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김형식
질문하고 질문하라
당신도 질의 문에서 나왔다
질문은 생명의 문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
태양도 지구도
석가도 예수도
철학도 예술도
질문에서 나왔다
질문에는 세 가지 갈증이 있다
그 하나는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요
그 둘은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고
그 셋은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질문을 던져라
인간의 심장을 뜨겁게 하라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몸이다
질문만이 위대하고, 또, 위대하다
질문하고 질문하라
질의 문은 당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김형식 시집 {질문}에서
반경환의 ‘사색인의 십계명’ 중, 제1계는 ‘깊이 있게 배운다’이고, 제2계는 ‘잘 질문한다’이다. ‘깊이 있게 배운다’는 것은 어떠한 사건과 사물의 본질을 배운다는 것이고, ‘잘 질문하다’는 것은 그 어떠한 사상과 이론, 또는 이 세상의 참된 진리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묻고 그것을 배운다는 것이다. 유목민이란 무엇이고, 농경민이란 무엇인가? 유목민이란 푸르고 푸른 초지와 오아시스를 찾아다니며 가축 떼를 기르는 사람을 말하고, 농경민이란 그 무엇보다도 넓고 비옥한 땅에 살면서 쌀과 보리 등의 농작물을 기르는 사람을 말한다. 유목민과 농경민 중, 어느 인간이 더 우월하고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 유목민에게는 유목민의 삶이 가장 소중하고, 농경민에게는 농경민의 삶이 가장 소중하며, 따라서 이러한 질문 자체는 성립할 수가 없다. 모든 삶과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고, 모든 진리는 단지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진리(허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고, 유목민과 농경민의 삶은 다같이 소중한 것이지만, 그러나 현실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진리가 다른 진리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사상과 이론(진리)에 봉사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양의 유목민들에게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를 믿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듯이, 동양의 농경민에게 살생을 밥 먹듯이 하는 기독교를 강제하는 것은 너무나도 크나큰 야만적인 폭력이자 죄악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깊이 있게 공부하고 잘 질문한다는 것은 이처럼 유목민과 농경민, 또는 기독교와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고, 이 동, 서양의 대립과 갈등을 초월하여 새로운 ‘삶의 철학’을 정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김형식 시인의 [질문]은 ‘질문의 존재론’이자 ‘질문의 삶의 철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이고, 깊이 있게 배우고 잘 질문하는 ‘삶의 철학’을 실천하는 존재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앎이 육화되어 있는 시인이며, 따라서 그의 앎의 욕망으로 ‘질문質問’을 ‘질膣의 문門’으로 명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질문質問’은 모르거나 의심나는 점을 묻는 것을 말하지만, ‘질문膣門’은 여성의 생식기를 뜻하고, 따라서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질膣의 문門’에서 나왔던 것이다.
질문은 생명의 문이고, 살아 있는 것은 모두가 다같이 이곳에서 나왔다. 태양도 지구도 이곳에서 나왔고, 석가도 예수도 이곳에서 나왔다. 철학도 예술도 이곳에서 나왔고, 공자도 칸트도 이곳에서 나왔다. “질문에는 세 가지 갈증”이 있는데, “그 하나는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고, “그 둘은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며, “그 셋은 지혜를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질문은 생명의 문/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는 시구는 ‘질문의 존재론’을 말하고, “질문을 던져라/ 인간의 심장을 뜨겁게 하라”,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몸이다”, “질문만이 위대하고, 또, 위대하다”라는 시구들은 ‘질문의 삶의 철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김형식 시인의 [질문]은 생명의 문이자 죽음의 문이고, 이 질문의 존재론과 이 질문의 철학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그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고 할 수가 있다. 깊이 있게 공부한다는 것은 잘 질문하는 것이고, 잘 질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이다. 유목민에게 왜 함부로 살생을 하느냐고 묻고, 어떻게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했는가를 물어본다면 어떻게 될 것이고, 농경민에게 왜 유목민을 존경하지 않느냐고 묻고, 석가모니는 예수의 시종인가라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인간들이 성장하고 변모하듯이, 모든 앎(지혜)도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모한다. 새로운 앎은 기존의 앎을 짓밟고 폐기처분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모든 철학자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목을 비틀고 그 사상과 이론을 폐기처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질문은 싸움이고, 싸움은 비판이고, 비판은 모든 학문의 근본토대이다.
