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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湖水)로 둘러싸인 54주(州), 옛 부여(扶餘) 땅 홍주(洪州)
2022년 07월 14일
○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 따르면 :「홍주(洪州)」를 가리켜 “강해(江海)의 땅”이라고 하였고, “택국(澤國)에 있는 대도회지(大都會地)”였다고 하면서, 오늘날의 충청도(忠淸道) “홍성(洪城)” 땅의 ‘옛 지명(地名)’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說明)에 따라 실제(實題) “옛 홍주(洪州)였다던 오늘날의 홍성(洪城)”을 보면 : “너무 초라하여 비교대상(比較對象)조차 될 수 없는 곳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 땅’을 지칭(指稱)하여 ‘강해(江海)’라고 하였음에 비춰보면, 강(江)이라고는 시냇물이고, 전형적(典型的)인 농촌(農村)으로 호수(湖水), 택(澤), 소(沼) 하나 없는 구석진 땅이 무슨 강해(江海)의 땅이요, 택국(澤國)의 대도회지(大都會地)라는 말일까?」
이건 조작(造作) 또는 왜곡(歪曲)된 이야기가 아니라면, 존재(存在)할 수 없는 ‘땅’ 얘기다. 발전(發展)할 수 있는 요소(要素)가 전혀 없어 지금도 낙후(落後)된 땅이다. 이러한 땅이 무슨 ‘강해(江海)의 땅이요, 무려(無慮) 일천(一千)년 전(前)의 대도회지(大都會地)였다’는 말일까?
이건 왜곡(歪曲), 조작(造作)된 역사해설(歷史解說)이고, 자연환경(自然環境)적인 요소(要素)와 배치(背馳)되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의 역사해설(歷史解說)로 비춰진다. 왜냐하면,
➊ ‘강해(江海)’란 말은, “강(江)과 바다(海) 또는 큰 호수(湖水)”를 지칭(指稱)하는 말인데, ‘충청도(忠淸道) 홍주(洪州)’ 땅에는 서(西)쪽으로 바다와 접해 있지만 “강(江)”이라고 할 만한 큰 물줄기는 없는 곳이며.
➋ 또 ‘택국(澤國)’이란 말은, 옛 ‘백제(百濟)를 지칭(指稱)하는 별명(別名)’으로, 그 땅 내(內)에 ‘많은 호수(湖水)와 저지대(低地帶), 택(澤) 또는 늪(沼)’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곧 “땅”의 별칭(別稱)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韓半島) ’충청도(忠淸道)나 전라도(全羅道)‘ 땅에는, 그 어디에도 호수(湖水)라고 할 만한 곳이 없고, 일제(日帝) 식민지(植民地) 때나, 1945년 해방(解放) 이후(以後)에 만들어진 농사(農事)를 짓기 위해 가뭄에 대비(對備)해서 만들어 놓은, 인공적(人工的)으로 만든 조그마한, 도토리만 한 ’저수지(貯水池)‘들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건 반도(半島) 땅 전체(全體)가 똑같은 모양새다.
얼마나 웃기는, ‘머저리’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인가?
➌ 『홍주(洪州)」는 본시(本是)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의 “운주(運州)”였다고 말하는데, 이곳은 ‘백제(百濟) 땅이었다.’고 하면서도, ‘백제(百濟) 또는 신라(新羅)’등 그 어느 ‘지지(地志)’에도 기록(記錄)이 없어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고려(高麗) 건국(建國)시절인 ‘AD 918’년에, 《熊,運等十餘州縣,叛附百濟,命前侍中金行濤,爲東南道招討使,知牙州諸軍事,以備之. : 웅주(熊州)·운주(運州)등 10여 주현(州縣)이 배반하여 백제(百濟)에 붙었으므로, 전 시중(侍中) 김행도(金行濤)를 동남도(東南道)초토사지아주제군사(招討使知牙州諸軍事)로 삼아 대비하도록 명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곳 『‘운주(運州)·웅주(熊州)’가 ‘동남(東南)쪽’ 지방(地方)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다.』 즉(卽) ‘AD 918년’에 ‘웅주(熊州)·운주(運州)’등이 백제(百濟)에 붙어버리자, “왕건(王建)”이 “김행도(金行濤)”를 “동남도(東南道)초토사지아주제군사(招討使知牙州諸軍事)”로 삼아서 이들에 대해 대비(對備)토록 했다는 이야기다.
