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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성시대 파라다이스아일랜드
심장이 뛰었다. 흥분과 분노로 뇌수가 순식간에 끓어오른다,
만악의 근원, 나를 이 엿같은 상황에 밀어 쳐넣은 악마가 바로 저기서 나를 보고 있었다.
잡아야 한다, 잡아서 족쳐야 한다, 잡아서 족치고, 물어봐야 한다.
나한테 왜 그랬는지! 왜 내가 걸려든 건지!
내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 지금이 몇 시인지,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딴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분노로 머리가 통채로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잡는다잡는다잡는다잡는다잡는다잡는다!!!!!!
주위 풍경이 미친듯이 스쳐 지나간다. 나와 가까워 지는 사람들의 당혹한 표정,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불쾌한 표정, 몇명인가와 부딫히고, 그들중 몇명은 넘어지고, 몇번은 내가 넘어질 뻔 하면서도 나는 그녀가 있던 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그녀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사거리를 지난다, 자동차들이 가깝게 스쳐지나간다. 급 브레이크에 타이어가 지면과 마찰하며 세된 비명소리를 울린다. 빵빵거리는 클락션, 여러가지 언어로 쏟아져 나오는 욕설과 삿대질,
안 보인다, 안 들린다.
난 지금 하나만 보여. 심장이 터져도 좋다, 두 다리가 부러져도 좋다. 저 악마년을 놓치지 말고 잡을수만 있다면!!!
잡아라잡아라잡아라잡아라잡아라잡아라잡아라!
마침내 그녀와의 거리가 10미터 까지 접근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한결같은 속도로 걷고 있었다. 그녀가 큰길을 벗어나 작은 골목으로 돌아들어간다. 딱 좋다.
“야!! 플라워!! 멈춰!!”
내 고함소리에도 멈추지 않는다. 상관없어, 악마년, 곧 네 머리채를 잡아채 주지! 이제 거리는 4~5미터 까지 가까워 져 있었다.
그녀는 모퉁이를 돌았고, 나는 터질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며 모퉁이를 따라돌았다.
“거기 서-.....!”
골목 안의 시선들이 일제히 여기로 돌아왔다. 길거리 벽화가 그려진, 약간 슬럼스런 거리에, 10대 말레이 소년 몇명이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없었다.
나는 황급히 그 골목을 뒤졌다. 그녀가 있을 만한 곳은 모두. 그러나 그녀는 마치 세상에서 증발한 마냥 자취를 감추었다.
“...제길!!”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었던 쓰레기 통 뚜껑을 거칠게 던지며, 나는 주저앉아 절규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터덜터덜 돌아왔다. 아캄과의 약속장소였던 카페테리아로 돌아왔을때. 앉아서 싱글벙글한 얼굴로 쥬스를 마시고 있던 아캄은 눈이 동그래졌다.
“어 몰골이 말이 아닌데요? 무슨 일 있었어요?”
“플라워를 만났어.”
“예!?”
나는 허탈하게 의자에 주저 앉으며 말했다.
“플라워 였다고, 제길! 놓쳐버렸어.”
아캄은 웃음기 쫙 뺀 얼굴로 말했다.
“확실해요?”
“그래.”
“어디에서 놓쳤어요? 한번 찾아보죠.”
“...”
나는 그에게 이끌려서, 그녀가 사라진 골목을 중심으로 메르싱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는 지쳐서 택시를 타고 선착장으로 돌아와, 배를 타고 돌아왔다.
나는 쿠알라 푸파로 돌아갈 때 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쿠알라 푸파로 돌아왔을때, 나는 뒤늦게서야 그 소녀가 건내주었던 종이 쪽지에 생각이 미쳤다. 다행히 달리기 시작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모양인지, 종이는 심하게 구겨진 체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종이를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벗어나고자 한다면, 구청장의 집 서재속 금고.
밀리에타(miliatta)]
벗어나고자 한다면, 벗어난다? 누가? 어디서?
주어와 목적어가 없는 불성실하기 짝이 없는 문장 이었지만, 그럼에도 읽은 사람에게 확실하게 각인되는 한마디였다.
