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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52
1월31일[성 요한보스코 사제 기념일/연중 제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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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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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JcObXDueoE
[살레시오회 신철균 파스칼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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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에게 영혼을 달라.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져가라!>
오늘은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 특히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의 착한 목자였던 성 요한 보스코 사제(1815~1888)의 축일입니다. 줄여서 돈보스코라고도 부릅니다.
돈보스코가 평생토록 추구했던 모토요, 그가 생애 내내 일관되게 지니고 살았던 화두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이었습니다. 그는 수시로 부르짖었습니다.
“나에게 영혼을 달라.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져 가라!”
그가 살아생전 직접 창립한 세 단체의 명칭을 통해 돈보스코란 인물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① 남자 청소년들의 교육사업을 위해 창립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 그는 여타 수도회와는 달리 자신이 창립한 수도회에 자신의 이름을 걸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이 각별히 존경했을 뿐 아니라 청소년 사목자로서 자신이 추구하고자 노력했던 롤모델이었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이름을 수도회 명으로 선택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교회 안에서 매력 넘치는 성인, 온유와 친절의 대명사로 유명합니다. 돈보스코는 자신이 시작한 청소년 교육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재물이나 권력, 힘이나 조직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자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돈보스코는 평생토록 강조했습니다. 체벌이나 폭력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인내와 사랑, 온유와 친절만이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사랑의 교육학, 예방 교육을 창시한 것입니다.
②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 줄여서 살레시오 수녀회라고도 합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수녀와 함께 여자 청소년들을 위한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립하였습니다.
돈보스코는 살아 생전 자신이 수행하고 이룩한 위대한 교육 사업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극찬하고 박수를 보낼 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항상 자신의 인생 여정과 교육 사업 안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돈보스코는 강하면서도 균형잡힌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를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수녀와 수녀회를 공동 창립하면서 지은 수녀회의 이름입니다. 성모님께 드리는 살아있는 감사의 기념비라는 뜻으로 수녀회의 이름을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회로 지었습니다.
③ 살레시오 협력자회: 돈보스코는 자신이 개척한 선구자적인 교육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 수도자들만으로는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예방 교육이라는 자신의 교육 이념에 뜻을 같이 하는 평신도들과의 협력을 위해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립했습니다.
살레시오 협력자회는 세상 속의 살레시오 회원들, 수도원 담밖의 살레시안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돈보스코의 정신과 영성, 그의 마음과 그가 지녔던 사랑으로 세상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살레시오 회원들은 전 세계 방방곡곡 진출 안 한 나라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가장 가난한 지역, 분쟁 지역, 청소년들이 심각한 학대와 착취를 당하는 나라에서 돈보스코께서 하셨던 바로 그 일을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수확할 것을 많은 데 일꾼이 심각하게 부족합니다. 돈보스코가 지녔던 그 따뜻한 마음으로, 그의 청소년 구원 사업에 기쁘게 참여할 일꾼들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이름으로 창립된 단체들은 32개 단체가 있으며, 회원 숫자는 40만 명에 달합니다. 살레시오회 회원만의(사제 및 수사) 현재 숫자는 1만4천 명가량이니, 돈보스코 영성의 보편성이 얼마나 광범위한 것인지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돈보스코의 이름과 영성으로 한국에서 활동 중인 단체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는 살레시오 회원이 창립한 수녀회입니다. 돈보스코 여자재속회는 세상 안에서 수도자처럼 생활하는 단체입니다.
◇성소 문의◇
살레시오회: 010-6221-3520,
살레시오 수녀회: 010-2894-8958, http://salesiansisters.or.kr
살레시오 협력자회: 010-9060-4091, https://asscc.kr
돈보스코 여자 재속회: 0507-1306-1505, http://isvdb.creatorlink.net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서울 관구: 010-5830-3217, http://icaritas.or.kr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광주 관구: 010-8566-1865, http://icaritas.or.kr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수원 관구: 010-7273-5983, http://icarita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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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순간순간 판단하는 마음과 싸우라!>
한 농부가 도끼를 잃었는데 틀림없이 옆집의 젊은이가 훔쳤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옆집 젊은이의 거동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길을 걷는 모양이나 말하는 목소리나 그의 일거일동이 다 자기의 도끼를 훔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젊은이가 도끼를 훔쳤다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그는 산에 갔다가 전에 잃었던 도끼를 찾아냈습니다. 며칠 전에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방심하여 도끼를 그곳에 두고 왔던 것입니다.
이튿날, 그는 또 옆집의 젊은이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시 이모저모 살펴보니, 길 걷는 모양이나 말하는 음성이나 그의 일거일동이 다 자기의 도끼를 훔친 사람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자신 안에 판단의 완전한 잣대가 들어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은 하느님밖에 안 계십니다.
