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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순왕후의 결혼
영조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1759년 6월 창경궁에서는 큰 잔치가 열렸다. 35년이나 재위한 국왕 영조는 왕비 정성왕후가 사망한 후, 신하들의 성황에 못 이기는 척하며 어린 신부를 맞이하는데 동의하였다. 6월 22일은 신부가 왕비 수업을 받고 있는 별궁 어의궁에 행차하는 날, 조정의 신하들은 현왕의 결혼식이라는 국가 최고의 행사 준비로 분주했고, 왕의 결혼식을 직접 볼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된 백성들의 마음도 덩달아 뛰어올랐다.
1759년 6월에 이루어졌던 왕실 결혼식의 전 과정과 행사 참여자들의 모습은 의식이 끝난 후에 작성한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 로 완벽하게 정리되었다. 의궤와 함께, 조선왕조실록, 『한중록』 등 조선시대 궁중풍속을 알려주는 자료를 통하여 당시 결혼식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두 주인공, 영조와 정순왕후
1) 조선의 최장수 집권 왕 영조(英祖)
영조(1694~1776)는 우리나라 역대 국왕 중에서 최장수 집권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균역법, 탕평책 등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치세 52년간은 조선후기 정치ㆍ문화의 부흥기였다.
영조는 1694년 아버지 숙종과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 숙빈 최씨 사이에서 숙종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무수리’란 원래 몽고의 궁중어인 ‘궁중에서 일하는 소녀’라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궁중에서 허드렛일에 종사하던 어린 계집종을 일컫는 말이었다. 중국어로는 수사(水賜) 또는 수사이(水賜伊)라 하고 그녀들이 거주하는 곳을 수사간(水賜間)이라 하였는데, 우리나라에는 몽고와 교유하던 고려후기에 전래되어 조선시대에는 완전히 궁중의 청소일을 맡은 어린 여자종을 뜻하는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무수리는 처음에는 당번의 형식으로 교대로 궁중에 출입하였으나, 태종 때부터 궁중의 소식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궁내에 상주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영조의 생모는 7세에 궁중에 들어가 허드렛일 맡은 무수리에서 궁중생활을 출발할 만큼 신분이 미천한 인물이었으나, 결국에는 당시의 국왕인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의 위치에 올랐고, 1694년 마침내 왕자인 연잉군(후에 英祖)를 낳기에 이르렀다. 영조는 이처럼 숙종과 최나인의 드라마틱한 결합으로 탄생하였지만, 출생의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나 52년간 왕위를 지키면서 조선시대 최장수 국왕으로 우리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영조는 숙종 사후 왕위계승의 폭풍에 휘말렸던 인물이었다. 영조는 1721년 노론의 지지에 힘입어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21년 장희빈의 아들이었던 경종이 소론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국왕으로 즉위한 후 영조를 지지했던 노론 인사들이 대거 처형되면서 그의 위치 또한 불안정해졌다. 특히 영조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노론사대신’으로 불렸던 김창집, 이이명, 조태구, 조태채의 죽음은 이후의 정국에 파란을 몰고 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노론의 지원을 얻은 영조가 1724년 경종의 뒤를 이어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노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영조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영조는 1704년 달성 서씨인 진사 서종제의 딸과 혼인하였다. 영조는 당시 숙종의 제4왕자인 연잉군의 위치에 있었으며, 연잉군과 혼인한 정성왕후는 달성군 부인에 봉해졌다. 당시 『숙종실록』 의 기록에 ‘이 혼인은 사치가 법도를 넘어 비용이 만금(萬金)으로 헤아릴 정도였다’고 표현하여 이 혼인이 대단히 호화로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조가 자신이 국왕으로 있으면서 계비를 맞이한 정순왕후의 결혼식에서 철저히 사치를 방지하라고 강조한 것은 이때의 경험이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서씨 부인은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올라 정성왕후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영조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이 1757년 사망했다.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는 홍릉(弘陵)이다.
