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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65)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61>‘민국 4공자’의 으뜸, 大수장가 장보쥐 | 제62호 | 2008년 5월 18
장보쥐가 1930년대 자신이 살던 총벽(叢碧)산장에서 꽃에 둘러싸인 채 서 있다. 김명호 제공
장보쥐(張伯駒)는 난쉰의 팡쉬원과 함께 대(大)수장가였다. 두 사람을 일컬어 ‘난팡베이장(南龐北張)’이라고 부르지만 장보쥐 이름 앞에는 ‘민국 4공자(民國四公子)’ 중 한 사람이라는 또 다른 수식어가 늘 붙는다.
2000여 년 전 전국시대에 맹상군(孟嘗君)·신릉군(信陵君)·평원군(平原君)·춘신군(春申君) 등 네 명을 ‘4공자’라고 일컬은 이래 왕조 교체기나 시대마다 4공자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있었다. ‘명말(明末) 4공자’가 있었고, 청말(淸末)에도 4공자가 있었다. 그러나 ‘민국 시대’에 와선 7명이 ‘민국 4공자’ 소리를 듣게 된다.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둘째 아들 위안커원(袁克文), 장쭤린(張作霖)의 아들 장쉐량(張學良), 돤치루이(段祺瑞)의 아들 돤훙강(段宏綱), 장젠(張健)의 아들 장샤오뤄(張孝若), 우창칭(吳長慶)의 아들 우바오추(吳寶初), 루융샹(盧永祥)의 아들 루사오쟈(盧少嘉), 장전팡(張鎭芳)의 아들 장보쥐가 그들이다. 이들 이외의 인물이 민국 4공자로 분류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분류하는 사람에 따라 들어가거나 빠지는 경우가 있지만 장보쥐와 장쉐량은 빠지는 법이 없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公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부(富)였다. 그러나 스스로 노력해 부를 축적했다면 공자 칭호를 듣지 못했다. 순전히 조상 덕에 이룬 부라야만 했다. 부의 성격도 중요했지만 많은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었거나 도둑질한 것이 아니면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본인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보쥐의 부친 장전팡은 위안스카이와 외사촌 간이었다. 평소 검소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나라를 도둑질할 생각은 했어도 금전을 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굴러 들어오는, 주는 사람은 뇌물이었지만 받는 사람은 관행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뿐인 재물들이 엄청났다. 이것을 관리한 사람이 장전팡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장이 관리하는 재물을 찾는 법이 거의 없었다. 자연스럽게 장전팡의 개인 재산이 돼버렸고 장보쥐가 이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장보쥐는 어려서부터 말수가 적었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정치적인 사건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잠시였지만 부친이 감옥에 가 있을 때도 무슨 일 때문인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아 주위 사람들이 심란해할 정도였다. 그러나 바둑·경극·꽃·시·서·화·골동 등 예술과 관련된 것은 어릴 때부터 사소한 것도 소홀히 넘기지 않았다.
17세 때 갑자기 군인이 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22세 미만의 나이로는 군인이 될 수 없을 때였다. ‘드디어 집안에 장군이 나오게 됐다’며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긴 부친의 안배로 기병 장교가 됐지만 장보쥐의 군대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고 기병은 특히 군기가 엄했다. 게다가 출신이 좋아 위안스카이의 근위병으로 편입되는 바람에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애초에 군인, 그중에서도 기병이 되겠다고 한 것은 밖에 나갔다가 말을 타고 달리는 기병의 멋진 군복에 매료됐기 때문이었다. 부친의 생각처럼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공자 소리를 듣는 데 결격 사유는 아니었다. 중국인이 보기에는 역시 남들과 다른, 공자다운 결단력이었다.