인생의 그 짧은 경험으로 어떻게 사람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판단은 그 사람이 완전하지 않으면 틀릴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 판단이 틀릴 것 같아서가 아닙니다. 판단하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잘못된 점을 찾아내기 때문입니다. 판단할수록 상대가 부정적으로 보이고 그렇게 판단한 상태에서 상대를 만나면 왠지 이미 껄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저 사람은 참 버릇없네!”라고 판단해 놓고 “그래도 난 널 이해하고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도 요건 좀 바꾸면 좋겠네!”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바뀌면 더 사랑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부모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가 물에 빠졌을 때 “네가 한 가지만 고치면 구해줄게!”라고 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상대에게서 단점을 많이 찾아낼수록 그만큼 사랑하기는 힘들어집니다.
따라서 많은 판단을 내려 상대를 더 잘 안다고 여기게 되는 만큼 관계는 멀어집니다. 저도 가만히 보면 저에게 “난 너 잘 알아!”라고 한 사람과 지금도 관계가 긴밀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참 희한한 것이 모르는 사람과는 관계가 좋은데 서로 잘 알게 되면 더 많이 싸우게 되고 관계가 소원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러면서 더 끈끈해지기는 하지만 결국 그렇게 오래 사신 분들도 하시는 말은 상대를 바꾸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장 잘 안다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고향과 친척 집안만큼 그 예언자를 잘 아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미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이기에 그들은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아는 것 안에서 바라보기에 위선적인 것 같아 보이거나 미쳤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교만이 컸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예수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것에 못마땅해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그만큼 축복을 덜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이 사례가 꼭 예수님에게만 해당하는 말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변할 수 있고 변합니다. 내가 안다고 믿어버리면 그 변화를 감당할 수 없어서 견디지 못합니다.
초등학교 때의 아이를 기억하여 그 모습만 가지고 시집장가 다 간 사람에게 “난 널 알아!”라고 한다면 “난 너와 친구 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난 널 잘 알아!”라며 바라보는 사람과 친해지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판단을 많이 하면 불안해지고 외톨이가 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판단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의 나자렛 사람들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 마음에서 판단이 저절로 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간음한 여인을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알 수 없듯, 사람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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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사제평의회가 열리고 서울대교구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입니다. 인사이동의 대상이 되는 신부님들은 어디로 가게 될지 궁금할 것입니다. 교구에서는 인사이동을 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첫째는 출신 본당으로 임명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로 같은 곳에 두 번 보내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로 같은 신부님과 두 번 지내게 하지는 않습니다. 따뜻한 신부님, 사랑이 많은 신부님, 강론을 정성껏 준비하는 신부님, 미사시간 30분 전에 고백성사를 주는 신부님, 함께 사는 수도자와 신부님들과 잘 지내는 신부님, 성체조배를 자주하는 신부님, 합리적으로 본당의 재정을 관리하는 신부님, 직원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신부님,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을 먼저 찾아가는 신부님이 떠나면 아쉬움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런 신부님은 어디로 가셔도 사랑받는, 존경받는 신부님으로 지낼 것입니다. 그런 신부님들은 어디로 가도 그 자리가 꽃자리가 될 것입니다.
도연명은 歸去來辭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미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앞으로 다가올 일은 추구할 수 있음을 알았노라. 사실 길을 잘못 들기는 했으나 아직 멀리 벗어나지는 않았고, 지금이 옳고 예전이 틀렸다는 것을 뉴욕에서 5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정들었던 사제들이 소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느덧 4명의 사제가 돌아갔습니다. 이제 저도 ‘귀거래사’할 날이 올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어디에 있느냐를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사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계절은 이렇게 다시 바뀌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봄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 돌아가야 함을 늘 잊지 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바람과 해님’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사나운 바람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했지만 따뜻한 햇볕은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다는 동화입니다. 어릴 때, 이 동화를 읽으면서 감동을 했고, 늘 이 동화는 제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건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감시와 비판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세력은 늘 방송과 언론을 장악하려는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그렇게 하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정과 부패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방송과 언론’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를 해야 하고, 정부의 잘못된 정책 수행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비판을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감시와 비판의 기능이 약해지면 당장의 정책 수행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우리 사회는 점점 병들게 되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비판과 비난은 비슷한 면이 있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이라는 책을 통해서 비판은 사상의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말을 했습니다. 비판은 공정하고 사심이 없는 가운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배려를 생각합니다. 비난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사회 발전에 도움을 주시 못합니다. 비난은 질투와 사적인 감정에서 시작합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였습니다. 나탄 예언자는 다윗왕의 잘못에 대해서, 잘못한 일에 대해서 비판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했고, 다윗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정한 여인을 앞에 놓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모두 손에 돌을 들고, 유대인들의 법을 들어 돌로 쳐야 한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
오늘 복음은 비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정하고 올바른 비판은 받아들일 줄 아는 겸허함이 있어야 합니다. 질투와 사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비난은 하지 않는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고칠 수 있는 것은 개선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고, 고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손함을 청하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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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1-6: 고향에서는 예언자라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는데 다섯 가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2-3절).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 사이에 장인으로 통했다. 목수, 미장이, 석공, 대장장이 일을 두루 다 하신 기술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누구의 아들인지도 알고 있다. 관례에 따르면 “요셉의 아들”(마태 13,55 참조)이어야 하는데 “마리아의 아들”(3절)로 표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5절) 나자렛에서 어떤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6절 참조) 치유되기 위해서는 환자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치유하는 분에게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상대방이 없으면 기적을 행할 수가 없다. 그분의 은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막혀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 고향인 나자렛에서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기신다. 예수께서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척한 예언자들과 당신을 비교하시면서(4절) 당신 자신도 결국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신다. 