나를 속여 이 섬으로 밀어넣은 마녀가, 이번에는 나를 섬에서 빼 내려고 한다
여러가지 감정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분노와 불신, 의문과 실낱같은 희망, 그래 어쩌면 이건 마녀의 희망고문. 이 환경에 어찌어찌 적응하고 살아가는 나를 짙밟기 위한 희망고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그 한마디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다녀왔어요~ 별 일 없었죠?”
“... 왜 벌써들 와, 재미좀 보고 술 한잔씩 하고 오는 거 아니었어?”
릭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플라워를 추적하다가 놓친 다음 우리는 저녁 식사고 뭐고 할 생각 자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급히 귀가해서, 도착했을때는 아직 5시가 되기 전 이었다.
나는 딱히 이야기를 할 기분이 아니라서 릭을 그냥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저녁 준비는 아캄이 알아서 하겠지.
침대에 누워서 계속 생각해 봤다. 이 쪽지를 전한 저의가 무엇일까. 모습을 나에게 노출한 이유는 왜 위험을 감수하며 그런 짓을 했을 까 그녀가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왜 나 여야 했지이 쪽지의 내용을 신뢰 할 수는 있을 까 만일 신뢰 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하면 구청장의 서재금고에 접근할 수 있을까 릭과 아캄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것인가
한참을 누워서 고민했지만, 쉽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구청장의 금고에 접근하는 것도, 이 쪽지의 저의를 파악하는 것도. 나는 그녀에 대한 원한과 증오로 지금 너무나도 단락적인 사고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냉정한 제 3자의 의견이 필요했다.
결국 나는 저녁시간을 빌어, 두 사람에게 쪽지의 내용을 공개했다.
“What the fuck...”
“@#$%^#$^&&”
내가 내민 쪽지를 들여다 본 릭과 아캄은 각각 모국어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릭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직시하며 말했다.
“그년, 확실해?”
“어.”
“등신같은 새꺄, 그걸 놓치냐 그래, 콱 칼이라도 물고 죽어버려.”
릭은 분노하고 있었다. 나를 향해서 라기 보다는 마치 자신들을 희롱하는 듯한 그 여자의 행동에, 그리고 이런 처지에 놓여있는 한심한 자기 자신에 대해 갈곳없는 분노를 나에게 표출하는 것 같았다. 말은 거칠었지만 목소리에 힘은 없었고, 욕 이라기 보다는 한탄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발끈 할 힘도 없었다.
아캄은 욕을 뱉어낸 후로는 아무 말 없이 계속 뭔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내가 물었다.
“아캄, 구청장의 금고에 대해 뭔가 좀 알아?”
“um~~~어느정도는요, 실제로 내부를 본적이 없으니까 100%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그 금고는 역대 이 섬의 관리자들이 모아온 PI와 루바섬에 대한 정보를 보관한 금고 일 거예요. 구청장 집에 찾아 갔을때 본 기억은 있지만 비밀 번호는 모르는데...그런데 두 사람, 이 메세지를 믿어요?”
“...모르겠어. 하지만 솔직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야.”
“그 년이 우리를 속여서 함정에 빠트린들 무슨 이득이 있지 어차피 우리가 죽는 건 시간의 문제야. 늦게 죽느냐, 좀 더 빨리 죽느냐 하는거지.”
릭은 으르렁 거렸다.
“솔직이 이건 살아도 사는게 아냐, 나는 고향에 마누라랑 애들이 있다고, 씨팔, 나는 내 삶을 되찾아야해. 그렇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게 나아. 달아날 기회가 있다면 나는 뭐든지 할테데, 최소한 그러다가 죽으면 덜 억울하기라도 하지, 이대로 평생 머저리처럼 이 섬에 눌러 앉아서 늙다가 어느날 실수로 죽을순 없다고.”
“릭...”
아캄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사실, 저도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낀 지 좀 되었죠. 해 볼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만장 일치로군.”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난 20대의 꽃다운 청춘을 가족을 위해 바다에 내다 버렸다. 한번도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이제 내 삶을 되찾아야 할 시간이었다.
그렇게 의기 투합한 우리는 잠시 머리를 맞대고 그 쪽지를 노려보았다. 마치 그 쪽지를 보다보면 뭔가 뚜렷한 대책이라도 나올 것 처럼 말이다.
그때, 별안간 릭이 중얼거렸다.
“이거...이상한데...”
“뭐가?”