넘쳐나는 재물과 검소했던 부친 덕에 엄청난 거부가 된 장보쥐의 지출은 규모 자체가 일반 부자들과 격이 달랐다. 문화예술계와 학계의 대가들로 항상 집 안이 북적거렸고 고(古)문물의 구입에는 돈을 물 쓰듯 했다. 대수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대(大)화가에다 서예가·시인이었다. 바둑은 기단의 고수들이 몰려 있는 베이징에서 그를 이기는 자가 많지 않았고, 경극(京劇)은 직접 분장하고 무대에 설 경지에 이르렀다. 무술에도 조예가 깊어 당시 무림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때문에 공자 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소장했던 명화(名畵)와 문물들은 모두가 국보였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서첩(書帖)인 서진(西晉)시대 육기(陸機)의 『평복첩(平復帖)』,수(隋)대 전자건(展子虔)의 『유춘도(游春圖)』를 비롯해 이백(李白)·두목(杜牧)·황정견(黃庭堅) 등의 진본 서화들이 모두 장보쥐의 소장품이었다. 작품 한 점마다 도시 하나를 통째로 사고도 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 문물들이었다. 거의 모두가 해외로 유출되기 직전 거금을 털어 사들인 것들이었다. 그의 감식안은 당대 최고였다.
장보쥐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소장하고 있던 진품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국가에 기증했다. 그에게 기증을 권한 사람도, 요구한 사람도 없었다.
<62>장제스가 아끼던 대논객 陳布雷의 비극 |제63호| 2008년 5월 25일
저장성 교육청장 시절의 천부레이(가운데). 김명호 제공
1947년 여름 국민당의 베이핑싱잉(北平行營) 전파관리소는 중공의 비밀 전파 발신지를 확인했다. 한 주택의 지하실이었다. 국방부 보밀국(保密局)은 경악했다. 천부레이(陳布雷)의 딸과 사위가 집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천부레이는 기자 출신이었다. 일찍부터 대정론가 소리를 들었다. 반봉건과 국민국가의 수립, 외세 배척과 군벌 타도, 혁명의 당위성을 피력하던 글들은 지금 봐도 힘이 넘친다. 36세 되는 해에 난창(南昌)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났다. 장제스는 그를 보는 순간부터 가까이 두고 싶어 했다.
천부레이는 그러나 “체구가 왜소해 보는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고, 잠시만 서 있어도 다리가 떨리고 현기증이 난다”며 완강히 거절했다. 또 “정치가 체질에 맞지 않고 소질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국민당에 가입은 했다. 장제스는 그를 중앙당 부비서장에 기용했지만 상하이로 돌아가 ‘시사신보(時事新報)’의 주필로 근무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때부터 장제스의 중요한 문건들을 관리하고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지만 정치적인 일에는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당내의 모든 파벌이 그를 서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보니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저장(浙江)성 교육청장, 교육부 상무차장, 당 중앙선전부 차장 등을 거쳤지만 그에게는 모두가 허직(虛職)이나 다름없었다. 장제스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고지식할 정도로 “선비는 자신을 알아 주는 사람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에 철저했다. 어느 파벌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자기 사람을 만들지도 않았다. 표면에 나서는 적이 없었고 기교를 부리지도 않았으며 사치와도 거리가 멀었던 그를 장제스는 애지중지했다.
‘당대완인(當代完人)’이라는 휘호를 선물할 정도였다. 신설된 시종실의 2처 주임으로 근무케 했다. 군사와 당무를 제외한 재경·외교·문교·교통·민정이 2처 소관이었다. 1처 주임은 여러 사람이 역임했지만 유독 2처만은 10년간 변동이 없었다. 극소수의 원로 외에는 이름을 부르는 게 습관이었던 장제스였지만 천부레이에게만은 “부레이(布雷) 선생”이라고 부르며, 의논할 일이 있으면 직접 그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본인만 빼고는 모두가 그를 명실상부한 2인자라고들 했다.
