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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족산에 삼밭음달 사흘가리가 있다---
제보자: 임성배(林聖培)
나이: 96세
조사일: 2018년 12월 24일
텃골마을은 내고향 마을과 오리(五里)쯤 강상류로 이웃해 있고 국민학교가 있어 6년동안 학업한 곳이다. 이러한 사정은 종민동 토박이들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큰일이나 결혼식이 있으면 왕래하곤 하는 공동체이다. 학창시절 얘기만 꺼내도 이야기가 한 보따리지만 생략하고 지금 기준으로 보면 형편 없었지만 어려운 시절 가르쳐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텃골, 기동(基洞)마을이 중요한 것은 일찍부터 천주교 공소(1976년)가 있었고 감리교회가 들어서서 <믿음의 텃밭>이 된 사실에 있다. 그리고 지금 충주 한림디자인고등학교를 비롯 북여자중학교 설립자인 임병구씨 고향이 텃골마을이다. 이 분과 전인배씨 관련 얘기는 분량이 넘치므로 생략한다.
어릴적 친구도 있고 친구 부모님도 살아계시며 모두들 안면이 있는 형님들도 살아 있으니 조심스러운데 막상 조사를 해보니 놀라웠다. 작은 지명들이 무수히 쏟아진 것이다.
그 공은 임성배 아저씨에게로 돌아간다. 아저씨는 임승배 아저씨라고 불렀다. 어릴적부터 큰일이 있으면 뵙곤했는데 조금 짓궂고 장난끼가 있으셨는데 연세가 드신후 뵈니 다른 분으로 보인다. 오염되지 않은 고항말을 쓰시고 오래전 일들을 막힘없이 풀어 주셨다. 연세가 드셔서 귀가 조금 어둡고 중간중간 대화가 막혔으나 기억은 또렷하셨다.
할 수 있다면 녹음한대로 조금 다듬어서 글로 옮겼으면 하는데 다음으로 미룬다. 분량이 많아 굉장한 공력이 들 것 같아서이다. 주로 소지명(小地名)을 여쭈어 보았고 농사관행과 주변인물들에 관해서 물어 보았다. 예전에 계명산 기슭에 화전해 먹은 얘기, 논농사와 옆동네에 관해 아시는 걸 물어 보았다. 얼마전 고향에 다녀가니 아직 정정하시다고 하는데 나도 바쁘고 요즘 코로나때문에 꺼려져 방문은 삼갔다. 오래 장수하시기를 빌어본다.
임성배 아저씨와 시내에 사시는 임수만 아저씨가 텃골마을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셨다. 조금 다른 부분도 있지만 상호보완한다고 생각한다. 한마을을 방문해서 상세히 조사한다는 것은 외부인에게는 별소득이 없을 수 있다. 한국의 많은 농촌과 산촌, 어촌마을 사람들은 외부인에게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잘 알지 못하는 외부인에게 마을의 속깊은 얘기까지 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 분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나도 이 점이 염려스러운 것이 나의 호기심과 열정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한심스럽지 않았으면 한다.
다 지나간 옛날 일이고 수몰된 땅이 태반인데 다시 끄집어내서 따진들 무엇하겠다는 거냐? 현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냐?
굳이 변명한다면 기록으로 남겨볼 생각이고 내가 관심있게 보는 종민동의 땅이름을 제대로 규명(糾明)하겠다는 의지를 다져본다. 몇몇 지명에 대한 깊이있는 고찰은 이 자료들을 정리한 후 계획하고 있다. 농사관련한 얘기와 살아오신 얘기를 다음으로 미루었으니 부제로 단 <계족산에 삼밭음달 사흘가리가 있다>란 구절은 숙제로 남은 셈이다.
지명풀이를 나름하였다. 다시 한번 귀찮은 질문에도 불구하고 상세하고 친절하게 말씀해 주신 아저씨께 감사드린다.