내 반문에 릭은 쪽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적혀 있는 글을 봐. '벗어나고 싶으면 구청장의 집 서재속 금고
(Wanna To Escape, The Safe Box In The Library, Cheif's House) 이 글은 단어의 첫 글자를 모두 대문자로 썼어. 표시방법에 대해서는 그렇다 치고,
그 뒤에 나와있는 '밀리에타' 라는 명칭은 전부 소문자로만 썼어.그렇지 내가 이 글을 쓴 사람이라면 난 밀리에타를 앞의 형식과 똑같이 맞춰서 밀리에타(Miliatta) 라고 쓸거야. 전부다 소문자로 쓴 이름은 이상하다구. 차라리 처음부터 문장 전체를 소문자로 썼다면 모르겠지만. 저렇게 해놓으니까 마치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아 보인단 말이야.”
“의미라면요?”
아캄의 말에 나는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아나그램(Anagram)?”
영어 문장을, 그 문장에 속한 알파벳으로 때어낸 후 재 배열한다. 추리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트릭 기법 이었다. 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넌 쓸데없이 눈치가 빨라. 자 그럼 생각해보자고, miliatta, 8글자니까 경우의 수는...4320가지인가 열라게 많구만. 그래도 문장이 될 만한 걸 배열하다보면 금방 풀 수 있을 거야.”
“글자 수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면, 하나의 긴 단어, 혹은 짧은 2, 3단 구조를 가진 문단일 수 있어.”
“좋아 친구들, 대가리 싸매 보자고.”
우리는 종이에 열심히 아나그램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
“... 아캄”
“...헤이, 브라운몽키, 왜 그래?”
추리게임은 싱거울 정도로 금방 끝났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 무언가를 적고 그대로 굳어버린 아캄을 보고 나랑 릭은 시선을 교환한 후 그가 적어놓은 종이를 봤다.
그 종이를 본 릭은 한 표정을 지었지만. 난 단번에 이해했다.
왜 아캄이 굳어버렸는지.
그의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miliatta
m i l i a t t a
i a m l i t t a
i am litta
릭은, 굳어버린 나와 아캄을 보더니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리따가 누군데?”
-'얼마나 아느냐' 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최단 기록은 하루였죠.
'리따'
아캄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구청장의 딸이고, 제 친구였습니다.
'저는 그녀와 친하게 지내서는 안됐어요. 소꿉친구 였지만. 제가 저주의 희생양이 되고서는 거리를 두어야 했죠., 하지만 저는 그럴수 없었습니다.
그녀를 좋아했거든요... 12살 어린이 였습니다. 전, 철이 없었죠.'
'결국 제가 그 사실을 인지한건 우리가 18살이 되었을 때 였습니다.
저는 그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그녀는 바뀐 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찾아와 저를 설득하려고 했죠. 저는 그런 그녀를 메몰차게 거절했습니다. 전...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날 리따는 어느날 나에게 찾아와 말했습니다. 파라다이스 아일랜드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너를 고쳐줄 방법을 알아. 내가 너를 고쳐줄게.'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그날 오후, 아버지 몰래 섬을 떠났습니다. 다음날 저녁. 섬에서는 그녀의 장례식이 치뤄졌지요.' –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이든,
죽는 순간 그의 시간은 멈춘다. 그의 이름은 과거의 산물이 되어, 시간의 흐름속에서 유리되고, 도태되어 간다.
하지만 이 순간. 과거의 것이 된 이름이, 4년의 세월이라는 관뚜껑을 열고 현재로 뛰쳐나온 것이다. 마치, 세상을 떠난 망령이 현현을 목격한 것 같았다.
나는 등골이 오싹한 느낌을 받으며 아캄을 돌아보았다.
그는...여느때 보다 더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캄은 마치 동상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웃는 동상, 그러나 그 웃음은 마치 석고상의 웃음처럼 더없이 무기질 적이고 건조했다.
마치 신이 분노, 공포, 그리움, 절망 등의 감정을 믹서기에 넣고 갈아버린 후, 그의 얼굴에 뿌려버린 것 같았다.