중공도 일찍부터 그에게 눈독을 들였다. 특히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심할 정도로 집착했다. 시도 때도 없이 문안 편지를 보냈다. 대꾸가 없자 천의 조카에게 “우리 당원들은 부레이(布雷) 선생의 문장을 볼 때마다 감동을 받고 선생의 도덕성을 존경한다. 그러나 선생의 붓과 도덕성이 한 사람만이 아닌 전체 인민을 위해 봉사해 주시길 간절히 요망한다”는 말을 했다. 조카가 말을 전하자 천은 “나도 저우 선생을 존경한다. 그러나 공산당에 언라이(恩來) 선생 같은 분이 많지 않은 것이 애석하다”며 “나는 글 쓸 자격을 이미 상실한 사람이다. 하잘것없는 기록원일 뿐이다”고 말했다.
중공 상하이국 조직부는 웬융시(袁永熙)라는 베이징의 지하당원을 천부레이의 막내딸 천롄(陳蓮)에게 접근시켰다. 웬융시는 서남연합대학의 학생운동 지도자였고 미남이었다. 금 한 냥을 공작금 겸 결혼자금으로 지원했지만 천롄이 한눈에 반해 버리는 바람에 공작이고 뭐고 할 필요가 없었다. 베이징 시장이 보증인이 되어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이 체포된 뒤 천부레이는 침묵했다. 몇 달 후 장제스에게 “부녀 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편지를 보냈다. 연말에 “너의 사위는 공산당원은 아니다”는 장제스의 답신을 받았다. 딸과 사위가 연이어 출옥했다. 장제스의 새해 선물이었다.
그해 쌍십절, 천부레이는 딸과 사위를 데리고 쑨원(孫文)의 무덤을 참배했다. 동상에 절한 후 계단을 내려오던 그는 탄식하며 한마디했다. “석양이 참 좋기도 하구나(夕陽無限好).” 그날 그의 입에서 나온 유일한 말이었다.
11월 13일 아침 천부레이는 사위에게 전화를 했다. “이발을 자주해라. 그리고 정치라는 것은 할 게 못 된다. 너와 자손들 모두 근처에도 가지 말도록 해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세상을 떠났다. 장제스에게는 한 통의 유서를 남겼다.
장례를 치른 후 천롄 부부는 상하이로 나왔다. 지하당은 이들을 당 중앙 소재지인 시보포(西柏坡)로 보냈다. 1949년 2월 3일 중공의 베이징 점령 3일 후 베이징에 들어와 ‘공청단(共靑團)’ 중앙(中央)에 일자리를 분배받았다.
문혁이 일어나자 천롄 부부는 강제로 이혼당했다. 얼마 후 천롄은 투신자살했다.
<63>上將 계급장 단 ‘붉은 간첩’ 리커눙<上> |제64호| 2008년 6월 1일
◀1936년 1월 옌안에서 홍군 연락처장을 맡고 있던 리커눙. 김명호 제공
1955년 9월 27일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 마오쩌둥(毛澤東) 주재하에 인민해방군 계급 수여식이 열렸다. 28년 전 8월 1일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의 무장봉기를 기점으로 장정(長征)과 항일전쟁, 국공전쟁, 한국전쟁 등 무수한 전쟁터를 누빈 사람들이었지만 30년 가까이 직책만 있었지 계급은 없었다.
10원수(元帥), 10대장(大將)과 함께 55명의 상장(上將)이 탄생했다. 하나같이 그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전장에서 날을 지새운 사람들이었다. 이날 마오쩌둥은 실전을 지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리커눙(李克農)에게 일급8·1훈장, 일급독립훈장, 일급해방훈장과 함께 상장 계급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7년 후 리커눙이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이 거행됐다. 중공 중앙 부주석 겸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제주(祭主)였고 천윈(陳雲), 둥비우(董必武), 덩샤오핑(鄧小平), 천이(陳毅), 리센녠(李先念) 등이 부(副)제주였다. 부총리 정도는 돼야 명단에 끼일 수 있었다. 월남의 호찌민(胡志明)과 북한 외무상 김광협(金光俠)의 조문이 있었고 각국의 주중 대사와 무관들이 전원 참석했다. 한결같이 ‘정보의 천재’를 잃었다고들 했지만 정작 그가 했던 일이 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러나 그를 적대시하던 쪽에서는 ‘중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고 좋아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사흘간 할 일이 없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사자(死者)의 지위와 지명도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정중하고 장엄한 영결식이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저우언라이를 비롯해 이날 참석한 여러 사람은 이미 30년 전에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사람들이었다. 영결식은 “당(唐)의 명신(名臣)이었던 방현령(房玄齡)도 리커눙에게는 미치지 못했다”는 둥비우의 조시(弔詩)로 끝을 맺었다.
