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기까지 하던 증자의 효
어릴 적 우리 집에는 히어로들이 살았다.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알려주고, 뭐든 잘 만들고, 잘 고치는 강한 히어로였다. 나는 그들을 좋아했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어지러워지며 그들을 잊었고 점점 그들의 마음은 뒷전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흐른 지금, 이제야 서서히 느껴진다. 히어로들의 불안함과 아픔이, 떠안아야 했을 세상이. 이제야 효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깨닫는다.
논어의 8번째 책 태백편에서는 먼저 태백의 덕 이야기로 시작하여 증자가 죽음에 다다랐을 때 전했던 말들을 나열되었다. 그 뒤엔 공자의 여러 가르침들이 이어지고 마지막엔 전설적인 세 성군, 순임금, 우임금, 요임금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처럼 태백편에는 중요한 주제가 다양한데, 나는 증자의 죽음과 그의 효에 대해 좀 더 집중적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증자는 기원전 505년부터 435년까지 있었던 사람으로 춘추전국시대 후반부의 사상가였다. 증자의 본래 이름은 증(曾) 삼(參)이며 몰락한 귀족으로 빈한한 집안에서 자랐다. 또 공자보다 46세 어리고 아버지 증점과 함께 공자의 제자로서 배움을 얻었다. 공자는 큰 나이 차이 때문에 증자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증자를“우직하고 노둔하다”(우직하지만 둔하고 어리석음)고 평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증자는 배우고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직했고 그러한 공자 밑에서 부모를 섬기는 효(孝)와, 정성으로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충서(忠恕)를 배우고 가장 중시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증자는 동양의 효의 대명사로 여겨질 정도로 강직한 효를 보인다. 그에 관한 일화들이 있다. 증자는 아버지를 봉양하며 항상 밥상에 술과 고기를 올렸는데 상을 물릴 때면 아버지는 더 남은 음식이 있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러면 증자는 언제나 남은 음식이 있다고 대답했다. 아버지의 마음을 정성스레 짐작해 한발 앞서 준비하는 효를 실천한 것이다.
또 증자는 어릴 석을 정도로 효를 실천했다.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오이밭을 갈고 있을 적에 증자가 실수로 오이의 뿌리를 잘못 베었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가 몽둥이로 증자의 등을 한번 쳤서 증자가 쓰러졌다. 하지만 얼마 후 증자는 일어난 뒤 오히려 아버지의 손을 걱정하며 혹여나 자신의 몸을 걱정하실까 자신의 방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아버지를 안심시키려 했다. 이 일화를 들은 공자는 증자에게 화를 냈다. 순임금도 아버지의 큰 모둥이에는 도망을 치셨다며 순간의 화로 자식에게 매질을 하면 부모가 얻을 마음의 상처를 이야기한다. 이처럼 공자는 증자의 융통성 없는 증자의 효에 화를 내었다고 한다.
이번 태백편에서는 이러한 증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듯 보이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8.3, 8.4, 8.5, 8.6, 8.7) 증자는 병에 들어 제자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이 주심 몸에 손산된 곳이 있는지)내 발을 펴보아라! 내 손을 펴보아라! <시경>에 두려워하고 삼가기를, 못가에 서 있듯, 얇은 얼음을 밟고 가듯 하노라 라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이제부터는 그런 걱정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알겠구나, 애들아!”(8.3) 당시에는 부모님이 주신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불효였다. 하지만 이제 증자는 삶의 끝에서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죽기 전까지 효를 잊지 않았던 증자였다. 또 증자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듯한 말을 남겼다. “선비는 뜻이 크고 의지가 강인해야 하니,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仁)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또한 책임이 무겁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그만두는 것이니 또한 갈 길이 멀지 않은가?”(8.7) 인(仁)은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서로 관계를 지으며 사랑하고 그 관계를 천하로 확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효는 가장 가깝고 작은 관계에서 실천하는 '인'인 셈이다. 증자의 이 대목은 그러한 효를 통해 인(仁)의 길을 걷고자 했던 증자의 삶이 보이는 대목인 듯하다.
지금의 시대의 우리는 진정한 효를 잊은 것 같다. 처음에는 유교 사상으로 인해 효를 중시했다. 하지만 점점 사랑이 없는 허울뿐인 효가 행해졌고 지금은 가족과 부모가 함께 있는 다는 것이 당연해진 것 같다. 이러한 지점에서 언제부턴가 독거노인은 무시할 수 없는 사회문제가 되었다. 사회가 점점 빠르게 흘러가고 각자의 일상도 바쁨 속에서 부딪히며 살아진다. 아무런 탈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이 힘들어졌고 자신만 챙겨도 숨 가쁜 삶이다. 지금의 효는 그리도 어려운 것일까?
물론 효와 인(仁)은 어렵고 이상적이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아니어도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해볼 만하다. 사실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나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하고있는 평범한 일이다. 논어는 이것이 효와 인의 출발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덤벼 볼만 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