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7.19 - 동양대학교는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에 위치한 지방대학으로 1994년에 설립. 학생수는 약 4,000명 정도의 작은 대학이지만 나름대로 특성화가 잘되어 전국 종합대학중 취업률 4위를 차지하며 3년 연속 86% 대의 취업률을 유지. 그간 정보통신 분야,공무원(주로 철도, 경찰등), 항공 써비스 분야 등에 주력하였는데 앞으로는 국방기술분야로 새롭게 관심을 전환하여 군, 군관련기관, 방위산업체 등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인력을 양성하여 공급하겠다는 다소 색다른 목표를 세우고, 국방기술대학을 신설. 초대학장으로 취임
27기
1. 김순규 동문 인쇄업 개업 - 忠武企劃, 명함, 봉투, 각종 팜플렛 들 인쇄에 관련된 제반 업무 취급 - 주소 : 서울시 중구 충무로4가 134-1호 - 전화 : 02-2265-3851
41기
1. 성석경 동문 사업체 홈페이지 신규 오픈 - (주)아름다운세상, 물티슈 및 기능성 티슈를 생산 공급 - 홈페이지 : www.febiane.com - 전화 : 031-977-7307
미국 이야기 제12화 : Retire(隱退)하기 까지 - 16기 고장환
직원이 500여명 되는 중에 네 번째로 나이가 많으니까 간혹 동료 직원들이 When you retire ? 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나는 I will work forever 하며 농담조로 답 하면서 건강과 상황이 허락 하는 한 계속 일 할 것이라고 대답 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집사람이 비교적 큰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인데 집사람 옆에 내내 있어야 되겠기에 은퇴를 결심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잘살 때가 아닌 78년도에 쥐꼬리만한 연금을 일시불로 받아 이민 오느라고 일곱 식구 비행기표 사고 거이 빈손으로 미국 땅을 밟은 이래 오늘까지 지난 이야기를 솔직하게 함으로서 이국 이민생활의 일부나마 소개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합니다.
이민 초기에 제일 싼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 하여 지금은 그래도 수영장 있는 방 다섯 개 짜리 집에서 Benz 타고 다닌다고 하면 성공한 이민이라고 말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 스스로 생각 하기에는 그저 열심히 정직 하게 산 결과 인 것으로 생각 됩니다.이민 올 때 비행장에 누가 Pick Up 하러 나왔는가 가 미국에서의 생활이 어떻게 전개 될 것인가 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으로부터 안내와 영향을 받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 됩니다.
부모를 따라 온 어린이야 이곳에서 교육 받고 성장 하여 능력과 노력 여하에 따라 진출 하지만 부양가족을 데리고 온 이민 일세들이야 당장 먹고 살아야 되니 즉시 일 하여야 되는데 역시 이곳은 낮선 곳이고 언어장벽도 있으니 그럴듯한 직장을 구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한인이 운영 하는 조그마한 업체에서 일하다가 노력 하여 스스로 자영업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 크게 성공한 사례도 있지만 대부분 먹고 살 정도이고 넉넉하게 사는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이민 일세들 대부분은 엄청나게 열심이 일 한다는 것입니다.
내 경우는 이민 오자 마자 우리를 초청 해 주신 누님이 그리 크지는 않지만 새로 산 Super Market에서 일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일 하는 사람이래야 4-5명 정도니까 대부분의 노동력은 내가 담당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달에 500 불을 받았으니 극빈자 부류에 속하는 처지였습니다. 이때 둘째인 승우가 맹장염에 걸렸는데 USC 부속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병원시설이 어찌나 좋고 대우가 좋은지 10살 짜리 막내인 승진이가 자기도 입원 해 보고싶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신기할 정도로 땡전 한푼 내지 않았습니다. 극빈자 대우를 받은 겁니다. 그러다가 기적과도 같은 일이 있어서 지금 은퇴 하는 직장에 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누님 가게에서 일년간 일 하면서 한번도 결근하는 일 없이 열심히 일 하면서 일요일은 어김없이 교회에 나가 열심히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꼭 1 년 여 되던 때에 한번은 Frozen Food 를 진열 하는 Shelve의 냉동이 고장 나서 진열 되어 있는 물건들을 전부 뒤에 있는 냉장고에 넣은 다음 기술자가 와서 기계를 고쳤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물건들을 진열대에 다시 내 왔습니다.
