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김형주 산악인 추모비 제막식.)
( 2009년 7월4일(토) 오전 10 : 00시 )
( 장소 : 북한산 무당골.,산악인 추모비.)
(추모제 참석 후 설악산으로 이동)
(2009년 7월 5일 울산암 추모 등반)
1972년 암벽에 입문한 김형주 산악인
한국등산학교 정규반 3기를 수료하고
서울 산악연맹·대한적십자사 산악구조대원,
코오롱등산학교· 서울등산학교 강사 등으로 활동.
10여 차례의 유럽 알프스 등반과 1988년 낭가파르밧,
1993년 마셔브룸, 1996년 라카포시 등을 등반한 바 있다.
2005년 코오롱 등산학교 강사로 드리피카(6,447m)를 등정
여러해 육군사관학교에서 등반 강의를 맡았고,
매년 홍콩 산악인들에게 동계등반 기술을 전수
홍콩 경찰청장 공로패를 받았던.,김형주 산악인.
"등반은 예술" 약 40년 아트 클라이밍 삶을 살다 간.,그.
"산은 나에게 고고한 행위의 예술이다." - 김형주 산악인 -
"오봉까지 15분 도보거리" 송추계곡 부근 그의 보금자리.
그곳은 그와 한솥 밥을 먹는 사이.,정명숙 여류화가의 집.
화덕에서 잘 익은 삼겹살에 숲에서 따온 민들레 잎쌈 저녁.
"길이 없는 벽에서 라인 하나 잡아 올라가는 등반행위는 예술.
화가가 그림 그리는 것이나, 작가가 글쓰는 것이나 다름 없어요."
"예술가의 고고한 정신세계와 등반가의 치열함.
y무대 위 무용수의 우아한, 때로는 현란한 몸동작.
'아트 클라이밍(Art Climbing)은 곧, My way (나의 길)."
그는 90년대 초 '아트 클라이밍(Art Climbing) 장비점을 운영.
1997년 종로 5가에 문을 열었던 인공암장도 아트 클라이밍 센터.
1956년생 그가 처음 산에 입문한 시기는 1969년, 중학교 1학년 때
영정산악회를 거쳐 은정산악회에서 활동한 그는
1975년 한국등산학교 3기 졸업후 체계적으로 등반
1976년 선배들과 함께 선인봉 정양길을 개척했던 그.
"선배들이 돈을 주며 '가서 배워오라'고 했어요.
그때 등산학교 입학금이 1500원 정도 한 것 같아요.
그때 누나가 송림 크레타 슈즈를 선물하기도 했었죠."
"지리산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너무 잘 알아요.
왜냐면 술자리에서 귀 따갑게 많이 들었기 때문이죠.
바위만 하다 보니 산에 바위가 없으면 성에 차지 않아요."
"설악산은 클라이머의 산이죠.
파키스탄과 네팔의 차이처럼."
"처음 갔던 히말라야가 파키스탄 낭가파르바트였고,
이후로도 마셔브룸, 라카포시, 작년 차라쿠사 지역까지
둘러보며 더욱 더 가야 할 곳이 파키스탄이라 생각했지요.
"환갑이 되면 지리산에도 가볼 생각이예요.
폭설이 쏟아지는 날, 스키를 타며 갈꺼예요."
이야기가 무르익는 사이 어둠을 가르며 환한 자동차 불빛
코오롱등산학교에서 그가 지도한 동문산악회 하이락 회원들.
얼마 전, 그는 하이락 회원들과도 유럽 알프스를 등반하고 왔다.
알피니즘 근원을 찾고자 그가 이끈., 알프스 원정대.
"<알피니즘을 찾아서>라는 명제로 간 만큼,
산에 다니는 뿌리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어요. "
"등산은 기술이 아니에요.
거기에 무슨 기술이 있습니까.
알피니즘은 곧 '파이널 십',
희생정신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희생하며 팀을 살려나간 소수의 사람들,
수많은 산악인 중 1 %가 알피니즘을 이어 왔어요."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건
언젠가 마터호른을 오르며 만난
한 늙은 가이드의 모습 때문이다.
"백발의 가이드가 초보자 손님 3명과 함께 하산하며,
피톤이 없고 확보점도 없는 곳에서는 자기 몸에 로프를 묶고
젊은 손님들은 백발 가이드 몸에 하강기를 걸고 내려가더라고요."
"고통을 참는 그의 얼굴이 바로 산이었어요."
코오롱등산학교, 육군사관학교, 홍콩 경찰청에서 등산 강의
서울등산학교 대표강사와 서울스포츠대학원 등산 전임강사로
교육생들을 지도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산에서의 자유'.
"초보자에게 어려운 길을 갈 때는
정 힘들면 볼트를 잡으라고 말해요."
"하지만, 나중에는가급적 잡지 않으려 노력하라고 말해요.
하루는, 아주 더운 날에 설악산 장군봉에서 교육이 있었어요. "
"등반할 수도 있었지만, 너무 더워서 다들 힘들어했죠.
그래서 다래도 따먹고, 가재도 잡으며 실컷 놀았습니다.
교육생 아무도 등산교육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장강의 앞 물결은 뒷 물결이 미는 법"
지천명인 그가 무엇이든 배우려는 이유.
1976년 쌍용양회에 입사한., 첫 사회생활
플랜트 설계와 관련한 기계 전기 분야였다.
한때 컴퓨터가 10대나 있을 정도로 '컴퓨터광'
그가 컴퓨터를 처음 접한 것은 70년대 말,
그가 회사 업무차 독일 출장을 가서이지만,
그 이후로는 산을 위해 컴퓨터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등산잡지에 해외 산악사이트를
소개하는 기사를 올려 연재했다."던.,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