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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성시대 파라다이스아일랜드
아캄이 읽어준 에피소드 내용은 대략 이랬다.
어느 부자가, 굉장히 비싼 다이아몬드를 오만가지 잠금장치와 함정이 있는 방에 가두었다. 루팡은 그 부자에게 범행 예고장을 보냈다. 부자는 루팡이 절대로 그 장치들을 뚫고 다이아몬드를 훔치지 못할 거라고 자신하고, 무도회를 열어 지인들에게 자신의 보안 장치와 부를 과시했다.
그리고 루팡은 이번에야 말로 실패하리라 장담했다. 그때, 잠시 정전으로 연회장의 모든 불이 꺼지고, 잠깐의 소란스러움이 있었던 후, 연회장 저 멀리 루팡이 나타났다.
루팡은 부자에게 다이아몬드는 잘 가져가겠다 하고 말하고 담을 넘어 사라졌다.
당황한 부자는 즉시 방으로 뛰어들어, 모든 잠금장치를 해제 했다.
그리고 부자는 당황했다. 다이아몬드는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당황한 부자가 미쳐 대응하기도 전에, 방에 나타난 루팡은 부자를 포박하고, 다이아몬드를 훔쳐 유유히 사라졌다~ 뭐 그런 이야기.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릭이 말했다.
"그러니까, 구청장에게, 이미 금고의 내용물을 훔쳐냈다고 뻥을 쳤고, 녀석이 금고를 열 때 그 내용물을 가로채자? 좋긴 한데, 결국 마지막엔 무력시위 잖아?
내가 처음에 제안한 후드려까기랑 뭐가 달라?"
그는 자기 아이디어가 묵살 당했다는 사실이 다소 불만족스러워 보였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인간병기인 주제에 은근 애같은 구석이 있다 이놈.
"다르죠~! 협박과 구타로 입을 열게 만들어도, 구청장 입장에선 사람들이 달려 올 때 까지만 입을 다물고 있음 되니까, 의외로 저항할 지도 몰라요.
그리고 사람들이 와 버리면 진짜 게임 끝이죠. 하지만 이 방법은, 어쨌던 그가 문만 따면 그 다음부턴 어떻게 하든 자유죠.
뒤에서 다가가 얼굴에 자루를 씌우든 해서 공격한 사람이 누군지만 모르게 하면 알게 뭐예요."
"...끄응..."
릭은 납득할수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토닥였다.
"야, 인정해라 릭. 이건 아캄이 맞다."
"...쳇, 알았어. 그럼 실행은 언제. 내일?"
"음~ 뻥을 치더라도 믿을 수 있는 상황에서 뻥을 치는게 신뢰도가 높아지겠죠? 뻥카 라는게 눈에 보이는 뻥카는 포커에서 먹히지 않아요~"
"믿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어쨌던 구청장이 금고에서 멀어져 있던 순간에 일이 일어난 것 처럼 꾸며야 겠군."
"그렇죠~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냐는 건데요."
나와 아캄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릭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거라면 좋은 날짜가 있다. 내일 모레, 서쪽 리조트에서 신년맞이 파티가 있어. 구청장 내외는 초청받았지. 리조트 관리인이 한 말이니 신뢰할 수 있어.
나도 초대 받았지만 대답은 아직 하지 않았지. 등대지기 일도 있어서 참가하긴 힘들겠지만, 만에하나...해서."
"구청장은 따로 가택경비를 두지 않아요, 서쪽 사람들은 그날 구청장 집으로 오지 않을거고~그럼 동쪽 사람들만 묶어 놓으면 구청장의 집을 텅 비게 만들 수 있는 거군요.
"그날이군, 그날 밖에 없어."
"구체적인 방법은?"
"일단, 여섯시면 해가 지기 시작할 테니, 파티가 시작될 시점엔 한명은 반드시 등대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제 생각에 그건 장이 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관계 없지만, 왜지?"
"우선, 우리 중에 대인격투에 가장 능한게 릭 이니까, 구청장의 집에 가야 하는건 릭 이라고 봐요. 우선 릭은 신년파티에 참석해 주세요.