이곳 “운주(運州)·웅주(熊州)”는, 『백제(百濟) 땅으로, 백제(百濟)는 “남주(南州) 또는 남국(南國), 택국(澤國)”등으로 불려졌었다. 갑자기 “동남도(東南道)”란 말은 어찌된 것일까? 또 이곳은 고려(高麗) 때의 ‘하남도(河南道)’에 속했던 곳이라고 한다.
➤ “웅주(熊州)·홍주[洪州 : 운주(運州)]가 ‘고려(高麗)의 동남도(東南道)’에 속해 있으려면, 당시(當時) 고려(高麗) 도성(都城)은, 황해도(黃海道) 서(西)쪽에 있는 ‘백령도(白翎島) 또는 대청도(大靑島)·소청도(小靑島)’에 있었다는 말과 같다. 이런 역사해설(歷史解說)은, 블랙 코메디(black comedy) 수준(水準)을 벗어날 수 없다.
‘충청도(忠淸道) 홍성(洪城)’ 땅이 ‘동남도(東南道)’에 속하는 곳에 있었다는 것일까? 그러면 이곳이 하(河)의 남(南)쪽 땅! ‘하남도(河南道)였다’는 말은 또 뭐고, 또 이곳 땅이 ‘충청우도(忠淸右道)’에 속했다는 말은 뭐고, 이곳이 ‘호서(湖西)니 호우(湖右)’ 지방(地方)이니 하는 말은 또 뭔가?
이렇게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는, 범인(凡人=凡夫)들은, 이해(理解)할 수 없는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얘기로 만들어져 있다.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는, 외계인(外界人)들도 이해(理解)하지 못할 괴문(怪聞)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운주(運州)’가, ‘홍주(洪州)’가 될 수 있을까?
○ 사실(事實) 핵심(核心)은, 『“운주(運州)”가 “홍주(洪州)”가 될 수 있을까?』
위의 예문(例問) ➌에서 설명(說明)했듯이, 「“운주(運州)와 웅주(熊州)”는, 어떤 곳에서 어떻게 바라보더라도 “동남(東南)”쪽이 될 수 없는 땅이다.」
즉(卽) 평양(平壤), 개성(開成), 한양(漢陽)등 그 어느 곳에서 바라보더라도 “정남(正南)”이지 “동남(東南)”이 될 수 없는 지세(地勢)를 가지고 있다. “동남도(東南道)”가 될 수 있으려면, “운주(運州)”는 경상도(慶尙道) 땅에 있어야 한다. 즉(卽),
➍ 高麗史節要 1권 / 太祖神聖大王[정해 10년(AD 927)] : 《三月,王,敗運州城主兢俊於城下,遂攻近品城,下之。: 3월에 왕(王)이 운주[運州 충남 홍성(洪城)]의 성주(城主) 긍준(兢俊)을 성 아래서 패배시키고, 드디어 근품성[近品城 경북 문경군(聞慶郡) 산양(山陽)] 을 쳐서 이를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高麗史1卷-世家1-太祖 [927] : 《辛酉王入運州敗其城主兢俊於城下. 甲子攻下近品城. : 왕(王)이 운주(運州)에 들어갔다. 운주(運州) 성주(城主) 긍준(兢俊)이 성하(城下)에서 패하였다. 갑자(甲子), 드디어 근품성(近品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여기서 『“운주(運州)”가 “홍주(洪州)”가 될 수 없다.“』 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즉(卽) 운주(運州) 성주(城主)를 성(城) 아래에서 패배(敗北)시키고, 드디어 근품성(近品城)인 경상북도(慶尙北道) 문경군(聞慶郡)의 산양(山陽)을 함락시켰다.』고 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동남도(東南道)”에 해당(該當)되는 곳이다.
➤ 여기서 근품성(近品城)이 문경(聞慶)이 아닌 “홍성(洪城)=홍주(洪州)”부근에 있었던 성(城)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疑問)을 제기(提起)할 수도 있으나, 이는 “홍성(洪城)=홍주(洪州)”가 “동남도(東南道)”에 해당(該當)될 수 없기 때문에, 의미(意味)조차 없다.
