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신 장군이 평생 묻어둔 비밀 - 적장이 맡긴 고아, 교수로 키웠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3. 12. 02
서울현충원 사병묘역에 마련된 고 채명신 예비역 중장의 묘지에서 30일 삼우제가 열렸다. (집례 김흔중 목사)
특전사 군종 참모를 지낸 김충렬씨(75·목사)가 유가족들을 위해 아코디온으로 찬송가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 최정동 기자]
지난 달 (2013년 11월 25일) 별세하면서 ‘장성묘역 대신 병사묘역에 묻히기 원한다’ 는 유언을 남긴
베트남전의 영웅 고(故) 채명신 장군의 삼우제가 치러졌다.
부인 문정인 여사와 아들·딸을 비롯한 유족들, 베트남전 참전 노병들이 추모 예배를 하며 고인을 기렸다.
이 자리에선 4일장으로 치러진 채 장군의 장례 기간 내내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았던 채 장군의
동생 채모(76세) 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흘간 밤샘하며 쌓인 피로를 걱정해 “삼우제는 직계가족만으로 치를 테니 나오지 말라”는 문정인
여사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생 채씨는 채 장군이 60년 넘게 숨겨온 또 다른 미담의 주인공이다.
채씨는 채 장군이 1951년 초 강원고에서 생포한 조선노동당 제2비서 겸 북한군 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중장)
길원팔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녔던 전쟁고아였다.
당시 육군 중령이던 채 장군은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끌며 강원도 내에서 암약하던 북한군 색출작전을 펼쳤
다. 채 장군에게 생포된 길원팔은 채 장군의 전향 권유를 거부하고 채 장군이 준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러면서 "전쟁 중 부모 잃은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다. 저기 밖에 있으니 그 소년을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시켜
달라" 부탁했다. 적장(敵將)이지만 길원팔의 인간됨에 끌린 채 장군은 '그러겠다' 고 약속하고 그 소년을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켰다.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 소년은 채 장군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 유명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채 교수는 10여 년 전 은퇴했다.
두 사람은 채 장군이 숨질 때까지 우애 깊은 형제로 지내왔다고 한다. 채 장군의 자녀들은 그를 삼촌으로, 채 교수의 자녀들은 채 장군을 큰아버지라고 부른다.
문정인 여사는 지난달 29일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중앙 SUNDAY' 기자와 만나 "채 장군이 길원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채 교수를 동생으로 맞은 것" 이라며 "채 장군이 생전에 길원팔 칭찬을 많이 했다. 적장이긴 하지만 '사나이 중의 사나이' 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문 여사는 "채 장군이 채 교수를 (아들이 아닌) 동생으로 입적한 것은 채 장군의 나이(당시 25세)가 젊었고 채 교수와의 나이 차도 11세 밖에 되지않았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이어 "(채 교수)가 형님이 별세하신 데 대해 크게 슬퍼했다. 나흘 내내 빈소를 지켰다" 고 말했다.
채 장군은 총각 시절 본인이 손수 소년을 돌보다 그가 고교생이 됐을 무렵 문 여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주변 사람에게 소년을 맡기고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서울대에 진학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채 장군은 북한군 고위 간부가 데리고 있던 고아 소년을 입적시킨 사실이 문제가 돼 군 생활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채 장군에겐 친동생 명세씨가 있었다.
하지만 51년 채 장군이 연대장으로 복무하던 5사단의 다른 연대에 소대장으로 배속돼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이에 따라 채 교수는 형제자매가 없던 채 장군에게 유일한 동생이 됐다.
채 장군 본인도 지난 5월 초 고인의 마지막 언론 인터뷰가 된 '중앙SUNDAY'의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대담 당시 비보도를 전제로 “길원팔이 자결하면서 데리고 있던 10대 남녀 아이를 돌봐달라" 고 내게 부탁했다.
