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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봉은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도문3
삼국통일과 사회통합-원효의화쟁사상을 중심으로
김상현(동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목 차 ▒
| 1. 삼국의 항쟁 2. 일통삼한 3. 원효와 의상과 경흥 4. 원효의 화쟁사상 1) 왜 원효인가? 2) 和諍國師의 영광 3) 막힘없는 無碍人 4) 경계의 담장을 허물고 5) 화쟁의 논리와 방법 5. 마무리 |
1. 삼국의 항쟁
7세기는 전쟁의 시대였다. 중국에서 일어난 수당제국의 팽창에 의한 물결은 고구려로 백제로 밀려들었고 해동의 삼국도 서로 싸웠다. 삼국의 항쟁은 이미 6세기 중반부터 치열했지만, 7세기 중반부터는 더욱 심했다.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를,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를 서로 공격했다. 어느 때는 신라와 백제가 연합했는가 하면, 또 어느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손을 잡고 신라를 고립시키기도 했다. 어제의 동맹국도 이해관계가 어긋나면 원수처럼 싸웠다. 아직 민족의식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신라에서는 608년(진평왕 30)에 수나라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기 위해서 원광에게 乞師表를 짓도록 했고, 645년 5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해왔을 때 신라에서는 군사 3만을 내어 도왔으며, 백제는 그 틈을 타서 신라의 서쪽을 공격하여 일곱 성을 빼앗기도 했다. 660년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668년에 고구려도 망했다. 역시 나당연합군에 의해. 침략은 또 다른 침략을 불렀다.
2. 일통삼한
강한 적대의식으로 대립하고 있던 삼국민은 통일을 계기로 하나의 민족 구성원으로 융합되기 시작, 한민족 형성의 토대를 이룩했다. 이것은 신라의 고구려 백제 유민에 대한 일련의 융합책의 결과이지만, 또한 삼국 공동의 적인 당과의 투쟁이 더욱 이를 가속화시켰다.
660년 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백제인도 그 재능을 헤아려 임용했다. 고구려 또한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했지만 신라와 당이 대결하게 되자, 고구려 부흥군 중에는 신라에 합류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고구려 유민을 포섭함으로써 이들은 신라인들과 더불어 당과 싸웠다. 문무왕 12년(672)에 신라병이 고구려병과 더불어 당군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다던 예 등이 그 경우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신라의 군사조직은 구서당(九誓幢)으로 정비되어 갔는데, 구서당 중 신라민으로 편성된 경우는 겨우 3개 뿐, 나머지 6개는 신복속민을 흡수하여 편성한 것이었다. 이로써 복속지의 유민에 대한 융화책이 급속하게 진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제유민의 흡수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그들에게도 신라의 官階를 수여했던 점이다. 문무왕 13년(673)에는 백제의 유민에게 옛 백제에서의 관계에 준하여 차등 있게 신라의 관계를 주었다. 또한 신문왕 6년(686)에는 고구려의 유민에게도 신라의 경관(京官)을 주었는데, 물론 옛 고구려의 관품에 준하여 균형을 이루도록 했었다. 이처럼 과거에 대립하고 있던 여제 양국인을 신라의 관료 조직 속에 편성, 포섭했음은 삼국민의 융합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신문왕 5년(685)에는 전국을 구주(九州)로 편제하는 지방통치조직을 완성하였다. 구주는 옛 삼국의 영역에 각각 3주씩 나누어 설치된 것이고, 이것은 삼국민의 융합을 위한 조처였다고만 설명하기에는 문제가 없지도 않다. 구주의 설치시기가 삼국통일 훨씬 이전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주가 천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때, 구주로의 편제에는 통일을 이룩하여 온 나라를 평정한 때문이었다. 신라 사회에는 일찍부터 명산대천 등 자연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 왔었고, 이와 같은 토착신앙은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었다. 통일 이후 신라에서는 그 제사의 대상을 전국으로 확대 정비했다. 중사, 소사의 대상을 옛 고구려 및 백제 지역에까지 확대했던 것은 당연한 조처였겠지만, 그것이 고구려 백제 양국 유민에 대한 정신적, 종교적 융합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이다.