이런 실정(實情)임에도, “운주(運州)”가 충청도(忠淸道)【호서(湖西):호우(湖右)】 홍주(洪州)라고 할 수 있을까? 초딩들도 두 손을 번쩍 들고, “아니요” 할게다.
이러다 보니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던 무리들이 지지(地志)에서 “모 르겠다”고 하면서 빼버린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의 “머저리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위의 기록(記錄)에 따르면 : “운주(運州)는 홍주(洪州)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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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洪州)”가 오늘날의 “홍성(洪城)” 땅이 될 수 있을까?
○ 결과론(結果論)이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말이다. 즉(卽),
(1) 五山集 2권 七言律詩 /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부임하는 김승지(金承旨) 신국(藎國) 에게 올리다 : 《王命分符養母慈 : 어명(御命)으로 임명되어 어머니 봉양하니, 一麾江海尙恩私 : 강해로 보내 준 그 은총이 그지없네 股肱蹔作湖西牧 : 중신으로 잠시간 호서목이 되었으니, 중략(中略)》하였고,
(2) ‘홍주(洪州)’에 대해서 :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는 이르기를 : 《百濟時,稱號未詳 ; 金氏地志,亦不載,唯高麗太祖實錄,十年丁亥三月,王入運州, 註云卽今洪州 : 백제 때의 칭호(稱號)는 알 수 없다. 김씨[金富軾]의 지지(地志)에도 실리지 아니했고, 오직 고려태조실록(高麗太祖實錄) 10년 정해(丁亥) 3월에 왕이 운주(運州)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주(註)에 이르기를, “지금의 홍주(洪州)이다.”고 하였다.】》
위의 예문(例問) ‘(1)+(2)’를 보면 : ‘홍주(洪州)’ 땅이 “강해(江海)의 땅이었다.”는 말이고, ‘호서목(湖西牧)’이라고 하니, ‘큰 호수(湖水)의 서(西)쪽 땅’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는, “반도(半島) 땅에는 없다.”는 것이 문제(問題)다.
위에서 말했듯이 “강해(江海)”란 ➀ 강(江) 즉(卽) 여러 개의 하천(河川)이 모이는 땅이라는 이야기고, ➁ 바다(海) 또는 내륙해(內陸海: 海)가 있는 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홍주(洪州)”란 곳은 그 관할(管轄) 내에 많은 하천(河川)이나 그 하천이 모여 대강(大江)을 이루는 곳도 없다. 서(西)쪽에 “서해(西海)”가 맞닿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問題)는 이곳이 “호서(湖西) 즉 호우(湖右)”의 땅이라는 것에 있다.
“호서(湖西)니 호우(湖右)”니 하는 말은, “쉽게 말해서 그곳을 상징(象徵)하는 호수(湖水)가 있고, 그 호수(湖水)를 기준(基準)하여,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땅을 별칭(別稱)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즉 그 호수(湖水)를 기준(基準)해서, “➀ 서(西)는 호서[湖西 : 호우(湖右)] ➁ 동(東)은 호좌(湖左) ➂ 남(南)은 호남(湖南), ➃ 북(北)은 호북(湖北)”이라는 특정(特定) 지명(地名)이 탄생(誕生)된 것이다.
또 하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 조차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오직[註云卽今洪州]라는 주석(註釋)으로 말미암아 ”운주(運州)가 홍주(洪州)가 된 것이다.“ 즉(卽),
➤ 高麗史節要 1권 / 太祖神聖大王[정해 10년(AD 927)] : 《三月,王,敗運州城主兢俊於城下,遂攻近品城,下之。:3월에 왕(王)이 운주[運州 충남 홍성(洪城)]의 성주(城主) 긍준(兢俊)을 성 아래서 패배시키고, 드디어 근품성[近品城 경북 문경군(聞慶郡) 산양(山陽)] 을 쳐서 이를 함락시켰다.》고 하였으니,
➤ 위의 고려사(高麗史) 및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기록(記錄)에 따르면 : 「”운주(運州)“는, ”근품성(近品城 : 慶北 聞慶郡)“과는 근접(近接)한 곳에 있었다」는 말과 통한다.
