금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고 허위 보고를 일삼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는 후금과 강화를 체결한 것을 질타했다. 정묘호란이 끝난 이후 모문룡은 ‘후금과 강화했다’는 것을 빌미로 조선에 대한 경제적 징색을 일삼았다.
가도는 정묘호란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 명 본토-조선-후금을 연결하는 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모문룡은 강남 등지로부터 항행하는 상선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막대한 부를 챙겼고, 조선 상인들 또한 가도를 드나들면서 무역에 종사했다. 특히 이 시기 후금이나 일본 상인들이 얻고 싶어 했던 명나라의 비단이나 청포 등의 직물은 가도를 왕래하던 조선 상인들에 의해 중개되었다. 즉 후금 상인들은 명과의 전쟁으로 판로가 막힌 인삼 그리고 조선에서 사로잡은 포로 등을 밑천으로 조선에게서 곡물과 청포 등을 얻어내고, 일본 상인들은 은을 밑천으로 명나라 비단을 얻어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실제 후금과의 개시에 별다른 관심이나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후금이 조선에 대해 봄, 여름, 가을에 걸쳐 개시하고 수시로 각종 물자의 제공을 요청했던 데 비해, 조선은 봄,가을 2회의 개시만을 고집했다.(인조 6년 2월 경신).
하지만 조정 차원의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모문룡이 주둔하고 있던 가도를 왕래하고 있던 조선 상인들은 명 본토의 물자를 후금과 일본에 공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명 내부에서는 조선이 후금과 강화를 맺은 것을 빌미로 “조선이 후금오랑캐에게 정성을 바치고 있다”는 등의 비방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원숭환등은 조선의 명으로 가는 사행로를 등주를 경유하던 것에서 覺化島를 경유하는 거으로 바꾸는 조치를 취했다. 당시 각화도를 경유하는 사행로에서는 파도가 험악하여 사행선의 침몰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조선은 이에 대해 사행로의 원상 복구를 요청하면서 후금과의 강화가 종묘사직을 보전하기 위한 기미 차원의 권도였음을 강조했다.
1619년 ‘살이호전투’ 이후 명과 후금이 조선의 향배에 시경을 썼던 가장 큰 이유는 조선의 수군 때문이었다. 명은 조선이 후금에게 넘어갈 경우, 후금이 조선 수군을 이용하여 압록강을 출발하여 발해만을 거쳐 강남지역까지 위협하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보았다.
후금은 1631년 이래 조선에게 전함과 수군을 제공해달라고 간청한 바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거부했다.
1633년 등래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수군과 선단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하려 했던 공유덕 일행을 -명의 요청을 받아들여-토벌하는 데 동참하기도 했다.
청 태종은 1636년 조선침공을 일으키면서 조선의 ‘공유덕 토벌 시도’를 개전의 명분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실제 공유덕과 그가 이끄는 병력과 선단이 후금으로 투항한 뒤, 후금은 수군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들은 1636년 병자전쟁 당시 조선을 굴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청 태종은 항복을 받은 직후 철수하는 길에 공유덕의 수군 선단에 유림과 임경업이 이끄는 조선 선단을 합세시켜 다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 측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가도를 함락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조선군이었다.
1643년 2월, 명은 철산취鐵山취에서 등래로 이어지는 해로에 수군 3000명을 배치하여 청이 조선 수군을 이끌고 등주 쪽으로 공격하는 것을 차단하려고 시도했다.
1639년부터 1642년 당시 명은 청군의 금주 공략을 막기 위해 1641년 이부시랑 홍승주를 총독구눈으로 삼아 13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송산에서 청군의 포위를 풀도록 조처했다. 그런데 당시 홍승주의 휘하 병력은 청군의 포위망을 거의 풀 수 있는 직전까지 갔지만, 조선의 정밀한 화포 때문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문에 당시 명군 지휘관들은 청군보다 조선군의 수급을 획득하는 병사에게 더 많은 상금을 걸었을 정도로 조선군에게 원한이 높았다고 한다.