이 일은 아침 일직부터 저녁 늦게 까지 혼자서 했는데 이로 인해 완전히 녹초가 되어 그날 밤 되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출근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출근하여야 되니까 오후에 준비운동 겸 해서 한인타운에 있는 한인 마켓에 필요한 두어가지 정도를 사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곳 Parking 장에서 Check Book(수표책) 하나를 주웠습니다 그래서 보니까 어느 한국여자의 것이 였습니다. 그런데 그 수표책 속에 그의 남편 인 듯 싶은 사람이 수령한 봉급 Check 가 세 장이나 있었는데 이미 뒷면에 서명 까지 하였으니 누구라도 현금화 할 수 있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나는 한 달에 500 불을 받는데 이 사람은 일주일에 400 불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집에 와서 수표책에 있는 전화번호에 전화 걸어서 그 여인의 이름을 대면서 찾으니까 남편인 듯한 남자가 되게 화난 목소리로 "그런 사람 여기 없어요 " 하면서 전화를 쾅 하고 끝 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전화 걸고는 대뜸 Check Book을 잃어버리지 않았느냐고 하였더니 "어이구 어이구 그것 때문에 난리가 나 있는 상태입니다." 하는 갑니다. 그리고는 즉시 귤 한상자를 사 들고 찾아 왔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이후 지금까지 함께 일 하게 되는 홍 명국 이라는 장로입니다. 그래서 반갑게 만나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무슨 일을 하기에 그렇게 돈 많이 받느냐고 물었더니 Inspector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을 하는 거냐고 하였더니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우리말로 하자면 제품검사관 같은 것이라며 고 선생 정도면 잘 하실 거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 Boss에게 이야기 해 둘 테니 한번 와 보라고 하였습니다.
천분의 일 인치. 만분의 일 인치 같은 것은 Blue Print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인데 그것을 영어로 어떻게 읽는지도 몰랐으니 엄두도 안 나섰습니다. 그러나 매우 권하기에 갔는데 Boss 라는 사람이 Frank Cunningham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미 해병대 장교 출신으로 포항에서 3 개월 가량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거기에서 KMA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어렴풋이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고 하면서 전연 아무것도 묻지 않고 대뜸 시간당 얼마를 주면 되겠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래서 홍 장로가 미리 이야기 해 준대로 5 불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왜냐고 하기에 홍 장로가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고 하니까 웃으면서 무슨 책자를 꺼내서 한참 보더니 시간당 6불 50쎈트를 줄 테니 일 하겠느냐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뼈저리게 느껴지는 것은 육사에서 배운 이공계통의 교육이 얼마나 충실한 것이 였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1 년 여가 지났는데 Boss 가 나에게 말 하기를 너하고 똑 같은 사람이 있으면 하나 데리고 오라고 하는 겁니다. 마침 그때 나하고 같은 시기에 혼자 이민 온 이 영수가 시카고에서 이곳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직장이 마땅치 안았습니다. 그래서 영수를 소개 해서 함께 일 하게 되었습니다. 영수는 폐암으로 세상을 일직 뜰 때 까지 정말 열심히 그리고 유능 하게 일 하였습니다. 영수가 한번은 최우수직원으로 선정 되어 표창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홍 장로에게 말 하기를 홍 장로에게는 물론이지만 회사에도 감사 한다고 하니까. 홍 장로 말은 회사가 오히려 우리에게 감사 하여야 된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는 일도 고급화 되고 넓어져서 Inspector로서 뿐만 아니라 Quality Assurance Engineer로서의 일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번은 Boss 가 말 하기를 누가 자기에게 와서 보고 하기를 Jay KO 가 결석 하였다고 하면 자기는 "그래 Jay KO 가 죽었구나" 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하면서 30년 가까이 지나다 보니 이제는 Retire 할 때가 온 듯 합니다. 군을 떠날 때와 마찬 가지로 최선을 다하였다는 보람과 자부심을 가슴에 새기면서...