영조는 1757년 왕비 정성왕후가 사망하자, 1759년 계비로 경주 김씨 김한구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66세의 영조에게 15세의 꽃다운 신부가 계비로 들어온 것이다. 이 신부가 곧 정순왕후이다. 51세의 나이차가 무척이나 커보였지만 어린 계비 또한 영조 못지않게 야심에 찬 여걸이었음은 후대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조선후기 정치ㆍ문화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영조와 정조의 죽음 후에 전개되는 조선후기 세도정치의 쟁점에 바로 이날의 꽃다운 신부가 자리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영조는 정순왕후와 만년의 삶 17년을 함께 보내다가 1776년 3월 5일 경희궁에서 보령 83세로 승하하였다. 그리고 그해 7월 27일 조선건국의 시조 태조가 모셔진 건원릉 서쪽의 두 번째 산줄기에 모셔졌다.
2) 15세의 신부 정순왕후 김씨
정순왕후 김씨는 경주 김씨 김한구(金漢耈)의 딸로 1745년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하였다. 정순왕후는 15세의 꽃다운 나이에 영조에게 시집와서 청춘의 대부분을 노년의 국왕 뒷바라지에 바쳤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영조와의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다. 영조가 83세에 사망했으니, 17년간의 젊음을 자식에 대한 애정 없이 오로지 노년의 국왕에게 자신의 청춘을 바친 셈이었다. 정순왕후는 특히 자식인 사도세자 내외와는 무척이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장성한 왕자가 대권을 계승하려는 현실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나이 어린 왕비의 존재는 어느 시대에나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가 계비 강씨를 맞아들이고 급기야 그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을 때, 신덕왕후의 아들인 이방원(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동생을 죽이고 왕비 강씨와도 끝까지 화합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것이다.
시집을 올 당시 정순왕후는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나 며느리인 혜경궁 보다 10살이나 아래였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아들로 1736년 2세가 되던 해에 왕세자(사도세자)로 책봉되고 15세에 대리기무를 맡는 등 정치에도 남다른 능력을 보였으나 부왕인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갈등 때문에 뒤주에 갇혀 죽은 비운의 인물이다. 사도세자는 그의 아들인 정조가 왕이 된 직후에 남다른 효심을 보이고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 을 저술함으로써 일반 사람들에게도 비참한 죽음이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자 비록 31살에 불과했지만 곧바로 왕실의 최고어른이 되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충격적인 죽음은 정조와 정순왕후에게 서로간에 화합할 수 없는 갈등을 내재하게 하였다. 특히 정순왕후는 아버지 김한구와 그녀의 형제들인 김귀주, 김관주의 사주를 받아 나경언이라는 인물이 사도세자의 부도덕과 비행을 상소하게 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이처럼 정순왕후의 친족들은 영조대에 노론 벽파의 핵심인물로 활약하면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는 정치적으로 크게 대립하였다. 이러한 정순왕후의 정치노선은 시파의 입장에 서 있었던 정조와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되었다.
정조에게 있어서 정순왕후가 왕실의 부담스러운 할머니로 인식되었음은 정조시대 왕실의 최대경사인 혜경궁의 회갑일에 정순왕후를 모시지 않은 것에서도 나타난다. 1795년(정조 20) 정조는 혜경궁 홍씨와 돌아가신 부친(사도세자)의 회갑일을 맞이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할 것을 지시한다. 그런데 정조는 그의 부인 효의왕후를 대동하지 않고 다만 그의 누이동생들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의 수행만을 명한다. 왜 그런 조치를 취했을까? 표면상 정조는 왕실의 최고어른인 정순왕후 혼자만을 궁에 남기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자신의 부인에게 정순왕후의 수발을 부탁한 것이지만, 내심은 정순왕후의 참여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부친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의 경사에 바로 그 죽음에 깊이 관여했던 할머니 정순왕후를 참여시킬 수 없다는 것이 정조의 깊은 속뜻이 아니었을까?
