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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파라다이스아일랜드
이야기에는 온도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기도 하고,
등골을 오싹하게 식히기도 한다.
아캄이 건조한 어조로 들려주는 동화는, 동화라고 하기엔 너무나 잔혹했다.
동화같은 수사법 속에, 너무나도 추악하고 공포스런 진실이 숨어있었다.
나는 구토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릭은 착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음, 그러니까, 내가, 느낀걸 말해보면. 뭐야, 식인, 인신공양, 미성년자 강간, 사자능욕, 악마숭배, 뭐 그런 전설이야?"
"...그런거 같아요."
"SHUT! THE! FUCK UP!!!!!!!!!!!!!!!!!!!"
콰앙!!
릭은 무기함를 군홧발로 걷어찼다. 아캄은 모든 힘을 다 써버린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나는 도무지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DAMM IT! DAMM IT!DAMM IT!DAMM IT!DAMM IT!DAMM IT!DAMM IT!DAMM IT!DAMM IT!!!!"
콰앙!콰앙!콰앙!콰앙!콰앙!
릭은 계속해서 무기함을 박살낼 기세로 걷어찼고, 나는 말리고 싶지 않았다.
아캄의 이야기는, 내 마음은 싸늘히 식혔고, 릭의 마음은 격렬히 타오르게 만들었다.
이 아름다운 섬에 숨어있는 진실이, 이렇게 추악하고 무서운 것 이었다니.
어지러웠다.
우리가 진정하는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동안 무기고는 완전히 다 찌그러진 깡통이 되어버렸고. 아캄은 식물처럼 무기력한 동작으로 우물우물 음식들을 씹어 삼켰다. 먹고싶어서 먹는게 아니라 살기위해 먹는 듯한 식사였다.
나는 그 동안 필사적으로 머리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원래 동화라고 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것 이외에 숨겨진 진짜 의미가 있는게 보통이다.
과거 유행하던 인터넷의 '잔혹한 동화' 라는 내용을 보면, 어떻게 이게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 인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 들이 얼마든지 있다.
나는 쉬는 동안, '엄마님'의 이야기 속에서 단서를 발견해 보려 애썼다.
1.우선, PI의 정체는 '따님' 이다. 엄마를 찾기 위해 쿠알파 푸파를 향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2.'악마님'은 초월적인 무언가다. 문자 그대로 악마일 수도 있고, 망령, 혹은 그냥 옛날 사람들이 가뭄, 해일, 천둥같은 자연현상을 두려워하여 신격을 부여한 상상속의 존재 일 수도 있다. 현대 문학에서는 신화를 그렇게 정의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나왔던 정보를 가지고 맞춰 보자면,
빈어(貧魚: 바다에 물고기가 없음)를 두려워한 과거의 말레이 원주민들이 그것을 인격을 지닌 신으로 형상화 하고 제물을 바쳐 풍요를 기원했다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말이 되게 끼워 맞춰보려고 해도, 애초에 이 섬에서 일어나는 일 전부가 넌센스 이긴 하지만.
3. 따님은 '자신에 대해 알고, 자신을 바라보는, 머리좋은 남자와 힘센 남자, 용기있는 남자'를 찾아 '엄마'를 돌려받으려 한다.
4. 따님의 무기는 안개다
5. 따님은 머리좋은 남자와 힘센 남자, 용기있는 남자에게 움직이는 모습을 들켜선 안됀다. 즉, 우리가 시야에 그녀를 두고 있는 동안엔 움직일 수 없다.
6. 우리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모두 잠들어, 루바섬과 쿠알라 푸파 전체에 '그녀를 알고 그녀를 보는 머리좋은 남자와 힘센 남자, 용기있는 남자가' 한명도 없어지면. 루바섬의 모든 주민이 그녀의 먹이가 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문득 계획 결성 당시 아캄과 릭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게 정말 PI의 정보라면, 그걸 확인하고 나면 우리는 높은 확률로 '어디에도 없어'지겠지. 놈은 우리를 죽이고 싶은 건가?’
‘절대(Never)’
‘말도 안돼요.’
릭과 아캄이 완벽한 이중창으로 대답했다. 그들은 시선을 마주쳤다가, 내가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빠르게 대답했다.
‘그녀가 정말 PI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를 죽게 하려 두지는 않을 거예요. 왜냐면...’