‘붉은 간첩’ ‘호랑이 굴에 태연히 들어가는 사람’ ‘늑대와도 즐겁게 춤을 출 수 있는 사람’ 등이 리커눙의 별명이었다. 국민당 정부의 국방부 작전처장을 비롯해 국방부장·참모총장의 보안담당 비서를 공산당원으로 만들었고, 상대편의 극비 자료를 다음날 아침 홍군(紅軍)의 해당 지휘관들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사람이 리커눙이었다.
리커눙은 중학생 시절 ‘자퇴 운동’을 주도해 머리 큰 대학생 운동가들의 넋을 잃게 한 적이 있었다. 27세 때 공산당에 가입했고 2년 후 당의 지시로 상하이로 갔다. 의사이며 연기자인 첸좡페이(錢壯飛), 영화배우 후디(胡底)와 함께 국민당 특무 조직인 중앙조사통계국(중통)에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중통의 책임자는 김구(金九)의 『백범일지(白凡逸志)』에도 등장하는 쉬언쩡(徐恩曾)이었다. 세 사람 모두 쉬의 비서 등 최측근이 되는 데 성공했다. 미국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쉬언쩡은 여자친구가 많았고 부인을 무서워했다. 여자친구를 만날 때마다 부인이 현장을 급습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곤 했지만 세 사람을 측근에 둔 다음부터는 걱정이 없었다. 항상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고 부인을 잘 따돌리는 리커눙 덕분에 부인과 조우할 일이 없었다. 쉬언쩡이 여자친구를 만나는 사이 사무실에 있던 기밀문서들이 통째로 털리곤 했다.
1931년 4월 공산당 중앙위원인 중앙특과의 책임자가 우한(武漢)에서 체포됐다. 상하이에 은신해 있던 공산당 지도부의 소재지를 줄줄이 불어댔다. 일망타진될 뻔했던 지도부는 세 사람 덕택에 안전하게 피신했다. 저우언라이도 여자로 변장하고 피신해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졌다. 세 사람을 찬양하는 ‘용담3걸(龍潭三杰)’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첸좡페이와 후디는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살아남은 리커눙은 두 사람의 몫까지 다했다. 동북군에 단신으로 침투해 시안(西安)사변을 발발케 했고,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해 국공합작과 항일전쟁으로 유도한 것도 그였다. 일제가 항복한 후 장제스가 제의한 충칭(重慶) 담판에 마오쩌둥이 응한 것도 리커눙의 정보 분석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베이징 입성 후 80만 명에 달하던 국민당 특무를 단시일 내에 소탕한 것도 리커눙이었다. 그러나 리커눙의 진수는 한국전쟁 휴전과 제네바 회담을 통해 보여준 협상 능력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기까지 발생했던 굵직한 사건치고 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지 않은 것은 없었다. 다만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64>上將 계급장 단 ‘붉은 간첩’ 리커눙<下> 한국전쟁 停戰 담판 747일간 막후 지휘 |제65호| 2008년 6월8일
1954년 4월부터 석 달간 제네바 회담에 참석한 리커눙. 왼쪽부터 리커눙, 저우언라이, 장원톈(張聞天·당시 외교부 부부장). 김명호 제공
한국전쟁 발발 1년 후인 1951년 7월 10일 정전회담이 시작됐다. 전투가 진행 중이다 보니 회담이나 협상이라기보다 담판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외교부 상무 부부장 겸 중앙군사위 총정보부 부장 리커눙(李克農)을 담판의 중국 측 총지휘자로 지명했다.