릭은 뭐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 한 듯 했지만, 여전히 머리 위로 를 띄우고 나와 아캄을 번갈아 바라보았고, 나는 아캄의 반응이 신경 쓰여서 경솔히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비유를 하자면, 초상당한 친구와, 그 사실을 모르는 친구를 만났을 때 모르는 친구가 드립을 쳤을때 두 사람 사이에서 어쩔줄 몰라 하는 그런 기분 이었다고나 할까
10분이나 됐을까 어쩌면 1분도 안돼는 짧은 시간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 무거운 침묵을 깨고, 아캄은 천천히, 한자한자 씹어 뱉듯이 말했다.
“제 친구이자, 첫 사람.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도 없는' 사람 입니다.”
“.What the hell....죽은자로 부터의 메세지 라는 건가”
평소라면 말도 안돼는 소리 하고 있네, 조작이지! 하고 일축해 버렸을 나 지만, 그 순간에는 릭의 중얼거림을 반박할 수 없었다. PI같은 정신나간 현상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다른 이상한 현상이 있다고 해서 놀랄 것이 뭐가 있나!
그리고 난 골목에서 그녀를 거의 따라 잡았다. 2,3 미터 밖에 안돼는 거리를 남겨두고, 코너를 돈 후 그녀는 마치 증발하듯이 사라졌단 말이다.
그녀는 정말 유령인 건가 아니면, PI에 의한 또다른 증상?
머리가 복잡했다.
아캄은 말을 이었다.
“...알 수가 없죠, 정말로 그녀가 살아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조작인지, PI에 의한 현상인지, 그녀의 망령이 전한 메세지인지. 알수 없어요. 하지만 단 한가지 분명한게 있습니다. 그녀는 PI를 알고 있어요. 그리고 구청장의 비밀 금고에 우리가 접근하므로서 무언가의 이득을 보는 사람입니다.”
“이득이라면?”
릭의 말에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 보았다. 그래 지금 중요한 건 그녀가 정말 리따인가 를 밝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런 메세지를 전했을까 그것으로 그녀가 얻을 수 있는게 무엇일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할 때는, 한꺼번에 여러가지 사고를 진행하는 것이 버겁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우선 한가지 사실에만 주목해 보기로 결심했다.
“아캄의 말이 맞아, 무언가의 이득이 있으니까 그녀가 이 일을 꾸몄겠지.
목적을 추론해 보면 그 동기도 알 수 있을지 몰라. 우선 거기서 부터 시작해 보자고. 구청장의 금고속 내용물을 우리가 확인, 혹은 훔쳐냈을때, 어떤 일이 일어날 지를. “
“그러자면 일단 내용물에 주목해야 겠군요.”
“내용물로 의심되는 걸 전부 말해보자.”
“가장 유력한건, PI에 대한 기록이겠지. 이 섬의 관리자들과 역대 등대지기들의 증언을 모은 자료 말이야.”
“혹은 금품? 작은 섬이지만 구청장은 어로조합 장이며, 또 이 섬의 서쪽 리조트 단지와 계약을 체결하고 있어요. 축적한 부는 무시할수 없습니다.”
“혹은 정치적인 무언가 일 수도 있어, 노출될 경우, 구청장을 압박할 수 있는 것, 말야. 섬의 관리자는 꽤 많은 권한을 누릴 수 있잖아 대대로 세습되어 온 자리 같지만,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 특히 이 섬의 리조트를 확대하고 싶어하는 화교들이나, 혹은 리조트들을 받아들인 구청장을 비판하는 원주민들은 충분히 있을 거야.”
“또 있을 만한건-“
“글쎄요, 마약?”
“넌센스다, 이 섬에 약쟁이라도 있냐? 무역항도 아니고, 여기로 들여올 이유가 없지.”
“마피아의 검은 돈?”
“릭씨, 007 너무 보셨어요.”
우리는 그렇게 툭탁 거리며 의견을 계속 나누었다.
“달리 떠오르는 내용물이 없으면, 이번엔 그걸 원하는 목적을 생각해 보자고. 차례차례 가보자, 일단 제일 유력한 가설. 'PI의 정보' 가 그 내용물 이라면, 여자가 그걸 노리는 이유는 뭐지?”
릭의 말에 아캄이 대답했다.
