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의 일환으로 상륙작전에 앞서 서울을 폭격하여 국군과 연합군이 서울에 진입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서울은 수많은 문화재들이 도심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 폭격이 진행될 경우 이 문화재들이 당연히 파괴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문화재를 지켜낸 사람들이 있었다.
주일공사인 김용주는 서울폭격작전을 들은 직후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을 찾아가 “오랜 역사가 흐르는 동안 여러 위기에서 보존되어진 문화재가 폭격에 파괴되어버린다면 한국엔 더 이상 문화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며 사령관과 참모진을 설득하여 숭례문과 덕수궁의 온전한 보전을 약속 받았다. 9월 9일부터 13일까지 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서울 시가지에 위치한 문화재는 어떠한 폭격의 피해도 입지 않게 되었다.
제임스 헤밀턴 딜은 한국전에 자원한 포병장교로 9월 25일 덕수궁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부대를 포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순간 포격으로 덕수궁이 하루아침에 파괴된다면 한국인들에게 죄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민군이 덕수궁을 나올 때까지 포격을 지연하여 덕수궁이 파괴되는 것을 막았다. 그는 덕수궁을 지켜낸 스스로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6.25당시 이러한 사찰들을 인민군이 군사적으로 악용하여 국군에 많은 피해를 줄 가능성때문에군사령부는 지리산내 사찰 소각명령을 각 군에 하달했다.
당시 사찰소각명령을 받은 군이 상원사를 태우기 위해 소각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상원사 주지스님인 한암스님이 법당에 앉으면서 “어차피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는데 여기 있으면 힘 안 들이고 화장될 것이고, 자네들은 명령대로 한 것이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어서 법당에 불을 지르게”라고 말하며 군인들을 꾸짖었다. 스님의 기세에 눌린 국군은 상원사 소각을 포기하고 돌아가 상원사를 지켜낼 수 있었다.
당시 1전투 비행단 부단장 '김영환대령'에게 가야산의 사찰인 해인사 폭격명령이 하달되었다. 하지만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를 폭격할 경우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과 같이 역사를 간직한 문화재가 사라질 수 있다고 판단하여 과감히 전투기를 해인사 상공에서 회항하는 결단을 내려 해인사를 지켜냈다.
경찰대 제2연대장 ‘차일혁 총경‘에게도 지리산 내 사찰소각명령이 하달되었다. 하지만 차일혁 총경은 사찰에 문이 없다면 인민군도 사찰을 군사적으로 이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올라 화엄사를 소각할 당시 법당 내 모든 문짝만 떼어 소각하는 방법으로 화엄사를 지켜냈다. 이러한 방법으로 화엄사를 시작으로 천은사, 쌍계사, 백양사, 선운사 등 전라도의 많은 고찰을 지켜내었다.
첫댓글 명령불복종...
그러나 그 명령이 잘 못 된것이라는 사실을 설득할 수 있는 시간이 없을때...
그 누군가의 투철한 희생정신이 후세에 영웅을 탄생시킬 수 도 있다는 사실을..
지금 우리가 하는 일도 이와 유사한 일들일수도 있답니다... 설득과 선택과 결단으로!!!!
항상 누군가의 목숨을 건 헌신의 결과임을 ~~~
국익을 위한 선택 ...
공감합니다.. 우리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