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oy, the mole, the fox and the Horse>는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영어책이다. 날마나 조금씩 읽어간다. 조금씩 읽어야 건져지는 풍부한 글맛이 있다.
소년Boy과 두더지mole가 만나 얘기를 나눈다.
What do you want to be when you grow up?이라고 묻자 소년이 대답한다. "Kind", 나는 이 단어에 밑줄을 그었다. 대화가 이어진다. "What do you think success is?"라고 묻자 두더지가 대답한다. "To love"라고. 나는 다시 밑줄을 그었다.
소년이 또 묻는다. "What do you think is the biggest waste of the time? "Comparing yourself to others."라고 두더지가 대답한다. 나는 한번 더 밑줄을 그었다.
모두 익숙한 생각들이다. 아이들에게 꿈을 가르칠 때, 직업은 꿈이 아니라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그것이 꿈이라고 알려주었다. 관계를 택할 것이냐, 성과를 택할 것이냐라는 기로에 서서 선택을 할 때는 늘 관계를 선택하고자 했다.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 속에서 자라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들을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주 의식적인 노력이었다. 아이들이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자기의 일부로 생각할 수 있길, 그 어떤 것도 자기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꿈이 친절하기,라든가, 성공이란 사랑하는 삶이라든가, 시간을 가장 헛으로 사용한다는 게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이라는, 이런 글귀들이 전혀 생소하지 않은데도 나는 또 밑줄을 그었다. 밑줄을 그어놓고 잠시 생각에 잠긴 나를 지켜본다. 왜 밑줄을 그었을까? 아마도 익숙하지만 잃어버리기 쉬운 가치라서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익숙함이란 감옥에 갇혀 잊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나 싶은 것이다.
<고난은 사랑을 남기고>를 읽으면서 같은 감흥에 젖었다. 사순절묵상집으로 꾸며진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그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 가상칠언이 이 책의 핵심내용이다. 신자라면 십자가가 낯선 사람이 없을테고, 십자가의 사랑을 모를 리가 없을 테다. 익숙하고 식상하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십자가'는 언제난 밑줄이 그어진다. 십자가를 다시 환기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읽기였다.
"용서"로부터 시작되는 십자가의 언어. 저자는 "용서없이는 예수도 없습니다"라고 단언한다. 이 책에서 키워드 하나를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가차없이 "용서'를 말할 것이다.
며칠 전에 우리 집에 한 분이 다녀가셨다. 심란한 마음을 털어놓고자 부러 나에게 시간을 구한 것이다. 그 심란한 마음이란 나도 이미 아는 바다. 수년을 들어왔던 내용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그 마음을 하소연 하고자 함이었다. 용서하지 못하는 이에 대하여 한참을 비난한다. 상처가 얼마나 컸는가를 풀어놓는다. 매번 같은 레파토리다.
용서해야 하는데 용서가 안된다고 한다. 같은 레파토리를 7년 동안 들었다. 어찌할 것인가?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 바로 용서이건만, 십자가에의 첫 언어가 바로 용서였음을 저자는 상기시킨다. 내게 가장 새롭게 다가왔던 부분은 저자의 질문이었다.
"왜 정의로운 하나님께서 용서라는 부정의를 행하실까요?"
용서의 의무가 지워진 자는 기실은 피해자이다. 상처받은 이다. 그러니 용서해야 할 이에게 용서란 부정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용서는 정의의 실현이라고 주장한다.
"나에게 악하게 행한 당사자를 찾아가서 말합니다. '당신은 내가 스스로 죽고 싶을만큼 나에게 큰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가해자를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일입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그의 잘못을 말해야 하고 그가 자신의 행동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잘못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정의의 시작입니다"(21p)
수년 동안 같은 이야기를 들어준 이유는 그분이 상처에서 놓임받기를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한 번 말하고 두 번 말하다 보면 어느새 흐릿해져서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용서에 더 가까와자기를 바랬지만, 상처는 어찌된 일인지 희미해지기는 커녕 더욱 더 또렷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사과의 말을 먼저 들으셔야지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만 들어도 내 마음이 이렇게 힘들지는 않겠어요"
"그럼, 먼저 가서 왜 상처를 받았는지를 말씀하세요. 무엇이 상처였는지, 많은 상처 중에서도 어떤 것이 가장 깊었는지 말씀하세요"
"................."