‘멈춰 아캄, 장은 그 정도로도 '알아버릴' 지 몰라.’ –
...아, 이 둘은 그 시점에도 알고 있었구나. 그녀를 보는 자가 없어지면 안된다는 사실을. 그 이유까지 알았을 리는 없겠지만 말야.
나는 세삼스레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을 다스리느라 여념 없었고, 나는 섬뜩함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도 생각에 집중했다.
7. 가장 중요한, 게임을 멈출 수 있는 정보.
악마의 게임은, 따님이 엄마님을 찾으면 끝이난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룰 이지만.
'고기' 인 인간은, '따님'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머리좋은 남자, 용기 있는 남자, 힘센 남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따님에 대해 '정확히 알면 알 수록' 딸의 '정확한 표적이 된다.' 딸은 그에게서 엄마를 돌려받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알면 알수록 위험해 지는 게임. 마치, 하나의 출구를 뚫어놓은 미로의 출구로 가는 길은 칼날과 송곳으로 둘러 싸고, 편안한 길로 가면 괴물에게 잡혀먹히게 고안해 놓은 미로와 같다.
공포와 싸우고, 고통을 이겨가며 출구를 향해 직진할 수 밖에 없는 게임.
문제는! 모르는 인간은 그렇게 할 리가 없고! 아는 인간은! 아는 만큼 살 확률이 낮아진다는 거다!
에라28!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RPG의 용사가 마왕을 물리치러 가는데, 마왕의 성에 다가갈수록 LV이 다운되는 구조를 가진 게임인 셈이다! 어떻게 이기냐고! 사기잖아!
"...악마들은 절대 이길수 없는 내기를, 상대가 이길수 있는 것 같은 희망을 주고 거기에 빠트린 다음, 인간이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고 즐긴다던데..."
이 이야기의 악마는 진짜 대단한 놈이다.
물고기를 대가로, 섬의 촌장을 낚아서 그들에게 산제물을 바치게 만들어 산제물의 절망을 즐기고,
따님과의 내기를 통해서, 따님을 이 섬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영원히 이 섬에 묶어두고, 엄마를 찾기위해 발버퉁 치는 모습을 보고 즐긴다.
그리고, 그 따님에게 쫓기며 살기위해 공포에 질려 울부짓는 희생자의 공포를 즐긴다.
...그리고 이 섬은 자기가 만든 놀이터라는 그 말에 의하면, 맨 처음, 식량이 부족한 이 섬으로 밀어넣은 것도, 그놈의 소행이 아닐까?
눈이 몇개나 달린 놈이냐.
비극을 디자인 하는 능력을 놓고 본다면, 정말...악마같은 솜씨다.
"악마는 악마로구만..."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식어버린 내 몫의 식사를 비웠다.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릭이 진정했다. 그는 터덜터덜 걸어와서 탁자에 거칠게 주저앉았다.
"...휴우, 그래. 크흠. 계속해 보자.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충, 이 X같은 현상과 비슷하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이 이야기를 신뢰할 수 있을까? 잘 만들어진 개 X같은 이야기라도 ,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잖아. 다른 근거는 없어?"
"...이야기는 이야기, 진실은 진실 이겠지만. 애석하게도, 그 이야기 이외에 다른 이 상황에 들어맞는 설명은 없었어요. 나머지 자료들은 PI에 대한 정보와, 그 정보를 알게되었을 때 해금되는 PI의 공격패턴들 이었습니다. 무수하게 많더군요. 우리의 상상 그 이상으로요. 아마 저는 오늘밤을 넘기지 못할 겁니다."
"뭐?"
릭의 반문에 아캄은 히, 하고 웃었다. 힘은 없어 보였지만, 눈빛속에서 그 특유의 장난기는 되살아 나고 있었다.
"뭐, 알고 있던거 아닙니까? 원래 히어로는 온갖 역경을 딛고 극복하는 거잖아요."
"...멍충이, 긍정적인 것도 정도가 있지."
"후후후후, 위기의 순간에서 보란듯이 살아돌아온다! 그것이 바로 헐리웃 영화의 필승공식!"
"너는 장르가 틀렸어, 넌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코미디 영화배우감으로 딱이다 딱이야."
아캄의 농담에, 나와 릭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우리의 얼굴을 보고 히히히 웃은 아캄은. 다시 한번 짝 하고 박수를 쳤다.
"자! 반격의 시간입니다! 한번 멋진 작품을 만들어 보자고요!"