당시 삼국민의 공통된 종교는 불교였다. 따라서 불교 신앙은 삼국민의 유대와 통합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신문왕대에는 백제지역 웅천주 출신의 고승 憬興을 國老로 우대했다. 이처럼 백제지역 출신의 고승을 국노로 삼았던 까닭은 복속된 지역을 불교의 교화로 폭넓게 회유시키려는 종교정책의 실현이었을 것이다. 문무왕이 임종 직전에, “경흥법사는 국사가 될 만하니 내 명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도 신문왕이 이 명을 따라 그를 국노에 임명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통일 전쟁이 끝난 뒤, 고구려 백제 양국 유민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불교가 많이 기여했다. 삼국통일이 불교의 공덕에 힘입어 이룩되었다는 주장이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신문왕 6년(686)에 청주시 운천동에 세워졌던 한 사적비에는 불교의 홍포와 삼국통일과를 연결 지어 서술하고 있다. 9세기 초에 一念이 지은 촉향분예불결사문에는 이차돈의 순교에 의한 불교의 공인과 그 후의 발전에 의해 삼한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온 세상은 어울려 한 집안이 되었다고 했다. 또한 818년에 건립한 栢栗寺石幢記에서도 이차돈의 입을 빌어 천하에 불교가 유행하게 되면 나라가 풍요롭고 국민이 편안하게 되며 가히 삼한을 통합하고 四海를 한 집안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872년에 쓰여진 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에서도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운 공덕으로 과연 삼한을 통합해 한 집안이 되고 군신이 안락하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불교 측의 기록에서는 대부분 삼국통일이 불교의 공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3. 원효와 의상과 경흥
신라 중대 왕실에서는 고승을 國師에 책봉한 경우가 있고, 다른 여러 고승과도 가까이 했다. 무열왕은 원효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고, 문무왕의 주위에는 智義, 明朗, 義相 등이 있었으며, 신문왕은 憬興을 國老에 책봉했고, 효소왕은 惠通을 국사로 삼았다. 국왕은 고승으로부터 설법을 듣거나 정치적 자문을 구하기도 했고, 간언을 듣기도 했다. 문무왕이 의상의 간언에 따라 築城의 대 역사를 중지했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중대초기의 여러 고승들 중에서도 원효와 의상, 그리고 경흥의 활동은 더욱 두드러졌다. 원효는 100여 부의 저서를 남긴 대표적 학승이었다. 그는 무열왕(654-660) 때 요석공주와 결혼함으로서 왕실과는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여러 성을 쌓고 궁궐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단장했다. 특히 21년(681)에는 都城을 새롭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도성을 새롭게 축성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의상은 왕에게 글을 보내어 간했다.
“왕의 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밭에 선을 그어서 성이라고 하여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가히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이며,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기나긴 성이 있다 하더라도 재앙이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왕이 역사를 중지하였다.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여 성을 쌓는 일보다는 좋은 정치를 펼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의상의 건의를 왕이 수용하여 곧 공사를 중지하게 했던 것이다.
의상을 공경하는 국왕이 토지와 노복을 보시하고자 제의했는데, 이에 의상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사양했다. “우리의 불법은 평등하여 고하가 함께 균등하고, 귀천이 같은 도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열반경에서는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田莊이 필요하고, 어찌 노복을 거느리겠습니까? 빈도는 法界로써 집을 삼고, 바루로 농사를 지어서 익기를 기다립니다. 法身의 慧命이 이를 의지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상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강조하면서 국왕의 제의를 거절했던 것이다.
경흥(-681-)의 생몰년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략 620년경으로부터 700년경까지 생존했을 것이다. 경흥은 47종이나 되는 저서를 남겼는데, 이것은 그 무렵 원효 다음으로 많은 것이었고, 또한 그의 교학은 불교 전반에 걸치는 것이었다. 당시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원효와 의상과 경흥의 위치에 주목하면서 이들의 신라 왕실과의 인연 및 그 역할에 유의할 때, 이들이 신라 왕실의 현실 정치에 끼친 영향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그것은 불교정치사상에 대한 한 단계 높은 이해와 그 활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4. 원효의 화쟁사상
1) 왜 원효인가?