1800년 정조의 급서는 야심에 찬 여인 정순왕후에게 정치적으로 날개를 달아주는 계기가 되었다. 『순조실록』 의 즉위년 7월의 기사를 보면 정순왕후는 스스로 ‘주상이 나이가 어리니 내가 여주(女主)로서 조정에 임한다’고 하면서 국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할 것임을 시사하였다. 이후 정순왕후는 여군(女君) 또는 여주(女主)로 자처하면서 3년 반 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조가 구축해놓은 탕평정치의 기반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단순히 사학(邪學)으로만 규정되던 서학(천주교)을 금기시하여 서학을 믿던 사람들을 국가반역자 집단으로 규정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으니 이것이 1801년의 신유박해이다. 신유박해는 정순왕후가 주연으로 활약한 대표적인 천주교 박해사건이었다. 신유박해의 여파로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삼형제를 비롯한 이가환, 권철신 등 남인학자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이들은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했던 인사들로서, 자의건 타의건 천주교 신자라는 모함을 받고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1759년 6월 22일 15세의 꽃다운 신부가 되어 국왕 영조를 수줍게 바라보았을 이 여인 정순왕후는 순조 즉위 후에 왕실의 최고어른이 되자 여자 군주임을 자처하고 정치에 적극 개입하였다. 그녀는 정조의 개혁정치를 지원하던 세력들을 대거 제거하면서 경색 정국을 이끌어가는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1804년(순조 4) 순조의 친정체제가 이루어지자 수렴청정을 마치고 왕실의 최고어른이라는 상징적 존재로 되돌아갔다. 권력을 잃은 허망함이 죽음을 재촉했는지 창덕궁 경복전에서 승하하였다. 1805년(순조 5) 1월 12일 조정에서는 그녀의 환갑잔치 준비로 들떠 있었던 때였다.
정순왕후는 그해 6월 20일 영조의 무덤인 원릉 옆에 모셔졌다. 원래의 정비인 정성왕후가 국왕인 영조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후대의 영조를 위하여 무덤의 옆자리를 남겨 놓았지만 영조는 사망 후에 따로 원릉에 묻혀 졌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는 계비 정순왕후가 30년 만에 돌아왔다. 국왕 영조는 어린 계비가 쓸쓸히 혼자 묻히는 것을 지하에서도 원치 않았던 것일까?
2. 영조와 정순왕후의 결혼이야기
1) 왕실 혼인의 6가지 예법
왕실의 혼례는 국혼(國婚)이라고도 하였으며, 『국조오례의』 에는 국혼을 다시 왕과 왕세자, 왕세손의 혼례인 ‘가례’와 일반 왕자녀의 혼례인 ‘길례’로 구분하기도 하였지만, 조선후기 이후에는 대체로 가례라 하면 왕실의 혼인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영조는 숙종의 제4왕자로서 연잉군(延礽君)으로 있을 때인 1704년(숙종 30) 달성 서씨 서종제의 딸인 정성왕후(1692-1757)와 혼례를 올렸으며, 1757년 정성왕후가 사망하자 이해 6월에 경주 김씨인 김한구의 딸을 계비로 맞았으니 이가 곧 정순왕후이다. 1759년 6월 2일에 6인을 초간택하였고, 6월 4일에 유학 김한구, 현감 김노, 유학 윤득행의 딸을 재간택하였으며, 6월 9일에 김한구의 딸을 삼간택하였다. 혼례일은 日官이 정하도록 하여 6월 22일로 확정하였다.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를 토대로 결혼식의 주요 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조대 혼례식 일정
1) 간택 : 신부 후보 중에서 신부감을 선택함, 대개 3차에 걸친 간택의 과정을 거침. 1차 : 6~10명, 2차 : 3명, 3차 : 1명을 선발한다. (삼간택 : 6월 9일)
2) 육례의 절차
① 납채 : 간택한 왕비에게 혼인의 징표인 교명문을 보내고 왕비가 이를 받아들 이는 의식. (6월 13일)
② 납징(납폐) : 혼인 성립의 징표로 폐물을 보내는 의식. (6월 17일)
③ 고기 : 혼인 날짜를 잡는 의식. (6월 19일)
④ 책비(책빈) : 왕비 또는 세자빈을 책봉하는 의식. 왕비가 혼례복인 적의를 입고 책명을 받는 자리로 나간다. (6월 20일)
⑤ 친영 : 국왕이 별궁에 있는 왕비를 직접 맞이하러 가는 의식. (6월 22일)
⑥ 동뢰 : 국왕이 왕비를 대궐에 모셔와 함께 절하고 술을 주고받는 의식. (6월 22일)
2) 왕비의 간택
가. 삼간택을 실시하다.