"여자아이는 전쟁통에 숨졌으나 남자아이는 아들처럼 키웠다. 사랑으로 키웠다. 대학 교수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채 장군은 당시 “그(채 교수)의 인생이 중요하니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문 여사도 29일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절대 주변에 알리지 않고 지내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라며 기사화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본지는 적장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닌 소년을 동생으로 입적시켜 대한민국 엘리트로 키워낸 채 장군의 선행이 이념 갈등 해소와 남북 화해의 귀감이 될 것으로 판단해 기사화를 결정했다.
채명신 장군이 김일성의 오른팔로 불렸던 북한군 간부 길원팔이 맡긴 소년을 동생으로 삼은 건 채 장군과 길원팔의 짧고도 극적인 만남 때문이었다.
51년 3월 25세 때 북한군 후방에 침투하는 한국군 최초의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지휘하던 채 장군(당시 중령)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군량밭이란 마을을 급습했다.
“인민군 거물 길원팔이 숨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직후였다.
채 장군은 그곳을 지키던 북한군들에게 평안도 말씨로
“중앙당에서 나왔다. 조사할 게 있으니 협조해달라”고 말해 안심시킨 뒤 그들을 전원 사살했다.
이어 세포위원장 집에 숨어있던 길원팔을 붙잡았다.
그에게선 김일성 직인이 찍힌 작전훈령과 전선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 등 특급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채 장군은 방에서 길원팔과 단둘이 마주보고 심문에 들어갔다.
채 장군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던 길원팔은 “네 놈은 누구냐”고 되물었다.
“대한민국 국군 유격대 사령관 채명신” 이라고 답하자 “그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 중 이곳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 반란군 아니냐”고 쏘아붙였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길원팔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안한 기색 없이 침착하고 당당했다.
그는 확실히 거물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채 장군은 “당신 같은 사람은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가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라며 전향을 권유했다.
그러자 길원팔은 “썩어빠진 땅에 왜 가느냐” 며 일축했다.
이어 “부탁이 있다. 김일성 동지에게 선물받은 내 총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다.
소년(채 교수)을 거둬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채 장군은 길원팔의 총에 실탄을 한 발 넣어 건네주고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잠시 후 총소리가 났고 길원팔은 책상에 머리를 숙인 채 숨졌다.
훗날 “혹시라도 길원팔이 뒷통수를 쏠 것이란 걱정은 안 들었나”는 주변의 질문에
채 장군은 “늘 하나님이 방패가 되는 걸 믿었기에 두려움이 없었다”고 답했다.
채 장군은 양지바른 곳에 길원팔을 묻고 ‘길원팔지묘(吉元八之墓)’란 묘비를 세운 뒤 부하들과 함께 경례했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적장이었지만 그는 충분히 경례를 받을 만한 장군이었다”고 적었다.
강찬호 기자 stoncol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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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
대한민국의 군인
출생 : 1926년 11월 27일, 황해도 곡산군
사망 : 2013년 11월 25일(향년 86세), 서울특별시묘소국립서울현충원 2묘역-1 34489번
본관 : 인천 채씨
재임기간 : 제3대 감찰위원장, 1961년 7월 11일 ~ 1963년 3월 19일,
제12대 제2야전군사령관, 1969년 5월 1일 ~ 1972년 6월 1일
첫댓글
네...
채명신 장군님
참으로 존경하옵는 분이십시다
이렇게 참 군인의 역사를 기리 남기신
채명신장군님
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제 2묘역 병사들과의 영면에 드셨습니다
저도 갈때 마다
채명신장군님의 묘역에 꼭 들러서
장군님의 이름을 한번 불러보고 온답니다
엊그제 다녀 왔어요
사진 찍어 왔어요
정리해서 올릴 예정입니다
채명신장군의 참 역사의 이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숙영작가 님의 그마음 깊이를 100%이해를 드립니다
늘 좋은 소식 함께 하 십 시다
최숙영작가 님
아, 그러시군요.
공감하여 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
체명신 장군님을 모른다면..그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다..!!
세월 흘러도 잊지 않고 그뜻을 기리는 후손들 또한 존경 받아야 하지요..
양떼님의 아버님께서도 훌륭한 국군였지요..~ ~
6월 장마철에 다시 돌아 오렵니다..최숙영작가님도 건강하시길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