신라 화엄종의 시조 의상의 화엄사상도 통일직후의 민족융합이나 사회통합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華嚴的인 세계관에 의하면, 존재들의 평화로운 공존과 화해, 포용과 상호 존중의 통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붓다, 그 분이 깨달은 것은 ‘緣起의 도리’였다. 신라의 의상도 말했다. “연기라는 한 마디 말로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이 손바닥을 보듯 분명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諸法]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거대한 은하계거나 혹은 미세한 먼지일지라도. 이를 화엄에서는 重重無盡의 法界緣起라고 한다. 우주는 서로 의존하고 있는 총체적 세계, 제석천의 거대한 그물, 즉 인드라망처럼 얽혀서 서로 영향 준다. 상데리아 구슬들이 서로 비추듯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무수히 분리된 개체로 구성된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조화를 이루는, 그러기에 나눌 수 없는 전체로 역동적인 관계의 거물이다. 그래서 의상은 “전체라는 하나 속에 일체의 다양한 것들이 있고, 많은 개별 중에 전체라는 하나가 있다[一中一切多中一]”고 했다. 의상에 의하면, 전체와 부분은 卽과 中의 관계로 설명된다. 하나가 곧 일체고, 일체가 곧 하나이다. 하나 속에 전체가, 그리고 전체 중에 하나가 있다. 결국 존재간의 공존과 조화를 강조하는 화엄사상은 통일 직후의 민족 통합에 기여했을 것이다.
삼국통일 이후의 민족융합과 사회통합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원효의 화쟁사상이라고 하겠다. 7세기 삼국통일 전쟁의 와중에 살았던 원효는 和諍의 방법을 모색해서 十門和諍論이라는 명저를 남겼고, 훗날 和諍國師에 추봉되는 영광을 누렸다. 원효에게 있어서 화쟁은 세계와 인생의 본래의 모습을 의미하는 당위이면서 동시에 그의 학문 방법론이자 실천행의 목표이기도 했다. 원효가 추구했던 화쟁의 방법,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원효(617-686)는 삼국간의 전쟁과 통일이 있었던 격변의 7세기에 살았다. 修行과 敎學에 매진하는 젊은 시절을 보냈고, 요석공주를 만나 환속하여 小性居士로 자처하기도 했다. 歌舞로 千村萬落을 누비며 대중을 교화 했고, 밤을 지새우며 교학에 몰두하기도 했다. 70년의 빛나는 생애를 마감할 대까지. 원효는 위대한 學僧이었다. 천부적 재능과 불같은 열정과 냉철한 비판안과 정확한 논리, 그리고 뛰어난 문장력을 갖춘 학승이었다. 100여 부 24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저술가였고, 三藏과 大小乘 경전에 두루 통했던 웅대한 안목으로 古今의 오류를 바로 잡고, 和諍을 강조했던 사상가였다. 그리고 원효는 無碍의 대자유인이었다. 그는 인간이 온갖 사슬과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려야 함을 이론적으로 밝혔을 뿐 아니라 온 몸으로 이를 구현했기에.
신라에서는 원효를 ‘丘龍大師’로 불렀다. 丘龍이란 靑丘의 용이라는 의미였다. 또한 그는 ‘萬人之敵’으로도 불렸는데 만 명을 능히 당해내는 위대한 장수에 원효를 비긴 호칭이다. 고려 숙종 5년(1101)에는 국가에서 원효를 ‘동방의 성인’으로 공인하며 和諍國師의 호를 추증했다. 고려의 대각국사 義天은 원효를 聖師로 존칭했고, 원효 오른쪽에 가는 분은 없다고 하면서, 오직 龍樹와 馬鳴만이 원효와 짝할 수 있다고 했다.
2) 和諍國師의 영광
원효의 화쟁사상은 일찍이 신라시대로부터 주목되어 왔다. 9세기 초의 기록인 誓幢和上碑文에서는 십문화쟁론을 원효의 대표적인 저술로 인식하면서, 화쟁의 의미를 부각시켰고, 이 책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훌륭하다는 칭송을 받았다고 했다. 원효의 여러 저술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이 책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당나라와 일본에 유포되었고, 당나라에 왔던 陳那門徒에 의해서 멀리 천축에까지 전해지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화쟁사상은 원효사상의 핵심으로 파악되었다. 의천과 河千旦은 원효를 ‘백가의 서로 다른 논쟁을 화해시킨(和百家異諍)’ 인물로 평했다. 원효에게 화쟁국사라는 시호를 추증했던 것은 원효사상의 특징을 화쟁으로 파악한 때문이었다. 金富軾은 和諍國師影贊을 지었다. 12세기 후반에는 분황사에 화쟁국사비가 건립되었는데, 지금은 비의 대좌만 전한다.
