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맞혀 봅시다. 딩동댕~!
북적한 도시를 걷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많은 이들이 타인으로 남아 있다.
이 두 문장은 종속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일까, 독립적이어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와 마침표를 두고 잠시 생각했다. 보다 적합한 말은 옛 자취들을 훑어보며 대입해야 할 거라고. 그건 옛 기억을 생각해야 한다는 얘긴데 그래서와 마침표를 어떻게 하는지가 뭐가 중요한가. 결론을 짓고 생각을 하든 결론을 짓기 위해 생각을 하든 과거의 기억 속에서 풍덩하는 일이란 현재를 방기하는데 최적이다.
어느 다리로 할까요, 알아맞혀 봅시다.
다리 하나씩을 짚어 가며 노래를 부르다 노래가 끝날 때 선택된 다리를 하나씩 제하는 놀이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술래를 정하거나 하는, 놀이의 역할을 정할 때 주로 활용되었으니 그 자체는 놀이가 아니었을 거다. 선별작업이 주가 되는 원활한 놀이를 위해 필요한 보조 활동이었다. 다만 그만을 위한 주제곡을 가졌던 탓에 노래 하나로 오래도록 주된 놀이로 기억되고 있다.
처음 불렀던 그날 이후로 제법 이 노래를 불러 왔다. 선택의 순간이면, 결정이 필요할 때면 찾아지는 노래였다. ‘알아맞혀 봅시다’를 점점 높은 음으로 부르면 ‘다’에 해당되는 다리를 가진 이는 움찔한다. 선택되리라는 기대 혹은 실망이 감지되는 순간이 닥친 것이다. 그 순간 이 활동의 담당자는 자신의 권한을 여지없이 활용해 놀이 동무들의 감정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
어느 다리로 할까요, 알아맞혀 봅시다. 딩동댕~!
또 한번 딩동댕! 딩-동-댕을 이어 붙이는 것으로 말이다. 반복된 딩동댕의 끝에, 마지막으로 ‘댕’자와 만난 다리가 행운, 어쩌면 불운을 누리게 된다. 마지막에 남은 다리가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 놀이를 하며 우리는 함께 노래를 불렀고 함께 딩동댕을 외쳤다. 놀이는 놀이로서 그렇게 끝났어야 한다. 불규칙 선언이 가져다주는 건, 흥얼거리던 노래가 남겨 놓은 건, 관계와 앙금이다. 반복된 딩동댕은 타인을 위한 배려였을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었을까.
딩동댕. 딩-동-댕.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 딩동댕만을 불러대던 것처럼 결정을 미루는 일은 습관처럼 반복되어 왔다. 커피를 마실까 딩동댕. 카페라떼로 할까 딩동댕. 아메리카노로 할까 딩동댕. 레몬에이드로? 딩동댕, 딩동댕. 삶은 음료를 고르는 것 정도의 선택은 아니었으니 딩동댕과 함께 한 노래부르기는 결코 재밌는 놀이로 끝나지 않았다.
딩동댕은 정답! 합격!의 또다른 말인데 돌이켜보면 그 모든 딩동댕 노래는 비극의 전주곡이었다. 돌이켜 보았을 때 그랬다 말하는 건 그땐 몰랐다는 얘기와 같다. 습관처럼 굳어진 딩동댕의 일상을 단 한번 비켜간 적이 있었다. 리듬을 놓쳐버린 것처럼 딩동댕을 제대로 이어 붙이지 못했던 그날의 기억이 선명한 것은 하나의 이유밖에 없다. 미루지 않은, 단번의 선택과 결정이 가져다준 파급효과가 내 삶의 뒷날에도 계속 엉겨붙어 있을 것이기에……. 러시아 선원들에게 닥친 아홉 번째 파도처럼.
러시아 화가 이반 아이바좁스키의 그림 「아홉 번째 파도」는 산처럼 우뚝 솟아 폭풍우치는 바다에 난파된 배와 이제 해가 떠오르는 듯 붉은 빛과 구름들이 어우러져 있다. 검은 파도가 아니라 밝은 빛이 떠오르니 폭풍우가 이제 끝나려나 싶은데, 러시아 선원들에게 ‘아홉번째 파도’란 폭풍이 몰고 오는 가장 치명적인 마지막 파도라고 한다. 그러니까 난파된 배에서 돛대에 매달린 선원들에게는 가장 절망적인 순간이 될 것이다. 이 돛대에서 알아맞혀 봅시다, 딩동댕을 부르게 된다면!
선택은 놀이일 수가 없음을 알기에 그래서 더욱 선택에 무게를 주지 않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선택이 온전한 나의 의지와 절실함으로 이루어졌던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선택의 순간, 내가 타인을 의식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배려처럼 행했던 것이 사실은 배려였던가, 포기는 아니었던가. 회피는 아니었던가. 어떤 상황마다 선택의 유예가 반복되었던 것이, 삶에 대한 진중한 결정이 아니었던 거다. 좀더 이기적이었어도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 이기적이었어야 한다.
어떠한 상황마다 딩동댕이 되어버리는 것이, 내가 나를 놓아버린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 치열한 사회에서 아니 치졸한 사회에서 무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딩동댕을 권력처럼 휘두르며 간다. 그가 가는 곳마다 세상은 폭풍이고 암흑이기에 내게도 갑옷이 필요하다.
타인들이 늘어간다는 것은 이 엉겨붙은 덩어리들을 최소화하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