왕실의 혼사에는 3차례의 간택이 실시되었다. 국가에서는 왕실의 결혼에 앞서 금혼령을 내리고 결혼의 적령기에 있는 팔도의 모든 처녀를 대상으로 ‘처녀단자’를 올리게 했다. 처녀단자를 올릴 필요가 없는 규수는 종실의 딸, 이씨의 딸, 과부의 딸, 첩의 딸 등에 한정되었으나, 실제 처녀단자를 올리는 응모자는 25-30명 정도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간택은 형식상의 절차였을 뿐 실제 규수가 내정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간택에 참여하는데 큰 부담이 따랐기 때문이었다. 간택의 대상이 된 규수는 의복이나 가마를 갖추어야 하는 등 간택 준비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혹 왕실의 부인으로 간택이 되더라도 정치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따랐기 때문에 이를 기피하는 경향이 컸다.
그러나 간택은 영예의 길이기도 했다. 혜경궁은 간택 후 집안에 변화가 왔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간택 이후 갑자기 찾아오는 친척들이 많고 전에는 절연되었던 하인들도 오는 이가 많아졌으니 인정과 세태를 가히 볼지라.” 권력층에 접근하는 세태는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아래의 자료는 혜경궁이 재간택에 임했을 때의 정황을 표현한 것이다.
“10월 28일에 재간택에 임하니 내 마음이 자연 놀랍고 부모도 근심으로 나를 궁중에 들여보내시면서 요행 간택에서 떨어져 나오기를 바라셨으나, 내가 궁중에 들어가자 그때 이미 완전히 정하여 계시던 모양이어서 거처도 대접하는 법도 달라 당황하다가 어전에 올라가니, 영조대왕께서는 다른 처자들과는 달리 발안으로 들어오셔서 친히 어루만져 사랑하시고 ‘내 아름다운 며느리를 얻었다. 네 조부를 생각하노라. 네 아비를 보고 좋은 신하 얻은 줄을 기뻐하였더니 네가 그의 딸이다.’ 하시며 기뻐하시고 또 정성왕후와 선희궁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분에 넘쳤고 여러 옹주도 나의 손을 잡고 귀여워하였다. 즉시 내보내지 아니하고 경춘전(景春殿)이라 하는 집에 머무르매 예법에 맞는 몸가짐을 차리러 갔던지 오래 머무니, 점심을 보내시고 나인이 웃옷을 벗겨 척수를 하매 내 심사가 경황하여 눈물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고 가마에 들어 울고 나오니 궁중의 하인들이 부축하여 주어 놀랍기 비할 데 없었다.”
위의 내용 중 ‘내가 궁중에 들어가자 그때 이미 완전히 정하여 계시던 모양이어서 거처도 대접하는 법도 달라 당황하다가’라는 표현에서 간택 당시 홍씨는 자신이 이미 선택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왕비를 간택할 때 세 차례의 심사과정을 거침으로써 왕비 간택에 최대한 공정성을 기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왕비를 뽑는 중요한 행사를 전국적으로 알려 축제분위기를 조성하고 전국에 걸쳐 널리 왕비감을 물색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과시하고자 하였다. 왕비 간택시에는 먼저 상궁으로 하여금 왕비로 예정된 처녀의 집으로 가서 뜻을 정하고 당사자를 살폈다. 그러나 실제 왕비는 미리 내정된 경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왕비의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은 짧은 기간 안에 이루어졌다. 영조의 경우 초간택이 6월 2일 삼간택이 6월 9일로 불과 1주일 만에 왕비를 뽑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간택에 참가한 처녀들은 같은 조건에서 후보를 고른다는 취지에서 모두 똑같은 복장을 입었다. 초간택시의 복장은 노랑저고리에 삼회장을 달고 다홍치마를 입었다. 재간택, 삼간택으로 올라갈수록 옷에 치장하는 장식품은 조금씩 늘었다. 삼간택에서 최종적으로 뽑힌 처녀가 부인궁으로 나갈 때 입는 옷은 비빈(妃嬪)의 대례복으로 거의 왕비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삼간택에 임하는 어린 왕비의 가슴은 부모와의 이별이 무척이나 아쉬웠던 듯하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 에서 “삼간이 동짓날 열사흘이어서 남은 날이 점점 적으니 갑갑하고 슬퍼서 밤이면 선비 품에서 자고 두 고모와 둘째어머니께서 어루만지며 이별을 슬퍼해 주셨고 부모께서 여러날 잠을 못 주무셨으니 지금도 그 당시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힌다”고 하여 사가(私家)와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였다.