3) 막힘없는 無碍人
원효에게는 굴레가 없다[元曉不羈]고 했다. 그는 해방자였고 자유인이었다. 불교로부터도, 승려라는 형색으로부터도, 지식으로부터도, 명예로부터도, 계율로부터도, 그는 언제나 자유로웠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는 자유를 이론적으로 규명하여 二障章을 남겼고, 자신의 삶으로 이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의 無碍行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원효는 일정한 범위나 틀 속에 안주하기를 거부했다. 그가 ‘遊方外’, ‘超出方外’를 강조했던 것도, 무애인으로 행동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나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원효는 화엄경의 이 게송을 재발견했고, 이로부터 無碍라는 용어를 취했다. 걸림 없이 행동하는 원효는 無碍自在하여 일시에 몸을 백 곳에 나타냈다는 설화까지 생겨났다. 너무 바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몸이 열 개라면 좋겠다”고 말한다. 원효가 일시에 몸을 백 가지로 분신했다는 이야기에는 소박한 사람들의 희망이 투영되기도 했다.
無礙는 화쟁사상과도 연결된다. 세상에는 境界가 많다. 界는 영역이나 범위를 나타낸다. 나와 너, 그리고 이쪽과 저쪽을 가로막는 장벽들이다. 方도 일정한 구역 또는 영역을 의미한다. 방이란 경계끼리 각을 이루는 모양이다. 礙는 서로 다른 계를 가로막는 장벽들이다. 무애란 가로 막는 장벽들의 완전한 제거를 의미 한다. 方外는 일정한 범주와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일정한 범위와 틀을 벗어나는 것, 그것이 ‘유방외’며, ‘초출방외’다. 무애의 礙란 방해하고 정체시키는 것이기에 무애란 결국 경계와 장벽의 타파를 의미하고, 이를 통해 확대와 통합이 가능하다. 장벽의 제거가 사람을 무애의 세계로 이끈다. 무애란 집착의 소멸을 통하지 않고서는 가까이 하기 어렵다. 융섭(融攝)은 걸림(礙)의 제거에 의해서 열린다. 무애란 자성의 울타리가 제거된 것이다. 무애는 空에 대한 이해 없이는 실현되기 어렵다. 모든 사물은 상호 의존하여 일어나므로 공한 것이다. 이쪽과 저쪽을 경계 짓고 있는 界의 융통과 무애가 가능한 이유는 空은 緣起며, 無碍며, 無執이며, 無我며, 無住인 것이다. 연기법상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걸림 없이 하나로 융합하고 있는 것을 無碍鎔融이라고 한다.
4) 경계의 담장을 허물고
원효는 출가 수행자의 모습과 환속한 거사의 모습을 하기도 했다. 머리를 깎으면 원효대사요 머리를 기르면 小性居士였다. 요석공주와의 만남은 다시 세속으로 돌아오는 강렬한 몸짓이었다. 그가 “出世法은 世間法을 치유하는 법이고, 出出世法은 출세법을 치료하는 법이다”라고 한 섭대승론의 구절에 주목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금강삼매경에는 출가와 재가의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대목을 주목한 원효는 道俗二邊의 상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이해했다. 출가와 재가, 혹은 道俗 두 가지 모습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원효의 이 말은 세간과 출세간, 세속적인 삶과 종교적인 삶, 聖과 俗 그 어느 쪽에 치우쳐도 안 된다는 것이다.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되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잡보장경의 이 구절은 인간 원효에 그대로 적용시켜도 무방할 것 같다. 그는 높이 나는 봉황새의 기상을 갖고도 산기슭에 사는 작은 새의 행복을 잊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자긍심이 있었다. 서까래 아닌 하나의 대들보임을 자부하고, 하늘을 떠받칠 기둥[天柱]으로 자처할 만큼의 자긍심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만의 콧대를 스스로 꺾을 줄 알았기에 소성거사의 모습 하고서 낮은 곳으로 임했다. 그는 환속하여 小性居士로 자처할 수 있었기에 小乘의 소중함도 잊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날개 짧은 새는 산림에 의지하여 형을 기르고, 작은 고기는 여울물에 엎드려 본성을 편안히 한다. 이 때문에 천근한 가르침도 역시 함부로 하지 못한다”라고. 그리고 크고 작은 것이 다 보배라고 말하기도 했다. “옷을 깁을 때는 짧은 바늘이 필요하고, 긴 창이 있어도 그것은 소용없다. 비를 피할 때는 작은 우산이 필요하고, 온 하늘 덮는 것이 있어도 소용없다. 그러므로 작다고 가벼이 볼 것이 아니다. 그 근성을 따라서는 크고 작은 것이 다 보배다.”
