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눈물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런 표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나라가 예멘이다. 커피의 나라에서 난민의 나라로 변한 예멘의 역사는 눈물의 역사이고 그 한가운데 커피가 있다.
한동안 우리나라와 같은 분단국가라는 이미지를 가졌던 예멘이 지금은 세계인들에게 난민을 상징하는 지역이 되었다. 2015년에 격화된 내전을 피해 2018년 제주에 도착한 500여 명의 예멘 난민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예멘=난민 국가"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확고하게 만들었고, 우리나라의 다문화 정책에 부정적 영향을 적지 않게 주었다.
모카 커피의 명성
사실 난민 이전에 예멘을 상징하는 것은 커피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 '모카'(Mocha)가 바로 예멘의 대표적인 무역항이었고, 모카는 커피 역사에서 생산과 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15세기 중엽부터 적어도 200년 이상 모카 항은 이슬람 지역 무역의 중심이었고, 예멘은 유럽인들 사이에서 아라비아 펠릭스(Arabia Felix), 즉 '행복한 아라비아'로 불렸다.
커피 재배지가 실론과 자바 등 동인도 지역으로 확장하기 이전인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까지 세계 커피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것이 바로 모카 항을 배경으로 한 예멘 지역에서 재배되는 커피 또는 모카 항에서 출발하는 에티오피아 커피였다. 모카 주변 예멘 내륙에서 생산되는 커피와 모카를 통해 수출되는 에티오피아 커피는 구분이 어려운 커피였고, '모카 커피'로 통칭되는 이 커피가 초기 커피 음용자들의 입맛에는 커피 맛과 향의 표준이었다. 유럽인들에게 커피 맛은 모카에서 수입하는 커피 그 맛이었다.
▲ 한 행상인이 예멘의 도시 사나(Sanaa)에서 세계 커피의 날 행사에 맞춰 다양한 볶은 커피콩을 전시하고 있다. 세계 커피의 날은 커피가 가장 사랑받는 음료가 된 이래 매년 10월 1일에 열린다. 예멘은 아랍 커피의 본고장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카 커피의 본고장으로 맛과 고품질로 유명하다.
이렇게 하여 모카라는 지역 명칭이 지니는 의미가 확장되어 '모카=커피'라는 인식이 생겨나 굳어졌다. 커피 경작의 출발지 중 하나이며 커피 무역의 시작을 열었던 항구 모카는 이후 커피 관련 용어에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모카는 예멘에서 생산되는 커피의 이름, 예멘과 에티오피아 동부 하라 지역에서 생산되는 커피 전체의 이름, 아라비아반도 전체에서 생산되는 커피의 이름에서 출발하여 커피 그 자체를 의미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가정용 에스프레소 커피 추출 기구를 모카포트라고 부르고, 커피 성분이 들어간 빵을 모카빵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모카=커피'의 용례다.
지금은 모카빵이나 카페모카처럼 초콜릿이나 코코아 가루가 들어간 음료나 음식 이름에 모카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네덜란드에 의해 커피나무가 실론과 자바 등에서 경작되기 시작한 18세기에 이들 지역에서 생산하는 커피에서는 모카커피가 지닌 특유의 달콤한 맛과 향이 나지 않았다. 따라서 설탕이나 초콜릿을 가미하여 모카 커피와 비슷한 맛을 내려는 문화가 널리 생겨났고, 이로 인해서 초콜릿 향이 나는 커피 혹은 단맛이 가미된 커피를 모카 커피로 부르게 된 역사는 모카 커피의 명성을 말해 준다.
모카 항이 커피 무역에서 가장 전성기였던 18세기 초 연간 세계 커피 소비량이었던 2만 톤은 모카를 중심으로 한 예멘 지역에서의 커피 거래량과 거의 같았다. 물론 모카 항에서 거래되는 커피 중에서 유럽으로 판매되는 양은 전체의 8분의 1 수준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오스만터키,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의 무슬림 세계로 향했다.
자바 커피의 폭발적 증가
변화가 시작된 것은 18세기 초반이었다. 가장 큰 요인은 커피 재배 지역의 확대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실론과 자바 지역에 옮겨 심은 커피의 생산이 시작된 것이다. 대항해시대의 도래와 함께 향신료 전쟁을 통한 이익 창출이 시들해지자 새롭게 선택한 것이 커피였다.
이 지역에 진출한 초기 네덜란드인들은 지역 문화에 적응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업의 성공을 위해 현지 여성과 결혼을 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물론 커피로 수익을 얻고자 하는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해 커피농장에는 많은 현지 농민들이 동원되었다.