거기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구청장이 거기에 나타나면 슬쩍 빠져서 구청장의 집으로 가서 몰래 숨어있는 거예요."
"너는?"
"저는 무언가 구실을 만들어서 그날 동쪽 주민들과 술판을 벌이겠습니다.
그러다가 파티가 절정에 이르렀을 시간쯤 되면 슬그머니 빠져나가 리조트 쪽으로 가서 구청장에게 편지를 건내 줄 거예요."
"편지?"
아캄은 씩 웃었다.
"돌맹이에 싼 편지요. 그걸 구청장에게 던질겁니다. 이래뵈도, 제 돌팔매는 10미터 안에서는 거의 빗나가지 않아요!"
"미묘하게 쓸모없는 재능이구나..."
"으흠! 어쨌든, 꼭 구청장을 맞출 필요는 없죠. 요는 그의 주의만 끌면 되니까요. 돌이 떨어지면 사람들의 주의가 쏠릴 꺼고, 누군가 그 쪽지를 발견해 읽을 겁니다.
거기엔 구청장만 아는 말이 적혀 있을 예정이죠. '네 도서실의 보물은 잘 가져갔다. 괴도 KID' 어때요?"
루팡 아니었냐? 원작자에게 사과해!
속으로 그런 딴죽을 걸고 있느라 잠시 말을 못하는 사이에 릭은 계속해서 아캄을 추궁했다. 어지간히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다...
"잠깐만, 팔매질을 하는 거라면, 꼭 네가 안해도 되잖아. 장이 해도 되는 거 아냐?"
"어휴~ 거사 직전까지 동쪽 사람들의 시선을 묶어 놔야 하잖아요~ 마을 사람들과 더 친밀한게 접니까 장 입니까? 무슨 일이 생겨도 제가 더 유리하죠~"
아캄은 쯧쯧쯧 하고 아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릭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까딱거렸고, 릭은 얼굴이 완전 벌겋게 달아올랐다.
와아...현실에서 저런 만화같은 제스쳐 하는 인간이 진짜 있구나...가 아니라. 놔 뒀다간 또 싸우겠네.
나는 릭이 말하기 전에 얼른 치고 들어갔다.
"일리있네. 그래서 그 다음은?"
릭의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묵살하고, 나는 다음을 물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구청장은 집에 돌아갈 겁니다. 하지만 도둑맞은 물건이 물건인 만큼, 그리고 외지인들이 대부분인 서부 리조트의 연회장에서 추태를 보일 수는 없기에,
조용히 빠져나가겠죠. 아무도 데려가지 않고요. 아마 아내도 말이죠. 아내를 데려가려고 하면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데,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려고 들진 않을거예요.
한시가 급할 테니까. 물론,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그 시점부터 저는 구청장의 뒤를 밟겠습니다.
만약 그의 와이프가 따라가면 릭 혼자서 제압하기는 힘이 들테니, 제가 중요한 시점에서 백업 하도록 하죠.
"흠흠"
"집에 도착한 구청장은 놀라겠죠? 집의 문도 열려있고, 서재의 문도 열려 있으니까요, 심장이 쫄깃 할 겁니다. 서재 안에는 작은 벽장이 있는데,
릭은 그 안에 자루를 가지고 숨어 있도록 하세요."
"그리고?"
"예정대로 구청장 혼자 들어오면, 그는 금고를 열어볼 겁니다. 금고가 다 열리는 건 벽장의 틈새나, 소리로 확인 할 수 있을 거예요. 문이 열리면
그는 내용물이 무사함을 확인하고, 안도와 의아함에 잠시 긴장을 풀겠죠? 그때 뛰쳐나가서..."
아캄은 목을 손으로 긋는 시늉을 했다. 잠깐만! 죽이면 안돼잖아 죽이면!
"얼굴에 자루를 덮어 씌우고, 기절 시키세요. 방법은 알아서 하시고... 만약을 대비해서 릭도 복면을 쓰는 게 좋겠네요.