실제 청 태종은 조선군 화기수들을 독전하기 위해 당시 심양에 억류되어 있던 소현세자 일행을 금주까지 불러들였고, 혹시라도 조선군의 사격이 정밀하지 못할 경우 소현세자 일행을 채근하는 등 극도의 집착을 보였다. 결국 1642년 청군의 포위를 풀지 못했던 홍승주와 조대수 등이 모두 청군에 투항함으로써 금주전투는 청의 승리로 끝났다. 실제 홍승주는 청에 투항한 이후 ‘대릉하 전투’의; 패전 원인을 오로지 조선 때문으로 돌리고 조선에 대해 악감정을 드러냈다. (효종 2년 2월)
‘살이호전투’에 참전했을 당시 명장 유정등이 조선 화기수들을 속히 들여보내라고 닦달한 바 있다.
1619년 ‘살이호전투’에 참가했던 조선군 지휘관 강홍립은 후금군에게 투항하면서 자신들의 참전 명분을 “왜란 당시 며이 베푼 은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누르하치는 조선군의 투항을 받아들이면서 조선이 내건 ‘재조지은’의 명분을 인정해주는 태도를 보였고, 동시에 강홍립에게 자신들은 명과는 다른 존재임을 밝히면서 향후의 향배를 분명히 하라고 촉구한 바 있었다.
하지만 공유덕 등의 귀순으로 수군과 홍이포를 획득하는 등 군사력이 더욱 커딘 병자 전 직전 무렵이 되면 청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1637년 1월, 남한산성에서 농성하고 있던 조선 조정이 예의 ‘재조지은’을 내세워 명과의 관계를 단절할 수 없다고 강조하자, 청은 답서에서 “명이 조선을 돕기 위해 천하의 병력을 동원 했다.”는 조선 측 국서의 문구를 문제 삼았다. 즉 청은 ‘명 또한 천하 구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규정한 뒤 조선의 이러한 표현을 망령된 것이라고 비난했다.
청은 심양으로 끌로 간 ‘소현세자 카드’를 이용하여 때때로 ‘인조의 입조’나 ‘왕위 교체론’ 등을 흘러 인조를 압박했다.
청은 또한 조선을 무장해제 시켰다.
1645년 11월 청은 조선에 보낸 유시문에서 ‘중외의 일통을 달성했고’고, ‘사해가 전부 청 황실의 저가’라고 하였다.
청의 압박과 통제 분위기 hr에서 인조는 친청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인조의 친청 행보 아래서 최명길 등 주화파가 대처 외교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주화파가 이끌던 비변사는 명이 보내온 서신을 받는 것을 기피하는가 하면 명과의 접촉 사실을 대부분 청 조정에 보고했다.
인조와 비변사의 친청 행보가 지속되자 그에 대한 비판이 터져 나왔다. 1640년 6월, 응교 조석윤 등은 인조에게 월왕 구천을 본받아 자강을 위한 정치를 펼치라고 촉구했고, 1643년 유백증은 친청 행보를 지속하는 인조에게 “그렇다면 당초 인조반정을 한 이유는 무엇이냐?”라고 비판의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1644년에는 반정공신 출신인 심기원에 의해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심기원 등은 “병자호란 이후 인조가 천하에 죄를 지었다”, “소현세자에게 전위하려고 했다”라고 말하며 친청 정책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청이 중원을 차지한 뒤에도 인조가-국왕으로서의 권위가 실추된 채-친청 정책을 지속하자 조정 안팎에서는 출사하는 것을 푀히하는 풍조가 번져갔다.
전쟁이후 일본과의 관계
1607년 이른바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에 갈 때 지참했던 국서에는 “의리상 일본과 더불어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다”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었다.
당시 조선은 명의 요동도사에게 일본의 동향을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했고, 조선에 남아 있던 명군 지휘관들은 조선의 대일 교섭에 간여하고 있었다.
1599년 쓰시마는 국교 재개 교섭을 위해 사자 가케하시 시치다유와 요시소에 사콘 등을 조선에 보냈는데 이들은 귀환하지 못했다. 1600년에 파견했던 유타니 야스케 등도 역시 쓰시마로 귀환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조선 측의 대일 적개심이 극심했던 것과 아울러 통교 재개에 대한 쓰시마 측의 열망을 잘 보여준다.
쓰시마 측의 호소와 협박이 계속되는 와중에....