“우선은 그, '여자가 노린다' 하는 전제도 저는 의심 스러워요. 그녀는 '벗어나고 싶다면', 이라는 말과, '구청장의 금고' 라는 말 밖에 안했어요. 제가 만약에 그녀고, PI의 정보를 원한다면 좀 다른 메세지를 보냈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그걸 '어디로 가져와라' 라든지”
“그렇군, 놈이 보낸 메세지 로 만 봐서는 이걸 가지고 뭘 하라는 지에 대한 말이 한마디도 없어. 본인이 자료의 획득을 원하는 자라면 이런 지시는 하지 않겠지.”
“그럼 우리가 자료를 획득 하는 것 만으로 목표가 달성되거나, 혹은 자료를 획득한다면 무조건적으로 '특정한 행동을 할 거라는 확신'이 있거나, 둘중의 하나겠군요.”
“그런 게 뭐가 있지?”
나는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그게 정말 PI의 정보라면, 그걸 확인하고 나면 우리는 높은 확률로 '어디에도 없어'지겠지. 놈은 우리를 죽이고 싶은 건가?”
“절대(Never)”
“말도 안돼요.”
릭과 아캄이 완벽한 이중창으로 대답했다. 그들은 시선을 마주쳤다가, 내가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빠르게 대답했다.
“그녀가 정말 PI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를 죽게 하려 두지는 않을 거예요. 왜냐면...”
“멈춰 아캄, 장은 그 정도로도 '알아버릴' 지 몰라. “
릭의 제지에 아캄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릭은 나에게 눈을 찡긋 했다. 나는 솟아오르는 한숨을 억누르며 뺨을 쓰다듬었다.
“또 그거냐...'알아선 안될 것' “
“또 그거다, 정말 X 같지 아무튼 그 가설은 배제해도 좋아. 나와 아캄이 보증하지.”
릭의 말에 아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도대체 왜' 라는 질문을 떠올리기 시작하는 사고의 방향을 틀기 위해 무단한 노력을 해야 했다. 생각하지 마라 멍청한 뇌야.
릭이 말했다.
“이건 어때, 진짜로 우리를 꺼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 일'을 일으키지 않고 우리를 빼줄 방법을 안거지. 그래서 우리에게 정보를 확인하게 만드는 거고, 우리가 그 정보를 확인하자 마자 그대로 행동할 것 이라는 걸 확신한 경우라면?”
'그 일'(That happening) 이라는 표현이 좀 거슬렸지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 표현에 대해 생각하는 건 자폭이다.
다만 본능적으로 '그 일' 이 앞서 두 사람이 언급을 피한 '우리가 죽어선 안돼는 이유' 와 연관이 있을 것 이라는 짐작이 되었다. 문맥의 흐름 상, 언급하지 않은 사건에 관한 일 이라면 '어떤 사건(The happening)', 혹은 '무엇(Something)' 따위의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그 '행동'이란, 탈출하기 위한?”
“당연한거 아니냐. 일부러 그렇게 번거롭게 우리를 죽이려 들 사람이 있을까 원한을 산 기억은...x발 너무 많긴 하구만. 나는 용병 이었다고!”
릭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더니 담배를 꺼내 불을 당겼다. 아캄은 쥬스를 따라 나에게 건내주고 본인의 잔에도 따르며 말했다.
“근데 그럴 거라면, 저라면 그냥 여기로 찾아와서 걍 쏴 버릴거 같아요. 쿠알라 푸파에서 살인사건이 나든 누가 신경이나 쓸까요?”
“그렇겠지 일단 우리를 죽이려고 획책하고 있는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 번거롭다고.”
“나도 동감이야.”
릭은 도넛 모양의 연기를 뿜었다. 아, 신기하네.
“우리가 자료를 확보하고, 탈출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탈출을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자료를 확보했다 치자. 그걸 읽는 순간 '알아버리는' 거잖아 그럼 결국 죽는거 아냐?”
“다음 PI의 등장 까지는 생존할 수 있겠지. 일단 PI가 뜨거나, 문제 해결없이 루바섬을 빠져나가면 당일로 사망 하겠지만. 어느쪽이든 최소 하루의 시간은 있어. 그 사이에 해결하는 수 밖에 없겠지.”
“무슨 일인지 미리 알 수도 없고 계획도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알자 말자 바로 타임어택(Time attack 시간제한)이 시작되는 미션이냐 나 참.”
