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신발 외 1편
정재춘
지상에 신발들이 흔들리고 있다
이젠 기억에도 없는 먹빛 사랑의 뜸자리로
밑창을 댄,
그것은 해진 삶에 짓쳐진
이 녘의 나룻배
돌아갈 길을 모르는 겨울 제비들과
한 줌의 신비도 부릴 곳 없는 들풀들이
어딜 밟든 옥죄는 진창에서
한 구멍 두 구멍 끼워 넣은 빛바랜 끈으로
길이 다른 인연의 돛을 묶어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더께로 눌어붙은
그녀의 신발에,
눈물의 망루를 만들었다
전생의 발이
꼼지락거리며 붉은 산을 유영하고
눈앞의 검은 노을과 몸 시린 한숨으로
똑같은 아침을 준비하는 오늘의 삶이 겨워
,반짝,
흘러내리는 새벽이슬로 목청껏 노래하던 겨울 바다를
아버지들은 아셨을까
부여잡은 아가의 발에
차마 눈 떼지 못하는 천륜의 몸짓에도
한사코 불민한 거리로만 부유하는
물려받은 왼짝 오른짝
첫 걸음에 정을 떼고
두 걸음에 슬픔을 알아버린,
무수히 밟고 돌아 이제 다시 새것 같은 남루에도
낮엔 해 뜨고 밤엔 별이 떴다
내일 또 걸어도 좋은
매일 또 항해할 수밖에 없는
개펄 속 집게마냥
자정이 넘으면 형광등 하나 살아남지 못하고
입간판이나 네온사인 모두 전멸해버리고 만
올림픽이 열렸다는 어느 해 그곳에서는
게 구멍 비치는 횃불 같은 알전구들이 간짓대에 걸려
주렁주렁 제 눈을 밝히고
창신동 산다는 커피 할머니와
만날 같은 앞치마와 나이롱 몸뻬의 국수 이모가
금 그어진 것도 아닌데
주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항상 그 자리에
어제의 구루마로 용케도 오늘을
부려놓았다
새로 들어온 시다 계집애에 빠져있는 골덴 바지집 재만이와
사글세 살며 종암동에서 걸어 다닌다는 벨트가게 점원 성호가
더운 숨으로 하루치 노동을 펼쳐놓은 전방 앞에서
암탉 제 새끼 품듯
‘어린것들이…’ 하며 타주는 뜨거운 커피를
목구멍이 데도록 후루룩거리면
약속이나 한 듯
백고 머리의 말쑥한 짐꾼 신씨가 ‘길마담! 여 커피!’
해장으로 소주 사 홉을 붓는다는 임씨는 ‘길자야. 국수 좀 내와 부러’하며
찬 새벽을 데웠다
계란이 얼어 터지는 모진 바람에 온몸이 튼 하루는
멸치 몇 마리와 진한 소주로 불콰해져 독한 순은 잦아들었지만
그렁거리던 눈물이 꼭 맵찬 추위 때문만은 아니라고
매점 창문 앞 희뿌연 미래를 샛눈으로 바라보는 것인데
오래된 미친년 하나가 축대처럼 쌓아올린
거룩한 인생의 밑동을 훔쳐 달아났다
모든 빛이 죽어야 비로소 살아나는 그곳
제 삶의 거푸집에서 새벽을 열었다가
환한 대낮이 부끄러워 깜깜한 개흙으로만 고개 박는 소라게마냥
알 수 없는 제 속으로
새벽을 열고 한낮을 닫았던 이들의
그 많은 집게발들은 무엇을 물고 있었을까
살 에이는 추위보다는 눈앞의 미래가 더 추워
맺혔던 눈물에 얼굴이 트는 그런 때가 있었다
─『시에』 2012년 여름호
정재춘
서울 출생. 2011년 『미네르바』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