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28_서광_주일설교 김기화전도사
본문: 요한복음 8장 1~7장
제목: 가면을 벗어라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라는 말이 있죠. 누군가에게 어떠한 자리가 주어지면 그 자리와 위치에 맞게 사람이 변한다는 말이죠. 저도 참 공감이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희의 신앙에 빗대어 한번에 믿음의 좋은 자리로 신앙의 좋은 자리에 앉아서 믿음의 삶을 쭉~ 좋게 바뀌어 살아가면 좋은데
저희의 신앙과 삶의 모습은 좋은 자리에만 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처럼” 좋지 않은 자리와 위치에도 저희는 쉽게 그 잘못된 것에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거예요.
한 학자가 이런말을 했더라고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나의 모습이 진짜 자신의 모습이다” 누가 보지 않는 나, 혼자 있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나의 행동이 진짜 나의 모습이라는거죠.
예전에 이 말을 스스로 생각하면서 과연 나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저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을 돌아봤는데요.
예배 이후의 저의 모습, 퇴근하고 집에 혼자 있을 때의 저의 모습, 교회와 일터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사람들 앞에서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웃으며 이야기하고 난뒤 뒤돌아서의 지쳐있는 저의 모습, 저의 표정의 변화등을 돌아보는까 저는 참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 같더라고요.
나의 어려움과 고민과 아픔 또 연약함들을 가리고 감추기 위해서
그때 그때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거죠.
그런데 문제는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있어서도 잘못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저도 교회 안에서 바른 척 거룩한 척 성실한 척 그런 거짓된 가면을 쓰고 살아갈 때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혹 오늘 여러분들 중에 저와 같이 때론 주님께 부끄러운 신앙의 거짓 가면을 써보신 분이 계신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신앙의 거짓 가면을 벗고 올바른 믿음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실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저희가 잘 알고 계신 내용이시죠?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일화죠.
간음한 여인 즉, 성적으로 음란한 여인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가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서로를 정죄할 수 없다라는 가르침을 주고계세요.
그런데 오늘은 이 결과보다 조금 앞으로 가서 이 내용의 과정을 조금더 자세히 살펴봤으면 좋겠어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8장에서 시작을 합니다. 당시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감란산에 다녀오시고 성전으로 돌아와보니까 서기관들과 바래새인들의 간음한 여인들 붙잡아 온 상황이죠.
그런데 이 당시의 시기가 어떤 시기였냐면 7장에 보면 그때는 초막절이였고 간음한 여인이 잡혀온 날은 초막절이 끝난 바로 다음날 이른 새벽아침이였어요.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중 하나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 시키시고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았던 그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초막절에는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7일동안 초막을 지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억했습니다. 또 그들의 풍습중에는 초막절에 7일이 지나고 여덟째가 되는 날 새벽에 밤새도록 춤추고 찬양하다가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그 순간에 모두 해를 등지고 뒤로 돌아서 해가 뜨는 반대편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봅니다.
그 이유가 뭐예요? 우리는 저 해 태양신 즉,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섬긴다는 의미의 행동이였어요.
그런데 아까 뭐하고했죠? 오늘 본문의 이 사건이 초막절 직후에 일어났다고 했지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몇시간 전만하더라고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영광을 높이며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태양을 등지고 하나님을 바라봤던 그들이
축제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간음한 여인을 발견했을까요?
간음한 여인을 잡아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애초에 처음부터 예수님을 시험하려고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막절이 끝나는 그 직후에 온 동네 구석구석 뒤져가면서 간음한 여인을 일부로 찾아 낸거죠
그렇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놓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는데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 질문은 예수님을 시험하기에 아주 치밀하고 완벽한 질문이였어요. 그들이 생각한 답은 두가지였겠죠? 돌로쳐 죽여라 아니면 용서하고 살려줘라
그런데 이 질문이 치밀하고 완벽한 질문인 이유가 예수님이 대답하시기에는 어떤 답을해도 빠져 나갈 수 없는 질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그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라고 하셨다면 이건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공의를 어기는 일이 되고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겼다고 꼬투리를 잡고 예수님을 잡아갔을것이고
반대로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어떻게될까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 자리에 계셨는데 예수님이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어떠시겠어요?
아... 예수님 그렇게 안봤는데 진짜 매정하시네요 예수님 본인이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말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어기는 상황이 되는거죠
그렇기에 이 질문은 교활할 정도로 완벽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질문이였습니다.
서리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신이났겠죠. 자신들이 파논 함정에 예수님이 뭐하고 대답하든 덫에 걸리게 될테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죠? 이런 함정의 질문에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명쾌한 답으로 모든 사람들을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셨죠.
예수님은 갑자기 바닥에 쪼그려 앉으시고는 손가락으로 땅에 뭘 주절주절 쓰셨어
그러고서는 벌떡 일어나셔서 돌로 간음한 여인을 쳐 죽이려고 모인 사람들에게 여기서 죄 없는 사람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고 또 앉으셔서 손가락으로 땅에 다시 뭘 적으셨어요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바닥에 도대체 뭘 적으셨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많은 학자들이 아마도 그곳에 있는 죄인들의 이름과 죄명을 적지 않으셨을까? 하고 많이들 이야기해요.
예수님께서는 함정 같은 질문을 명쾌하게 답하셨고 그 자리에 죄를 한번도 짓지 않은 사람을 없었기에 사람들은 조용히 떠나갔고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여인도 돌려보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함께 나눈 메시지 속에서의 가면을 쓰고 이중적인 모습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저희의 신앙의 모습을 잠시 빗대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는 당당하고 떳떳한 신앙생활 하고 있나요?
제가 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때로 저희의 신앙생활의 모습이 부끄러울때가있죠.
그런데 그 부끄러움은 저희가 하나님을 더욱 깊게 알아가고 쫒아가고자 마음 먹었을 때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오히려 저희가 신앙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저희는 가면을 쓰고 낮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바로 다음날 예수를 시험하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나의 신앙의 모습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부족하다고 느끼는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의 위험한 부끄러움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를 부끄러워 한다는거죠.
이 두 가지 부끄러움은 스스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없는지에서 차이가 납니다.
내가 예수님을 바로 알고 있어 그런데 알고있지만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의 신앙의 부끄러움이 생기고,
반대로 내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나에게 부끄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저희는 내가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고 있는가를 깨달아야합니다.
혹 내가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하지만 가면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유익과 나의 생각으로 서기관들처럼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려 하는 것은 아닌지 분명히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가면을 쓴 거짓 신앙이라면 그 가면쓴 우리의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득이 될게 없어요.
그렇다면 어떻게해야 이중적인 가면쓴 신잉의 모습을 버릴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우리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변화를 꿈꾸는거예요.
자신이 부족하다라는 걸 인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본문에 예수님을 시험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그랬을거예요. 그들은 성경과 율볍을 줄줄 외우고 정확하게 지키던 사람들이였어요. 그렇기에 자신이 누구보다 뛰어나나고 생각했지 결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자신의 신앙의 부족함, 은혜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은 모두 옳다라는 착각에 빠져 살아가게됬던거죠.
한번도 물어볼께요. 저희 자신의 신앙생활은 어떤가요?
나에게 맞춘 신앙인가요? 하나님께 맞춘 신앙인가요?
지금까지 저희가 잘못된 가면을 쓰고 신앙생활 했다면 이제는 그 가면을 벗는 용기를 갖기 축복합니다. 부끄럽다고 감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짓되고 가려진 신앙이 아닌, 올바른 신앙, 참된 신앙,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신앙, 하나님 앞에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부끄러움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