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禍가 복福이 되다
김 선 구
어느 해 이른 봄 나는 독일북부 지방도시인 킬(Kiel)을 출발하여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다. 이른 새벽이어서 버스 안은 나와 운전사 두 사람뿐. 차안은 썰렁했지만 날이 밝아오자 차창을 통하여 바깥풍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푸른 초원이 이어지는 가운데 길가 양옆에 늘어 선 나무 가지 끝에서는 새순들이 움터 나고, 풀잎에 맺힌 이슬들이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북부독일 대 평원에서 끝없이 펼쳐진 봄의 정경을 혼자 감상하며 달리고 있는 마음이 환희와 희망으로 가득 할 만 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떨쳐 버리지 못할 불안이 깔려 있었다. 그것은 덴마크 주재 독일대사관에서 독일입국비자를 받아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가 동서독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어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독일정부에서는 통일 후 자국민의 일자리보호와 외국인 노동자들의 독일 내 유입을 막기 위하여 제반 조치를 강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도 모른 채 나는 이듬해 초에 독일 땅을 밟게 되었다. 독일의 킬 대학에 여장을 풀고 숙소를 정하자 메틀러 교수가 독일 내 채류신고부터 하라고 하였다. 채류신고가 단순한 신고가 아니고 채류허가를 받는 절차란 것을 나중에 알았다. 외국인 등록 센터직원이 나의 여권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서류하나를 내 주었다. 내용은 「당신은 비자 없이 독일 땅에 불법 입국했으니 벌금 ○○마르크를 지불하고, 3주 이내 출국하라. 그렇지 않으면 독일 법 ○조○항에 의거 강제집행 하겠다.」는 요지였다.
뜻하지 않은 사태에 직면하고 보니 마음이 황당했다. 먼저 한국대사관으로 전화하여 해결책을 물었다. 담당영사의 대답은 우선 내가 소지하고 있는 여권이 관용여권임을 확인한 후 “당신은 공무원 신분이므로 준 외교관이나 다름없다. 함부로 추방하지 못할 것이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와 독일은 무비자입국협정이 체결되어 있으니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그러나 독일정부 관리의 설명은 달랐다. “무비자입국협정이란 독일을 여행하는 외국인들에게 3개월 범위 내에서 독일에 머물 수 있도록 허용한 조처일 뿐이다. 당신의 경우는 입국목적이 학술연구이며, 채류기간도 1년이므로 무비자 입국적용대상자에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결국 나는 메틀러 교수를 찾아가서 나의 입장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바로 외국인등록센터의 소장과 통화가 이루어 졌다. 그리고는 한 가지 방법을 제시받았다. 이웃 덴마크에 상주하고 있는 독일대사관에 가서 독일입국 비자를 요청해보라는 것이었다. “가능성이 있지만 예외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일단 해결의 실마리는 찾았지만 거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나의 마음 한구석을 짓눌렀다. 다행히 외국인등록센터 소장의 협조로 비자발급 협조요청서를 받았고, 메틀러 교수도 독일대사에게 잘 부탁한다는 편지를 써 주었다.
나를 태운 버스가 독일의 발트 해 연안 도시에 이르자 그곳 항구에 대기 중인 카페리여객선 속으로 바로 들어갔다. 여객선 안에는 각종 화물차며 승용차 그리고 코펜하겐으로 가는 열차까지 실려 있었다. 옛날 북유럽 해변의 도시들은 일찍부터 서로 동맹을 맺고 해상무역을 활발히 실행했다. 그러한 결과가 이제 배를 이용하여 철도까지 이어주는 모습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배가 출발하여 덴마크 땅에 이르기까지는 한시간정도 소요되었다. 그동안은 배의 갑판으로 올라가서 여러 시설물을 둘러보기도 하고,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차가운 바다바람에 몸을 맡겨보기도 하였다. 옛날 바이킹 족들이 이 험난한 바다를 누비며 북유럽을 재패했을 역사적 사실들을 회고하며 항해를 즐겼다. 배안에는 바다를 조망하며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식당과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면세점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처음 접해보는 이국의 풍물모습에 잠시나마 모든 시름을 맡겨보았다.