당시 리커눙은 천식이 심해 약을 끼고 살았다. 게다가 마오의 장남 안잉(岸英)이 한국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전사한 뒤에는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건강상태가 최악이었다. 그와 안잉은 좀 유별난 관계였다. 공산정권 수립 초기에 마오는 장남을 리커눙에게 맡겼다. 비서로 옆에 데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집에서 같이 살았다. 마오안잉은 누구와도 농담을 잘했지만 얼핏 보면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넙적한 얼굴의 리커눙 앞에서는 농담은커녕 제대로 웃어본 적도 없었다고 한다. 안잉의 사망 소식을 마오쩌둥에게 제일 먼저 전한 것도 리커눙이었다.
리커눙은 "병이 깊어 판단을 그르칠 수 있다"며 재고를 요청했다. 그가 병중인 것을 몰랐던 마오는 심사숙고했지만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시안(西安)사변과 충칭(重慶)담판을 성공적으로 이끈 중국의 ‘정보의 왕(情報之王)’에게 잘못된 판단이란 있을 수 없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담판의 주역은 중국이다. 대외적으로는 조선인민군이 담판의 주역으로 나선다. 담판의 제1선은 리커눙이 주관한다”는 전문을 보냈다.
병중의 리커눙은 외교부 정책위원회 부주임 차오관화(喬冠華)와 연락관 쯔청원(柴成文)을 데리고 베이징을 떠났다. 7월 6일 김일성을 만난 리커눙은 중조대표단(中朝代表團)을 구성했다. 북한과 중국에서 두 명씩 대표를 선정해 회담장에 내보냈다. 리커눙은 노출을 피하고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대표단을 공작대(工作隊)라 했고 자신은 리 대장(隊長), 차오관화는 차오 지도원(指導員)으로 행세했다.
동영상을 보시려면 상단 중앙에 있는 배경음악은 잠시 꺼주세요. 판문점 휴전회담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747일간 리커눙은 한반도에서 펑더화이(彭德懷)와 함께 ‘일문일무(一文一武)’를 연출했다. 펑더화이는 실전을 지휘했고, 리는 담판의 모든 과정에 전권을 행사했다. 담판의 구체적인 방안을 기획하고 대표들의 발언 내용과 앉고 일어서는 일까지 직접 연락관을 통해 지시했다. 2시간12분간 ‘침묵 대치’라는 기상천외한 담판 모습을 최초로 선보였고, 개회 선포 25초 만에 휴회를 선포하고 회담장을 뜨게 하는 등 온갖 계산된 변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협상 상대방의 진을 빼놨다. 5차례의 회담 중단과 58차례에 걸친 대표단 회의, 733차례 열린 소(小)회의를 끝까지 장악했지만 과로 때문에 천식과 심장병이 재발해 한쪽 눈이 실명하기에 이르렀다. 베이징에선 리커눙의 건강을 염려해 외교부 부부장 우슈취안(伍修權)을 파견했으나 리 스스로 “담판이 진행 중인데 사람을 교체해선 안 된다”며 거부했다.
리커눙의 한국과의 인연은 귀국 이듬해인 1954년 4월 한국과 월남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제네바 회담까지 이어졌다.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외교부장 자격으로 대표단을 이끌게 됐다. 저우는 리에게 대표단 인선과 분담 부서, 회의 대책, 자료 수집 등을 일임했다. 사흘 만에 리의 계획서가 완성됐다. 저우는 리의 건의를 그대로 수용했다. 그러나 국제·외교 문제에 관한 감각과 지식이 없고, 외국어를 한마디도 못하고, 건강이 나쁘기 때문에 자신은 참가하지 않겠다는 리의 요청은 거부했다. 모든 준비 공작을 그에게 일임했다.