1)텃골: 여기 물가에 지금은 물에 잠겼지만 큰바우가 있었는데 턱을 괸 형상이라 턱골이라 했다. 한자로 터 기(基), 골 동(洞)자 기동(基洞)으로 쓴다. 이와 다른 해석은 예전 마을지형이 가파르고 턱이 졌다고 턱골이라 했다. 하지만 텃골이라 하고 톳골, 토골이라고도 한다. 아주 오래전 사신 분들이 쓰던 마을이름이 순화(醇化)되면서 터를 잡고 살았다고 텃골이 되고 한자로 기동(基洞)으로 표기한 듯하다.
2)밤나무골도랑: 밤나무도랑, 지금 호반마을이 들어선 곳이며 음탈(음달) 산에 밤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이 곳은 막골 청서렁에서 내려오는 물이 사시사철 많아 계단식 논다랭이가 많았다. 옛날 노인들은 논이 많으니 밥이 넘어오는 골짜기라 <밥나무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 수몰되고 충주댐여수로 사업으로 매립된 곳에도 예전에 논이 많이 있었고 한가구가 살았다고 전한다. 밤나무골은 전국에 흔한 지명이며 한자로 율목곡(栗木谷)이 되고 혹은 줄여 율곡(栗谷)으로 쓰며, 재래종 산밤이 많이 자란데서 불려진 지명이 된다.
3)불당골: 예전에 불당이 있어서 불당골이라 했는데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막골로 올라가기 전에 있다. 때로 북당골이라고도 하는데 작은 암자가 있던 골을 말하며 전국에 흔한 지명이다.
4)장자골: 봉골 유용득씨 산 있는 곳에 집터가 있었는데 지금도 옛날 기왓장이 나온다. 큰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예전에 잘 사는 사람을 장자(長者)라 했다. 장자골은 큰부자 장자가 살았다고 유래하였다. 장자골을 지금은 장작골이라 부른다. 장자골은 오래전 이름이고 훗날 장작골로 변한듯 하다. 여기서 장자골은 밤나무골도랑 위쪽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봉골쪽으로 조금 가면 있는 장작골을 가리킨다. 지명이 옮아간 셈이고 이름도 장자골에서 장작골로 바뀌었다.
충주 다른 지역에 장자못 관련 전설이 있다. 임성배 어르신 얘기가 중요한 점은 지금 사람 입장에서는 전설로 여겨지지만 오래전 있었던 일을 전해준다는 것이다. 옛일은 한낱 전설로 치부하고 무시하는 세태는 어찌보면 젊은 세대들이 갖기 쉬운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 작성된 충주군(忠州郡) 광무양안(光武量案)을 보면 이 지역이 장자곡(長子谷)으로 나온다. 결국 구전(口傳)이 맞다는 얘기다. 최근에 이 지역을 가보았는데 으리으리한 기와집이 두채 있었다. 이 곳 지형은 몰라보게 변했고 기암괴석이 드러나 있고 별장 주인이 기와집을 짓다 말았는데 물론 우연한 일일 것이다.
그곳을 나오면서 묘한 생각이 들었다.
5)중석구데이: 중석을 캐던 광산이 있었다. 텃골마을 위 산쪽이다. 구데이는 구덩이란 뜻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예전에 돗자리를 만드는데 쓰던 고드랫돌을 만들던 곳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작은 쇠꼬지가 되고 쇠를 불리던 점터가 된다. 텃골마을 집너메도랑 위 골짜기에 있었다고 한다.
6)선바우: 중석구데이 옆에 있는 바위. 선바위란 서 있는 바위란 뜻이다.
7)거북바우: 텃골에서 왼들로 가는 도로위 참나무밭 속에 들어 앉아있다. 거북이가 물가를 바라보고 내려오는 형상으로 석회암이다. 대가리까지 나있어 누가봐도 거북이를 닮았다. 바위아래 속은 움푹 파여 예전에 농기구나 짚 등을 보관하였다.