나. 간택과 정순왕후의 지혜
1925년 강효석이 편찬한 『대동기문(大東奇聞)』 이라는 책에는 정순왕후가 왕비 후보자로 뽑혀 국왕인 영조 앞에 섰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먼저 정순왕후는 다른 후보자들과는 달리 방석을 치우고 자리에 앉았는데 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 방석에 부친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이라 답하였다. 당시 간택을 할 때 후보자의 위치를 구분하기 위하여 간택된 사람의 부친의 이름을 의자의 방석에 적어 놓았던 것이다. 또 영조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혹은 산이 깊다, 혹은 물이 깊다 하였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하였다. 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 ‘물건의 깊이는 가히 측량할 수 있지만 인심은 결코 그 깊이를 잴 수 없다’고 답하였다. 이어 영조가 꽃 중에는 어떤 것이 제일 좋으냐는 질문을 던졌다. 왕비 후보들은 저마다 복숭아꽃, 매화꽃, 모란꽃이라고 대답하였지만, 정순왕후만은 목화꽃이라고 답하고, ‘다른 꽃들은 모두 일시적으로 좋은데 불과하지만 오직 목면은 천하의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공이 있습니다.’라고 그 이유를 들었다. 당시 비가 오고 있었는데, 국왕은 다시 후보들에게 궁궐의 월랑(月廊)의 수가 얼마냐는 질문을 던졌다. 후보들은 저마다 위를 보면서 손가락으로 하나, 둘, 셋, 넷의 숫자를 세었지만, 정순왕후는 홀로 머리를 내리고 침묵하고 있었다. 국왕이 너는 알았느냐고 묻자,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면 행랑의 수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지혜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간택을 받을 당시 정순왕후는 속이 깊고 지혜로운 규수의 면모를 보여 영조의 마음에 쏙 들었다는 일화가 『대동기문』에 전한다. 그런데 『대동기문』에는 또한 정순왕후가 왕비로 뽑힌 후에 상궁이 옷의 칫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라고 추상같이 말하였다. 왕비로서의 체통을 그대로 지키고자하는 정순왕후의 뜻이 나타난 것이었다. 지혜로움 속에 내재하는 추상같은 면모, 어쩌면 이런 모습이 세도정치기 폭풍의 중심에 있었던 정순왕후의 캐릭터가 아닐까?
다. 간택에는 무엇이 중시되었을까?
간택에는 규수의 집안이나 처녀의 용모, 행실이 주요한 기준이 되었다. 오늘날처럼 용모나 언어가 간택의 기준이 되었던 사실이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먼저 세종대에 세자빈을 간택하면서 국왕과 신하들이 주고받았던 대화들을 살펴보자. 세종은 황희ㆍ맹사성ㆍ변계량 등 신하들과 함께 세자빈 간택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이제 동궁을 위하여 배필을 간택할 때이니 마땅히 처녀를 잘 뽑아야 하겠다. 세계(世系)와 부덕(婦德)은 본래부터 중요하나, 혹시 인물이 아름답지 않다면 또한 불가할 것이다. 나는 부모된 마음에서 친히 간택하고자 하나 옛 예법에 없어서 실행할 수가 없으므로, 처녀들을 창덕궁에 모이게 하고 내관으로 하여금 시녀와 효령대군과 더불어 뽑게 하면 어떻겠는가." 하니, 신하들이 모두 "좋습니다." 하였으나, 허조만 유독 "불가하옵니다. 만약에 한 곳에 모이게 하여 가려 뽑는다면 오로지 얼굴 모양만을 취하고 덕을 보고 뽑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잠깐 본 나머지 어찌 곧 그 덕을 알 수 있으리오. 이미 덕으로서 뽑을 수 없다면 또한 용모로서 뽑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처녀의 집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좋다고 생각되는 자를 미리 뽑아서, 다시 창덕궁에 모아 놓고 뽑는 것이 좋겠다." 하니, 모두가 "좋습니다." 하였다.