오렌지 쥬스가 전혀 달게 느껴지지 않았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지끈 울렸다.
“자료를 입수 하더라도 바로 열람해서는 안돼겠네. 다음날 일출 직후에 읽어야 조금이라도 많은 시간을 확보 할 수 있을테니.”
“그러게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이상...가만, 첫번째 전재인 'PI'의 정보에 대한 가설은 이걸로 끝 인가요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요?”
“...”
“...”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다. 나는 달리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난 없어.”
“나도.”
“...저도 그렇네요. 그럼 다음 가설로 넘어가보죠.”
“금품인가”
아캄이 말했다.
“예, 금고는 그렇게 초대형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린아이 키 정도 높이예요. 그 안에 금괴나 다이아몬드가 들어가 있을 가능성도 0 이라고는 할 수가 없죠. 현금이 있을 수도 있고. 그 사람은 구청장의 금고에 금품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지만 본인이 섬에 들어와서 훔치기에는 용의치 않다. 그래서 타지인인 장을 이 섬에 보내어 기회를 노리다가 접촉, 장이 금품을 훔쳐내는 데 성공한다. 작은 섬이니 만큼, 도둑질을 하고 섬 안에 남아있으면 금방 발각될 것이 뻔 하므로 당연히 장은 탈출을 시도 할 것이다. 탈출한 장을 제거하고 금품을 가로챈다. 어때요?”
“무슨 영화 스토리에 나오는 악당 같구만. 그런데 장이 어디로 도망칠 지 어떻게 알아서?”
“글쎄요 메르싱 한 복판에서, 커피마시고 있는 장에게 메세지를 전달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상륙한지 불과 2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어요. 장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지 않나요 유연치고는 이상해요.”
머리털이 곤두섰다. 그럼 나는 지금, 그년에게 감시 당하고 있단 말인가?
갑자기 주방의 공기가 무거워 졌다. 릭은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고. 아캄은 컵을 만지작 거리며 침묵했다.
창 밖에 부는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며 스르륵 거리는 소리를 낸다. 이름모를 풀벌래가 울고, 이름모를 새가 홰치며 날아 오르는 소리가 난다.
그 어딘가에, 나는 누군가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섬뜩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무섭잖아... 왜 꼭 나라고 단정을 하지? 내가 쪽지를 받아서 금고 안의 금품을 노리는 거라면 꼭 나를 감시할 필요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3가지 있어.
첫째, 네가 가장 최근에 이 섬에 들어온 사람이다. 접촉하고자 한다면 가장 쉬운 대상이지, 더군다나 넌 그 여자와의 접촉 이후 이 섬에 들어왔어.
둘째, 그년은 아캄이 아니라 네게 접촉했어. 메세지를 전하는 것 뿐이라면 꼭 네가 아니라 아캄에게 전하는 편이 더 수월했을거야. 아캄은 우리 중 가장 외부와 활발하게 왕래하는 사람이니까.
마지막으로, 아캄이 이 섬에 갖힌지 10년, 그리고 내가 갖힌지 2년동안 이런 일은 한번도 없었어. 아캄 말대로 우연치고는 좀, 많이 너무 공교로워.”
릭의 탁한 녹색 눈동자는 마치 나를 꿰뚫어 보기라도 할 것 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아캄은 가타부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요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깐, 잠깐만, 이 분위기는 뭐지 지금 날 의심하는 건가
나는 슬슬 차오르는 부아를 감추지 않고 두 사람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어이, 지금 니들 설마 나를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아냐 임마.”
“물론 아니에요. 다만 감시 받고 있는지에 대해선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릭이 말했다.
“그래, 네가 그년과 한패라면 목숨 내던지고 이 섬이 들어올 리가 없지, 그럴 목적이었다면 애초에 쿠알라 푸파 까지 올 필요도 없어. 구청장 집을 털고 나가면 끝이지. 넌 피해자 일 수 밖에 없는 입장이야. 의심하는거 아니니까 눈깔에 힘 빼.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고.”
“...좋아.”
나는 반쯤 일어났다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급격히 혈압이 오른 탓인지 이마가 뜨뜻하고 뒷골이 띵...했다.
릭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캄, 금품설 말인데...아니, 금품설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겠네. 정치적 자료, 마약 기타등등... 그런 가설에는 맹점이 하나 있는거 같아.”