배가 덴마크 땅에 이르자 버스기사도 덴마크 인으로 교체되었다. 이 버스는 덴마크 본토인 유틀란트반도에서 출발하여 독일 땅을 거쳐 셀란 섬에 있는 코펜하겐까지 가는 버스였다. 국경이 개방적인 유럽사회는 교통망이 편리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이 자유스럽지 못했던 시절이어서 나에게는 보이는 것 하나하나가 낯설고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코펜하겐에 있는 덴마크주재독일대사관은 예상과는 달리 조그만 건물이었다. 은행창구처럼 꾸며진 작은 사무실에는 많은 민원인들로 붐비고 있었다. 휴대하고 간 서류와 편지를 접수시켰더니 담당영사가 다음날 다시 오라고 했다. 흔하지 않은 일이어서 나름 데로 검토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덴마크주재 독일대사관은 덴마크 인이나 독일인을 대상으로 민원을 처리해 주는 곳이다. 한국인에게 비자를 발급한다는 것은 분명 편법일 것이지만 나에게 최선을 다해주는 것 같았다. 다음날 찾아갔더니 “오직 킬 대학 객원교수로 활동하는 기간에만 독일 채류가 유효하다”라는 문구를 여권에 명기하여 독일채류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국내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고심했던 흔적이 역역했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막상 비자를 발급받고 나자 긴장이 풀리면서 또 다른 욕심이 생겼다. 이왕 이곳에 왔으니 덴마크의 주변 명소들을 둘러보자는 마음이 발동했다.
비자발급을 기다리는 동안 코펜하겐시내 관광은 이미 마쳤다. 시청광장에서 출발하여 인어상이 있는 곳까지 걸어보니 볼거리들을 거의 접한 듯했다. 티볼리공원, 국립미술관, 왕립도서관 코펜하겐대학, 로젠보그궁과 그 정문에서 행해지는 위병교대식 등을 다 둘러보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시청광광에 서 있는 안데르센 동상과 왕립도서관 앞의 키르케고르 동상이었다. 이 두 사람은 덴마크가 낳은 자랑스러운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어린이들에게 많은 꿈을 안겨준 안데르센은 유명한 동화작가이다.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인어공주를 형상화하여 코펜하겐북쪽 바닷가에 동상을 세워 놓았다. 그 때문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인어상을 보기위하여 세계 각처에서 찾아오고 있었다. 한 예술작가의 힘이 어떠한가를 대변해주는 듯도 했다. 또한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대학 시절 나의관심의 대상이었다. 그의 대표적 저술인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통하여 그와 가까이 접근 했었다. 철학적 소신 때문에 약혼녀 레키네에게 파혼을 선언하고 평생 그 여인을 그리며 독신으로 살다 간 외로운 철학자였다. 그날도 그는 정원 한편에서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듯했다.
코펜하겐 시내관광을 마치고는 중앙역에서 열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그곳 바닷가에 있는 작은 도시 헬싱괴르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무대였던 크론보그 성이 있는 곳이다. 시내 길거리에 세워져 있는 햄릿과 오필리어 조각상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바다건너 맞은편에는 스웨덴 땅이 이웃처럼 가깝게 보였다. 두 나라 사이 바다 폭이 불과 4km. 이 바다는 북해에서 발트 해로 들어오는 입구이다. 옛날 덴마크 왕국에서는 이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들로부터 통행세를 징수하여 부를 축적 하였다. 크론보그성은 통행세를 징수하기 위하여 만들어졌고, 여기에 스웨덴을 감시하는 망루가 설치되었다. 이 망루에 귀신이 나타나는 것으로 ‘햄릿’이라는 작품줄거리가 시작된다. 셰익스피어는 이 곳에 실재했던 왕자 암레트(Amleth)가 겪었던 얘기를 각색하여 이야기를 엮어갔다. Amleth라는 이름 중 마지막 글자 H자를 앞으로 옮겨 Hamlet이라고 표기하여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한다.
안내인을 따라 궁 안에 들어서니 왕의 집무실, 손님접대실, 무도회장, 왕후의 방과 침실 등 당시 왕궁 내의 생활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도구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셰익스피어가 왕을 알현하는 장면의 그림도 보였다. 아마 셰익스피어가 이곳을 방문하면서 햄릿에 대한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을 것 같았다. 지하에는 병사들의 막사와 마구간이었고, 한쪽에는 덴마크의 전설적 영웅 홀거단스크 동상이 잠에 잠긴 듯 앉아 있었다. 그는 덴마크의 전설적 영웅이다. 어두운 지하에서 깊이 잠든 모습이지만 외적이 침입하면 깨어나서 나라를 구한다는 전설을 안고 있었다. 이층에는 항해에 쓰였던 여러 가지 배들 모습이 전시되어 있었다. 덴마크인 들은 예로부터 해상활동을 중요시했었음을 느끼게 했다. 국토가 좁고 기후풍토가 조악했던 이 나라 사람들이 일찍부터 해상진출에 공들였던 결과라고 유추해보았다. 세계에서 제일 큰 섬 그린란드를 덴마크보호령으로 둘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헬싱괴르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 바닷가를 산책했다. 북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싸늘하게 몸을 감싸 안았다. 그렇지만 매끄러운 자갈돌들이 널려있는 바닷가는 마치 나의 고향 제주도 해변을 걷는 것과 같았다. 바닷물의 술렁임은 어디서나 비슷했다. 해변의 모습도 그렇고 바람결이 주는 느낌도 비슷했다. 차가운 바람결이지만 거기에서 내 나라 내 고향의 냄새를 맡는 것 같았다.