독일의 커피 역사학자 야콥의 표현에 따르면 백인 농장주들이 맥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동안 현지 농민들은 소작 노예의 형태로 뙤약볕 아래에서 땀을 흘려야 했다. 커피가 경제적 수익만을 목표로 하는 제국주의에 의해 드디어 계획적인 착취의 도구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첫 희생양은 아프리카나 중남미가 아니라 아시아 민족이었고, 착취에 앞장선 것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
1711년에는 처음으로 자바에 와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인에게 현지에서 생산, 가공된 커피 생두가 판매되었다. 같은 해에 894파운드의 자바 커피가 암스테르담의 경매 시장에 등장하였다. 자바의 화산재 토양과 따뜻한 날씨는 커피 재배에 적합하였고, 커피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식민지 개척에서 활용하였던 쿼터제를 통한 생산량 강제 배분 같은 시스템도 커피 생산을 늘리고 가격을 통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지역의 농장주들에게 일정한 가격에 일정량의 커피를 출하할 것을 사전에 배분하는 방식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정한 가격에 필요한 커피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지만, 지역 재배자들은 이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커피 역사에 있어서 18세기는 소비와 생산 면에서 동시 팽창을 보여 준 100년이었다. 비록 영국에서 커피하우스 문화는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였지만 베네치아, 프랑스 그리고 오스트리아에 이어 프로이센을 비롯한 북유럽 여러 나라에서 커피 소비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유럽의 18세기 역사를 설명할 때 산업혁명, 시민혁명만큼 중요한 것은 소비혁명이다. 소비혁명에 따라 하층민들 역시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였다. 커피는 18세기 소비혁명을 상징하는 물품의 하나였다.
18세기에 소비와 생산의 지속적인 팽창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인구의 지속적인 증가라는 요인도 작용하였다. 그 이전까지 흑사병 등 전염병으로 인해 밀물과 썰물처럼 증가와 감소를 반복하였던 지구 상의 인구가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상한선을 넘어섰다. 이후 지금까지 인류의 양적 팽창은 멈추지 않고 지속되어 왔다. 18세기 커피 생산과 소비의 확장에 인구의 안정적 성장도 한몫을 한 것이다.
예멘의 비극
커피의 생산과 소비의 폭발적 증가에도 커피 무역의 시초인 모카 항에서의 커피 거래는 크게 위축되었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18세기 초부터다.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는 흑사병으로 인한 도시 기능 마비였다. 14세기에 유럽에서 창궐하였던 흑사병은 이후 세계 이곳저곳에서 재발을 거듭하였다. 흑사병이 18세기 초반 무렵에 모카 지역에서 다시 기승을 부렸고, 이로 인해 도시 인구의 절반 이상이 희생됨으로써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둘째는 전쟁이었다. 이맘(이슬람교 교단 조직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직명)들이 주도하는 지역 토착 세력, 16세기 초부터 이 지역을 통치하였던 오스만터키 세력 그리고 영국을 포함한 서유럽 제국주의 세력이 이 지역의 패권을 두고 크고 작은 전쟁을 잇따라 벌였다. 지역의 안정이 무너졌고, 무역항으로서의 모카의 역할이 점차 축소되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요인은 커피 생산 경쟁 지역의 지속적인 등장이었다. 소비의 팽창에 따라 커피 재배지가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와 홍해 연안 예멘을 넘어 아시아의 실론, 자바 그리고 서인도제도와 중남미로 급속히 확대되기 시작했다. 결국 1720년대에 이르러 200년 이상 지속된 모카 커피의 독점이 급속도로 막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질 좋은 자바 커피의 등장은 모카 커피의 독점적 지위를 무너뜨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1717년에 불과 2000파운드였던 암스테르담으로의 자바 커피 선적량이 1720년에는 무려 11만 6587파운드에 이르렀고, 4년 후인 1724년에는 100만 파운드의 자바 커피가 암스테르담 경매 시장에 등장하였다.
증가세는 멈추지 않았다. 1726년에는 자바로부터 공급되는 커피의 양이 연 400만 파운드에 달함으로써 생산을 시작한 지 불과 20년 만에 자바 커피는 모카 커피를 추월하여 생산량에서 세계 제1위의 커피가 되었다. 암스테르담 시장에서 거래되는 커피의 90%가 자바로부터 공급되기에 이르렀다.
자바 커피의 가격이 모카 커피의 3분의 1 수준이었던 것도 자바 커피 수요를 늘리는 데 기여하였다. 1731년부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모카로부터의 커피 수입을 그만두었다. 이후 자바 커피는 매년 400만 파운드씩 암스테르담으로 팔려 나가더니 1736년 즈음에는 600만 파운드로 증가했다.
1740년대에 이르러서는 신흥 생산지 카리브해 지역으로부터의 수입 커피량이 자바로부터의 수입량을 초월하였다. 이후 모카 항의 역할이나 예멘 커피의 가치는 철저히 무너졌고, 1869년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될 즈음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에티오피아 커피는 모카 항을 거치지 않고 손쉽게 유럽인들에게 전달되었다. 19세기 후반 즈음 미국에서 커피가 국민 음료로 자리 잡으면서 커피의 대유행이 시작되었지만 예멘의 커피 생산은 멈추어 있었다.
▲ 예멘 난민 신청자들이 29일 오후 제주시 일도1동 제주이주민센터에서 국가인권위 순회 인권상담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1980년대 스타벅스의 등장과 카페 문화의 대중화로 상징되는 커피 제2의 물결 시대가 도래하자 예멘 커피는 부활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안한 정세가 장애물로 등장했다. 2015년에 본격화된 내전은 예멘의 모든 일상과 산업을 무너뜨렸다. 커피산업도 마찬가지였다.
커피 무역의 상징 모카 항의 몰락으로 시작한 예멘의 비극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3년 전 제주에 온 예멘 난민들이 흘리던 눈물에서 나는 쓴 커피향을 느꼈다. 예멘이 난민의 나라에서 커피의 나라로 부활하는 그날이 언제일지.
이길상 기자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