한반도(韓半島) 땅의 ‘홍주(洪州: 湖西)’와 ‘운주(運州 : 慶北聞慶)’는, 실제(實際) 300리 이상(以上) 떨어져 있다. 따라서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 말하고 있는 ‘AD, 927년’의 「운주(運州)와 근품성(近品城) 함락(陷落)이 있었던 곳은, ”동남도(東南道)“」에 속하는 곳이 맞다.
또한 ‘호우(湖右)니 호서(湖西)’니 하는, 이런 특정(特定) 지명(地名)이 ”한반도(韓半島)의 땅“에서 가능한 것이냐? 이러한 논리(論理)는, 오늘날의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허구성(虛構性)을 증거(證據)하는 좋은 예(例)의 하나다.
(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충청도(忠淸道) 홍주(洪州)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와도 같은 내용임】
➊ 《조위(曺偉)의 객관 기문[記]에, “洪,湖西之巨邑。其地沃以廣,其民繁以庶,號稱難治。홍주(洪州)는 호서(湖西)의 거읍(巨邑)이다. 그 땅이 기름지고 넓으며, 그 백성이 번성하고 많아서 난치(難治)의 고을로 일컬어 왔다.”》
➋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 澤國正逢鱸膾美,故鄕遙憶雁書傳。: 물 많은 나라에선 한창 농어회 맛나는 계절인데, 고향은 멀리 기러기 소식 전하여 주기 바라네.” 하였다.》
위의 글 ‘➊+➋’를 보면 : ‘한반도(韓半島)의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지세(地勢)’를 말해준다. 위의 글 (2)에서 설명(說明)했듯이 말이다.
‘호서(湖西)니, 택국(澤國)’이라는 말 자체(自體)가 “한반도(韓半島) 땅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려준다.
➤ ‘한반도(韓半島) 삼천리(三千里) 금수강산(錦繡江山)’은 :『거대(巨大)한 호수(湖水)가 없으니 그 호수(湖水)를 기준(基準)하여 호남(湖南)이니, 호북(湖北)이니 하고 가를 일이 없고, 또 호우(湖右=湖西)니, 호좌(湖左)니 하면서 땅을 갈라치기 할 일도 없는 땅이다. 또 택(澤)이나 늪(沼)이 없으니, 택국(澤國)이란 별칭(別稱)도 만들어질 수 없으며, 땅이 저지대(低地帶)가 없으니, 백성(百姓)들이 산(山)에 집을 짓고 살 일도 없는 땅이다.』
‘홍주(洪州)’를 놓고 보면 : 지세(地勢)는 지세(地勢)대로 놀고,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들의 매국(賣國) 사학(史學)은, 지들 끼리끼리 치고받는 헛소리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런 사관(史觀)을 추종(追從)하는 무리들이 있다는데? 바로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이다.
어떻게 보면, 웃기는 국민(國民)들이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족보(族譜)”를 들먹이며, 가문(家門)을 들먹이는지, 이해(理解)불가(不可)한 국민성(國民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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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芝峯集[이수광:李睟光] 21 / 잡저(雜著) / 洪州到任後, 上監司啓 : 홍주에 부임한 뒤 감사에게 올리는 계사〔監司崔沂 : 감사는 최기(崔沂)이다.〕
【‘지봉(芝峯)’이 AD 1,607년[宣祖40] 12월에 ‘홍주목사(洪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처음 부임하고 난 뒤 당시 ‘충청도(忠淸道) 관찰사(觀察使)’로 있던 ‘최기(崔沂)’에게 올린 계사이다. [출처 : 고전번역원 DB 주석(註釋)]】
洪州到任後上監司啓 監司崔沂 : 《環湖五十四州。扶餘國之舊壤。: 호수에 둘러싸인 54개의 고을은 부여국(夫餘國)의 옛 땅입니다. 有地數百千里。大丈夫之殊榮。錦水生輝。鷄山增重。中略. : 수백천 리의 땅을 다스리는 것은 대장부의 특별한 영예이니, 금수(錦水)에서 밝게 빛이 나고 계산(鷄山)은 더욱 중후해집니다. 중략(中略). 使節朝回於北極。福星夕臨於南維。大麓煙霞。望旌旗而動色。西原草木。與衮綉而爭春。中略. : 사신(使臣)이 되어 북경(北京)에 조회를 다녀오고, 관찰사가 되어 남쪽 지방에 임하니, 큰 산의 연하(煙霞)는 공의 깃발을 바라보고 반가운 기색을 띠며, 서쪽 들판의 초목은 공의 화려한 관복과 더불어 봄빛을 다투었습니다. 중략(中略). 隨軒化雨。洒百濟之遺黎。攬轡淸風。振三韓之左海。中略. : 수레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화우(化雨)가 내려 백제(百濟)의 유민들을 적셔주고, 고삐를 잡을 때마다 맑은 바람이 불어와 삼한(三韓)의 좌해(左海) 지역을 진작시킵니다. 중략(中略). 守職有限。阻親問於起居。奉公無他。期勉承於條約。: 제가 직책을 지켜야 하는 제약이 있어 직접 찾아가 문안을 여쭙지 못합니다. 공무를 잘 봉행하는 것은 다른 것이 없으니, 기필코 조약(條約)을 힘써 받들겠습니다.》하였다.
