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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0. 묵상글 (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 약하기에 청하는 표징.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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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0.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약하기에 청하는 표징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악하기 때문에 표징을 요구하는 우리가 되지 말고,
약하기 때문에 표징을 청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너무 늦게 일어난 관계로 오늘은 이렇게 짧은 묵상 나눔으로 갈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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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0.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오늘 <복음>은 앞 장면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어떤 사람들은 놀라워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자는 마귀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악한 세대”라는 말은 <마태오복음>에 비추어 보면,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앞 장면에서 그들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그들의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1,16 참조).
사실,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했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 달려왔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지역에서는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신 지혜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분을 시험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표징은 무엇인가?
요나의 표징은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라고 외치는 회개의 때가 왔음의 표징이며, 동시에 그가 바다에 빠져 고래 배속에서 사흘째 날에 다시 밖으로 나온 일은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의 표징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
사실, 요나와 솔로몬은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소생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번영과 지혜는 사라질지라도, 예수님의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곧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표징을 볼 줄 아는 눈, 곧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보면, 모두가 신비요 사랑이요 자비요 기적일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활동이요 현존일 것입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언가 불가사의한 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과 그 자비를 선포하시기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루카 11,29)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사의한 일로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하시려 오셨습니다.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으시고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먼저 베푸신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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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0.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다리시는 분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군중을 보시고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가 11,30).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음의 쇄신을 갖지 않은 이상 어떤 것을 보여줘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려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표징을 알아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징이 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단죄의 표징이 됩니다.
요나 예언자가 회개의 삶을 가르쳤을 때 삶을 바꾼 사람은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살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거부하는 사람은 생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체가 벌이 됩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벌입니다.
일상을 하느님의 손길이 주어지는 자리로 인정할 때, 매 순간 접하게 되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마음의 변화 없이는 주님의 손길이 매 순간 주어져도 결코 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어떤 일을 하든지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구 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니 감사하십시오.
성녀 줄리아르는 말합니다. “정력적으로 온 힘을 다해서 일하되 법석을 피우지 마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 조용한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삶의 자리를 표징의 자리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겉모양에 힘쓰는 허영은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속이 더 소중함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착각과 오류 속에 살면서 그것을 지적해 줘도 인정하지 않고 완고하게 버티면 그것은 악한 세대입니다. 악한 세대는 자신이 회개할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타인과 심지어 예수님이 회개의 대상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착각 속에 삽니다. 그럼에도 이 악한 세대 사람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죽음을 체험한 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이들이 회개하였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회개의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솔로몬을 능가하는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귀한 은총 가운데 살면서도 그분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께, 돌같이 딱딱한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주기를 청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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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0.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운동경기 중에 야구는 ‘규칙의 경기’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경기와는 달리 규칙이 상세하고 많기 때문입니다. 선수들에게도 이런 규칙은 적용이 됩니다. ‘출루율, 타율, 도루, 홈런, 장타율’과 같은 항목을 선수들에게 적용합니다. 투수에게는 ‘승율, 실점, 방어율, 매회 던진 횟수’가 적용됩니다. 이런 지표들이 계산되면 선수들의 연봉이 정해집니다. 규칙을 잘 알면 야구경기를 더욱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습니다. 투수와 포수는 정해진 사인을 공유합니다. 포수는 상대 선수의 특성에 따라서, 게임의 흐름에 따라서 사인을 투수에게 보냅니다. 투수는 포수의 사인을 읽고 공을 던지게 됩니다. 변화구에 약한 타자에게는 변화구를 던지도록 사인을 보냅니다. 홈런을 잘 치는 타자에게는 볼을 던지도록 사인을 보냅니다. 아무리 기량이 뛰어난 투수라도 포수의 사인을 잘 읽어야 합니다. 포수는 투수의 컨디션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그날 투수가 잘 던지는 공의 종류를 알아야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타자를 잡을 수 있는 공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사인’을 보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환경을 파괴하고, 자연을 훼손하지 말라고 사인을 보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자비를 베푸시고, 사람은 가끔 자비를 베풀지만 자연은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강력한 태풍, 극심한 가뭄, 꺼지지 않는 화재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빙하가 녹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고 있던 많은 생명들이 멸종하고 있습니다. 투수가 포수의 사인을 외면하고 마음대로 공을 던진다면 경기에서 승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이 지구가 보내는 사인을 외면하고 지금처럼 자연을 파괴한다면, 탄소가스를 배출한다면 지구는 더 이상 인간의 친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오랜 지구의 역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지금 생명의 최 상위에 있는 인간도 멸종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교황님의 회칙 ‘찬미 받으소서.’는 지구가 보내는 사인을 외면하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유대인들이 원하는 표징은 놀라운 업적, 전쟁에서의 승리, 엄청난 재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이면 족하다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한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3번씩이나 말씀하십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고, 생각을 바꾼 사람은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의 얼굴은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얼굴이 분노와 짜증, 원망과 불평의 모습이라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드리면 감사할 일들이 찾아옵니다. 반대로 원망을 하면 원망할 일들이 찾아옵니다.