위의 기록에서는 가문이나 부덕과 함께 용모가 왕비 후보의 중요한 기준이었음이 명확히 드러난다.
『영조실록』에도 ‘아조(我朝)에 와서 간택한 것이 어느 세대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비루하고 또 불경(不敬)하여 단지 용모의 예쁘고 누추함과 언어의 조용하고 우아함으로써 취한다.’고 한 기록(『영조실록』 영조 35년 6월 4일)이 나타나는데, 당시 용모와 언어가 간택의 주요한 기준이었던 세태를 풍자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왕실에서 선호한 왕비감은 오늘날 미인의 기준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음이 발견된다. 먼저 현재 사진으로 남아있는 현존하는 조선후기 왕비들의 사진을 보면 현대적 기준으로 그리 뛰어난 미인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조선후기의 화원 신윤복의 미인도에 그려진 미인의 얼굴이 실제 왕비들의 모습과 흡사한 점이 있다. 얼굴이 복스럽고 턱은 둥글고 크며 눈은 가늘고 눈썹이 가지런한 모습이다. 조선시대에 선호되었던 인물은 전반적으로 견실하고 반듯한 모습을 갖추었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미인에 대한 기준이 시대에 따라 달라졌음은 중국의 절세미인이라는 양귀비가 매우 통통한 모습의 여인으로 전혀 현대적인 미인의 모습이 전혀 아니라는 점에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는 조선시대의 미인들은 전체적으로 견실하고 반듯한 모습의 여성이었다. 왕비 후보감 또한 8등신의 날씬한 미인보다는 이러한 요건을 갖춘 여성들이 보다 후한 점수를 받았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인조에서 숙종대에 왕비로 책봉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서인 명문가의 딸로서 그만큼 당시에는 서인 외척들의 정치세력이 컸음을 반증해 준다. 인조에서 숙종대에 이르는 시기는 서인과 남인의 붕당 대립에서 서인이 전반적으로 득세해가는 시기였던 만큼 왕비 간택에서도 서인들의 영향력이 컸던 것이다. 붕당정치의 파장이 왕비의 간택에까지 연결되었던 대표적인 예로 장희빈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숙종대에 장희빈이 왕비로 책봉될 때 남인의 후원이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남인은 숙종 후반 서인과의 정쟁 속에서 정치적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장희빈이 숙종에게 사약을 받은 이유는 개인적인 자질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지만 서인과 남인의 붕당정치의 산물이라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3) 여섯 가지 예법에 담긴 의미들
가례의 기본이 된 예법은 대체로 여섯 가지 예법 즉 육례가 기본이 되었다. 그러나 육례는 왕실과 민간의 입장에 따라 그리고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유교 경전의 고전에 해당하는 『예기』 의 「혼의(昏儀)」편에는 납채, 문명, 납길, 납징, 청기, 친영의 6단계를 육례로 규정하였지만, 조선중기 이후 널리 채택된 『 주자가례』 에는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의 4례를 혼인의 예법으로 규정하였고, 조선후기 이재(李縡)라는 학자가 정리한 『 사례편람』 에도 4례만이 언급되어 있다. 혼인에서 육례로 대표되는 각종 예법과 의식이 준수된 이유는 혼인이 인륜의 대사로 인식하여 엄숙한 형식절차를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통시대의 혼인은 당사자들간의 결합이 아니라 중매인을 통해 집안간의 결혼이라는 점 때문에 주혼자(대개 신랑, 신부의 부모나 조부모가 해당됨)들 간에 지켜야 할 예절과 이에 따르는 형식 요건이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 혼인에서 준수된 여섯 가지 예법 즉 육례는 국왕이 혼인을 청하는 의식인 납채, 성혼의 징표로 예물을 보내는 납징(납폐), 책비와 친영의 날짜를 잡는 고기, 왕비로 책봉하는 의식인 책비, 국왕이 별궁으로 가서 신부를 모셔오는 의식인 친영, 국왕과 왕비가 함께 궁궐에서 잔치를 베푸는 의식인 동뇌였다. 