후금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조총과 화약 등의 무기류를 일본으로부터 도입하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했던 항왜인의 자손들을 선발하여 부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나아가 1626년에는 훈련도감 등에서 필요한 유황을 왜관을 통해 조달하려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1627년 정묘전쟁이 실제로 발생하자 조선의 대일 정책은 더욱 유화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서변에서의 긴장이 높아졌을 무렵 조선 조정은 그 사실은 왜관과 일본인들이 알지 못하도록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의 발생이 기정 사실이 되어가고 있던 상황에서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었다. 실제 조선 조정은 1627년 2월 27일, 동래부사 유대화를 통해 일본에 서계를 보내 호란의 발생을 알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연례 무역선의 파견을 일시적으로 중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조선이 일본에 전란 발생 소식을 알린 것은 명에게 보고한 것보다 더 빠른 것이었다.
조선이 후금의 침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도쿠가와 막부가 ‘조선을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침략해올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커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후금과의 강화가 성립된 이후, 쓰시마에게 조선이 전란을 평정했다는 것과 후금군이 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고하여 일본의 개입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정묘전쟁 이후인 1628년 도쿠가와막부는 쓰시마주에게 조선 정세 탐색을 위한 사절을 파견할 것과 필요하다면 조선에 원병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는 사실을 통고하라고 지시했다. 쓰시마는 막부의 이 같은 지시를 빌미로, 조선이 처한 수세적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정책을 취했다. 그것은 1629년 임진왜란 이후 금지되어 있던 왜차의 상경을 허락해달라고 강청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임진왜란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는 조선 조정은 처음에은 이를 거부했지만 이귀 등이 네세운 “서북과 남동 양단에서 동시에 적을 만들 수는 없다”라는 주장에 밀려 결국 허용하고 말았다. (인조 7년 4월 정축) 실제 한성으로 들어온 왜차 겐포는 “중국을 도와 오랑캐를 치고 조공로를 열려고 한다”라고 떠벌렸다.(인조 7년 5월 기해) 인조는 이례적으로 왜차 겐포 등의 거처에 예관을 보내 잔치를 베풀고, 그동안 쓰시마가 요구해온 공무목公貿木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나아가 쓰시마는 당시 왜차의 입경을 통해 1609년 기유약조 때 약속했던 공무목과 정사년(1617)의 미수분까지 받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1637년 2월, 왜관의 일본인들은 청군의 침략 사실을 파악하여 쓰시마에 보고했고, 쓰시마는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을 원조하겠다는 풍문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은 그러한 왜관의 제의를 거부하는 한편, 조선군이 누차 청군을 격퇴하여 그들이 화의를 요청하면서 퇴각했다고 짐짓 ‘조선의 건재함’을 과시하려 했다.
하지만 조선의 항복 사실이 일본인들에게 알려지고, 그에 따라 조선의 수세가 노출되면서 조선의 대일 자세는 다시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병자전쟁 이후에도 일본에 대한 전통적인 적개심과 재침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인조 16년 1월 29일 조)
1638년 집의 조경은 일본을 ‘30년간 사귀었던 우방’이라 지칭한 뒤 일본의 군사적 도움을 얻어 청에 대해 복수라자는 주장을 폈다.
쓰시마는 조선이 위기를 벗어나면 ‘막부의 방침을 어기고서라도 무기를 보내겠다’는 고 하였다.
병자전쟁을 통해 조선을 굴복시킨 청 또한 일본의 동향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1637년 11월, 이른바 ‘성하지맹;을 맺을 때 청 태종은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 사신을 입조시키도록 요구했다. 이어 1638년 5월에는 조선이 일본의 동향을 자신들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는다고 힐문했다.
1639년 9월 조선은, 병자전쟁 이후 일본이 조선의 수세를 이용하여 조선에 대해 무리하게 경제적 요구를 일삼는다는 것을 알렸다. 일본 내부에서 조선을 해치려는 논의가 무성한 데 쓰시마주가 조선을 위해 그러한 주장들을 힘써 무마하고 있다는 것, 이것을 빌미로 조선에게 공갈을 자행하여 각종 물자들을 얻어내려 하고 있는 실상을 보고했다.