제21회 목요산행 - 24기 이풍길
금년에 매주 목요일에는 다른 어떤 일정 보다 동기생 산우회원들과 산행 약속이 우선이다. 또한, 산행을 마친후에는 동기생들에게 산행 결과를 알려 주어야하기 때문에 다른 저녁 모임에 참석을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좋다. 내가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금년 말까지 이렇게 하겠다는 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고 동기회장을 비롯한 모든 동기생들에게 내가 해야할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늘을 보니, 어제까지는 구름낀 하늘에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맑고 흰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이고 그 사이로 밝은 햇살이 비춰 마음까지 상쾌하다. 지금까지도 산행을 하는 날이면 일찍 일어나 날씨를 확인하고 산행을 준비하면서도 산행에 누가 올것인지, 또한 몇명이나 참여할것인지 궁금하여 가벼운 긴장을 하곤 한다. 오늘도 산행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웃에 사는 유 익현생도가 교통편을 묻는다. 기다리라고 해놓고 이 기영생도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염려말고 미금역으로 나오란다. 익현생도에게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어 미금역에서 만나 박 홍권생도와 함께 온 이 기영생도의 차에 올라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가벼운 대화를 하면서 시원스럽게 뚫린 길로 옛골로 향한다.
청계산 옛골 기와집에 도착하니, 벌써 여러명의 낯익은 동기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신 창호, 안 병무, 양 순모, 정 태건, 채 문기, 허 충호생도등이다. 서로 인사와 가벼운 농담을 나누는 사이에 눈치 빠른 종업원이 커피를 타온다. 이어서 이 명완생도가 서 성근 생도와 함께 도착했고, 마지막으로 김 기택생도가 도착한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이니 조용하던 식당 앞에는 60대 청년들이 떠들고 웃는 소리에 화기가 넘친다. 모두가 도착하니 배낭에서 가지고온 자두, 방울 도마도를 동기생들 앞에 꺼내는 모습에서 진한 동기애를 느낀다. 오늘은 우리가 목요산행을 실시한 이래 가장 많은 인원인 13명이 참석하여 청계산 목요산행을 시행했다.
비가온 후의 따가운 햇살이 내려 쪼이고 바람도 거의 없는 뜨거운 날씨에 산행을 준비하고 있는데 태건생도는 기영, 홍권생도와 함께 먼저 출발하는 요령을 이미 터득했다. 이제는 동기생들이 모이면 제일 먼저 화제가 되는것은 동기생 홈페이지에 대한 얘기들이다. 산우회원들은 대부분 홈페이지의 회원들이라 자주 홈피를 방문하여 글과 사진, 음악을 올리기도 하고 다른 동기생이 올린 내용에 댓글도 달고 눈팅도 하곤 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어떤 내용을 올린 사람의 생각과 댓글을 올린 사람의 생각이 화제의 서두가 되고 이어서 들어와 눈팅만 한 사람들의 생각이 어우러지는 장마당이 되면 한바탕 소란스러워지곤한다. 그 다음 우리들의 대화는 과거로 부터, 현재와 미래로 뻗어나가고, 정치와 경제는 물론 사회, 교육, 문화, 의학등 무궁무진 하다. 우리들은 같은 시대를 살아오면서 거의 같은 교육과 생활을 해서 그런지 사고하는 바가 거의 같아 현장에서 바로 공감대가 형성되고 의기가 투합되곤한다.