위의 이야기는 〈지봉(芝峯)이 홍주목사(洪州牧使)[1608년 1월]에 부임하고 난 뒤에, 당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어 있던 “최기[崔沂) : 1553~1616]에게 보낸 글이다.〉라는 것을 염두(念頭)에 두고 살펴보아야 한다.
➊ 〈環湖五十四州。扶餘國之舊壤。: 호수에 둘러싸인 54개의 고을은, 부여국(夫餘國)의 옛 땅입니다.〉하였는데, 이는 백제(百濟)가 고구려(高駒驪)의 남진정책(南進政策)으로 말미암아 남천(南遷)한 이후(以後)의 백제(百濟) 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환호(環湖)’란 ‘호수(湖水)에 둘러싸이다’라는 말이니, ‘54개 주(州)’가 있는 충청(忠淸) 땅은, “호수(湖水)에 둘러싸인 땅”이며, 더불어 이곳이 ‘옛 부여(扶餘)의 땅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왕조(朝鮮王朝) 때의 개인(個人) 문집(文集)등을 보면 : 충청(忠淸) 땅에 54개 주(州)가 있어, ‘54주(州)’하면 곧 ‘충청도(忠淸道)’를 지칭(指稱)하는 말로 쓰였고, ‘72주(州)’는 ‘영남(嶺南)’ 지방을 지칭(指稱)했다.
➤ 그런데 얄궂게도 대륙(大陸)의 “사천(四川)” 땅도 마침 ‘54개 주(州)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즉《資治通鑑後編 144권 宋紀 理宗皇帝》편을 보면 :
資治通鑑後編卷一百四十四 / 刑部尚書徐乾學撰 / 宋紀一百四十四〈起昭陽赤奮若正月盡著雍敦牂十二月凡六年〉/ 理宗建道備徳大功復興烈文仁武聖明安孝皇帝 : 《庚午,召余晦還初晦帥,蜀制下徐清叟奏曰朝廷命令不甚行於西蜀者十有二年. : 처음에 여회(余晦)를 사천선유사(四川宣諭使)로 임명한 조서가 하달되었을 때, 서청수(徐清叟)가 아뢰기를, “조정의 명령이 서촉(西蜀)에서 잘 시행되지 않은 지 12년이 되었습니다. 今天斃余玠乃祖宗在天之靈社稷無疆之福陛下大有為之機也. 지금 하늘이 여개(余玠)를 죽였으니, 이는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령(英靈)이 돌봐 주신 것으로서, 사직(社稷)의 무궁한 복이자, 폐하께서 큰일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今以素無行檢輕儇俘薄不堪任重如晦者當之臣恐五十四州軍民不特望而輕鄙之韃靼聞之亦且竊笑中國之無人矣. 그런데 지금 본디부터 행검(行檢)이 없어 경망하고 부박하여 중임(重任)을 감당할 수 없는 여회를 사천선유사로 임명하였으니, 신이 보기에는 ”54주(州)“의 군인과 백성들이 그를 바라보고 경시할 뿐만 아니라, 달단(韃靼)도 들으면 중국에 사람이 없다고 비웃을까 염려됩니다. 所有除晦内批乞賜收回,帝責清叟曰数十年來未見執政繳囘成命者,卿若固執則廟堂之間同列之義皆有不安,詔命已頒决難反汗及晦在蜀屢敗邊事日急乃召晦還以李曾伯代之. : 바라건대, 그를 임명한 내비[内批 황제가 은밀히 내리는 명령]를 회수하소서.”라고 하니, 이종(理宗)이 서청수를 질책하기를, “수십 년 이래로 이미 결정된 명령을 집정대신(執政大臣)이 반대하는 사례를 보지 못하였다. 경이 고집을 부리면 묘당(廟堂)에 있는 동렬(同列)들의 마음이 모두 불안해 할 것이다. 조서를 이미 반포하였으니, 결코 되돌릴 수 없다.”라고 하였다. 여회가 촉에 부임한 뒤에 누차 패배하여 변방의 사태가 날로 급해지자, 이종이 여회를 소환하였다.》고 하였다.