8)생기밭: 텃골에서 하종으로 돌아가는 커브머리 아래 물가에 있는 밭을 말하는데 정확한 뜻은 모른다. 생기는 방언으로 놋그릇이지만 이 지방에서는 이 말을 안썼다. 놋그릇밭이란 말도 어색하다. 황기를 많이 심던 밭이 와전된게 아닌가 싶다. 방언으로 향나무를 상나무, 형님을 성님이라 부른다. 황기밭은 상기밭, 생기밭이 될 것이다. 이곳에도 지금 매립중이다.
9)매부리끝: 텃골 앞산에 매바위가 있어 매부리끝이라 했다. 매부리끝은 신작로쪽으로 치우쳐 있는 바위같다. 매붕재(매봉재)도 매바위가 있어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매바위는 매가 모여 사는 바위란 뜻이다.
10)매붕재: 매봉재, 텃골 앞산에 있는 고개로 하종 메골(묘골)로 가는 고개를 말한다. 예전에 하종 메골에도 여러집 살았다고 한다.
11)집너메도랑: 텃골마을 앞 계명산에서 흘러내리는 도랑이며 현재 임성배씨가 사는 집부근 도랑을 말한다.
12)귀신네샘께: 지금 어부네집(횟집) 아래 있었던 샘을 말한다. 지금은 수몰되었다. 예전에 거기에 살던 사람이름이 <기순>이라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어부네집은 최근에 가게이름을 <충주호매운탕>으로 바꿨다.
13)왼두리: 엔두리, 텃골마을에서 봉골마을쪽으로 가다보면 텃골광산 가기전 첫 커브머리를 왼두리라고 했다. 또는 엔들로 돌아간다고 했다. 앵돌아 간다고 붙은 지명이다.
14)양조장: 정운백(정진욱)씨가 예전에 운영하던 술도가집을 말하며 후에 김돌식(김남성 부친)씨네가 살았다.
연자방아도 있었고 집규모가 꽤 큰 것으로 기억한다. 물가 가까이 있었고 큰 느티나무도 있었는데 오래전에 수몰되었다.
15)용수꾸미: 용구먹, 봉골 댐 막은 자리에 있던 소. 암만 장마가 져도 모래가 쌓이지 않고 맨날 물이 새파랗다. 명주실 세 꾸러미가 풀렸다. 겨울에는 음달이라 얼음이 잘 얼고 잉어를 잡곤 했다.
16) 평풍바우: 텃골광산으로 가는 도로에 병풍처럼 생긴 바위를 말한다.
17) 벼락바우: 평풍바위 부근 도로 위에 있으며 바위가 벼락을 맞은것처럼 잘라져서 이름 지었다.
18) 누루꾸지여울: 밍개에서 내려오는 여울. 물살이 세고 물길이 돌아간다. 이 부근에서 많은 떼배가 파선하였다고 한다. 상종마을 앞강에 있었다.
19) 털썩바우: 누루꾸지여울 복판에 있던 바위로 떼배가 잘 걸려 털썩 앉는다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20) 독바우여울: 하종(종댕이) 앞강에 있던 여울. 여울 한복판에 바위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독처럼 생겨 독바우라 했고 여울살이 셌다고 한다.
21) 용수꾸미여울: 봉골 용수꾸미 부근에 있던 여울.
종민동에서는 누루꾸지여울, 독바우여울, 용수꾸미여울이 유명했다.
22) 즘터: 점(店)터, 지금 IBK 중소기업연수원 아래 물가에 있었다. 술을 파는 술집이 있었고 상류에서 파선된 떼를 이곳에서 건졌냈다고 한다.
23) 찬물내기: 용소꾸미 못미쳐 텃골쪽에 있었던 샘.
용수꾸미 위에는 사금을 캐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
24) 약물터: 용수꾸미 맞은편 물건네에 있었다.