“그게 뭐지요?”
“우리가 금고를 따 보고, 그걸 들고나온다는 보장이 없거든.”
“예?”
그러고 보니 그랬다. 도둑질을 할때, 금고를 통째로 들고 튈 생각을 하기 보다는, 비밀번호를 따고 그 속의 내용물을 꺼내오는 것이 정상적인 방법이다. 만약 누군가 우리를 조종해서 금고속의 내용물을 훔쳐내고 싶은 거라면. 그 계획은 허점이 너무나 많았다.
일단 금고문을 우리가 열어 본 시점에서, 고이 도로 닫고 나와버리면 그만 아닌가! 섬을 탈출할 필요도, 범죄를 저지를 필요도 없는 거다. 그리고 PI의 경우와 달리, 우리에겐 메리트가 없다. 어차피 이 섬에 묶여 있는 처지인데 백만장자가 되든, 남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든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아캄은 눈에 띄게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링스턴(릭은 별명이다). 그래도 그게 가장 현실적으로 가능성 있는 이야기 아닐까요? 섬 외부에 있는 누군가가 PI에 대해 알고 우리를 조종한다는 게 더 말이 안돼는 이야기 같은데...”
“PI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직접 목격하지 않으면 저주는 작용하지 않아. 애초에 아는 것 만으로 발동되는 저주였다면 대대로 구청장은 다 PI의 제물이 됐을거다.”
“그래도...그래도!”
“어이 아캄, 너 이상해 마치...”
릭은 조금 단어를 고르듯 말을 멈추었다가, 긴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그, 리따 때문에 그러냐?”
“...”
아캄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삼켰다. 언제나 웃는 청년, 속을 알수 없는 아이. 함께 지내 오면서도 어쩌면 단 한번도 나에게 진정한 속내를 보여 준 적이 없을지도 모르는 그의 포커페이스에 한가닥 균열이 달린다.
“......말이 안돼잖아요. 리따는 죽었어요.”
“시신은 직접 확인했나?”
“링스턴.”
“말 해봐, 직접 봤냐고.”
금이간다. 부서진다.
아캄의 얼굴은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죽지 않은 사람을 가지고 장례식을 치뤘단 말 인가요?”
“너네 장례 풍습에 대해서 난 잘 모르지만, 고인의 마지막 모습도, 문상객들에게 보이지 않냐?”
“...구청장 내외는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뭐, 그렇다 치자. 너무 열 내지 말라고. 리따 라는 가명을 쓴다고 해서, '그 리따' 가 살아있다는 보장도 없잖아. 당장 나라도 어디가서 '제 이름은 리따예요. 여자같죠 나도 ㅅㅂ X같은 건 아는데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라 어쩔수 없어요~ 징징징~ ' 할 수 있다고.”
“...풉!”
릭의 여자 흉내에 나는 그만 상황에 안 맞게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저 색히 뭔짓을 하는거야 겁나 심각한 상황에서.
릭은 어처구니 없어하는 아캄에게 씩 웃어보였고, 아캄은 기가 막히면서도 웃긴, 그런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리따에 대해 아는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사칭하고 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뭐 때문에요?”
“그건 내가 알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돌아온다. 아캄의 얼굴은 완전히 가면이 깨져 있었다. 평소처럼 햇님같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고하고 훨씬 그 나이에 어울리고, 좋아 보였다.
“너 때문이지. 너를 자극시켜서 움직이게 만들고 싶은거야. 실제로도 너는 그 이름이 언급되자 마치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아.”
“내가 하고 싶던 말이 바로 그거야, 아캄. 헤이, 장.”
릭은 내게 주먹을 내밀었다. 나는 그와 주먹을 맞 부딪히고는 말했다.
“중요한 건, 그게 누구든 무슨 의도이든, 우리는 금고에 접근해 볼 필요가 생겼다는 거야. 계획이 필요해.”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첫댓글 넘재밌어서 밤샜네...이따또봐야지
창문 열어서 춥게 하고 보니까 몸에 소름 돋고 더 무섭다 ㅠㅠㅠㅠ 넘 재밌다 진짜
똑또기들...애너그램은 어캐아냐구ㅜㅠㅠㅠ
오 pi 링에 나오는 저주비디오 같은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