리커눙은 각 기관에서 132명의 공작원과 29명의 기자단을 선발해 29편의 발언 원고와 총 12권, 1700만 자에 달하는 한반도·월남·중국의 상황과 국내외 정책에 관한 자료집을 작성해 일부 자료는 소련·북한·월남 대표단들에게 참고하게 했다. 대표단과 공작원들을 베이징에 소집해 의전과 스위스의 풍속·문화 등을 교육시키며 국민당 시절 외교업무에 종사했던 인물들을 찾아내 외교 경험을 듣도록 했다. 또 매일 밤 베이징에 주재하는 외국특파원 중 친한 기자들을 초청해 모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모든 준비에 20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대표단이 제네바에 도착하자 전 세계 언론이 국제 무대에 처음 나온 중국대표단을 주목했다. 리도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공개된 국제회의장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리커눙을 국제적인 감각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리 자신밖에 없었다.
<65>스승 이름으로 장학재단 세운 당대의 명필 치궁 |제66호| 2008년 6월 15일
치궁은 평소 인형을 좋아했다. 개구리 인형이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외출할 때는 토끼 인형을 팔에 안고 다녔다. 김명호 제공
1993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일정 중에 ‘서예가 면담’이 있었다. 중국서법가협회 주석 치궁(啓功)과의 만남이었다. 애초에는 붓글씨를 즐겨 쓰던 대통령인지라 류리창(琉璃窓)을 방문해 벼루를 한 점 구입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치궁이라는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볼 때 벼루 구입과는 비교가 안 될 상징성 있는 행사였다.
치궁은 1930년대부터 명필이었다. 게다가 어법학자(語法學者)이며 성운학(聲韻學)의 대가였다. 그림은 송대(宋代) 문인화의 화풍을 계승했다는 소리를 어려서부터 들었다. 본명은 아이신쥐에루오 치궁(愛新覺羅 啓功), 만주족이며 청(淸) 왕조의 후예였다. 9대조가 청의 다섯 번째 황제인 옹정(雍正)의 아들이며 건륭제(乾隆帝)의 동생이었다. 고조부 때에 모친이 측실이라는 이유로 왕부에서 쫓겨났다. 증조부는 과거를 통해 입신을 모색했다. 거인(擧人), 진사(進士)를 거쳐 한림(翰林)에 이르렀고 예부상서까지 지냈다. 조부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부친은 치궁이 태어난 지 1년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조부는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요절할 것을 염려해 라마교 사원인 융허궁(雍和宮)의 동자승(童子僧)이 되게 했다. 두 살 때였다.
1911년 청조(淸朝)가 몰락하자 정계에 염증을 느낀 증조부는 허베이(河北)성 이(易)현으로 이주했다. 그 바람에 치궁도 2년 만에 환속했다. 조부가 작은 부채에 붓을 몇 번 끄적거리니 석죽화(石竹畵)가 되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 게 5살 때였다. 증조부와 조부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집안은 완전히 몰락했다. 만주족에게는 특이한 풍속이 있었다. 출가한 고모는 남이나 다름없었지만 출가하지 않은 고모는 집안에서 가장 권위가 있었다. 20을 갓 넘은 치궁의 고모는 조카의 성장과 교육을 위해 결혼을 포기했다.
치궁은 소학 시절 서화반(書畵班)에 가입했다. 학교에서는 저명인사들이 방문할 때마다 그의 습작들을 선물로 증정했다. 학생의 습작이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받는 사람들은 명화를 선물 받았다고 좋아했다. 학교에서는 치궁 덕분에 경비가 많이 절약됐다. 그래도 학비는 꼬박꼬박 받았다. 소학을 마치자 조부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대대로 내려오는 서향세가(書香世家)에 맥이 끊어지게 할 수 없다며 치궁의 교육을 전담하겠다고 나섰다. 다이장푸(戴姜福)라는 한림 출신이었다.