반격작전을 짜기에 앞서서, 나는 두사람이 멘붕하고 있는 동안 나 나름대로 분석한 게임의 법칙에 대해 두사람에게 설명했다.
아캄과 릭은 때로는 고개를 끄덕여 가며, 때로는 눈쌀을 찌푸려 가며 내 말을 경청했고, 내 설명이 끝나자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는 듯 했다.
아캄이 말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건, '엄마님'을 찾는 거네요.'
"이 섬 어딘가에 있다는 거잖아. 살아있는 인간이 이 섬에 숨어있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설사 진짜 살아서 이 섬에 있었다고 할 지라도 이미 늙어죽어 뼈도 안남았을거다.
그렇다고 백골을 찾자고? 아무리 작은 섬이라지만 미친짓이야. 섬 전체를 갈아엎을 시간도 없을 뿐 더러, 얼마나 깊히 묻혀있는지 어떻게 알아서?
애초에, 어디까지나 동화가 사실이라는 가정에서 말해 보자면. 악마는 순전히 '따님'을 엿먹이는게 목적인 거잖아.
놈은 전지적 시점에 서서 인간을 조롱하고 있어. 따님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엄마님'을 찾지 못할거라는 걸 알고 헛된 노력을 비웃고 있는거지."
시간은 어느덧 오후 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릭은 거칠게 내뱉었고, 아캄은 웅...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동화속에 힌트가 있을 지도 몰라."
"예를 들면?"
"...예를 들어, 봐봐. '있잖니, 저 섬에 네 엄마가 있단다.' 랑 '그럼~ 난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단다.' 이 부분,"
"? 그게 뭐길래?"
릭은 뭔소리야? 하는 표정을 지었고, 아캄도 이해할 수 없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말했다.
"섬에 엄마가 '있다고' 했잖아. 그리고 악마는 거짓말은 안해. 진실을 일부만 말해 줄 뿐이지. 일종의 게임의 규칙 아닐까, 하등한 고기와 게임을 즐기기 위한 자신만의 규칙."
"...겁나 싫은 놈이네, 나르시스트 적인 악의를 느껴.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해석하면 되는데?"
"음...예를 들면, 상상하지 못한 뒤통수 치기는 안나올 거 같아. 예를 들어서. '섬 자체'가 '엄마님'이 모습이 변한거 라던가..."
"그런걸 생각하는 니가 이상하다."
릭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악마가 그랬잖아 '어떤 모습이 되더라도, 너와 엄마님은 서로를 알아볼까?' 라고. 나는 이걸 어떻게 해석했냐면,
'난 니가 절대 알아보지 못할 모습으로 니 엄마를 변화시킬거야' 라고 해석했어. 이 질문에 딸은 뭐라고 대답했지?"
릭은 아캄을 바라봤고, 아캄은 즉시 대답했다.
"참고로 문장 전체는 이랬죠. 어떤 모습이 되더라도, 너와 엄마님은 서로를 알아볼까?
-물론이죠, 몇년이 지나도, 두 눈만 감으면 생각이 나는걸요. 따님은 자신있게 말했답니다- 라고요. 장의 가설이 맞는다면. 딸은 악마의 속임수에 넘어 간 모양이네요."
"그렇지?"
"그러네요."
나랑 아캄은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우리를 질린다는 듯이 바라보던 릭이 짤막하게 툭 던졌다.
"니들, 뇌 구조가 어떻게 생겨먹은거냐? 변태같은 능력이네."
"릭이 멍청한게 아니고요?"
"디진다?!"
"자자, 만담하지 말고! 해 지기 전에 해답을 찾아야지."
마음이 급했다, 나는 쿨 하게 둘의 만담을 자르고 들어갔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봐봐, '어떤 모습이 되더라도', 하는 대목에서 악마는 엄마님의 모습을 변화시킬수도 있다는 단서를 단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어떤 모습으로 변경할 지는 말 안했다.
설령, 엄마님의 모습이 따.님.이 알.아.볼.수. 없.는. 모.습.으로 변해있다고 해도, 악마는 거.짓.말.은. 안.한. 셈 인거지.
그래서 나는, 악마가 만들어낸 바위섬, 즉 이 '쿠알라 푸파'가 어쩌면 '엄마님'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고, 동시에 아닐 거라고 생각한거야.