음... 노출된 팔다리에 구두약도 칠하는게 좋을 거 같아요. 백인의 피부는 너무 티나니까. 그렇다고 이 날씨에 긴팔을 입어도 역으로 의심 받을거고... 진흙같은게 떨어져도 곤란하니까요."
아캄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플랜 B 입니다. 아내와 같이 귀가한 경우, 저는 그들이 집에 들어간 걸 확인하고 밖에서 두건을 쓴 채 숨어서 대기하다가, 안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려오면 돌입할게요. 릭이 구청장을 기절시키는 광경을 보고 패닉에 빠진 아내를 제가 뒤에서 다가가서..."
아캄은 또다시 목을 손으로 그엇다. 그러니까 죽이지 말라고! 그는 사악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후후후...한번쯤은 해보고 싶었어요. 스티븐 시걸 처럼, 배후에서 다가가 목뼈를 우두둑!"
"하지마! " 하지마!"
모처럼 오랫만에, 나와 릭의 마음이 하나가 된 순간 이었다.
"에이~ 농담이예요 농담, 너무하시네~ 저를 뭘로 보시는 거예요?"
아캄은 웃으며 얼버무렸고, 나랑 릭은 약속이나 한 듯이 퀭~ 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암만 생각해도, 이놈이 제일 위험한 놈이다. 왠지 모르게 특유의 햇님미소를 지으며 구청장 와이프의 목뼈를 비틀어 재껴버린 후,
시신 옆에 서서 우후후후~ 하고 밝고 명랑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뇌내속에 영상지원되고 있었다.
릭도 나와 비슷한 상상을 한 듯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뭡니까, 그 표정은. 기분나쁘네~"
"됐으니까 빨리, 다음 이야기 해봐."
그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고, 릭은 어이없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캄은 예이예이~ 하면서 말을 이었다.
"음...그 다음, 우리는 아침이 올 때 까지 루바섬에 숨어 있어야 해요. 바다를 볼 수 없는 위치로 가야겠죠. 섬 중앙부 산속에 탠트라도 하나 준비해 두는게 좋을 것 같아요."
...위험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이 '바다를 보면 안돼는 이유를 ' 생각할 뻔 했고, 그걸 생각한다는 자각이 들자말자 왼손으로 내 머리를 후려쳤다.
생각하지마, 멍청아.
그런 나를 보며 아캄과 릭은 시선을 마주치고는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이건 아직 장은 '모르는' 거니까요."
"잘 했다. 정보를 읽을땐 또 모르겠지만, 그 전까진 굳이 위험도를 늘리지 마."
"...어, 진짜. 잡생각이 많아서 탈이야."
나는 욱신거리를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너무 세게 때렸어. 젠장.
"그래서, 그 다음은?"
"해가 떠오르면 안전하니까요. 우리는 나루터로 이동해서 쿠알라 푸파로 돌아오겠습니다. 장 에겐 미안하지만 그날은 혼자 밤샘근무 해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너희들도 고생하잖냐. 난 가만히 등대만 지키면 되니까, 오히려 제일 편할 수도 있지."
"크~ 멋있어. 장은 대인배 였군요! 내 마음속의 장의 주가가 수직상승 하고 있어요! 릭은 뭐 하나 몰라 이런거 안 배우고."
"뒤진다?"
아캄은 엄지를 치켜새우며 릭에게 국지도발을 시전했고, 릭은 한마리 월척처럼 낚여 푸덕거렸다. 나는 기이이이잎~은 한숨을 내쉬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려왔다.이 놈들은, 조금만 방심하면 이렇게 만담을 시작한다. 스탠딩 코미디 쇼에 출현이라도 시켜야 할 것 같다. 바보와 딴죽 역활도 확실하고.
천직이군, 천직이야.
"자자자자, 바보짓은 거기까지 하고. 너희들은 어떻게 좀 진지해 질 줄을 모르냐? 응?"
"쳇"
"쳇"
약속이나 한 듯이 혀를 차는 두 사람. 이쯤 되면 경이로울 정도다.