그분이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적이란 신앙이 있거나 적어도 믿으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있을 때,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자유로운 행위라고 하였다. 신앙이라는 배경이 없으면 기적이란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 믿음이 있어야 기적의 혜택도 있는 것이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고 그 사람을 안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이나, 내적인데 볼 줄도 모르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외적인 것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멋대로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이다. 외모로만 판단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도 저지르고 있다. 좀 더 이웃의 장점을, 내적인 면을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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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이 일어나다니!”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놀라워합니다. 그러나 이 놀라움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나자렛 사람들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왜 그분을 믿지 못하였을까요?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하느님의 힘을 보면서도 왜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그들 눈에 예수님께서는 그저 ‘목수의 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족들에 대하여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그분을 메시아로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하여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어쩌면 그 사람에 대하여 가장 모르고 있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선입견이 되어서, 그 사람에 대하여 더 알려고 하는 마음을 없애 버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런 일들은 부모와 자녀, 부부와 같이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모든 관계에서 ‘들음’이 중단되지 않게 하십시오. 듣는 것이 멈춘 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앎 또한 멈춘 관계입니다. 하느님과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듣는 것이 멈춘 신앙생활은 그분에 대한 앎이 멈춘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그분을 믿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임마누엘), 함께 계셔도 그분께서 누구이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아니 오히려 그분을 알려고 하지 않는 불행한 신앙인이 되어버립니다. 만일 신앙의 기쁨이 사라지고 있다면, 여러분의 믿음이 듣는 것을 멈춘 것은 아닌지 한번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모든 관계의 회복은 진실하게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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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1-3)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지혜로운 말씀’이라는 것을, 즉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이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어찌 감히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예언자 행세를 하는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원래 예수님의 집안을 무시하고 멸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가난한 목수 집안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집안이 다윗 왕실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 당시에 유대인들에게는 다윗 왕실의 후손이라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윗 왕실 후손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옛날의 족보보다는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나라에서 고려 왕실이나 조선 왕실의 후손이라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상류층 집안이나 부유층 집안에서 태어나셨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을까? 처음부터 무시하고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쉽게 받아들였던 것은 요한이 ‘사제의 아들’이었다는 점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가난한 목수를 예수님의 양아버지로 선택하셨을까? 대사제나 왕족이나 부자를 선택하셨다면, 좀 더 쉽게 복음 선포를 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삼을 수 있는 말이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7-29)
‘마리아의 노래’도 거의 비슷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예수님의 다음 기도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소외시키지 않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려면, 또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이 계시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만일에 지금 머물러 있는 곳에 그냥 계속 머물러 있겠다고 고집부리면,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고, 구원받지도 못하고, ‘그날’이 되면 주님 앞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4-6)
여기서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처음부터 하느님을 믿었다는 너희는 왜 복음을 거부하느냐?”라고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존경받으려고 고향에 가신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들 자신이 구원받기를 스스로 거부한 일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했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기적을 일으키실 기회 자체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은총을 청하지 않으니 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 주신 것이 아니라, 주셔도 안 받으니 결과적으로 못 주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놀라셨다.”라는 말은, “안타까워하셨다.”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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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종민 마태오 신부님]
고등학교 때, 저를 개신교 교회로 데려가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성경구절을 여기저기서 인용하며 가톨릭은 이단이고 마리아교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들 덕분에 집에 돌아와서 성서를 한 번 더 펼쳐보게 된 것이 지금은 고맙게 생각되지만, 그때는 짜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친구들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들은 나에게 언제부터 성당에 다녔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자랑스럽게 “엄마 뱃속에서부터 성당에 다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 내가 가진 신앙에 대해 그들처럼 자신 있게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 구교우 집안이다, 또 태중교우다 하는 것은 한편 자랑거리입니다. 신앙의 뿌리가 그만큼 깊고 튼튼하다는 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이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될 때도 있습니다. 늘 가까이하고 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거나 신앙의 이야기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만족해 버리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게 되는 경우 말입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향사람과 같은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 지혜와 기적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을 보고 놀라기는 하였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은 한낱 고향사람 예수일 뿐이었으며,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와 기적은 오히려 못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고향사람들을 보시고, 그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셨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과 나는 동향사람이라는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지만, 한편 큰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군중들이 모여들었다고 하지만, 고향에서만큼은 그렇지 못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랑할 것은 무엇입니까? 단지 구교우 집안의 태중교우라는 것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내가가진 신앙은 이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더 큰 걸림돌이 되어 예수님을 놀라게 해 드리는 일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그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과 같이 예수님의 목소리를 따라 살아가야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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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이태리에서 어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부모님이 이태리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의 어머니는 무릎이 좋지 않으셨는데,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캐리어 몇 개를 끌고 오셔서는 저를 위해 가져왔다며 안겨 주셨습니다.
