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에 수묵 (외 1편)
이성목
봄비 슴슴한 날이다. 젖은 땅에 산그늘 번져들더라. 어느 여백에 들까 궁리도 끝나지 않은 사이, 눈물 한 방울 떨어뜨렸으니 어쩌겠는가.
묽은 밤이 오는 것이더라. 어둑한 마당에 흰 꽃잎 날고, 빛들이 고요히 눈물에 닿아 번져가더라. 너무 멀리 번져가서 마음 희미해졌으니 어쩌겠는가.
날이 가니 색이 멀어지던가. 생살 붉은 저녁의 별리도, 아침이면 붓끝에 묻어나지 않는다. 색을 버리고도 못 버린 몸이, 몸에 겹쳐 파묵이 되고 다른 몸으로 번져 발묵이 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백발이 성성한 날 기다려지더라. 한없이 늙고 늙은 끝, 당신의 여백으로 스며드는 나를 맞이하고 싶더라. 있고 없는 것이, 들고 나는 것이 모두 세상의 한 폭인 것을 어쩌겠는가.
―《시로 여는 세상》 200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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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뿌리
식당주인은 펄펄 끓는 가마솥에 국수를 풀어 넣는다.
솥가마의 푸른 김이 천장까지 끼친다.
양파는 가늘고 긴 뿌리를 뽑아 내린다.
유리잔에 양파의 입김이 뿌옇게 서려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국수가닥을 건져 올리던 한 노년이
희뿌연 안경을 벗어놓고 잠시
가늘고 긴 숨을 끊어 뜨거운 국물 속에 내려 놓는다.
어린 손자는 후루룩 후루룩 그 뜨거운 소리를 먹는다.
땀을 닦고, 눈물을 훔친다.
세상의 모든, 푸른 것을 밀어 올리는 뿌리는
이렇듯 뜨거운 바닥에 맨발로 서는 것이다.
젓가락 가지런히 세워 잡듯
여기, 필생의 뿌리를 내려야겠다.
칼국수를 먹는 속이 훅 달아오르고
발바닥 툭툭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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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목 / 1962년 경북 선산 출생. 금오공고, 제주대 법학과 졸업. 1996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남자를 주겠다』『뜨거운 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