1650년 1월, 조정은 ‘일본의 동향이 우려된다[왜정가려]’는 명분을 내세워 병자호란 이후 방기되었던 남한산성 등의 수리를 시도했다. 하지만 청은 이러한 사실을 이지했던 직후 바로 대학사 기충격을 사문사로 파견하여 조선 조정을 힐책했다. 기충격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공격받을 경우 청군의 구원이 곧바로 이루어질 것임을 단언하고, ‘왜정가려’는 핑계일 뿐 조선은 청의 내정이 안정되지 못한 것을 빌미로 딴마음을 품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조선은 쓰시마를 통한 일본으로부터 무기 획득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본산 조총과 유황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았다. 이에 조선 조정은 유황이나 장검등의 구입을 비밀리에 타진했지만 병자전쟁 직후 일본측은 ‘원론적인 수락’ 의사만을 밝힐 분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 일본의 이러한 소극적 대응은 자연히 양측 사이에서 유황 등 무기류의 밀무역을 촉발시켰다.
조선후기(영조 22년) 이래 경상도지역에서 거뒤들이는 부세의 절반이 왜관으로 들어가서, 국가의 유지를 위한 재용은 오로지 호남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기록이 있다.
1672년 이후, 조선은 명대의 사서인『양조종신록』에서 인조반정을 ‘찬탈’이라고 기술한 내용을 고쳐달라고 청에 요청했다. 명을 위해 ‘복수해야 할 대상’인 ‘오랑캐 정권’ 청에게 명대의 곡필을 수정해달라고 했던 것은 분명 아이러니였다.
숙종, 영조대 대보단을 창설하여 설제하는 등 대명의리론을 고취하려 했던 조선의 동향과 의도를 당시의 청이 다 알고 있었다는 지적이 주목된다. 또 18세기 초 강희제가 조선이 명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은 것을 찬양했던 것에서 보이듯이 청은 망해버린 명에 대한 조선의 충절을 ‘청에 대한 충절’로 환치시켜 생각할 만큼 자신감이 커졌다.
첫댓글 근데 왜 아직도 교과서에서나..서적, 언론등에서는 1636년 청의 일방적인 조선을 패배시킨 사건을 '호란'이라 하는가? 아직도 우린 이런 화이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물론 그렇다고 내가..난데없이..만주족혹 말갈, 여진등은 우리민족 것은 아니다) 다만 왜 아직도 이런 개거지 같은 명칭, 비하하는 용어를 사용하냐 이말이다. 사실 엄밀히 말해..한인들도 그랬었지만, 우리나라는 일본이나..여진등에 대해..문화적 폭력을 엄청나게 가하였다. (이것에 대해 일본또한 천황과 막부의 쇼군의 일본국왕 해서..신라부터 조선까지 일본의 조공국, 번국, 하위국으로 여겼으니 ?? 아니냐도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좀 지난 얘기 이지만.대종영 드라마도 그렇다. 왜 거란족의 고귀한 처녀가..천하디 천한 왠 말갈족인지 뭔지의 종자와 엮어 놓냐? 난 그 거란족 여인이 자신의 종족을 위해..배신을 하는 거을 보고..피가 꺼꾸로 흘렀다.(물론 난 일본관련해서 ..배신..혹 정치적 용어로서 매국에 대해..난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긴 하다) 이것 말고도 엿먹이는 것은 많다. 뭐 당나라때 티벳의 강성함이니..초원을 호령한 돌궐 어쩌구 저쩌구 해도..결말은 그래도 다 고구려 밑이다라는... 당나라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고구려이고..고구려만이..당나라와 맞짱뜰수 있고..그러니..이 무지막지한 당나라 놈들에 대항할려면
거지꼬락서니 된 우리 유민과 합치자..뭐 그런...아.티벳 예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매우 인자한 모습의 달라이 라마...대부분의 티벳인들중 많은 사람이 스님이 되고..그런데..사실..7,8세기를 보면 그렇지 않다. 티벳 왕국은..중원을 수도 없이 침략하였었다.(장안도 점령).그렇다고 이들의 이런 행동이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후대에 여러 왕조들의 티벳 침략이 꼭 착했다는 것은 아니다.