지난번에도 잠시 언급을 했었지만, 우리들이 매주 오르는 옛골에서 이수봉에 이르는 능선은 계속되는 오르막 길이지만, 완만한 경사와 급한 경사가 잘 어우러져 있어서, 한 시간이상 다리 품도 팔아야되고 거친 호흡과 함께 땀도 제법 흘려야되는 코스로 능선길이 대부분 흙 길이며, 등산로에 나무 숲이 울창하여 항시 그늘을 걷는 좋은 코스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어제까지 내린 비로인해 대지는 축축하게 젖어 먼지도 없고 공기는 그야말로 상쾌한데 한가지 흠이라면 날씨가 너무 더웠다는 것이다.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오르는데 무더운 날씨에 땀은 흐르고, 숨은 가쁘며, 갈증은 나지만, 이렇게 하면서 건강을 다지고 동기생 산우들과 우정을 나누는 이 시간이 더 없이 즐겁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이수봉 정상에 올라 땀을 딲으니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주어 더워진 몸을 식혀준다. 모두들 가지고 온 과일과 음료수, 떡을 배낭에서 꺼내 나누어 들면서 숨을 고르며 쉬는 사이에도 신 창호생도는 카메라를 들고 보다 좋은 모습을 동기생들에게 보여주려고 쉬지도 않고 바쁘게 움직인다. 그의 그러한 숨은 봉사 정신이 동기생 산우! 회는 물론 홈페이지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하고 있다.
오늘의 참석자들에 대한 출석 사진을 찍고 하산을 하는데 아스팔트를 피하여 내려가자는 의견에 따라 올라온 길로 내려가는건 재미가 없어 다소 경사는 급하지만 가운데 능선으로 내려가기로 하고 그 길은 처음이라 내가 앞장을 서서 안내를 했다. 하산길에서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눈과 발을 조심하면 되고, 힘도 안들고 숨도 차지 않으니, 이 때가 우리들의 대화의 핵심이 거론된다. 최근에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대한 해설과 논평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때는 모두가 의기가 투합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자신이 없으면 듣고 맞장구치면 되고, 서론 본론 결론이 분명하게 말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바로 반론이 제기된다. 우리들은 함께 사관학교를 다닌 보수 진영의 핵심이요, 같은 시대를 살아오며 대부분 군 생활을 함께하여 생각하는 것이 비슷하여 부딪치는일이 거의 없다. 우리가 한 평생 어떻게 지킨 조국인데 자칭 빨갱이라고 하는 자들이 활개를 치는 현실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계곡의 시원한 냇가에서 손과 발을 씻고 내려오니 한결 시원하다. 옛골에 도착하여 식당에 설치된 야외 세면장에서 주위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등목을 하여 흘린 땀을 말끔히 씻은 뒤 식당에 들어가니 제일 시원한 방으로 안내한다. 산행을 통해 좋은 자연 속에서 땀을 흘리면서 운동을 하고, 동기생들과 우정도 나누느라 시장도 하던차에 메밀 동동주에 가벼운 안주를 곁들여 반주를 몇 순배하고 나서 보리밥에 나물을 가득 넣은 비빔밥은 보약중의 보약이고 그 맛이 또한 꿀 맛이더이다. 물론, 식사중에도 우리들의 우정어린 대화는 중단되지 않더라구.... 식사를 마친 후에도 오랫동안 자리를 함께 하다가 아쉬운 작별을하고 헤어져 집으로 오는길에 안 병무생도가 나와 유 익현생도를 집에까지 차로 태워주었다. 매번 이렇게 신경써주는 동기생 산우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다.
코소보(Kosovo) 전투에서 사망한 라자르 흐레벨리아노비치(Lazar Hrebeljanovic)의 아들 스테판 라자레비치(Stefan Lazarevic)는 1389년 당시 겨우 열네살의 소년이었다. 때문에 공국의 정사는 그의 어머니 밀리차(Milica)가 다스릴 수 밖에 없었다... 전체내용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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