모양이 특이하게 생긴 돌들을 몇 개 주워들고 호텔로 돌아오니 아침식사 시간이 되었다. 식사를 하며 스웨덴에서 가족단위로 온 여행객들과 마주했다. 그들로부터 가까운 곳에 스웨덴으로 가는 여객선 출발항구가 있다는 것을 들었다. 덴마크의 헬싱괴르와 스웨덴의 헬싱보리 사이에 바다 폭이 가장 좁은 곳을 ‘에어슨해협‘이라 했다. 이 해협을 통하여 25분 항해하면 바로 스웨덴 땅에 도착 했다. 그래서 스웨덴 사람들은 이웃처럼 덴마크를 방문한다고 했다. 나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맞은편의 도시 헬싱보르에 도착하여 스웨덴 땅까지 섭렵하였다.
헬싱보리로 가는 배위에서 만난 스웨덴 아가씨들은 개방적이고 활달한 인상을 주었다. 맥주를 사기 위하여 덴마크에 자주 간다고 했다. 스웨덴은 물가가 비싸고 주류산업이 국영이어서 술을 구입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덴마크의 맥주공장에서 생산되는 토속맥주의 맛과 향이 스웨덴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알맞았다. 우리나라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물어보던 스웨덴 아가씨들은 즐거운 여행을 하라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고 헤어졌다.
다시 덴마크로 돌아와서는 오덴세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오덴세는 안데르센의 고향이다. 안데르센의 자취와 기념물들을 둘러보고 독일로 들어 갈 생각이었다. 오덴세에 이르는 길은 멀었다. 코펜하겐이 위치한 셸란 섬과 오덴세가 있는 핀 섬 사이를 잇는 카페리여객선을 이용해야 했으므로 밤늦게 도착하였다. 안데르센 박물관 주변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아침에 호텔식당에 가보니 어린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찾아온 것을 보니 역시 안데르센은 청소년들의 우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데르센 박물관을 찾아갔더니 내가 첫 손님이었다. 동양인을 보는 것이 신기해서이지 사무원이 친절한 미소로 맞이해 주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입장료도 없었다. 전시실에 들어가 보니 안데르센의 다양한 작품들과 성장 일대기가 벽화로 전시되어 있다. 그는 가난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코펜하겐으로 가서 활동하였다. 훗날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후 고향을 방문하자 오덴세 사람들로부터 열광적인 축복 속에 명예시민으로 추앙받았다.
오덴세 관광을 마친 후 다시 카페리에 의지하여 셀란 섬으로 돌아 온 후에야 독일로 가는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이미 날이 저물었다. 열차는 스톡홀름을 출발하여 덴마크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를 거쳐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까지 가는 국제선 열차였다. 이 열차도 카페리를 이용하여 대륙 간 철로를 연결했다. 출발지에서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3일이 걸린다고 했다. 승객 6명이 마주앉을 수 있는 쿠세트 칸에 들어서니 웬 여자노인이 혼자 앉아있었다. 그녀는 스톡홀름을 출발하여 소피아로 여행을 떠나는 중이었다.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하여 연금으로 살아간다고도 했다. 독일어를 잘했다. 히틀러 때문에 어렸을 때 독일어를 배우게 되었다고 소개했다. “스웨덴에 복지제도가 잘되어 있지 않으냐?” 고 물었더니 고액세금과 비싼 물가 등으로 서민들 살기가 힘들다고 했다. “젊었을 때 전쟁을 겪으면서 어렵게 살다보니 결혼도 못했다. 정년이 되어 퇴임하고 보니 지나간 세월이 아쉽고 후회된다.”며 한숨 쉬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열차가 독일 땅에 들어섰다. 나는 열차에서 내리며 작별인사를 나눴다. 스웨덴 처녀할머니의 넋두리를 들으며 나의 덴마크 여행도 끝을 맺었다. 풍성한 주말여행을 즐긴 셈이었다.
다음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했더니 연구실 동료들 모두가 반겨주었다. 메틀러 교수의 호의로 나는 비자문제를 순조롭게 해결하였고, 부수적으로 덴마크 여행까지 즐기고 왔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인가! 그 동안의 심적 고통에 대하여 불평도 변명도 다 잊어버렸다. 도움을 준분들에게 고마움을 보내고 싶을 뿐이었다.