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의정부 영의정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이 졸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유성룡은 경상도 안동(安東) 풍산현(豊山縣) 사람이다
.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어린 나이에 퇴계(退溪) 선생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예로써 자신을 단속하니 보는 사람들이 그릇으로 여겼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가 날로 드러났으나 아침 저녁 여가에 또 학문에 힘써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기대거나 다리를 뻗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응접(應接)하는 즈음에는 고요하고 단아하여 말이 적었고 붓을 잡고 글을 쓸 때에는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뜻을 두지 않는 듯하였으나 문장이 정숙(精熟)하여 맛이 있었다.
여러 책을 박람(博覽)하여 외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의리(義理)를 논설하는 데는 뭇 서적에 밝아 수미(首尾)가 정밀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갔을 때 중국의 선비들이 모여 들었으나 힐난(詰難)하지 못하고서는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고 칭하였다
. 이로 말미암아 명예와 지위가 함께 드러나고 총애가 융숭하였다.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는 국가의 안위(安危)가 그에 의지하였는데, 정인홍(鄭仁弘)과 의논이 맞지 않아서, 인홍이 매양 공손홍(公孫弘)이라 배척하였고, 성룡 역시 인홍의 속이 좁고 편벽됨을 미워하니, 사론(士論)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서로 공격하는 것이 물과 불 같았다.
성룡은 조목(趙穆)ㆍ김성일(金誠一)과 함께 퇴계(退溪)의 문하에서 배웠다. 성일은 강의(剛毅), 독실하여 풍도가 엄숙하고 단정하였으며 너무 곧아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으나 대절(大節)이 드높아 사람들의 이의(異義)가 없었는데 계사년 나라 일에 진력하다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조목은 종신토록 은거하면서 학문에 독실하고 자수(自修)하였으나, 나라에 어려운 일이 많게 되자 강개(慷慨)해 마지 않았는데 지난해 죽었다. 조목은 일찍이 성일을 낫게 생각하고 성룡을 못하게 여겼는데, 만년에는 성룡이 하는 일에 매우 분개하여 절교(絶交)하는 편지를 쓰기까지 하였다. 퇴계의 문하에서는 이 세 사람을 영수(領袖)로 삼는다.
유성룡은 조정에 선 지 30여 년 동안 재상으로 있은 것이 10여 년이었는데, 상의 권우(眷遇)가 조금도 쇠하지 않아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들었다. 경악에서 선한 말을 올리고 임금의 잘못을 막을 적엔 겸손하고 뜻이 극진하니 이 때문에 상이 더욱 중히 여겨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유모(柳某)의 학식과 기상을 보면 모르는 사이에 심복(心服)할 때가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규모(規模)가 조금 좁고 마음이 굳세지 못하여 이해가 눈앞에 닥치면 흔들림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의 신임을 얻은 것이 오래였었지만 직간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고 정사를 비록 전단(專斷)하였으나 나빠진 풍습을 구하지 못하였다. 기축년의 변에 권간(權姦)이 화(禍)를 요행으로 여겨 역옥(逆獄)으로 함정을 만들어 무고한 사람을 얽어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일망타진하여 산림(山林)의 착한 사람들이 잇따라 죽었는데도 일찍이 한마디 말을 하거나 한 사람도 구제하지 않고 상소하여 자신을 변명하면서 구차하게 몸과 지위를 보전하기까지 하였다.
임진년과 정유년 사이에는 군신(君臣)이 들판에서 자고 백성들이 고생을 하였으며 두 능(陵)이 욕을 당하고 종사(宗社)가 불에 탔으니 하늘까지 닿는 원수는 영원토록 반드시 갚아야 하는데도 계획이 굳세지 못하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아서 화의(和議)를 극력 주장하며 통신(通信)하여 적에게 잘 보이기를 구하여서 원수를 잊고 부끄러움을 참게 한 죄가 천고(千古)에 한을 끼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의사(義士)들이 분개해 하고 언자(言者)들이 말을 하였다.
부제학 김우옹(金宇顒)이 신구(伸救)하는 상소 가운데 ‘성룡은 역시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마는 재보(宰輔)의 기국(器局)이 부족하고 대신(大臣)의 풍력(風力)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정확한 논의이다.
무술년 겨울에 변무(辨誣)하는 일을 어렵게 여겨 사피함으로써 파직되어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그후에 직첩(職牒)을 돌려주었고, 상이 그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의관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