25) 막골: 불당골에서 봉골쪽으로 돌아 산 위쪽 골짜기를 말하며 돌서렁이 산정상부터 펼쳐져 있다. 밤나무골도랑 위에 있다. 이곳은 다래, 머루, 으름이 많아 봄, 가을철 사람들이 모여든다. 막골서렁, 막골청서렁이라 하는데 돌색깔이 푸르기 때문이다.
26)수리봉: 수리베이, 밤나무골과 장작골 사이 산쪽 봉우리를 말한다. 형상이 뾰족하다. 수리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27)으름밭골: 으름박골, 수리봉 아래 으름밭을 말한다.
28)봉골: 어딘가에 범굴이 있다고 한다. 무슨 굴이 있는데(봄밧등 숲속에 있다) 그 굴을 쑤시면 봉골아주먼네들이 바람이 난다고 한다.
29)종댕이: 지금 하종마을 말한다. 웃종댕이, 아랫종댕이는 각각 상종(上宗), 하종(下宗)마을을 말한다.
30)민마루: 강가에 미루나무가 많았다.
31)메골: 묘골, 정선 전씨 선대조상 묘가 있다. 예전에는 집이 여러채 있었고 나중에 종댕이로 이사 나갔다고 한다. 근래 이 골짜기 입구에 <평강전공휘이채지비>가 세워졌고 집도 몇 집 들어섰다. 텃골 매붕재너머 하종마을 가기전 골짜기를 말한다.
32)못둔지: 메골(묘골)아래 강가에 있었고 못이 있었다.
정확한 위치는 텃골에서 하종으로 가는 지금 정선전씨 말림이 있는 산줄기가 강가에 닿는 아래이다. 텃골과 하종 중간사이가 되는데 물가에 있었다.예전에 사람들이 여럿 살았다고 한다. 전국에 못둔지가 몇군데 있다. 둔은 둔지벌, 숯둔이라고 할때 붙는 말이고 못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
33)비내미들: 종댕이앞 물가에 있던 들로 논다랭이가 있었다. 앙성면에 비내, 비내섬이 있고 한자로 벌천(伐川)이라 한다. 비내밑들 같은데 정확한 뜻은 모른다. 비내는 비스듬히 흐르는 내라는 뜻같은데 좀더 검토해야 할 것 같다.
34)망동골: 텃골 집너메도랑으로 올라가서 좌측 골짜기를 말하며 동네를 바라본다고 망동(望洞)골이라 불렀다 한다.
35)번식이들: 임성배씨 집 위 계명산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있는 들을 말하고 돌이 많아서 한자로 본석리(本石里)라 했다고 한다.
이 지명은 오래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주 오래전 얘기를 담고 있는데 중간에 뜻이 변한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이 들을 처음으로 소유하고 경작한 사람이름이 번식이란 인물이면 쉽게 이해될 땅이름이다. 제주도에 이런 이름이 많다.
다른 해석은 새번디기, 번더기란 지명이 새로 개간한 들을 말한다고 하는데 이 말과 연관있는 것으로 보인다.
36)웃종오리: 번식이들 위를 말한다. 웃종오리는 그 뜻이 불분명하나 윗쪽이란 뜻으로 생각된다.
37)마릿들: 웃종오리 위에 있는 들을 말한다. 편평하다고 한다. 집너메도랑에 있는 들과 지명을 아래부터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번식이들 ---> 웃종오리 ---> 마릿들 ---> 불당골.
38)행상바우: 왼두리 아래 큰바위를 말하며 옛날 행상을 보관하였다. 행상은 상여를 말한다.
행상바위는 전국에 흔하다. 대개 모양을 따서 이름지었고 이 경우는 상여를 보관한 바위라는 뜻에서 이름하였다.
39)허기바우: 지금도 물이 줄면 보인다. 예전 학교자리 아래 있는 큰 바위이며 겨울철 물건네에서 나무를 지고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 이 바위쯤 도착하면 허기진다고 허기바우라 했다 한다.