친영은 육례 중에서도 최고의 행사로 오늘날 예식장에서 행해지는 결혼식에 해당하며, 동뇌는 해로를 맹세하는 잔치 의식이었다. 동뇌의 ‘뢰(牢)’의 뜻은 굳을 로, 애오라지 로, 우리 로, 옥로의 용례로 사용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굳게, 한결같이 우리가 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동뇌연(同牢宴)은 서민의 혼례에서는 초례(醮禮)에 해당한다. 서민의 초례상에는 절개를 상징하는 송죽(松竹),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쌀과 닭, 의지를 상징하는 밤, 장수를 상징하는 대추와 용떡, 부부간의 금슬을 상징하는 청홍사, 일심동체를 상징하는 술이 각각 차려지는데 이러한 상징물은 혼인 의식의 의미를 보다 강화시키고 있다. 즉 전통시대에 있어서 혼례에는 절개, 다산, 금슬, 장수 등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혼이라는 것은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식 중 납채, 고기, 책비의 의식은 창경궁의 명정전에서, 친영 의식은 별궁인 어의궁에서, 동뇌 의식은 창경궁의 통명전에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정궁으로 주로 기능한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서 혼례식이 이루어진 까닭은 당시 영조가 세자인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지시하고 본인은 이곳 창경궁에서 주로 생활했기 때문이었다.
4) 별궁에서 혹독한 왕비 수업을 받다.
왕실의 친영 의식에서 꼭 필요했던 공간은 별궁이었다. 별궁은 왕비 수업을 미리 교육하고 국왕이 사가(私家)에 직접 가는 불편을 없애기 위하여 만든 제도적 장치였다. 왕비가 될 규수가 왕실의 법도를 익히는 첫 장소가 된 곳이 바로 별궁이었던 것이다. 별궁의 제도는 삼간택에서 뽑힌 예비 왕비를 미리 이곳에 모셔 놓고 왕비가 된 후에 지켜야 할 궁중 법도를 익히게 하는 한편 가례의식에 거행되는 순서와 행사를 미리 준비하는 장소를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별궁에서 친영의 의식을 치름으로써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살리고 사가에서 국왕을 맞이하는데 따르는 부담을 줄일 수 있게 하였다.
별궁은 대궐과 사가와의 중간 위치에 놓여있다. 국혼을 앞두고 앞으로 육례의 절차를 치르기에는 사가의 규모는 대궐과 비해 볼 때 크게 떨어진다. 또 혼인날 왕이나 왕세자가 와서 초례(醮禮)를 치루어야 하는데 사가에 올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왕비 혹은 세자빈은 삼간택이 끝난 뒤 가례 날까지 머물면서 장래 국모로서의 교양과 수련을 쌓았다. 별궁은 일명 ‘부인궁(夫人宮)’이라고 하였는데 아직 책봉을 받지 않았으니 왕비 혹은 빈궁(嬪宮)이라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처자라고도 할 수 없으므로 별궁 체류 기간의 명칭은 공적으로 ‘부인’이라 칭하였던 것이다.
삼간택을 통하여 선발된 처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별궁으로 들어가서 왕비로서 갖추어야 할 여러 덕목들을 교육받았다. 삼간택의 선발 자체는 왕비로서 대우를 받는 첫 걸음이었다. 『한중록』 에서도 “(재간택이후) 그날부터 부모께서 나에게 말씀을 고쳐 존대를 하시고 일가 어르신네들도 공경하여 대하시므로 내 마음이 불안하고 슬픔은 형용할 수 없었다. 선친께서 근심 걱정을 하시며 훈계하시는 말씀이 많으시니 내가 무슨 죄를 진 것만 같아 몸둘바를 몰라 하면서도 부모 옆을 떠날 일이 서러워 어린 간장이 녹을 듯하며 만사에 아무 흥미도 없었다.”고 표현하여 집안에서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음과 어린 신부가 집을 떠나기를 아쉬워하는 마음이 피력되어 있다. 그나마 혜경궁 홍씨는 동갑나기 신랑에 시집갔지만 66세의 노신랑에 시집가는 정순왕후의 아픈 마음은 오죽 했을까?