악마는 '섬에 엄마가 있다' 라고 했어. '섬 자체가 엄마' 라면, 그 말은 모순이야. 섬에 엄마가 있다는 말은 섬과 엄마를 동일시 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러니, 엉...너 좀 쩐다."
릭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캄은 히죽히죽 웃었다.
"에헴~! 장의 눈치를 우습게 보면 곤란하죠! 애시당초 우리가 가르쳐주지도 않아도 알아서 척척척 섬의 진실을 파해친 사람 이었으니까요!"
'왜 니가 득의양양하는건데?"
릭은 기가 막혀했다.
"그럼, 니 말 대로라면 확실히 이 섬 어딘가에 있기는 있다는 거네. 그럼 그 위치를 먼저 찾아야지?"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아캄. 그와 관계가 있을 만한 자료, 없었어?"
"음..."
아캄은 잠시 생각했다.
"글쎄요, 엄마님의 위치를 암시하는 듯한 자료는...딱히 없었는데요."
"그럼 무린데, 섬 전첼 뒤엎을 수도 없잖아. 시간도 없고...차라리, '따님' 이 상륙해서 활개치도록 놔 둬 보는건? 적당히 도망치면서 녀석이 하고싶은대로 하게 두는거지."
"한 방법일 지도 모르겠지만. 따님이 정확한 엄마님의 위치를 모르는 상황이라면, 아무런 수확도 없는데 우리의 목숨만 위험에 빠트리는 일 이야.
더군다나, 놈이 상륙했을때 어떤일이 생길지...아무것도 모르니까.항상 여기 등대에서 저지시켜 왔잖아"
거기까지 말했을 때 나는 문득 궁금한 점이 생각났다.
"...? 그러고 보니 지금껏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말야. 이 등대, 몇년 전 부터 있던거야?"
"등대요? 가만, 분명 20년 쯤 됐을 걸요? 제가 아기일때 만들어 졌다고 했으니까..."
"그럼 그 전에는, 쿠알라 푸파의 어디에서 '따님'에 대항한거야?
내 말에 아캄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아까 옆으로 재껴두었던 자료를 파라라락 넘기기 시작했다.
"분명히...아까 그런 기록이...있다!"
아캄이 뒤지던 자료는, 비교적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클리어파일 중 하나였다. 그는 페이지를 넘기다가 한 지점에 멈추더니 우리에게 그 페이지를 내밀었다.
비닐커버에 씌어져 들어가 있는, 아주 낡은 흑백사진과 그 밑에는 말레이어로 무언가 긴 글이 적혀 있혀 있는 페이지 였다.
식별이 곤란해 보일 정도로 저질인 화질 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것이 어떤 목조 건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건 뭐야?"
"이 쿠알라 푸파 등대가 있기 전에 이 자리에 있던, 쿠알라 푸파 등대예요. 50년 전의 사진이죠."
"50년도 전에 등대가 있었다라. 당연히 이 등대는 배들의 인도를 하는 등대가 아니잖아? 루바섬의 낚시배들이 이용하는 등대는 서부 해안가에 있다고.
이 쪽으론 오는 배도 가는 배도 없는데 이 등대가 있는 이유는, 당연히 '따님'에게 대항하기 위해서겠지. 빛이 필요하니까. 이상할 것도 없지."
"그 전에는?"
아캄은 몇장을 넘겨서 보여줬다.
사진은 없지만, 그림이 있었다.
"100년전 등대예요."
"제일 먼 기록, 제일 최초의 기록을 찾아가 보자."
"이봐 왜 그래, 등대가 언제 생겼냐? 그렇게 궁금해? 이유야 뻔한 거 잖아."
릭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것이 알고 싶은게 아니다.
"내가 알고 싶은건, 쿠알라 푸파중 '하필 왜? 이곳이 등대의 위치여야 했냐'는 거야."
내 말에 릭과 아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설명했다.
"게임의 법칙을 생각해봐. 따님은 머리좋은 남자, 용기있는 남자, 힘센 남자...에엣! 길어! 그냥 우리라고 할게! 어차피 지금 그 상황하에 있는 건 우리 니까 말야.
따님은 우리를 찾으러 오는거야! 우리가 등대에 있던, 등대 밖에 있던 상관 없다구. '쿠알라 푸파' 안에 엄마가 있다. 그건 '우리'가 안다!
즉, 등대가 계속해서 같은 곳에 지어질 필요가 없는거 아냐? 애시당초 등대를 지으려면, 빛을 더 멀리가게 하기 위해서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야 하지 않았을 까?