40)진개미께: 예전 종인국민학교가 있던 부근을 말하며 김가네 묘가 있어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일대에는 조선송(朝鮮松)이 울창했다고 하는데 왜정시대에 벌채하였다고 한다.
41)서낭당 : 학교밑 바위가 많고 숲이 울창한 곳에 있었다. 근처에 신작로를 사이에 두고 전나무 한그루도 있었다.
42)사당: 평택임씨 사당으로 마을 뒤 산쪽에 있다. 오래전 아름드리 참나무가 있었는데 고사(枯死)하고 최근 사당 뒷편에 있던 큰나무도 꺾여 베어 버렸다.
43)뱃나들이: 텃골뱃나드리, 정운백씨 도가집에서 조금 상류로 올라가면 물가에 있던 나룻터를 말한다. 물건네 즘터로 배가 왕래하였다. 하종에도 뱃나들이가 있었다. 뱃나들이는 살려 써야할 우리말이다. 예전 뱃터, 뱃터거리를 뱃나들이라고 불렀는데 일본에서 온 선착장(船着場)이란 말에 밀렸다.
44)붉은데기: 붉은디기, 붉은언덕, 지금 충주댐여수로사업 공사를 하고 있는 일대를 말한다. 텃골사람들이 이곳 이름에 친숙한 것은 이곳에 부치던 밭이 있었기 때문이다.
< 전면에 보이는 건물이 충주댐전망대에 있던 물박물관,
그 일대를 붉은데기, 붉은디기라고 불렀다. 충주댐여수로사업 공사전 모습이다, 인터넷 자료>
<물이 가득찬 텃골마을 앞 모습, 근래 배가 닿는 부근 물속에 여수로사업 공사후 남은 돌과 흙을 매립하여 지형이 달라졌다. 인터넷자료>
<위 사진은 매립전 사진, 텃골광산 아래 충주댐 여수로사업 공사로 비탈진 곳에 도로가 생겼다, 2020년 사진>
<텃골마을에서 하종으로 조금 가서 본 중소기업연수원, 2020년 사진>
<물이 빠졌을 때의 모습, 멀리 보이는 건물이 있는 곳이 옛날 학교자리가 된다.
아래에 보이는 큰바위들이 예전 성황당이 있던 자리>
<물 저쪽에도 바위들이 보인다.>
<텃골마을 뒷산에서 내려오는 길>
<텃골마을 앞산 모습, 매붕재가 있다>
<텃골마을 뒷편 계명산 골짜기, 멀리 막골서렁이 보인다.>
< 텃골마을 뒤 계명산 골짜기 모습 >
<텃골마을 뒤 계명산 골짜기의 모습, 산쪽으로 들이 보인다>
<종민감리교회 모습, 인터넷 자료>
<텃골 본마을이다. 멀리 사당이 보인다. 지금은 세대수가 많이 줄었다>
<텃골에서 본 충주호, 멀리 선착장과 오른쪽으로 사우앙산이 보인다>
<텃골마을 모습, 최근에 수난구조대가 있던 자리가 매립되었다. 공원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119수난구조대에서 바라본 텃골마을 모습, 오래전 사진이다. 인터넷자료>
<밤나무골도랑 모습, 지금 호반마을이다. 오래전 사진임.
인터넷자료>
<계명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텃골마을 모습, 인터넷자료>
첫댓글 사진에서 보듯이 텃골마을 뒷편으로 계명산 자락 아래 널찍한 들이 보입니다. 무덤들을 쓴 곳도 보입니다. 한마을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려면 그곳에 사는 여러분들을 만나봐야 하는데 달랑 두어 사람 만나 가지고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예전에 비해 가구수가 줄었습니다. 텃골마을은 평택임씨 종족마을로 타성받이는 얼마 안됩니다. 근래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 살지만 몇 안되고, 아직도 농사가 주생업이고 횟집과 카페를 운영하는 주민도 있습니다. 최근에 조성된 호반마을에 토박이 한분이 살았었고 나머지는 모두 외지 사람으로 별장에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