➤ 즉(卽) ‘사천(四川)’ 땅에 ‘54주(州)’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충청도(忠淸道) 54주(州)와 우연(偶然)의 일치(一致)치고는 너무 얄궂은 우연(偶然)이 아닐까?
➋ 〈有地數百千里。大丈夫之殊榮。錦水生輝。鷄山增重。中略. : 수백(數百) 천리(千里)의 땅을 다스리는 것은 대장부의 특별한 영예이니, 금수(錦水)에서 밝게 빛이 나고 계산(鷄山)은 더욱 중후해집니다.〉라고 하였는데,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든, 홍주목사(洪州牧使)든, 「그 땅이 “수백(數百) 천리(千里)의 땅”이 될 수 있는 곳이 없다.」 쉽게 말해 한양(漢陽) 도성(都城)에서 부산(釜山)까지 겨우 1천리(千里)에 불과(不過)한 땅에서 이런 이야기는 참 후인(後人)들을 놀리는 얘기도 아니고, 비웃는 이야기도 아니고… …문젠 ‘그 땅’이, 한반도(韓半島) 땅이 아니라는데 있는 것이다.
➌ 〈隨軒化雨。洒百濟之遺黎。攬轡淸風。振三韓之左海。中略. : 수레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화우(化雨)가 내려 백제(百濟)의 유민들을 적셔주고, 고삐를 잡을 때마다 맑은 바람이 불어와 삼한(三韓)의 좌해(左海) 지역을 진작시킵니다.〉라고 하였는데,
삼한(三韓)의 좌해(左海)란 뜻은 무엇일까? 우선 “좌해(左海)”란, 【간이집 제8권 / 서도록(西都錄) 전(前)】을 보면, “左海文章士 : 문장으로 이름난 동해(東海)의 선비”라는 구절이 있다. 이에 따르면 “동해(東海) 즉(卽) 동쪽바다”를 뜻하는 말이다.
문제(問題)는, 『‘백제의 동(東)’쪽에는 ‘신라(新羅)’가 버티고 있다가 ‘당(唐)’과 함께 백제(百濟)를 멸망(滅亡)시켰기 때문에 “맑은 바람이 아무리 불어와도 삼한(三韓)의 좌해(左海) 지역을 진작(振作)시킬 수가 없다.」
다만 ‘삼한(三韓)’을 ‘한반도(韓半島) 땅이라는 전제(前提)하에 만들어진 구절(句節)’이라고 보면 되는데,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은, “좌해(左海)”를 한반도(韓半島)로 비유(比喩)하고 있다.
그러나 이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며,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즉(卽) 위의 글 ➊에서 말해주고 있잖은가! 『호수(湖水)에 둘러싸인 54주(州)의 땅』이라고 말이다.
➤ 그러나 ‘백제(百濟)’가 남(南)쪽으로 내려와 ‘부여(夫餘)’로 천도(遷都)한 뒤, “강좌(江左)에 걸터앉아 있었다.”는 ‘역사적사실(歷史的事實)’에 비춰보면, 당연(當然)히 ‘삼한(三韓)의 좌해(左海)가 될 수 있으며, 이곳이 바로 대륙(大陸)의 동해(東海)’다.
‘54개 주(州)’가 ‘호수(湖水)에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나 “백제(百濟)”는 물 많은 나라란 뜻의 택국(澤國), 또는 남국(南國)이라는 여러 표현(表現)과 지칭(指稱)한 것들을 보면, “한반도(韓半島) 땅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것들이다.”