왜 여기에 등대가 있는거지?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사실 섬에 처음 왔을 때부터 생각했다.
등대는 빛을 보내 어두운 바닷길을 밝힌다. 같은 전력으로 더 먼 거리를 밝히기 위해서는 등대를 높게 설치해야 한다. 빛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는
2.09 X 광원높이의 2제곱근 이라는 공식이 있으니까.
등대가 여러곳 있는 곳이라면 식별을 위해서 등대를 꼭 제일 높은 곳에 설치 하지 않고, 특정할 만한 육상 물표 부근에 설치 한다던지 하기도 하지만.
이 섬의 경우는 그런게 아니다. 이 등대는 선박의 항해를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 아니니까.
"섬 중앙, 언덕위에 등대를 지었다면, 훨씬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고, 따님의 접근도 훨씬 멀리서 저지할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굳이 지대가 낮은 현재 위치에 등대를 지었다. 그것도 최소한 100년 동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삭삭삭삭!!
아캄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릭은 아캄의 뒤에서 눈이 뛰어나와라 파일의 그림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도 거기에 합류했다. 말레이어는 읽을줄 모르지만, 그림은 아니까.
아캄은 그 후로 몇권인가의 책을 더 뒤지고, 그때마다 '이게 아냐' '이것도 아냐' 하며 책을 여기저기 팽겨쳤다.
그러기를 십수분, 아캄은 나무껍질을 꼬아 만든 끈으로 묶어놓은 동물 가죽뭉치 안에서 한장의 그림을 찾아내서 우리에게 내밀었다.
"이거예요. 등대관련 최초의 기록은."
"이건 뭐지?"
"?"
거친 가죽의 표면에, 알수없는 염료로 거칠게 그려넣은 그림이었다. 손바닥 만한 그림이었는데, 계란처럼 생긴 무언가 였고, 거기에는 말레이어가 그려져 있었다.
아캄은 그 가죽 그림과 같이 있던 한 낡은 책자에서 그것과 같은 그림을 찾아내더니, 침을 묻혀 책장을 넘겨가며 말했다.
"연도를 짐작할 수 없는 굉장히 오래 된 자료예요. 연도를 알수 추적할 수 있는 기록이 300년 전에 끊겼으니, 최소한 그 이전의 자료죠, 저도 알수없는 말레이의 사어(死語)로 적혀있어서 읽을 순 없지만, 다행히도 누군가가 주석을 달아서 남겼고, 그 후 언어가 조금씩 변동해 올 때 마다 후대가 알아볼 수 있도록 기록을 남겨왔어요. 가장 최근의 기록은 60년 전의 거로군요. 좀 손상되긴 했지만 읽을수 있겠어요...읽어 볼게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릭은 마른침을 삼켰고, 아캄의 눈동자는 더욱 커졌다.
".... '기원석'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섬 사람들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평화를 인도해 준 우리 어버이 신령과, 희생된 수많은 영령들을 기리기 위해, 받들다."
기원석 비문
바다야 바다야, 내 손을 적셔라
붉은 빛 핏물이 모두 씻길 때 까지.
바람아 바람아, 내 머리를 씻어라.
깊이 베인 피비린내 모두 날릴 때 까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삶아, 죽음아,
산 이는 떠나고, 떠난 이 돌아오니,
이제와 떠난다고 애달파 할 소냐.
처녀야 처녀야 울지를 말아라,
살진 너의 육신, 해신님께에 바치어
부모형제 모두함께 배불리 먹으니
아름다운 바다에, 두팔을 벌려라.
원망따위 하지말고, 거품처럼 가거라.
찾느냐 찾느냐 어리석은 소녀야
아무리 헤메어도 찾아질리 없거늘,
원망따위 하지말고 구름처럼 가거라.
아캄은 비문을 다 읽자말자 종이를 한장 넘겨 그 뒤의 글을 손가락으로 훑어가며 읽었다.
"...이 비문은, 이 섬에 남아있는 최초의 '풍어제'때, 해신(海神)으로 부터 선사받았다는 백색 수정원석이랍니다. 죽인이를 위한 비문을 세기고, 위령제에 쓰였다고 하고요. 그 영험한 기운을 받아 섬의 어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 터에 등대를..."
팔락.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 하고 건드리며 아캄이 말했다.
"즉, 이 등대의 밑에는, 이 비문이 묻혀 있어요."