가방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한약이 가득 담겨져 있었습니다. 유학기간 동안 몸이 약해질까봐 걱정되어 굳이 아픈 무릎을 이끌고 그 무거운 한약을 가져오신 것입니다. 저는 뭐 이런 걸 가져왔냐 핀잔을 드렸지만 그 정성이 아까워 평소에는 있어도 먹지 않던 한약을 매번 꺼내 먹었습니다. 그리고 건강에 별다른 탈 없이 유학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어머니의 정성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사실 어렸을 때 제가 가장 이해하지 못했던 말 중 하나가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속담이었습니다. 내가 당장 싫은데, 먹기 싫고 귀찮은데 쓴 약을 먹는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어와 수학 공식, 과학이 중요하다는데 그것이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장의 고통을 참으며 좋은 결과를 기다리지 못했던 저 자신이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왔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곱씹어보기보다는 당장의 즐거움이나 편안함을 유익한 것이라고 착각하곤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보다 미워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당신 고향 나자렛을 찾아가신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가정사를 잘 아는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저런 지혜, 저런 기적의 힘이 어디서 났는가 하고 놀라면서도 그 말씀에 진실하게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의 아들이며, 어떻게 자랐고, 어떤 일을 해왔는가에 대해 선입견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라고 이야기합니다. 당시의 목수라는 직업은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허드렛일을 하는 하층 계급으로 치부되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선입견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결과를 불러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진심으로 믿는 소수의 병자만을 고쳐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기적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것에 놀라십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안다는 것만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음의 말씀을 무조건 거부하는 그들에게,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선입견에 사로잡혀 제대로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나의 단점을 지적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그것이 바른 말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피하거나, “자기가 뭔데 나에게 충고를 하는가?”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병에 걸린 자가 자기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고쳐 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장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남들의 충고를 들을 때 이러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채찍질하시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 아닙니다. 마치 입에 쓴 약이 몸에 좋은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여러 가지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지만, 신앙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의 복음의 핵심은 바로 “믿음”입니다. 어떠한 선입견에도, 어떠한 편견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주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그것이 곧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참 계명임을 기억하며, 오늘 미사 중에, 충실한 믿음의 은사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을 요청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히브 12,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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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가져야>
신뢰심은 정직한 사람, 능력을 갖춘 사람, 선을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신뢰를 잃은 사람은 정직하지 못하고, 능력이 없고 선을 행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또한 권력이나 재력이나 명예에 매달리는 사람도 주위에 사람들에게 신뢰받지 못합니다.
그 외 신뢰심을 받는 사람은 서로 긍정의 삶을 살며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사람입니다. 신뢰를 잃은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아니고 주위에 사람들에 의하여 신뢰를 상실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난 정치 지도자들을 검토해 보면 자신의 잘못 보다 친인척의 잘못으로 사회적 지탄받고 서로 신뢰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변 정리를 잘하는 것도 신뢰심을 보존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한 공동체의 존폐는 공동체 구성원의 서로 일치하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서 신뢰심이 보존됩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국민들에게 신뢰심을 잃고 나라를 암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국회 의원이 집단적 권력욕으로 어느 편이냐 누구와 연계되어야 되느냐? 자기 스스로 서고 나라와 만족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뒷전이고 어디에 붙어야 유리한가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를 잃은 사람들로 꽉 차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나라에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는 뒷전이고 자기 편리한 대로 살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존재 가치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 고향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배척하는 고향사람들 우리도 내가 그렇게 믿었는데 돌아오는 것이 요것뿐이냐? 