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5일(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신성한 책무를 위한 회개 바오로 사도는 회개했다. 예수님을 박해하는 사람에서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보통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 하는데 바오로 성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의 회심은 부활하신 주님이 하신 일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함께 간 이들은 빛만 보았지만, 성인은 그분 목소리도 들었다. 아마 율법을 지키고 하느님을 섬기려는 그의 열성 때문이었을 거다. 어느 가톨릭이었던 미국인 선승(禪僧)이 자신은 개종한 게 아니라고 했던 것에 비슷한 맥락일 거다. 그의 열성에 율법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당신을 드러내시고 참된 섬김이 무엇인지 직접 알려주셨을 거 같다.
다 이해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울 거다. 우선 믿어야 예수님을 이해하게 된다.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분부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복음은 사람만 아니라 세상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제일 먼저 사람이 복음을 들어야 하고, 사람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사람이 우월해서가 아니라 사람은 하느님처럼 모든 피조물을 잘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고(창세 1,26), 사람만이 하느님 말씀을 안 듣기 때문이다.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의 집사인 사람은 정신 차려 자신이 하느님께 받은 신성한 책무, 사람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잘 다스려야 한다. 그 회개의 중심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단죄받는다. 21세기 문명시대에 이런 주장이 합당한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이게 우리 믿음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우리가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사람은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있나? 그 율법 학자가 예수님 앞에서 속으로 말했던 거처럼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바로 우리 하느님이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용서하신다. 왜냐고? 그건 하느님만 아신다. 굳이 말하라면 사람은 죄를 안 지을 수 없고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내 몫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내 죄를 없애시려고 십자가 죽임을 받아들이셨고 부활하셨다는 걸 믿음뿐이다. 믿으면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예수님을 알게 된다.
성인은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님을 위해서 자랑스러운 자신의 출신, 학식, 기득권 모두를 쓰레기로 여기게 됐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단번에 180도 바뀌겠나. 사람이 바뀌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평생이 걸린다. 바오로 사도는 회심의 모범으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성경에는 자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바오로 성인은 다마스쿠스 사건 이후로 잠적했었다. 그는 그 즉시 베드로 사도단을 만나러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고, 3년이 지난 후에 베드로 사도를 만났다(갈라 1,17-18). 바르나바가 고향 타르수스에 있는 바오로를 찾아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는 증언도 있다(11,25-26).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라가 참 시끄럽고 답답하고 불안하다. 요즘 사회 현상을 보면 대통령 한 사람 때문에 갑자기 그런 일이 터지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것들이 겉으로 드러난 거다. 속으로 곪아 병이 더 깊어지는 거보다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인 거 같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그 사람들과 같이 갈 수 없다. 그들이 싫거나 미워서가 아니라 그들 안에는 하느님이 안 계신 거 같기 때문이다. 대화하려 하지 않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실리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왜 저러는지 마음을 열고 들어본다. 내키지 않지만 대화한다. 분열과 증오 그리고 폭력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화하지 않고 그들 마음을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나도 분열과 증오를 키우는 것에 동조하는 셈이 된다. 사람이 제일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하고 사람만 회개하면 되는 그 이유는 그 사람들을 포함한 세상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처럼 잘 다스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로마 8,18-19).”
예수님, 오늘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습니다. 저 혼자 구원받으려는 유치한 마음 때문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하느님을 대리해서 하느님처럼 사람을 돌보고 피조물을 다스려야 하는 책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할수록 그리고 회개한 사람, 참된 그리스도인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주님 보시기에 참 좋은 곳이 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마음을 열고 생각을 바꿔 다른 이들의 말과 마음을 듣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