릭은 신음하듯이 말했다.
"What the fuck...장의 말 대로라면 등대 위치는 본래 중요치 않치. 목표는 '사람'이니까. 현 시점엔 우리고. 등대를 지킬 필요 따위 처음부터 없었어. 그 말은..."
"맞아..."
나는 또 하나의 퍼즐이 내 머릿속에서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수백년 전 부터, '세남자' 가 지켜온 건, 이 등대가 아냐. 등대의 터... 묻혀있는 비석. '엄마님' 이다."
"잠깐만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비약하는 거 아닐까요?"
아캄은 눈을 깜빡거리며 나와 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좀더 정확한 증거가 필요해요. 확신 할 수 있는 증거가."
"...증거라..."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자료가 전설, 전래동화 나부랭인데 정확한 증거는 개뿔, 지금 무슨 CSI 찍어?지금은 직관에 의지 할 수 밖에 없어. 말만 앞뒤로 맞아 떨어지면 되는거라고."
"그렇다 해도 좀더 근거를 찾아보고..."
"아 그럼 뭐! 다른 그럴듯한 가설이 있어? 우린 시간이 없다고? 섬을 다 뒤지는 것 보다 훨씬 현실적이잖아."
아캄과 릭은 의견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평소답지 않은 신중론을 펴는 아캄과, 저돌적인 릭.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초조해 하고 있었다.
나 역시도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너무 서두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따님과 악마님의 내기가 성립된 다음,악마님은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응?"
"네?"
"우리 한번 악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그 말이야. 우리가 악마님 이라면? 가엾고 어리석은 먹잇감을 내기로 꼬여내는데 성공은 했다... 재미를 위해서 하는 게임이니 만큼, 거짓말은 하지 않은 채, 나는 엄마님을 그 섬에 숨겨야 겠지. 그런데 그냥 숨기면 재미가 있나?"
"재미?"
"그래 재미, 이건 악마 입장에서 보면 그냥 심심풀이 오락이야. 루바 섬의 주민들과 따님 이라는 한정된 재원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비극을 연출해 낼 수 있는가를 즐기는 게임.
어떻게 하면 좀더 극적이고, 재미난 결과가 초래될까? 비석을 땅속 깊이, 마그마가 흐르고 머리 아홉달린 용이 지키는 제단에 놓아서 누구도 가져가지 못하게 할까?
아니-. 그건 치트지. 하나도 재미없어. 그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깊은 바닷속에 숨길까? 아니-, 보물찾기 하면서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곳에 보물을 숨기면 어떻게 해?
게임이 재미없어 지잖아. 이봐 아캄, 재미있는 게임이 뭐지?"
"헷?!"
아캄은 멍하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갑작스레 질문이 날아오자 살짝 당황한 듯 했다. 그는 화들짝 놀라는 듯 하더니 이내 떠듬떠듬 말했다.
"아...뭐, 밸런스가 잘 맞고, 다양한 유저들이 자기 나름의 역할을 가지고 즐길수 있는...그런 게임?"
"바로 그거야!"
"아잇! 깜짝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고, 내 옆에 서있던 릭은 깝놀 해서 진저리를 쳤다. 미안 미안,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정말 유레카! 아르키메데스는 이런 기분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밸런스와 다양한 유저! 자, 이걸 가지고 이야기 해보자. 우선 '세 남자팀' '따님 팀'이 있어. '악마'는 게임 마스터라고 치자고. '세남자' 팀은 수비, '따님'팀은 공격이야. 역할도 적절해. 밸런스? '세남자'는 약하지만, 숫자가 많고. '정보'를 통해 무수히 전염시킬 수 있어.
'따님'팀은 하나 뿐이지만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막강한 적이지. 나약한 다수와 강력한 단수. 밸런스도 괜찮다고 봐."
"그런데 뭐가 문제야, 뭐가 문젠데 그렇게 소리를 치고 난리야?!"
릭은 귓구멍을 후비며 눈쌀을 찌푸린체 말했고 나는 대답했다. 아니, 대답하려 했다. 아캄이 5초만 늦게 말했어도, 나는 의기 양양하게 말 했을 것이다.
"주민들!!"
아캄은 부르르 떨며 말했다.
"뭐?"
릭이 반문했다. 아캄은 나를 바라보며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주민들의 역할이 없어요. 맞죠? 장."
