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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침략에 대비하라! |
[안산 역사이야기] <32> 안산의 봉수(烽燧) |
이를 계기로 안산의 봉수에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았다. 봉수와 관련된 조선시대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世宗實錄地理志》(1454년)에 이곳 안산에 무응고리(無應古里) 봉수와 오질이도(吾叱耳島) 봉수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안산군에 있는 2개소의 봉수 중 먼저 오질이도 봉수에 관해 언급을 하고 뒤에 무응고리 봉수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이는 처음에는 무응고리 봉수가 안산의 봉수 역할을 하다가 후에 오질이도 봉수가 그 기능을 대신 하면서 무응고리 봉수는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인지 그 이후 기록에는 무응고리 봉수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에는 오질이도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남쪽으로 남양 해운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인천의 성산에 응한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남쪽에서 남양(화성시)의 해운산(海雲山)에서 북쪽의 인천(인천광역시) 성산(城山)으로 봉화가 연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輿地圖書》(1760년)에는 정왕산(丁往山) 봉수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여기에는 이전의 기록에 없던 정왕산 봉수에 관한 기록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 내용인즉, 전에 있었던 오질이도 봉수를 이곳 정왕산 봉수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新增東國輿地勝覽》과 《輿地圖書》가 편찬된 사이에 오질이도에서 정왕산으로 봉수 기능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옮긴 이유는 전(前) 지역이 아마도 맑은 날에도 시계(視界)가 분명하지 않았던 해안도서 지역이라서 봉수 전달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산의 봉수는 조선시대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제5거 연변봉수(沿邊烽燧)의 간봉(間烽)이다. 이 봉수는 전라남도 순천의 돌산도 봉수에서 출발하여 전남 ․ 전북의 해안을 거쳐 충남의 내륙 ․ 해안과 경기도 및 강화도의 해안을 돌아서 경봉수(京烽燧)인 한성 목멱산(木覓山)에 이르렀다.
그런데 오늘날 안산의 봉수는 그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먼저 무응고리 봉수는 시흥시 죽률동과 안산시 신길동 경계상의 해발 63미터 나즈막한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근래에 이루어진 시화지구 공단 조성 공사로 인해 큰 봉우리 2개소만 빼고 산 전체가 깎여서 유적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다.
최근에는 공원 조성으로 그 흔적을 더더욱 찾기가 힘들고, ‘암석원’이라는 이름으로 돌무지가 몇 개 있을 뿐이다. 오질이도 봉수도 군 시설물의 설치로 흔적이 없어진 상태이다. 정왕산 봉수 또한 현재 시흥시 정왕동 봉우재 마을의 해발 115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나, 과거 시화공단 조성 공사에 필요한 매립용 흙을 채취하기 위해 산을 깎아내어 그 터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봉수제의 철폐 시기는 보통 1894년(고종 31년)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안산의 봉수로 폐지 직전까지 남아있던 봉수는 정왕산 봉수뿐이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봉수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최근에 발견된 석호중학교 뒷산의 건물지가 봉수지(烽燧址)라면 그나마 봉수의 흔적은 남아있는 셈이지만,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봉수대였다고 단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보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하겠다. 우리 조상의 삶의 궤적을 찾는, 관계당국의 보다 적극적인 의지와 실천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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