퍼온글말고 님이 직접. 정리하신글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개거지 같은 명칭이라고 생각되면 국사편찬위가서 한마디 하시던지요. 한국 사극이야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관광시킨게 하루이틀일도 아니고 그게 싫으면 안보면 그만 아닙니까? 그리고 천하디 천한 말갈족이 나중에 거란 관광보내고 조선도 관광보낸 애들인뎁쇼. 티벳이 중원을 침략한적 있다는 소리는 토번말하는거 같은데, 이게 티벳이 독립달라는말을 하지 못하는 근거가 되는건지? 이건뭐 개념도 안잡혀 있고, 말의 앞뒤도 안맞고.
천하디 천한 말갈족이라고 한것은...맨 처음 댓글에서의 '호란'이나 오랑캐라는 말 사용에 대한 불만과는 좀 다르게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말갈족'이란 것을 사용할때..저는 거란족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는데.거란족도..사실...옛 사료등에서는 오랑캐(여진족 느낌이 들지만)로 취급받았으니...그리 큰 상관은 없을듯 합니다. 그렇지만..제가 거기에서 말갈족이란 용어을 사용한것은..발해 문제로 중국과의 관련하여 "대조영은 말갈족이다" 하면 어떤 화를 돋굴수 있게 만들기에 일부러 택한 것입니다.오히려 지금 바로 앞의 댓글 내용이 문제가 있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티벳에 대해서는..티벳트가 마치 평화의 민족으로서만 알
이것이 거란족과 말갈족 엮어 놓은게 말이 안되는 근거가 되는겁니까? 도대체 무슨말을 하고 싶으신겁니까?
고 있는(물론 이런 평화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민족에게나..나라에게나 좋습니다. 그렇지만..이것은 대단히 위장된..선전이란것은 현대의 강대국들을 보면 알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은 사용하기 싫으나 군대에서...무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외교 같은것이 소용없다인가와도 근거가 비슷하고요.), 단순한 어떤 환상적인 것으로만 보는 것 같아서..매우 의외적인 티벳트 와 당나라 전쟁 부분을 언급하고 침략이라고도 표현한것 입니다.
지금 님의 논리는 우리나라도 월남에 가서 그나라 사람들 죽였으니 일본위안부문제를 비난해서 안된다는 논리와 같은 논리입니다만.
댓글은 다시 달겠습니다. 제가 댓글에서 사용한 천하디 천한 왠 말갈족 부분에서 '천하디 천한'이란 바로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이고 '말갈족'이란 말 그대로이며 이는 현 발해 관련 중국학계에서의 용법을 적용한 것입니다.
그러실수록 말의 앞뒤가 안맞는다는걸 알고 계십니까?
vonmusel님께서 제글에 대해 앞뒤가 안맞는다고 지적하셨지만 문장 요소요소를 보시면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말갈족부분에서 비칭적 개념이 들어가게/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쓴 천하디 천한 말갈족 부분은, 후대의 만주족, 그 이전 여진족과는 어떤 개념상의 연결은 없습니다. 제가 천하디 천한 말갈족에서 천하디 천한은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이고, 말갈족은, 물론 중국학계의 발해 개념때문에 넣었으나...그것은 어디까지나 허명(虛名)불과할뿐 그것은 앞의 천하디 천한 즉, 고구려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므로, 제가 까고 있는 것은
고구려 입니다. 그러므로 첫번째 댓글의 '호란' 이란것을 사용하는것에 대한 불만과 말갈족 부분은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허참. 갈수록 말이 중언부언 되고 있는걸로 보입니다만. 천하디 천한이라고 할때 그 기준이 고구려의 입장에서 그렇게 본것인지 그리고 거란족과 말갈족이 손잡았다는것에서 왜 천한 말갈족과 거란족을 연결시키냐는거는 의문을 제기하신거에 대한 답변은 안됩니다만. 호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것에 대한 불만을 왜 고구려에 제기하십니까? 호란은 조선조에 생긴일인데 8세기의 일어난 일을 논하면서 호란 언급하는건 뭔가 앞뒤가 안맞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지?
그리고 토번과 당나라간의 전쟁을 논하면서 침략이라고 하시고 중국이 티벳침공한것에 대해서 당연한거라고 하는거에 참 할말을 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