아캄은 불만스러운 듯이 입을 열었다.
"일단 합류 한 다음, 그날은 푹 쉽니다. 다들 밤샘으로 지쳐 있으니, 뭔가 활동하긴 좋은 날이 아닐 거예요. 당일날은 푹 쉬어 체력을 회복하고.
하루밤을 그날 밤을 보낸후, 그 다음날 아침, 쌩쌩한 상태에서 거사를 도모하죠."
"그 동안, 경찰의 손길이 다가올 확률은?"
"...낮아요. 심증은 있어도 물증은 없을걸요. 혹시 수색이 들어온다고 해도 우리가 사전에 숨겨버리면 발견하기 힘들 뿐 더러, 그 물건이 우리가 생각하는 PI의 정보가 맞다면 구청장은 경찰을 부르지 못할 겁니다. 생각해 봐요. PI의 정보가 담긴 서류를, 증거자료랍 시고 경찰들이 열람해 버리면?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짓이죠."
"그렇다고 해도 너무 상황을 낙관하는 건 옳지않아. 그토록 중요한 자료라면 코너에 몰린 구청장이 돌발행위를 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해."
"그야 그렇겠죠... 그래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아캄의 눈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는 앞으로 손바닥을 아래로 가게 내밀고,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승리할 겁니다."
나는 아캄의 눈을 보고, 릭의 눈을 바라보았다. 릭은 갑작스레 돌변한 아캄의 태도에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피식피식 웃으며 아캄의 손 위로 손을 포겠다.
이런 상황에서 으레 그렇게 했듯이. 그는 선창했다.
"승리를 위해."
나 역시도 웃음이 나왔다. 뭔가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나도 그들의 손 위로 손을 포개며 선창했다.
"탈출을 위해."
"YEA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
아캄은, 햇님같은 웃음을 뿌리며,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지나. 금고탈취 계획 시행 당일.
릭과 아캄은 계획대로 점심부터 섬을 떠났고, 나는 완전 밤샘을 위해 온종일 억지로 잠을 청하며 침대위를 굴러다녔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어서 혼자 밥을 차려 먹는데, 두 사람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그 자식들, 잘 하고 있으려나."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말 할 필요도 없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말을 입 밖으로 흘리고 있었다. 나 혼자밖에 없는
섬은 너무나도 조용해서, 마치 세상 끝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방에 내려앉은 정적 탓인지, 나는 극도로 주변의 소리에 예민해 져 있었다. 스스스스스~ 하고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이따금 들려오는 풀벌래와 새들의 소리, 철썩, 철썩, 하고, 파도가 바위를 때리는 소리. 삐걱삐걱, 내가 움직일 때 마다 마루에서 울리는
소리 까지도, 평소보다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아캄은, 릭이 나타나기 전에 혼자 이런 생활을 해왔다는 말일까?
나는 아캄의 구김살 없이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속이 검은 녀석이라고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속이 검음은 말할 수 없는 고독과 고통을 오랜시간
홀로 이겨내 오며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방패 같은게 아니었을까.
누구에게도 말 할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모두로부터 미움 받은체 격리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와'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했던 시간들.
10년의 세월동안, 그 지도의 표식의 주인들이 아캄의 곁에 다가왔고.또 사라져 갔다.
우리처럼 함께 의기 투합해서 생존하려고 애쓴 사람들만 있었을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용병으로서 문자 그대로 산전 수전 겪어온 릭의 멘탈은 말할 것도 없고, 나 역시 험한 바닷일을 해 온 사람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뭣 하지만
여기서 미치지 않고, 죽지 않고 지금까지 버텨온 것만 해도 나 스스로의 멘탈이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그 타개책을 강구하기 보다는 현실을 도피하는 경향이 더 많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하거나 불평하다가 속절없이 죽어갔으리라.
그리고 아캄은 그런 이들의 죽음을 곁에서 하나도 남김 없이 목격해야만 했겠지.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릭의 침대를 보니,담배갑이 있기에 한대 꺼내 물었다. 실내에서 담배 핀다고 욕할 자격이 없구나 나도.
