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이다.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바꾸면서부터이다.
1308년(충선왕 1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 때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聖殿)과 동무(東廡)·
서무(西廡) ·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성균관에는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大司成)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좨주(祭酒)·악정(樂正)·직강(直講)·박사(博士)·학정(學正)· 학록(學錄)·
학유(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儒生)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에의 입학 기회를 주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였으며,
소정의 선발 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蔭敍)에 의해 입학한 유생들을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격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였으며, 출석 점수
원점(圓點)을 300점 이상 취득해야만이 대과 초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유생의 생활은 엄격한 규칙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자치적인 활동기구로
재회(齋會)가 있었다.
유생은 기숙사생활을 하는 동안 국가로부터 학전(學田)과
외거노비(外居奴婢) 등을제공받았으며, 교육 경비로 쓰이는 전곡(錢穀)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하였다.
유생은 또한 당대의 학문·정치현실에도 매우 민감하여 문묘종사(文廟從祀)나
정부의 불교숭상 움직임에 대해 집단 상소를 올렸으며,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권당(捲堂:수업거부) 또는 공관(空館)이라는
실력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학문의 전당으로서 관리의 모집단으로 주요한 기능을 한 성균관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교육재정이 궁핍화하고 과거제도가 불공정하게 운영되
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1894년의 갑오개혁은 성균관의 역사에서 중요한 굴절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교육개혁이 추진되면서
일정한 변모를 겪게 되었다.
성균관은 개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 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1946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그 전통은 계승되었다.
1785년(정조 9)에 편찬된 《태학지(太學志)》에는 성균관의 건물 배치도 및
성균관 제도의 변천과정, 유생의 활동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성균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