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곳에 있지만 생각이 다른 경우를 뜻합니다.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의 생각과는 다른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 중에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과 다른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현실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힘과 권력으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높은 자리를 차지하길 원했습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과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류시화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리고 ‘소금인형’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는 것은 함께 있지만 생각과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했고, 결혼해서 함께 살지만 많은 부부가 갈등과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있습니다. 감성적인 사랑을 의지적인 사랑으로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성적인 사랑이 화려한 불꽃이라면, 의지적인 사랑은 그 불꽃이 계속될 수 있도록 넣어주는 땔감입니다. 땔감이 없다면 불꽃은 곧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소금인형이 물에 녹아 소금물이 되듯이, 땔감이 재가 되어 화려한 불꽃이 되듯이 희생과 인내가 함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 됩니다.
‘동상동몽(同床同夢)’을 생각합니다. 같은 곳에 있으면서 같은 꿈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대가 멀리 있어도 그대와 함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서로에게 아낌없이 녹아주는 소금인형이 됩니다. 첫 번째 순교자인 스테파노는 하늘을 보았을 때,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청하였던 것처럼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필립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 마귀들을 쫓아냈고,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박해가 시작되었고, 시련이 다가왔지만 예수님과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 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조직과 제도를 통해서 성장하였습니다. 교회는 교리와 신학을 통해서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교회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은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성장과 전통 그리고 공동체의 중심은 예수님과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꿈을 꾼다면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말이 참 아름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