그러나 계속 공부만 하면 모친과 결혼도 포기한 고모는 누가 책임지느냐며 한 달에 30위안(元)을 벌겠다고 생활 전선에 나서려 했다. 물론 고모의 반대로 무산됐다. 다이장푸는 치궁에게 고전(古典)과 전통 시사(詩詞)의 작법 등을 가르치며 고궁(故宮)에 진열된 서화를 감상케 했다. 당대의 대가들과 함께 작품들을 둘러보며 평(評)하는 모임을 만들었고 그때마다 치궁을 참석하게 했다. 일가를 이룬 학자이며 예술가들이었지만 구석에서 열심히 받아 적던 판다를 닮은 소년 덕분에 자신들의 이름이 후일 사람들에게 기억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치궁이 평생의 스승인 천위안(陳垣)을 만난 것은 결혼 이듬해인 21세 때였다. 천위안은 푸런(輔仁)대학의 교장이며 대학자였다. 문사철(文史哲)과 시서화(詩書畵)에 일가를 이룬 젊은 치궁의 재능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천위안은 치궁을 푸런대학 부속중학 교사로 초빙했다. 그러나 천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교사가 되려면 사범학교를 나와야 했다. 치궁은 사범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궁리를 거듭하던 천위안이 보고하러 온 직원에게 “부속중학은 그렇다 치고 대학에도 그런 규정이 있느냐”고 물었다. 대학에는 그런 규정이 없었다. 천위안은 간단히 문제를 해결했다. 치궁은 푸런대학 교수가 됐다. 푸런대학은 중공정권 수립 후 베이징사범대학과 합병했다.
치궁은 1990년 홍콩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40년간 스승으로 모셨던 천위안의 120회 탄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3년간 준비한 작품들이었다. 이 전설적인 인물을 보기 위해 관람객들이 운집했다. 몇 시간 만에 매진됐다. 전시회 수입금 163만1692위안을 챙겨 베이징에 돌아온 치궁은 리윈(勵耘)장학조학기금(奬學助學基金)을 창설했다. 천위안의 서재가 리윈서옥(勵耘書屋)이었다.
치궁은 말년을 융허궁의 가장 깊숙한 방에서 보냈다. 동자승 시절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 독경하며 지난날을 회상하곤 했다고 한다. 2005년 6월 세상을 떠났다. 사회 각계에서는 800만위안을 모금했다. 격변의 시대에 가장 천진난만한 삶을 살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그를 위해 치궁교육기금회(啓功敎育基金會)를 설립했다. |
첫댓글 한때 우리나라엔 '7공자'가 세인의 관심을 끈 적이 있었지. 정확한 명단은 알려진 바가 없다고 기억되지만,
세상에 떠도는 풍문으로는 신앙촌 박 장로의 아들 박*명과 최, 장, 박 등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음.
그러나 이들에 대해서는 재벌 또는 덩어리 부자 2세, 여성 편력, 탈선, 몰락 등등의 이지지만 남아 있네.
그들이 위의 장보쥐처럼 문화 예술에 조예가 깊어 가치 있는 문화재를 많이 소장했다면 그나마 일말의 동정이라도 할텐데... 쯧쯧.
게메...
우리나라에도 간송미술관이 있긴 하지...
그나마 간송 ,이병철 회장등이 집이나 땅대신 선비다운 기질로 수집했기에외국에다 팔리지않고 남아있는것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간송은 매년 두번 구경가서 까막눈을 부비고오곤하지요.
간송미술관 구경은...
두어시간은 열을 서야 하는게 쉬운 노릇은 아닌데,
茶咸은 대단도 허이~!
@鷗浦 순둥이 성북동에 터를 잡은게 70년대 중반부터인데,어느날 친구한
담에 고치걸라,평일날 가야한다,70년중반에 다닐땐 극 소수관람객뿐이었는대,이젠 축제처럼 인파가몰려 내가다흐믓(?)하단다!...
@茶咸 지난번 언제 한번 갔는데...
입구에서 부터 쭉 줄을 섰는데...
2시간 이상을 서서 기다리다 관람한 적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