대승적인 삶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다. 영웅적이고 혁명적으로 사는 사람만이 잘난것이 아니다. 소승적이고 소시민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소중한 것이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일등만 소중한 것이 아니고, 잘난 사람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다.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행복할 수 있는 소승의 인정, 이렇게 원효에게는 대승과 소승도 대립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인정과 도리가 상충할 때가 많다. 이런 경우, 상대방의 의견과 같지도 않게[非同], 그리고 다르지도 않게[非異] 말하라고 원효는 가르쳐주고 있다. 즉 “상대방과 다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정에 어긋나지 않고(由非異故 不違彼情), 같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도리에도 위배되지 않을 수 있어서(由非同故 不違道理), 정에도 도리에도 서로 바라보며 어긋나지 않는다(於情於理 相望不違).” 현실적 삶에는 人情과 道理의 문제로 고민할 때가 많다. 우리는 자주 합리적이라는 말로 재단하려 하지만, 인정 없는 세상은 분명 삭막하다. 어떻게 상대방의 정에도 도리에도 어긋나지 않을 수 있을까? 원효는 「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 「妙契環中」이라고 했다.
5) 화쟁의 논리와 방법
원효의 화쟁사상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화쟁의 논리와 방법이다. 원효의 화쟁은 상반된 두 세계를 妙合하는데 있었고, 이런 사유의 논리를 그는 「融二而不一」이라고 불렀다. 즉 원효의 화쟁 정신이란 두 가지를 융합하나 하나로 획일화 하지 않는 것이었다. 원효의 논리는 양자택일이나 변증법적인 통일의 논리와는 다르다. 원효는 「 融二而不一 」, 「離邊而非中」, 「妙契環中」 등의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 같고 다름[同異]에 관한 원효의 설명을 예로 들어보자.
그에 의하면, 같거나 다른 것도 서로 바라보며 서로 비추는 즉 相望하고 상조(相照)하는 관계일 뿐, 평행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같다(同)고 하는 것도 다른 것(異)을 녹여서 다 같이 만든 것이 아니다(辨同於異者 非銷異爲同也).” 원효의 이 말은 異見을 가진 사람을 다 몰아낸 뒤에 같은 견해로 획일화하는 것이 화쟁이 아니라는 의미다. “평등이란 학의 다리를 끊어서 오리 다리에 잇는 것도, 산을 무너뜨려 골짜기를 메우는 것도 아니다.” 白雲화상의 이 말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면 많은 시비를 종식시키기 어렵다.
서로 다른 두 가지의 融合은 일치나 同質性을, 그리고 劃一化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분법적 단순 논리가 강조될 때, 자신만이 선하고 자기와 입장이 다른 모든 국가와 민족은 악하다는 극단적인 독선주의는 갈등을 더욱 부추긴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거나, 한 가지 입장만을 절대화하면 문제가 생긴다. 오직 자신의 견해만을 주장할 뿐 다른 사람들의 異見에는 귀를 막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의 길만을 가야한다고 고집하는 종교가 적지 않다.
세상의 이치는 오직 한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문은 많고, 그 문으로 향한 길도 많다. 길은 여러 방향으로 나 있다. 평탄한 길도 있고, 가파른 길도 있다. 길이 없어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산을 오를 수도 있다. 인생의 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원효는 起信論疏에서 “법문은 한량없어 오직 한 길만이 아니다(法門無量 非唯一途). 이 때문에 곳을 따라 시설해서 모두 도리가 있다(故隨所施設 皆有道理).”라고 말했다. 세상의 이치는 하나가 아니지만(不一), 그렇다고 서로 다르기만 한 것도 아니다(不異).