매케한 연기가 폐부 깊이 들어오자, 나는 큰 한숨과 함께 뱉어내었다.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그날, 릭은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었다.
18살 어린 나이에, 용병일을 시작했다는 그, 세계 곳곳을 돌며 온갖 아비규환의 전장을 보고, 동료들을 잃고, 적들을 죽여가며 살아온 사나이.
그런 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무엇보다도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알지 못하는 사람의 흉계에 빠져, 목숨같은 전우들을 잃고,
알지 못하는 땅에 갖혀, 가족에게 돌아가지도 못한 체
알지 못하는 '무언가'와 싸우며 악착같이 살아남았던 그가,
가장 소중한 존재로 부터 버림받았을때의 그 절망감은 어느 정도였을 까?
"...이대로 끝내기는 너무 억울하잖냐..."
힘내라 아캄, 릭, 이제 몇일 후면. 이 지옥을 벗어날 수가 있다.
설령 실패해서 죽는다 해도.
셋이 같이 간다면, 저승길도 외롭지 않겠지.
바람이 강하게 불 수록 별은 빛나고, 시궁창에도 꽃은 핀다.
어떠한 절망 속애서도, 희망은 스스로를 구하는 자를 구한다.
믿는다. 힘내라, 형제들아.
나는 그들의 성공을 간절히 기원했다.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나는 평소처럼 등대탑에 출근해서, 아캄이 하던데로 라이트를 켜고, 3층에 올라갔다.
그날은 완전 밤샘을 대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다.
한밤중에 배고플 때를 대비해 먹을 간단한 야식, 졸음을 쫓기 위해 캔커피와 껌. 마실 물도 챙겼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걸 대비해 읽을 책 이라도 챙겨갈 까 생각했지만,
한순간이라도 바다에서 눈을 땠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으므로 그냥 포기했다.
심심타파에 목숨 걸 수는 없지.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 까지의 12시간, 다행스럽게도 아무 일도 없었다,
바다는 잔잔했고, 달빛은 부드러운 실크처럼 물결을 따라 해안으로 밀려들었다. 별은 총총히 빛나고, 세상은 고요했다.
그 평화로운 적막 속에서, 나는 오로지 두 사람의 걱정만을 했다.
지금쯤 파티가 열렸을까, 릭은 잘 하고 있으려나. 아캄은 동쪽 사람들을 어떻게 모을 생각 인 걸까,구청장을 잘 제압할 수 있을 까,
오늘따라 집에 가택경비가 있으면 어쩌지? 함정은? 릭 한테 토카레프라도 들고 가라고 할 걸 그랬나? 아캄은 돌맹이를 잘 던질 수 있을 까?
두사람이 섬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해변에서 PI를 목격해 버리면 어쩌지?
오만가지 걱정이 사고를 어지럽게 흩어놓은 덕에, 예상과는 달리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조할 정도였다. 시계바늘이 어찌나 더디게 가는지, 조바심에 시계를 몇번이고 쳐다봐야만 했다.
그러나, 닭모가질 비틀어도 꼬박꼬박 아침은 온다고 했던가.
어느덧, 밝아오기 시작하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나는 서서히 온 몸의 긴장을 풀었다.
또 하룻밤이 지났다. 이제 잠시후면 결과를 알 수 있겠지.
나는 등대를 내려갔다. 그리고 포구에 나가서, 릭과 아캄의 귀환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실패한 건가? 계획은 어떻게 된 거지? 경찰에 붙잡힌 건가? 왜 안 돌아오는 거지? 설마, 도주?
나는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을 털어내려고 애썼다. 그들을 믿어야 한다! 그들이 절대로 나를 배신할 리가 없지 않나!
뭔가 잘못된게 틀림없다. 그래서 귀환을 못하고 있는거야!
나는 아침을 먹는것도 잊고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포구를 어슬렁거렸다.
두번, 세번 계획의 허점을 생각해 보았다. 만약 실패한다면, 어디서 걸린걸까? 구청장 제압 실패? 아님 예상외로, 구청장 집에 사람들이 있었어?