회개한 사람은 봉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참으면 그것이 마음에 쌓이게 되고, 언젠가는 분노로 폭발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주님께 봉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주님께 봉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은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 잠시만이라도 모든 것을 털어내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길이 보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은총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아는 것이고, 그 진리가 환난 중에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 진리가 시련 중에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 진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회개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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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0.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말은 서서 잘까요? 아니면 누워서 잘까요? 언젠가 초식동물 대부분은 서서 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포식자들로부터 빨리 도망치기 위해서입니다. 누워서 자는 동안 공격당하기 훨씬 쉽고 일어서서 도망치기까지 시간과 에너지를 더 쓰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말도 서서 자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제주도에 갔다가 누워있는 말을 봤습니다.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야생의 말은 자기 보호를 위해 서서 자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목장에서 키우는 말은 대부분 누워서 잔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 사람이 받아주고 어릴 때부터 사람이 밥 주고 보살펴준 말은 자기를 지켜주는 보호자가 있다는 믿음에 누워 잔다는 것입니다.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 않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서서 자는 말처럼 매사 불안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를 보호해 주는 대상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나만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어렵고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고생하며 힘들어하는 사람은 모두 당신 곁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믿음, 그 믿음만이 세상을 더욱더 쉽게 살 수 있게 합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님께 대한 불신으로 주님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후회하는 삶을 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표징은 구약 시대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표징입니다. 에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할 때 당신 백성을 보호하는 표로 보여주신 10가지 재앙, 해방되어 광야를 헤매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었던 것, 그 밖에 사무엘 예언자와 엘리야 예언자가 보여주었던 하늘로부터의 표징과 같은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표징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가져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믿지 않고 계속해서 사랑의 증명을 요구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부부의 관계가 계속될 수 있을까요? 결국 끝장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보증이 요구되는 곳에는 믿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하지 못하고 하늘로부터의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는 악한 세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우둔해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현존을 보면서도 고개를 돌리고 일부러 알아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느끼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만이 후회하지 않는 삶, 참 기쁨의 삶을 살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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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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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0.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표징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회개의 표징은 동시에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이런 회개만이 무지에 대한 답이 됩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참 많이 강조해온 말마디가 여정과 무지입니다. 무지의 어둠, 무지의 악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자유로운 삶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해 지혜로워지고 겸손해질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자유인의 삶입니다. 그러니 무지로부터의 해방은 회개의 여정을 통한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어느 은퇴한 원로 정치인의 회고록 또한 저에겐 회개의 표징이었고 그 중 한 대목을 나눕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균형이 중요해요.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객관성이 중요하지. 재야 운동은 열정과 책임감과 그리고 희생이 필요해요. 핵심이 달라요. 정치는 균형, 학문은 객관성, 재야 운동은 희생, 헌신이지.
내가 80년대 감옥에 있을 때 책을 참 많이 읽었잖아요. 그중에서 도널드 고다드라는 전기작가가 쓴 <죽음 앞에서>가 참 인상적이었어요. 반나치운동을 하다가 처형된 보회퍼 목사의 삶, 그가 겪는 고난과 고뇌를 다룬 거야.
그 책에 고난을 이겨 내려면 고난 자체를 내걸로 체화해야 한다는 대목이 나와요. 내가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고난을 이기기 위해서는 고난을 내것으로 해야 한다는 말을 되새겼어요. 그리고 동지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못 견뎠을 거야.”
‘하느님’ 빠져 아쉽지만, 정말 공감이 가는 진솔한 대목이요 역시 우리 믿는 이들에게도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무엇보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요소가 열정과 책임감이요 종교인인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이 둘에 사랑이 추가될 것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때 열정과 책임감도 새로워질 것이며 겸손과 지혜, 사랑과 순수도 살아날 것입니다.
얼마전 영명축일을 맞이하여 사랑하는 도반 사제 두 분으로부터 사랑이 가득 담긴 선물도 저에게 회개의 표징이었습니다. 한 사제는 어제 집무실에 들렸다 시들어 죽어가는 스마트 필름 식물을 살려 내어 오전 내내 세 화분에 분갈이 작업하여 갖다 놓고 전에 선물 받은 ‘개운죽(꽃말은 행복, 행운, 장수)’을 추가하여 배치하여 놓고 다음 같이 설명해 줬습니다.
“1.하느님의 구마천사 미카엘, 2.하느님의 심부름 천사 가브리엘, 3.하느님의 치유천사 라파엘, 4.성 프란치스코를 상징하는 개운죽입니다.”
도반 사제의 순수한 사랑의 열정 또한 저에겐 회개의 표징입니다. 이런 회개의 표징들을 통해 부단히 회개할 때 겸손과 순수, 자비와 지혜의 회복입니다. 이런 회개의 여정을 통해 날로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주제는 요나의 표징입니다. 요나 역시 회개의 표징입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무지한 군중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오늘 세대에게도 그대로 통합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무지의 악입니다. 예나 이제나 악한 세대는 여전합니다. 바로 회개의 표징은 요나와 더불어 회개의 원原 표징인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온 남방 여왕을 상기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의 표징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결정적 표징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자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바로 언제 어디에나 현존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는, 솔로몬 보다 더 지혜로우시고 요나보다 더 큰 예언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회개의 결정적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삶 자체가 우리에겐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눈만 열리면 오늘 지금 여기서 함께 하시는 주님이 회개의 표징인데 새삼 무슨 하늘로부터의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무지에 눈이 가려 진짜 표징을 옆에 놔두고 새삼 하늘로부터 표징을 찾는 악한 세대입니다.
무지의 어둠, 무지의 악에 대한 근본 처방은 회개뿐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해 회개의 표징인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가 날로 깊어질 때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 날로 자유로워지는 참나의 삶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이 큰 위로가 격려가 됩니다. 이 말씀은 내일의 독서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5,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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