"그렇지, 이 게임은 루바섬과 쿠알라 푸파. 악마님과 따님, 그리고 루바섬 주민 전부가 플레이어가 되어 벌이는 게임이야. 근데 우리가 만든 시나리오에 주민들의 자리는 없어, 왜 일까?
그럼 주민들의 목적은 뭘까?"
"...그건..."
"풍어?"
릭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고기를 많이 잡는게, 과거 어민들의 목표였잖아 맞지? 근데 그걸 악마님이 이뤄준 거고. 응? 가만, 그럼 목적이 이뤄진거잖아? 주민들은 목표가 없는데?"
순간, 번개처럼 뇌내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언제부터 어민들은, '고기'를 바치지 않고서도 풍어를 할 수 있게 되었지? 따님과 악마님의 내기 시작부터가 아닌가?"
"그건..."
"그러고 보니..."
"즉... 악마와 따님이 내기가 성립되는 동안, 풍어는 계속되 온 거야.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서 모두다 그게 자연스럽다고 여긴거지. 여긴 본래 생선이 없는 곳 이었다는 걸 잊어버린거야."
그래. 같은 현상이 반복되면,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하물며 식인, 인신공양같은 풍습이 사실이었다면 후세에 전해질 리가 없지!!
아캄은 중얼거렸다.
"풍어... 악마님과 따님이 내기를 진행하는 것 만으로도 주민들은 풍어를 얻어요. 그들이 인신공양을 하면서도 바랬던 목적...즉, 처음부터 목적을 보장받고 있는 거죠.
어째서? 악마의 게임엔 빈틈이 없잖아요. 반드시 역할과 목적이 있어요. 그럼 이 게임에서 주민의 역할은 도대체 뭐죠?"
"발상을 전환해 보지. 이미 목적을 보장받고 있는게 아니라,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 대가로 '목적을 누리고' 있는 거라면?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은 뭐지?"
아캄과 릭은 침묵했다.
"그 역할은..."
호흡이 가빠진다. 머리가 어지럽고, 코끝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계속 떠들었던 탓인지 목은 아프고, 혀끝은 마른 행주 같이 깔깔하게 느껴졌다.
계속해서 생각을 반복한 머리는 이미 한계에 도달에 있었다.
"..."
"..."
두사람은 말이 없었다. 말이 없어도 괜찮았다. 괜찮다. 내가 말 하면 된다.
그래, 들어라. 이게 내 역할이겠지. 이 게임에서 주어진. 내 역할.
"주민들은, 이 등대를 세웠다. '엄마님'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여기에 묻고, 자신들은 진실을 잊었어. 아무것도 모르게 살고 있지. 그게 그들이 하고 있는 전부야."
"..."
"왜 이제야 알았을까? 게임이 클리어 되지 못하게 막고 있는건, 따님도, 악마님도 아냐.
처음부터 주.민.들.이. 엄마님을 따님으로 부터 숨.겨.왔.잖.던. 거잖아"
그랬다. 그들은, 엄마님을 등대 아래 묻어서 따님이 찾을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게임이 진행될 수 있도록, 자기들 사이에서, 혹은 외지인 가운데서 희생양을 골라 게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사실 마져 잊어버려서 '게임의 말' 이 될 가능성 마져도 차단했다 그들은 게임의 말이 되어 게임을 클리어 해서도, 게임의 희생양이 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영원히 게임이 이어지게 만들어서, 영원한 풍어를 손에 얻는 것이야 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최고의 시나리오.
그렇기 때문에야 말로. 악마는 풍어를 보장했다.
영원히 헤메이는 따님의 고행을 비웃으며, 영원히 돌아가는 룰렛을 돌리는 챗바퀴의 쥐들에게 먹이를 던져주고 있었다.
쥐들이 멈춰, 게임이 멈추지 않게.
룰렛의 볼(ball)이, 적(red)에도 흑(black)에도, 영(zero)에도 걸리지 않게 탁자 아래로 숨겨버린체.
어디에도 없는 볼을 찾기위에 눈에 핏발이 선채 룰렛 휠을 노려보는 어린 소녀의 양 어깨에 손을 얹고, 히죽히죽 웃으며.
영원이 끝나지 않는 고통의 룰렛을 조종하는, 테이블의 주인.
악마님.
"주민들이, 엄마님을 은폐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구나..."
첫댓글 주민들 잔인하고 이기적이다
진짜 충격이면서도 스레 주인은 똑똑하다...
헐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