아캄이 돌을 던지고 튀다가 잡혀서 계획이 발각됐나? 돌아오다가 PI랑 만났나? 함정에 걸렸나? 제길! 대체 뭐야!
그러던 그때, 답답한 마음에 망원경으로 루바섬 나루터에 릭과 아캄이 나타나기만 오매불망 바라보던 내 눈에 이상한 장면이 보였다.
한무리의 사람들이, 루바섬 북쪽 나루터로 이어지는 샛길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덤불속에 몸을 숨겼다. 뭐지? 저들은?
나는 주의깊게 그들의 동태를 살폈다.
그들은 섬의 경찰과 새파란 얼굴의 구청장, 그리고 몇몇의 동쪽 어민들 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평소 왕래하는 루바섬 나룻터까지 와서는 아캄의 트럭이 제자리에 있는 걸 보고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걸로 보였다.
성공했구나!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서 확신했다. 릭과 아캄은 계획을 성공시켰고, 그들은 릭과 아캄을 추적하러 온 것 이리라.
그렇다면 그들의 귀환이 늦어지는 것도 이해할 만 했다. 그들은 섬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기회를 노리고 있겠지.
이런 일이 생기려나 해서, 아캄은 어제 배를 루바의 나루터에 대지 않고 본인만 아는 비밀 장소에 정박 시킬 예정이라고 했다.
트럭또한 손 대지 않고 그 자리에 놔 둔 것은 우리에게 알리바이를 주기 위한 일종의 미끼였다.
그들은 바다건너 이쪽을 바라보긴 했지만, 망원경도 없어서 모터보트로 15분 거리에 있는 이곳의 나루터에 배사 있는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어보였다.
나는 우선은 안심하고서, 조용히 자리를 떠 숙소로 향했다.
일단은 믿고 기다리자. 어쩌면 저들이 해안선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귀환은 더 늦어질 지도 모르지.
그래도 믿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나는 하루 더 철야할 것을 각오하고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 숙소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결론부터 말 하면, 릭과 아캄은 오후 늦게가 되어서야 간신히 귀환했다.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그 둘은 시끌벅쩍한 소리로 들어와 나를 깨웠고, 나는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밤새 고생하고 제대로 된 식사도 못했을 그들을 위해 나는 진한 커피와 토스트, 그리고 인스턴트 야채수프를 준비해
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개걸스레 먹어치우며 지난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무용담을 풀어놓았다.
"후하~! 심장 쫄깃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내 말이, 완전 미션 임파시블 찍었다. 난 내가 톰 크루즈라도 된 줄 알았어."
파티장에 예상 외로 구청장이 너무 늦게 나타나 초조했던 일, 파티장이 하필이면 바닷가라서 정말 칼날위를 걷는 심정으로 PI가 나타나지 않기만을 속으로 빌고 또 밀었던 일.
동부 술판에서는 분위기가 너무 달아올라서 빠져나오기 힘이 들었던 일, 구청장이 나타났을 줄 알고 아캄이 리조트에 갔을 때 구청장이 없어서 당황한 일,
계획은 실패인가 하고 조마조마해 하고 있는데 그제서야 구청장이 아내와 함께 나타난 일.
나타나자 말자 바로 에헤라디야 감도 들었따~! 하고 할 수도 없는 일이라 이를 갈며 한두시간 동안 더 숨어서 기다리던 일.
릭이 그 사이에 구청장 집으로 가다가, 뒤늦게 출석하러 오는 백인을 만나 마주칠 뻔 하고 수풀 속에 숨은 일.
그 동안의 원한을 담아 던진 돌맹이가 정확히 구청장의 마빡을 맞춘 일, 통쾌해 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몰려와 X 빠지게 도망간 일.
구청장의 서재 안 벽장이 너무 작아서 몸을 꾸부리고 기다리느라 허리가 곱아버리는 줄 알았던 일, 구청장이 너무 늦어서 아캄이 실패한 것 아닌가 싶어 조마조마 했던 일,
이윽고 구청장이 나타나 자물쇠를 따자 계획이 착착 맞아 떨어진다면서 속으로 환호했던 일.