이를 두고 원효는 말했다. “하나가 아닌 까닭에 모든 부문에 해당하고(由非一故 能當諸門), 다른 것이 아닌 때문에 모든 문이 한 맛이다(由非異故 諸門一味).” 다양성의 인정, 그것은 본래 불교의 기본 입장인 동시에 원효 화쟁 논리의 한 전제이기도 하다. 비좁고 옹색한 가슴을 열면 창창한 하늘이 열린다. 원효는 “일체의 他義가 모두 다 佛義”라고 가슴을 열었고, “외도의 갖가지 다른 선도 모두 一乘이다”고 인정했다.
상대방과 더불어 대화하고 소통하는 일, 이 일은 일상적인 것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가? 마음을 열고 귀 기우려 진정으로 듣고 있는가? 건성으로 듣는 척하며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는 없는가? 행여나 자신의 말만 열심히 지껄이다가 상대방의 이야기는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마는 경우는 없는가? 무엇을 이해하거나 설명하거나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입장이나 위치, 방향 등에 얽매여 있는 경우가 흔히 있다. 사람들은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다.
자신의 안경으로 보고, 자기가 가진 잣대로 재며, 자기중심으로 인식하려 든다. 이로 인해 我執이 생겨난다. 원효는 “종래에 기신론을 해석한 이들이 많지만 진정으로 그 뜻을 밝힌 사람은 적다”고 했다. 그는 그 이유를 “각자는 자신이 익힌 것을 지켜 문구에 구애되고 능히 마음을 비워서 뜻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論主의 뜻에 가까이 하지 못한다”고 했다. 마음을 비우고 기신론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바를 따라서 이해하려하기 때문에 저자 마명의 뜻에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편협하여 자신의 종교나 의견에 집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편협한 생각에 얽매여 일방적으로 한 면만을 고집하거나 한 가지 입장만을 절대화하고 독단화 하면 문제가 생긴다. 이런 경우를 두고 원효는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자기가 조금 들은 바 좁은 견해만을 내세워, 그 견해에 동조하면 좋다고 하고, 그 견해에 반대하면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마치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것과 같아서, 그 구멍으로 하늘을 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편협한 사람은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 고정된 자기 견해에만 열광적으로 집착함으로 다른 의견, 즉 이견(異見)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자기 견해와 같지 않은 주장이면 모두 다 틀렸다고 한다. 그래서 원효는 말했다. “집착을 떠나 말하면 합당하지 않음이 없고, 만약 집착하여 말과 같이 취하면 파괴하지 않음이 없다(離著而說 無不當故若有著者 如言而取 無不破壤故).”
언쟁에는 말이 문제다. 말은 본래부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그러기에 손가락은 보지 말고 달을 보면 그만이다. 원효는 말했다. “나는 말을 빌려 언어가 단절된 진리를 보여주고자 한다. 마치 손가락으로 손가락을 떠나 있는 달을 가리키듯이(我寄言說以示絶言之法 如寄手指 以示離指之月).” 말꼬리를 잡는 태도는 옳지 않다.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을 살려서 듣는다면 허용하지 못할 어떤 것도 없다. 그러기에 원효는 말했다. “말과 같이 취하면 모두가 허용되지 않고, 뜻을 얻어 말하면 용납하지 못할 것이 없다(如言而取 所說皆非 得意而談 所說皆是).” 말꼬리를 잡는 태도는 손가락 끝만 보고 달이 아니라고 책망하는 꼴이다. 원효는 말했다. “도리가 있기에 모두 허용되지 않음이 없다. 허용되지 않음이 없기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有道理故 悉無不許 無不許故 無所不通).”
5. 마무리
7세기 삼국간의 항쟁은 치열했다. 따라서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된 직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민족의 융합과 사회통합이었다. 삼국민 공통의 종교였던 불교는 민족 융합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백제 출신의 경흥을 통일신라 최초의 국사로 삼았던 것도 삼국민의 융합을 위한 것이었다. 통일 직후에 창건된 부석사를 중심으로 화엄사상을 전개한 의상 또한 사회통합에 기여했다. 화엄사상의 특징은 모든 존재의 공존과 화합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효가 십문화쟁론을 저술하여 화쟁사상을 강조했던 것은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원효의 화쟁사상은 불교의 여러 논쟁을 화쟁하려는 본질적인 것이었지만, 이러한 그의 사상이 전쟁의 시대 7세기에 형성되었고, 당시 십문화쟁론을 본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칭송했던 점으로 미루어 당시 사회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출처: 감로수 한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