용서의 시작은 이렇듯 가해자에게 스스로의 잘못을 알게 하는 것부터였다. 그래서 용서는 정의의 실천인 것이다. 나는 그저 한 말이었는데, 저자가 이렇듯 나의 조언을 확증해주어서 고마웠다. 나도 질문이었다. 왜 피해자가 용서를 해야 하는가, 피해받은 것도 서러운데 용서까지 하라고 하니, 이중으로 너무나 괴로운 것이다. 이 괴로움을 알기에 나도 거의 7년이란 세월을 들어줬지만, 들어주는 것으로는 절대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십자가는 정반대의 진실을 똑똑히 알려 주었습니다. 내가 상처받은 것이 진실인 만큼, 내가 탓했던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은 기실 책임 전가와 화풀이 대상이었고, 내 죄를 감추고 싶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24p)
아내로서 나는 남편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받은 것 같다. 상처가 깊을수록 나는 하나님께 말씀 드렸다.
"하나님, 당신은 왜 저에게만 변화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왜 저에게만 말씀하십니까? 왜 저 인간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시죠? 저 남편에게도 말씀해주소서. 언제까지 저만 간섭하실 건가요? 내게 현숙한 아내가 되라고 하시기 전에 저 남편에게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니 아내를 사랑하라고! 그러면 내가 용서도 하고 변화하겠습니다."
유치찬란하지만 그랬더랬다. 어느 날, 내가 받은 상처의 대부분이 이 남편의 의도적인 악함 때문이 아니라,약함 때문임을, 그와 내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임을 뼛 속 깊이 알게 되었다. 그가 의도적으로 나를 아프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안경과 나의 안경이 달랐음을 깊이 깊이 알게 되었다.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그와 나는 말날 수 없는 평행선이구나, 이렇듯 다르구나. 그러나 나는 그 때로부터 나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 같다. 달라서 받은 상처라면 나 또한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내 상처는 아팠지만, 그의 상처에는 무지했다. 내 상처가 아파서 소리 질렀지만 그의 상처에는 냉랭했다. 이렇듯 나도 인식하지 못한 새에 나는 무정하고 냉정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십자가는 바로 이 사실을 발견하는 현장이다. 나의 상처는 도리어 나의 무지였음을 발견하는 곳이었다. 좁은 시야가 벗겨지면, 새로운 시야가 열린다. 용서는 시야를 넓히는 것이었다.
"기억한다는 것은 '함께함'이기 때문입니다. 수도사 로렌스는 "하나님을 자주 생각하는 것 말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기억은 곧 임재와 동행입니다."(55P)
왜 이렇듯 고통과 고난에 무심하십니까? 내 고난은 아니라도 이웃의 고난을 목격하다 보면, 이런 질문이 저절로 나왔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정의에 매우 동감한다. 인생은 한 마디로 고통이다. 먹고 사는 일, 가장 생존에 속한 이 일마저도 이리 고통스럽다면, 하나님은 왜 인간을 만드셨을까, 거리의 구걸하는 이들을 볼 때면 왜 저 사람을 저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실까, 의문했었다. 고통이 인생의 디폴트라면 인생은 뭘 바라고 살아야 하는가. 성장과 성숙, 이런 것은 안해도 된다. 고통만 겪지 않는다면. 이런 질문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답은 "임마누엘"이었다. 나는 너와 함께 하길 원한다. 고통에 빠져 있을 때, 나는 하나님께 바락 바락 소리를 지르며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에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기도했었다. 소리 소리 지르며 기도했지만 주님의 음성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제 풀에 지쳐 잠들었다. 일어나 아침 햇살을 맞으며, 왜 주님은 내게 어떤 위로도 하지 않으셨을까, 아무런 답도 주지 않으실까 서운했다. 그러나 같이 아픈 사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음을, 그분은 나와 함께 고통속에 계셨음을 알게 되었다. 동행할 수 있다는 것, 기억함으로 그분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가장 큰 은혜이다. 고통을 부러 구하진 않겠지만 그것에 직면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래서 고난이 사랑을 남긴다고, 저자는 이리도 아픈 제목을 붙였나 보다.
"십자가 없는 이전 삶은 끝이 나고 십자가와 함께 사는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이야기가 우리의 긴 여정입니다"(182p)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비록 아픈 제목이지만 사랑이 낳은 고난을 통과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 낡은 삶을 부인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동력이 십자가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새기게 한 책. 들어왔고 익숙했던 메세지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은 듯 생생했던 책읽기였다.
#마감 날짜를 잘못 알고 이제야 올립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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