구청장이 금고문을 열고 '뭐야?' 하자 말자 튀어나가 얼굴에 검정 자루 씌우고 *리어 네이키드 쵸크(Rear naked choke) 로 기절 시킨일.
기절시킨 구청장을 의자에 밧줄로 묶고 입에 수건을 물리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들어온 아캄에게 놀라 죽빵을 날릴 뻔 한 일.
죽빵 맞는 줄 알고 깜짝 놀란 일(이 만담콤비 어디가나 했다)
그리곤 둘이서 얼른 미리 설치해 놓은 탠트로 달아난 일. 추적자가 있을까봐 주변을 경계하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일,
아침이 되자 동네가 시끌시끌해 지더니 추적자 들이 나타나서 숲속을 이리저리 돌며 그들을 피한 일.
귀환하려고 보니 해안선을 따라 듬성듬성 감시의 눈이 있어서 그들을 피해 시간을 보낸 일.
결국 식사시간 쯤 되서 감시의 눈이 뜸해진 틈을 타 멀리 우회하여 눈에 띄지 않게 여기로 돌아온 일.
내가 이렇게 축약해서 말하면 한달 내에는 이야기를 끝맺을 수 없고, 레스도 1000개 넘어 스레가 폭파될 지경으로 장황한 묘사와 과장된 표현으로, 아캄은 침을 튀겨가며 이야기 했다. 평소라면 앵간히 하라고 갈궈 줬을 텐데. 그날 만큼은 웃으며 받아줬다. 그래 수고했다.
"링스턴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도망치는 법에 대해서 빠싹하더라구요. 추적을 피하는 방법에도 정통하고...
해안에 도착해서 무작정 배로 달리려고 했을 때 링스턴이 발자국을 발견해서 나를 막고는 숨었을 때, 잠시후 눈 앞으로 지나가는 추적자를 보고 완전 소름, 개소름!!
링스턴 진짜 대박 짱 멋있었어요. 반할 거 같애."
"아캄이 섬의 지형을 속속들이 꿰고 있어서 가능한 일 이었지. 별거 아냐. 그 보다 달라붙지 마라. 장난이 진심이 되는 순간 죽인다?"
"그래그래, 둘 다 수고했어. 그나저나 이제 슬슬 보여주지 그래? 성과는 어땠어?"
내 말에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치더니 씨익 웃었다.
"그야 물론..."
"수확이 있었지."
그들은 탕 하고, 식탁위에 책가방 하나를 올려놓았다. 금고의 내용물을 담아오기 위해 가져갔던 가방이었다.
"내용물은 아직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엄충하게 보관하는 종이뭉치라면 PI가 확실하겠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일단은 오늘은 자고, 내일 아침에 해 뜨자말자 바로 확인해 보자고."
"찬성이야. 두사람! 정말 고생 많았어. 난 성공하리라 믿었다."
우리 셋은 환하게 웃었다.
내 말에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치더니 씨익 웃었다.
그날 하루는 정말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침실에 들어온 두 사람은 긴장이 풀렸는지 금방 코를 골며 잠에 들었다, 나 또한 다시 잠을 청했지만 내일 아침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하는 마음에 도저히 잠이 안왔다.
PI의 진실이 위험하다는 사실만 몰랐다면 나는 진작에 내용물을 확인해 봤을 것이다.나는 괜히 일어나서 섬 어귀를 기웃거리며 루바섬의 동태를 살폈지만, 수상한 낌새는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저녁이 되고, 밤이 찾아왔다. PI는 나타나지 않았고, 우리는 마지막 등대지기 일을 아무 일 없이 마쳤다.
그리고 마침내 아침이 찾아와 황금빛 해오름이 등대를 물들일 때,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등대탑의 1층에 모였다.
"자, 이제..."
"응"
"진실을 확인할...시간이군요..."
첫댓글 아캄은 J였냐구
졸라 재밌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