하고 하느님을 원망한다면 믿음은 자기를 위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저는 오늘 하느님은 어떤 경우든지 신뢰심으로 저를 이끌어 주시니 주님의 신뢰 안에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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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김병로 라파엘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고향 나자렛을 떠나 공생활을 시작하신 후 처음으로 고향을 방문하신 것을 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복음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이 달라진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저런 모든 것들, 지혜와 기적의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는지”를 서로 반문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이런 사람들의 태도는 예수님이 다가가기 어렵게 만들 뿐 아니라 그들의 삶에 새로움을 가져다 주기가 힘듦을 복음은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그 익숙함은 우리의 삶을 더욱 편하고 수월하게 해주는 유용한 면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그런 익숙함이 반드시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익숙해져 버려 그 대상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놓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고향 사람들처럼.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에서 우리는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익숙해져 내 마음 안에 어쩌면 죽어 있을 그 대상을 다시 살려 그 안에서 생명을 발견할 수 있음은 결국 모든 것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분의 활동은 모든 것들을 선으로 인도하시어 평화와 자유라는 생명을 주신다는 그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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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6,2-3)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이 잡혀 옥에 갇히고 난 뒤부터 예수께서는 본격적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1,14)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신 지역은 갈릴래아 주변 지방들이었고, 활동기간은 약 3년으로 추정되며, 선교 효과는 복음의 수용과 믿음보다 불신과 거부가 더 많았습니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신 일이 빌미가 되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를 죽일 모의를 하였고(3,6), 친척들은 소문을 듣고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하였으며(3,21.31), 군중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고(4,12), 그분을 배척하였으며(5,17), 선발된 12제자(3,13-19)들까지도 스승이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고(4,40),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4,41)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해받지 못했으며 그분의 행적은 철저하게 거부되거나 배척당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을 방문하셨는데 심지어 고향 사람들에게도 무시당하고 푸대접받으신 내용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밤과 낮을 가르지 않으시고 가르치고 기적을 일으키시며 열심히 살았는데 왜 예수님의 열정적인 노력과 진심이 모두 외면당하고 거부와 배척당하고 말았을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이해를 위해 쉽게 눈높이를 맞춰가면서 가르치시고, 그들이 겪고 있는 삶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고 치유해 주시고 심지어 먹여 주시기까지 하였는데도 이 모든 일이 공염불이 되고 말았을까? 주님의 가르치는 스킬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스킨십이 잘못되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드러난 문제의 본질 내지 핵심은 주님보다는 주님의 언행을 보고 듣는 인간의 문제인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은 과거나 현재 그리고 다른 종교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인간 공통의 문제인가 봅니다. 그 점을 예수님께서는 한 문장으로 결론지으셨는데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6,4)라고 요약하셨습니다. 불교 선종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은 마조 선사라고 합니다. 오래도록 도를 닦던 그가, 득도하고 난 뒤 잠시 고향에 들른 일이 있었는데 이웃에 살던 한 노파가 그를 보고, “나는 무슨 대단한 양반이라도 와서 이렇게 소동이 났나 했더니 바로 쓰레기 청소부 마 씨의 아들 녀석이 왔구먼!” 하더라는 것입니다. 고향의 할머니는 세월이 변하고 사람이 달라졌는데도 어린 시절의 꼬마로만 여긴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마조는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지었답니다. 『권하거니 그대여 고향엘랑 가지 마소 고향에선 누구도 성자일 수 없으니 개울가에 살던 그 할머니 아직도 내 옛 이름만 부르네!』(선의 황금시대에서) 이것이 인간의 깊은 죄의 습성이며 악한 마음입니다. 단지 예수님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렇게 가장 자신을 잘 아는 고향 사람들에게서 환영받지 못하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은 열등감과 우월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람을 평가하는 낡은 기준이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모습을 보면서 분명 놀랍게 변화된 모습과 지혜와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평가 절하 곧 우리와 똑같잖은데 뭘 하고 표현합니다. 이런 표현은 자신들의 속셈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지만, 내적 열등감을 감춘 채 남의 잘된 것을 인정하지 않는 어둠이, 상처가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심연, 마음에는 무엇이 있기에 자유롭지 못한가? 자기 내면을 직시하지 못했기에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6.3)는 표현은 이를 극명하게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의 진리와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과 같다고 여겼던 그분의 존재 자체, 자신들과 그분의 함께 여기 있음 자체가 자신들의 내면에 내재된 열등감을 뒤흔들었기 때문인데도 그런 내적 움직임을 바라보기보다는 거부했던 것입니다. 흔히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라는 표현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잖아요. 예수님의 존재가 그들의 가장 깊은 내면의 열등감을 자극했고, 상대적으로 너무 크신 그분 앞에 자신들의 존재가 불편해지면서 그 탓을 주님께 돌리면서 뒤틀린 자신들의 심사를 한 마디로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 너 잘 잘났다 정말!