별궁은 왕비의 예비교육 장소로 활용되면서 앞으로 닥쳐올 궁중생활을 미리 대비하는 기능을 하였다. 오늘날 정상적인 군대생활을 위하여 미리 훈련소를 두는 것과 같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예비 신부가 왕비 수업을 미리 교육받는 공간인 별궁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몇 차례 장소의 변화가 있었다. 현재 전하는 『 가례도감의궤』 에 나타난 별궁은 태평관, 어의궁, 운현궁의 세 곳이었다. 소현세자의 가례 때에 태평관이 별궁으로 사용된 것과 고종의 가례시에 대원군의 잠저였던 운현궁이 별궁으로 사용된 것을 제외하면 조선후기 별궁의 대표적 장소로 활용된 곳은 어의궁(지금의 연지동 카톨릭회관 부근)이었다.
별궁에서의 왕비 수업은 경력이 있는 상궁의 지도하에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별궁은 사가의 여인이 일국의 왕비로 비상하는 공간이었던 만큼 왕비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 예절, 품위 등을 체계적으로 교육받았다. 걸음걸이나 동작, 태도 등 궁중에서 갖추어야 할 예절이나, 『소학』 등의 유교 교양서들을 단기간에 학습할 것이 요구되었다. 『한중록』 에서도 다음과 같이 혜경궁 홍씨가 영조에게 친히 『소학』 을 받아 공부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궐내에 들어와 경춘전에 쉬었다가 통명전에 올라가 삼전(영조, 인원왕후, 정성왕후)께 뵈었다.... 날이 저물었기 재촉하여 삼전께 사배하고 별궁으로 나오니, 대왕께서 가마를 타는 곳까지 친히 오셔서 내 손을 잡으시고 ‘잘 있다 오너라. 『소학』 을 보낼 것이니, 아비에게 배우고 잘 지내다가 들어와라’ 하오시며 못내 귀여워하심을 받잡고 궁중에서 물러나오니 날이 저물어 불을 켰다.”
궁중예법은 그 절차가 특히나 까다로워서 육체적으로도 큰 고통이 따랐다. 한 예로 혼례시 대례복 차림을 한 왕비에게 장식되는 어여머리와 장신구는 무척이나 무거웠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말기 마지막 궁녀였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순종의 왕비인 윤비가 별궁생활의 혹독함을 여러차례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들을 고려한다면 별궁 생활은 무척이나 힘든 정신적, 육체적인 인내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삼간택에 최종적으로 선발된 왕비는 그 기쁨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혹독한 별궁생활을 통하여 왕비의 길이 보랏빛 장래만 보장하는 화려한 길이 아니라 고통과 인내가 수반되는 험한 여정임을 미리 실감하지는 않았을까?
강의를 마치며
1759년 6월에 행해졌던 영조와 정순왕후 결혼식은 66세 왕과 15세 신부의 결혼식이라는 점, 역사 속에 우뚝 선 두 인물의 결합이라는 점이 흥미와 함께 역사적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결혼식 과정을 꼼꼼하게 정리한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가 남아 있고, 의궤에 포함된 반차도는 결혼식 현장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고 있다.
최근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지면서 궁중 의식 재현 행사도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의궤는 역사적 사료에 근거한 궁중 의식 고증을 위해 우리 선조들이 미리 준비해둔 기록이라 할 만큼 그 가치가 뛰어나다. 의궤와 함께 궁중생활상을 보여주는 자료를 적절히 활용하여 양질의 문화콘텐츠의 개발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이다. 품격 있는 왕실문화의 적극적인 홍보와 세계로의 전파는 21세기 문화대국을 지향하는 우리 대한민국의 브랜드를 보다 높여줄 것으로 확신한다.
신병주(申炳周)
ㆍ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업 / 동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ㆍ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
ㆍ저서 「하룻밤에 읽은 조선사」,「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조선 최고의 명저들」,「고전소설 속 역사 여행」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