(5) 오늘날 대륙(大陸) 강서성(江西省) 성도(省都)인 ‘남창(南倉)’은, “옛 이름이 홍주(洪州)였다”고 전해지는데, 이곳은 “강해(江海)의 땅이고, 동남(東南)쪽의 중요(重要)한 진(鎭)이 있었다”고 하였다. 즉(卽),
『남창(南倉)은, 곧 “운주(運州)”였다.』는 뜻이다. ‘강서성(江西省) 성도(省都)’인 ‘남창(南昌)’을 ‘홍주(洪州)’라고 했다고 전(傳)해지고 있는데, 이곳은 ‘강해(江海)’【큰 호수(湖水)와 강(江)】와 딱 어울리는 곳이다. 즉(卽) 서(西)쪽의 해(海)는 동정호(洞庭湖)를 말하는 것이며, 더불어 많은 물줄기가 모여드는 땅이다 또한 “동남(東南)쪽의 중요(重要)한 진(鎭)”이었다고 설명(說明)하는데, ‘고려사(高麗史)나 지리지(地理志)등의 설명(說明)과도 한 치의 오차(誤差)도 없다.’
▶ 南昌市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南昌市] : 簡稱 ‘洪、昌’,古稱豫章、洪州、隆興、鍾陵,別稱「天下英雄城」,是中華人民共和國江西省省會,位於江西省北部偏北。市境北臨九江市,西界宜春市,南達撫州市,東接上饒市。地處鄱陽湖平原腹地,東南部地勢平坦,西北部為丘陵。贛江、撫河縱貫市境中部,往北注入鄱陽湖。境內湖泊眾多,有青嵐湖、軍山湖、金溪湖、瑤湖、南塘湖等。
수당(隋唐)에서 오대(五代)에 이르기까지에는 : 『‘홍주(洪州)’라고 불렸으며, 이곳은 수륙(水陸)으로 통하여 대단히 편리(便利)했던 “동남(東南)”쪽의 중요(重要)한 진(鎭)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南昌市 : 隋唐至五代 : 隋唐稱洪州,水陸通利,經貿發達,已然是東南重鎮,一度曾為包含今日江西,湖南大部,湖北東南部,安徽南部,貴州大部的江南西道的道治,且以「洪州禪」,「洪州窯」,「滕王閣」而聞名,時人譽為「洪都」】
○ 『백제(百濟)가 ‘강좌(江左)=강동(江東)’ 땅에 걸터앉아 있었다』 는 말은, “백제(百濟)가 고구려(高駒驪)의 남진(南進)으로 남천(南遷)한 후(後)의 이야기다.”
이러한 땅에 있었던 “홍주(洪州)=운주(運州)”를 한반도(韓半島)로 이동(移動)시켜 조작(造作)하다 보니, 지형지세(地形地勢)가 맞지 않아 생긴 오류(誤謬)가 아닐까?
○ 그렇다면 ‘충청도(忠淸道) 땅에 있었다’는 “홍주(洪州)·웅주(熊州)·부여(夫餘) 땅”은, 어느 곳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백제(百濟)가 당군(唐軍)에 의해 함락(陷落)당한 도성(都城)은, 어디에 있었다는 말일까? 그곳이 ‘호우(湖右)=호서(湖西)’ 땅이 맞긴 맞는 건가?
그곳이 “강해(江海)의 땅이요, 동남(東南)쪽의 중요(重要)한 진(鎭)이었다”는 말이 맞긴 맞는 것일까? 그곳이 충청도(忠淸道) 땅인가? 전라도(全羅道) 땅인가? 2022년 07월 1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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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국 또는 택국"등의 별칭으로도 불리웠던 옛 백제의 강역을 보면,
"강좌[장강(長江)의 동(東)쪽 땅 즉 강동(江東)]"에 걸터앉아 있었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 때의 부여성 즉 사비성이나 낙화암등은 충청도에 없었다는 것일까? 아니면 호남성 땅에 있었다는 것일까?" 옛 선인들의 기록을 보면 모두가 '호우(湖右)=호서(湖西)' 땅인 '충청도'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에 따르면 "'호우(湖右)=호서(湖西)' 땅인 '충청도'는 정확하게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충청도는 '우도와 좌도'로 나눠진 때도 있었다.
그렇다면 충청도는,
동정호 서쪽지방인 사천성?
파양호 서쪽지방인 강서성과 호남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