예수님의 본심은 당신 고향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그들이 세상적인 것에서 벗어나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셨고 그 모든 것을 위해 기적도 일으킬 수 있었는데, 고향 사람들에게서 다가오는 차가운 반응과 매몰찬 거부를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면서 그곳에서는 아무런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듣는 것을 통해서 들을 수 없는 것, 보이는 것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길 바라셨던 예수님의 간절한 원의는 무참하게 깨졌고, 그들은 단지 예수님의 겉모습만을 보고 평가하고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사실 돈, 권력, 명예, 학식, 출신 가문과 성분, 학벌 따위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입니다. 「종교박람회」라는 ‘드 멜로’의 책에서도 표현되었듯이 그것들은 참나 眞我가 아니라 거짓된 나 妄我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늘 상 다른 사람의 속 모습보다는 겉모습이나 껍데기만을 보고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다 하느님 앞에 가면 다 거짓이고 헛된 것입니다. 그런 고향 사람들을 꿰뚫어 보셨기에 예수께서는 애당초에 크고 대단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셨지만 믿음이 없어도 너무 없는 그들을 보고 놀라셨던 모양입니다. (6,6참조) 그렇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믿음이 없는 곳에는 구원도 기적도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구원도 기적도 오직 그것을 간절히 찾고 구하고 두드릴 때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 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17, 6)라고, 이미 주님께서 믿음의 중요성을 언급하셨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례가 바로 어제 복음에서, 회당장의 딸의 치유와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여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있는 곳에는 그것이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치유와 기적이 일어나고 용서와 구원이 베풀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에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 활동 곧 자비와 사랑의 행적이며 믿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영성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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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갑곶성지에 살 때는 식복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식사 준비를 비롯한 주방 일, 빨래, 청소 등을 모두 스스로 해야만 했습니다. 주방일이나 빨래는 할 만했고, 또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청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자매님들이 이런 말씀 종종 하시지요.
“치워도 티가 나지 않고, 치우지 않으면 금방 표시가 난다.”
저 역시 청소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청소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청소하지 않으면 어떨까요? 실제로 바빠서 청소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부터 먼지가 방 안에서 굴러다니는 것을 볼 정도로 지저분해집니다.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서 티가 팍팍 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오히려 이 사랑을 어리숙함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티가 많이 납니다. 사람들의 평가도 곧바로 나오지요. 이기적이고 욕심이 너무 많다면서 각종 비판이 쏟아집니다. 이 비판을 받는 사람은 억울합니다. 왜 자신이 실천한 사랑은 알아주지 않느냐고 합니다.
사랑의 실천은 앞서도 말했듯이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사랑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소홀히 보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을 보고 계시고, 당신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티가 나지 않는다고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소도 티가 나지 않아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처럼, 사랑도 티가 나지 않는다고 포기할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내 영혼이 엉망진창으로 바뀌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도 머물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말씀하셨고, 당신 몸으로 사랑을 직접 실천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특히 그래도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지요. 또 병자를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신 것 역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두가 사랑을 보여 주시고, 또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왜 이렇게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예수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더 낫다는 교만함이 더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줍니다.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곳에서만 은총이 가득히 흘러넘치게 됩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예수님의 은총도 얻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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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놀람>
마르코 6,1-6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놀람>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마르 6,2)
“그러면서 그들은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삶은
‘경탄’과 ‘당황’이라는
두 가지 놀람의 연속입니다.
경탄은
낯선 것을 품는
아름다운 용기입니다.
당황은
가진 것에 집착하는
가련한 두려움입니다.
경탄은
평범함 속에 담긴 비범함을
발견하는 지혜입니다.
당황은
비범함을 애써 평범함 속에
묻어버리는 무지입니다.
경탄은
새 세상에서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진보입니다.
당황은
오늘의 나를 어제에 가두는
답보이며 퇴보입니다.
경탄과 당황!
그 가운데에서
선택은 나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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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잘못된 선입견은 나쁜 영향을 미친다>
사랑하면 보입니다. 선한 것이 보이고, 부족한 허물을 채워줄 방법이 보입니다. 미워하면 보입니다. 꼬투리 잡을 허물이 보입니다. 문제만이 보입니다. 편견과 불신, 선입견이 있으면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믿는 이들은 열린 마음과 믿음으로 모든 것 안에서 선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주님의 능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왔습니다. 지혜를 어디서? 지혜도 역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 능력의 손길을 펴는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1장 1절 이하를 보면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 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사리 판단력입니다. 또한 지혜란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방향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생활화합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배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균형과 조화는 올바른 사리 판단력과 방향 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정성 어린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유식한 사람, 지식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성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슬기롭게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지식인은 넘쳐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앎이 확고할수록 다른 앎에 대해 폐쇄적일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할수록 하느님을 모를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완고함입니다.” 그래서 섣불리 알면 아는 것이 병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의 직업이 엘리트가 아닌 목수라는 것, 요셉이 이미 세상을 떠서 어머니하고만 자랐다는 것, 즉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는 것, 자기들보다 특별한 것이 없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 마음이 비딱하면 밖으로 나오는 것도 비딱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나자렛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으로서 훌륭한 가문과 번듯한 학벌을 갖추고 등장하셨다면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구세주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시기 질투심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도 잘못된 선입관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적은 지식이나 정보라도 긍정적으로 관리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아무 은총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가 은총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을 성장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기적만을 바라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주어진 결과물에 매이지 않고 은총을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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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소중한 삶의 성경책 ‘렉시오 디비나’하기>
-날로 썩어가는 부패인생이 아닌, 날로 익어가는 발효인생을 삽시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 배움의 겸손한 삶”
성경의 이야기는 하느님 중심으로 펼쳐지는 성인들 삶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성서와 교회에는 참 무수한 성인들이 나오고 이들의 삶이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성서책 같습니다. 이래서 제가 몇 해 전부터 심취해 읽는 위인들의 자서전이나 평전으로 성서를 렉시오 디비나하는 마음으로 이들을 읽습니다.