“질문하고 질문하라/ 질의 문은 당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실증주의 비평, 현실주의 비평, 정신분석 비평, 구조주의 비평, 탈구조주의 비평, 현상학적 비평, 그리고 나의 낙천주의 비평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비평이란 모든 분야에서 그 힘을 기르는 수단으로 작용을 하며, 어떠한 총과 칼과 화약 냄새도 없이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처절한 생존경쟁의 장이 된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역사, 스포츠, 오락, 심지어는 연애까지도 그 비평의 장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성장해 나갈 수가 없다. 비평만이 위대하고 비평만이 고급문화의 최종적인 심급인 것이다. 신생아의 첫 울음 소리는 그 비평의 장에 내던져진 것에 대한 두려움의 산물일는지도 모른다. 아아, 우리 학자들이여, 어서 빨리 그대의 날카롭고 예리한 ‘비판의 칼날’(질문의 칼날)을 들고 비평의 장에 나서 보아라! 바로 그러면, 그때에는, 그대는 소크라테스처럼, 플라톤처럼,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한 철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깊이 있게 배우고 잘 질문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는다는 것이며, 자기 자신만이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반경환 {행복의 깊이 제4권}, 제1장에서
‘대한독립만세’와 ‘남북통일’과 ‘군사독재정권타도’는 그처럼 오랫동안 우리 한국인들에게 젖과 꿀처럼 들려왔던 것이고, 우리 한국인들을 지상낙원으로 인도해 주는 구원의 말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은 철두철미하게 앎이 육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처럼 소중하고 간절했던 소망들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고, 더 더군다나 이 세상에서 지상낙원을 건설할 수 있는 어떠한 꿈조차도 꾸지를 못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국가의 이념과 목표도 없이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고, 더 이상 군사독재정권을 허용하지 않는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겨우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이룩했지만, 우리 한국인들의 민주주의는 문화적 무질서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로서 그 패전의 상처를 딛고 동 서독의 통일을 이룩했지만, 우리 대한민국의 남북통일의 과업은 아직도 여전히 요원한 형극의 가시밭길일 뿐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깊이 있게 배우고 잘 질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삼천리 금수강산을 쓰레기 공화국으로 만들고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한 부정부패의 공화국으로 연출해 내기 위해서 그처럼 오랫동안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왔던 것이고, 또한 우리 한국인들은 자기 자신이 속한 집단과 사적인 이익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헌법과 국법을 무시하고 그처럼 오랫동안 ‘군사독재정권’의 타도를 외쳐왔단 말인가? 또,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가의 이념과 목표도 없이, 또는 통일의 비용과 주변의 4대강국을 설득시킬 힘도 없이, 주먹구구식의 당위성만을 내세우며 그처럼 남북통일을 외쳐대고 있단 말인가?
----반경환 {행복의 깊이 제4권}, 제1장에서
우리 한국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자기 자신의 철학이 없다는 것이다. 사상이 없기 때문에 깊이 있게 사유하지 못하고, 깊이 있게 사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소한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전체의 이익을 훼손하게 된다. 따라서 기초생활질서의 무시와 온갖 부정부패의 연출은 이 판단력의 어릿광대들의 걸작품일 뿐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깊이 있게 배우고 잘 질문하지 못한 죄인 것이다.
오오 小韓民國, 小韓民國이여!
오오 醜韓民國, 醜韓民國이여!
----반경환 {행복의 깊이 제4권}, 제1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