누구나의 참 소중한 성경책 같은 인생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뿐 아니라 믿는 이들의 삶, 하나하나가 소중한 살아있는 성경책입니다. 하루하루 쓰는 아직 미완인 내 삶의 성경책입니다. 내 나이 곱하기 365하면 각자 고유한 삶의 성경책 쪽수가 나옵니다. 삶이 혼란스럽고 앞이, 끝이 보이지 않을 때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디비나”하면서 삶을 새로이 추스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로써 1월은 끝나고 내일부터는 2월의 시작입니다. 그러니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하루하루 써 내려야 할 하느님 선물의 날들입니다.
우리 교회의 살아 있는 보물이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의 삶자체가 하나의 고유한 성경책이요 우리 삶의 좌표가 되고, 구원의 표지, 회개의 표지, 희망의 표지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의 삶을 통해 내 소중한 삶의 성경책을 부단히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배움의 여정에 충실함이 참으로 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입니다.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요 똑같은 성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몰(生沒)연대도 다 다릅니다. 성인들 모두가 가르쳐 주는 바 하느님 중심의 내 고유의 삶을 살라는 촉구입니다.
누구를 부러워하거나 모방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성인들의 삶을 통해 늘 우선적으로 확인하는 사실이 생몰연대에 산 햇수요 여기에 견줘보는 제 나이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떠날 인생임을 확인합니다.
성 요한 보스코 성인은 19세기 근대에 속합니다. 생몰연대를 보니 73세에 선종했으니 저는 성인보다 3세를 더 많이 살고 있습니다. 산 날보다 살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봅니다.
성 요한 보스코의 참 아름다운 성경책 같은 삶이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성인들의 배경에는 거의 틀림없이 성녀 같은 어머니가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부전자전이기보다는 모전자전입니다.
요한 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 카스텔누오보 베키에서 출생합니다.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두 형과 함께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마르게리타 어머니는 신앙심이 매우 깊은 분이었고 요한이 신앙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합니다. 그녀는 기도를 생활화하였으며 힘든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자기집을 찾는 불우한 이들을 결코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은 아홉 살 때의 꿈을 계기로 사제 성소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고 26세 되던해 1841년 토리노 교구의 사제로 서품됩니다. 성인을 돕던 젊은이들과 함께 살레시오 남자 수도회의 창립을 시작으로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와 함께 살레시오 수녀회와 평신도 단체인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설하여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도직의 기틀을 확고히 다집니다.
19세기 산업화라는 격변기 속에서 사회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빈곤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에 대한 교욱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몸소 실천한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였고 동시에 2천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놀랄만한 작가였습니다.
또 사회변혁의 순간에 교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호교론자이며 청소년 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성을 교회 안에 심은 대 영성가로 살레시오 프란치스코 성인을 참으로 존경했기에 수도회 명칭도 “살레시오회”입니다.
돈 보스코는 자신의 모든 것을 청소년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다 내어주고 1888년 1월 31일 바로 오늘 선종합니다. 이때 성인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깁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성인이 남긴 어록 둘이 대표적입니다.
“청소년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도록 사랑하십시오.”
요한 보스코는 1934년 부활절에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으로 반포되고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성인의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던 1988년 1월31일 교황 성 바오로 2세는 재차 그를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으로 선포합니다.
성인의 지칠 줄 모르는 활동의 원천은 “하느님과 끊임없는 일치”와 자신의 사업전체의 영감이자 후원자로 여겼던 도움이신 마리아 성모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였습니다.
기억하고 기념할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 고유의 성인이 될 것을 촉구하는 성인축일입니다. 우리는 성 요한 보스코를 통해서만 아니라 오늘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의 다윗으로부터도 참 많이 배웁니다. 내일부터 제1독서는 열왕기상권 시작으로 다윗의 죽음이 소개되고 오늘로서 파란만장했던 다윗의 생애도 끝납니다.
그런데 말년에 다윗은 또 죄를 짓습니다. 인구조사를 한 다음 양심에 가책을 느껴 주님께 말씀드리고 죄과를 기꺼이 받습니다.
“제가 이런 짓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주님, 이제 당신 종의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제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잠시 유혹되어 무지와 불신으로 인구조사를 한 교만을 후회하여 즉시 뉘우치는 회개에 있습니다. 완전히 회개가 일상화된 회개의 여정에 충실했던 다윗이요, 마지막으로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기도하는 다윗의 백성 사랑하는 마음이 감동을 줍니다.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치십시오.”
말 그대로 회개의 달인인 다윗이요 겸손한 성인 다윗입니다.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을 비교하며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라는 교황님 말씀도 생각납니다. 회개한 성인이 다윗이요 부패로 성인이 못된 솔로몬입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썩어 악취를 발하는 부패인생을 막아주고 익어 향기를 발하는 발효 인생으로 만들어 줍니다.
부패인생이냐 발효인생이냐 수시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회개의 달인인 다윗이 발효인생의 모범이라면 솔로몬은 시작은 좋았지만 회개의 소홀로 부패인생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회개의 시스템”같은 공동전례기도의 은총이 회개의 일상화와 더불어 참 좋은 영적 효소가 되어 발효인생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하루하루 내 고유의 성경책을 잘 써가도록 도와 줍니다.
오늘 다윗의 불신과 교만이 문제였다면 복음의 예수님 고향 사람들 역시 편견과 불신의 무지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지혜에 놀라던 이들이 급변하여 편견과 질투, 불신에 사로잡히니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이기도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좌절감의 표현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 존경받지 못한다.”
무지와 질투, 불신으로 인한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이 얼마나 고질적 영혼의 질병인지 우리가 체험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 고향 사람들의 불신에 놀랐고 별 기적도 행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진정 회개가 필요한 고향 사람들입니다. 무지와 편견에 대한 궁극의 답은 회개의 은총뿐이기 때문입니다.
내 소중한 고유의 성경책을 써내려가고 렉시오디비나 하는데 기도와 회개, 배움의 겸손한 자세가 얼마나 본질적이고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라는 대목에서 고향 사람들의 불신에 실망감을 즉시 떨쳐 버리고 본래의 복음 선포의 사명에 충실한, 주님의 한결같은 초연한 모습이 큰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자 회개의 여정이요 동시에 끊임없는 배움의 여정입니다. 이런 인생 여정과 더불어 점차 완성되어가는 내 삶의 성경책이요, 날로 익어 향기를 발하는 발효인생이 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익어가는 향기로운 발효인생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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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저 사람>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당신 고향에 가셨는데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아 몇몇 병자에게 밖에는 아무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다고 하며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고 하는데 저는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주님도 하실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인데 진정 주님도 하실 수 없는 것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산천초목과 삼라만상에게는 주님께서 하실 수 없는 것이 없지만 인간에게만은 인간의 협력 없이 하실 수 없는 것이 있고, 인간의 협력 없이는 전능하신 하느님도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협력이란 믿는 것인데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지 않으면 아무리 전능하셔도 하실 수 없습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아무리 명의일지라도 환자가 믿지 않으면 어떤 처방이나 진료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그럴 때 그에게는 명의도 명의가 아니고 아무 치료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의심도 기적을 불가능하게 하는데 불신은 더더욱 기적을 불가능케 합니다.
의심이나 불신은 기적의 문을 걸어 잠그게 하기 때문입니다. 의심하거나 불신하는 사람에게는 문을 잠그고 믿는 사람에게만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왜 주님을 믿지 못했습니까? 그리고 왜 주님을 못마땅해했습니까?
그것은 주님을 자기들과 똑같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과 똑같이 한 인간인데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자기들과 똑같은 인간인데 자기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고 주님께는 있다는 사실이 화나고 시기 질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과 똑같은 인간인데 어디서 그런 능력이 왔을까 그런 것이나 따지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저 사람입니다. 저분이 아니고, 스승도 아니고, 주님도 아니고 저 사람입니다.
주님을 저 사람이라고 하고, 주님께 인간적인 것을 들이대면 주님도 저 사람일 뿐 아무것도 내게 하실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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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6,4)
<단순한 믿음!>
오늘 복음(마르6,1-6)은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2-3)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아무런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습니다.
모순적이게도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어제 복음이 '믿음의 기적'을 전했다면, 오늘 복음은 '불신의 모습'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함께 믿는 '단순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단순한 믿음이 있는 곳에서 '크고 작은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성 안에만 갇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했습니다.
오늘은 '청소년들과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청소년을 사랑했고, 젊은이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며 헌신한 '성 요한 보스코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하느님, 복된 요한 사제를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도 똑같은 사랑의 불로 타올라, 오직 주님을 섬기며 형제들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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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bc-Bmphx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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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 6, 2)
지혜는 하느님께
있습니다.
새로운 길은
지혜를 통해
알게 되고
드러납니다.
지혜 없는 열정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지혜 없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모든 시간을
살아가셨습니다.
지혜를 간절히
청하는 우리의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친밀한
관계 안에서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는 부드러운
겸손으로 드러납니다.
새파란 청소년 같은
지혜에서부터
영글어가는 노년의
지혜로 영글어갑니다.
지혜는 서로의
약함을 갖고
물고 늘어지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지혜 앞에
모든 이들은
소중합니다.
지혜로 영원한
기쁨을 향하여
걸어 가는
열정의 날 되십시오.
하느님의 지혜로
삶의 진정한 내면을
바라보고 만나는
기쁜 날 되십시오.
지혜는 하느님의 뜻에
내어 맡기는 참 기쁨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리 소중한
청소년들 모두
열정 가득한
이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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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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